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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무하마드 아민 알 후세이니 2. 나찌와 아민 알 후세이니

2차대전 기간 중 나찌와의 협력


전쟁 이전


1943년 11월 2일자로 된, 이슬람 법률고문(알 후세이니)에게 보낸 히믈러의 전보
"법률고문 귀하. ; 위대한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 운동은 탄생초기부터 유대인 들에 대한 투쟁의 깃발을 높이세워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아랍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반대활동을 지지하며 특별히 팔레스타인의 상황에 동정을 갖고 있습니다. 전세계의 자유를 사랑하는 이슬람권과 위대한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당이 자연스럽고 확고한 동맹관계를 확립하여 유대인들에 대한 공동전선을 펼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저 악독한 벨푸어 선언의 날에 저의 진심어린 인사와 당신의 투쟁이 최종 승리를 얻기까지 성공적으로 수행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제국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


1933년,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바로 그 주에 팔레스타인의 독일 총영사이며 반유대주의자인 하인리히 볼프는 베를린에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새 독일 정부를 환영하며 파시즘이 팔레스타인에도 전파되기를 바란다며 독일이 이 지역에 개입하기 바란다는 뜻을 아민 알 후세이니가 전했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알 후세이니의 제안은 영국-독일 관계와 경제 상황을 고려하여 이 지역에 대한 중립을 유지하려는 정책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볼프는 몇달 후 알 후세이니와 많은 무슬림들을 나비 무사에서 만났으며 그 자리에서 아랍측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보내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전달했다. [각주:1]

1937년 7월 21일, 알 후세이니는 팔레스타인의 신임 독일 총영사 한스 될을 방문하여 다시금 독일에 대한 지지와 나찌 제3제국이 아랍의 반유대주의를 지원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물었고, 이에 관한 논의를 위하여 베를린에 대리인을 파견하기도 했다.

1938년 독일와 영국의 관계가 불분명해지자 알후세이니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1938년 8월, 경쟁자인 야보틴스키의 이르군이 막 지원이 끊긴 시점에서 알 후세이니는 독일 나찌당과 이탈리아 파시스트에게서 군사, 재정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2차대전이 가까워지면서 알후세이니는 열렬한 친나찌 주의자가 되었지만 이것이 팔레스타인의 지도부 전체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어서 예를들어 알 후세이니의 사촌 야말 같은 경우는 영국과 팔레스타인의 분리에 관한 협상을 유지하고 있었다.[각주:2]

1940년 5월, 영국 외무성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협회 바드 레우미(Vaad Leumi)의 알 후세이니 암살제안을 거절했지만 그해 11월에는 윈스턴 처칠이 유사한 계획을 제안하기도 했고 영국측 자료에 의하면 이듬해인 1941년 5월,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떠나서 통제권이 독일에 넘어가게 될 가능성을 우려한 이르군의 몇몇 멤버들은 전 이르군 지휘관 다비드 라지엘을 포함한 일파를 이라크에 파견하여 알 후세이니를 체포하거나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한편 이르군은 이들이 알 후세이니를 체포하여 협상대상으로 삼거나 암살작전을 방해하려는 의도였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작전은 독일 항공기에 의하여 다비드 라지엘이 사망하면서 포기되었다. [각주:3]



중동에서

1941년 4월, 이라크의 라시드 알리 장군이 이끄는 친나치 장교단은 친영국파이며 이라크 수상인 누리 사이드 파샤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리하여 친나찌 활동의 근거지를 마련한 알 후세이니는 한달 뒤인 5월에 영국에 대해 성전을 선포했고 [각주:4], 40일 후에 영국군이 이라크를 점령하자 알 후세이니는 일본이나 이탈리아 둘중 한 국가에 정치적 망명을 시도했다. 10월 8일, 이란이 영국과 소련에게 분리 점령되고 추축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가운데 알 후세이니는 한 이탈리아 외교관의 도움으로 이탈리아 여권을 얻어 도주할 수 있었으며 발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수염을 깍고 머리를 염색해야 했다.[각주:5] 이렇게 해서 유럽으로 도망친 후세이니는 2차대전 기간중에 베를린에 수차례에 걸쳐서 "텔 아비브를 폭격할 것"을 요청했다. [각주:6]



나찌 점령하의 유럽

알 후세이니는 1941년 10월 11일, 로마에 도착하여 즉시 이탈리아 첩보부와 접촉을 가졌다. 그는 이곳에서 "아랍에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트렌스요르단을 통괄하는 독립 파시스트 국가를 승인한다"는 조건으로 모든 아랍국가의 비밀 아랍 민족주의 조직 수장으로 취임했으며 영국에 대항하여, "성지, 레바논, 수에즈 운하, 아크바"에 관련된 논의에서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다. 이탈리아 외무성은 알 후세이니의 제안을 승인하면서 그에게 백만리라를 제공하였으며 10월 27일에는 베니토 무솔리니와의 회견도 이루어졌고, 알 후세이니에 의하면 그 만남에서 무솔리니는 유대인과 시오니즘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했다고 한다. [각주:7]

한편, 1940년 여름과 1941년 2월에 걸쳐서 알 후세이니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통해 독일 정부에 독일과 아랍의 공조를 통한 모병활동을 자청하였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아랍국가들이 팔레스타인과 다른 아랍국가에서 유대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권리가 있음과 아랍의 국가적, 인종적 이해관계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각주:8]

이것이 발단이 되어 이탈리아 지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알 후세이니는 11월 3일, 추축국이 아랍에 대한 지원을 확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랍인 모병에 협조할 것을 선언하였고 3일동안 이 선언은 이탈리아 외무성과 로마의 독일 대사관에서 논의되었다. 11월 6일, 알 후세이니는 베를린에서 자신의 선언에 대하여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와 다른 독일 당국과 논의하여 최종적으로 알 후세이니의 원안을 대부분 수용하여 추축국은 자신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국가를 말살(Beseitigung)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선언했다. [각주:9]



히틀러와 아민 알 후세이니 1941년

11월 20일, 알 후세이니는 독일 외무장관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를 만났고 [각주:10] 11월 28일에는 아돌프 히틀러를 접견하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히틀러에게 "독립과 자유의 획득을 위한 아랍측의 투쟁을 인정하고 동조하며, 동시에 유대인의 본거지를 말살하는 것을 지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공개 선언을 [각주:11] 요청한다. 히틀러는 이런 선언을 할 경우 비시 프랑스에 대한 드골주의자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결과임을 강조하면서 요청을 거절하지만 [각주:12] 다음과 같은 선언을 통해서 알 후세이니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1. 총통은 유대-공산주의 헤게모니의 마지막 흔적까지 박멸되는 그 순간까지 투쟁할 것이다.
2. 이 투쟁의 과정에서 독일군은,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가까운 미래의 언젠가 코카서스 남쪽(아랍 북부)으로 진출할 것이다.
3. 상황이 돌파되면 총통은 아랍세계에 해방의 시기가 왔음을 선언할 것이다. 또한 독일의 유일한 관심사는 "유대인을 보호하는 세력의 파괴"에 있다.(die Vernichtung der das Judentum protegierenden Macht) [각주:13]



유대인 대학살

알 후세이니는 전쟁기간 중에 베를린에서 머물렀지만 홀로코스트를 알고 있었음은 부인했다.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각주:14] 의 대리인 중 한명이었던 디터 비슬리세니(Dieter Wisliceny)는 전후에 후세이니가 유럽 유대인들의 절멸과정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으며 수차례 아이히만과 접촉하면서 그에게 제 3제국에서 벌어지는 "유럽에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 [각주:15] 에 관한 세세한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 증언은 1961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 재판 중에 부인된바 있는데 아이히만은 알 후세이니에게 다른 부서의 장들이 알고 있는 정도의 공적인 자료만을 제공했을 뿐이라고 증언했으며 최종판결에서 예루살렘 법원은 "피고의 부분적인 증언에도 불구하고 알후세이니와 아이히만 사이의 회견에 관한 비슬리세니의 증언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의 관점에서 피고와 알후세이니 간에 대화가 있었던 장소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다만, 우리에게 제출된 알후세이니의 기록에서 피고에 관한 결정적 증거는 확인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각주:16] [각주:17]

아이히만 재판의 전과정에 참석했던 유대인 정치 이론가 한나 아른트(Hannah Arendt)는 자신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에서 재판에서는 전 예루살렘 이슬람 법률고문 하즈 아민 엘 후세이니와 아이히만간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한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고 증거들은 확실하지 않았다라고 기술했다. [각주:18]

라파엘 메도프(Rafael Medoff)는 "사실, 알 후세이니의 존재가 유대인 학살에 기여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는 없고, 비슬리세니에 의한 발언은 불분명할 뿐 아니라 최종해결의 기원에 관련되어 알려진 것돌과 일치하지 않는다" [각주:19] 라고 결론짓고 있다.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또한 비슬리세니의 증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슬리세니의 진술을 확증할 수 있는 개별적인 문서가 발견된 적이 없으며 나찌는 외부로부터 이 문제와 관련된 특별한 영향을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각주:20]

그러나 최근의 연구로 볼때 알 후세이니는 아이히만과 접촉한 것과 만약 롬멜이 이집트의 영국 방어선을 돌파했을 경우 아인자츠 특수부대 [각주:21]가 신속히 배치되었을 것임은 확실한 것 같다. [각주:22]


후세이니는 1943년 5월 13일, 독일 외무성에서 추진한,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지에서 유대인의 이동을 막는 작업에 관여하여 500명의 유대인과 4,000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송하는 문제와 관련된 보고서가 제출되었으며, 외무성에게 "그가 최선을 다하여" 이런 상황을 막겠다고 회답하고 있다. [각주:23] 또, 1944년 7월 25일, 그는 헝가리 외무성에게 900명의 유대인 어린이들과 100명의 유대인 어른이 이송될 때, 팔레스타인이 목적지가 될 것인지 우려하고 있다는 서신을 보내었으며 그 문제와 관련해서 이송할 필요가 없다고 적으면서
"이들을 적절한 통제가 있는 폴란드 같은 국가에 보내는 것이 위험과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적절하고도 불가피한 조치"라고 마무리 짓고 있다. [각주:24]

미하엘 바르 조하르(Michael Bar Zohar)에 의하면 알 후세이니가 계획했던 사보타지 행동중에는 팔레스타인 제2의 도시이며 번성한 유대계 도시 텔아비브를 표적으로 화학전을 실시할 계획도 있었다. 그에 의하면, 도시의 상수시스템에 5명의 공수부대를 투입하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으나 경찰들이 예리코에서 침투대원들을 체포했고, 예리고의 경찰 총책임자 파이즈 베이 이드리시(Fayiz Bey Idrissi)에 의하면 "이들이 소지한 독극물 용기에는 각기 25,00명을 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독극물이 최소한 10개 이상 있었다"고 한다. [각주:25] 그는 또한, 독일 공군에게 예루살렘 폭격을 요청했다고 하지만 그의 신앙에 비추어 볼때 월터 라퀠(Walter Laqueur)이 말했듯이 "진실로 신실한 이슬람 교도가 이런 행동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각주:26]

전후에 남긴 회상록에서 후세이니는 "독일과의 협조에서 우리의 기본적인 조건은 팔레스타인과 아랍권에 남아있는 최후의 유대인 한명까지 남김없이 제거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받는 것이었다. 나는 히틀러에게 독일이 발명하여 유대인들을 다루는데 사용한 과학적 방법을 이용해서 우리가 민족적, 인종적 측면에서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명백한 언질을 요구했으며 내가 얻은 대답은 '유대인은 당신의 것'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각주:27]


보스니아에서

1943년 9월, 크로아티아의 아브(Arbe)에서 구출된 500명의 유대인 어린이를 터키에 넘겨져 팔레스타인으로 넘겨질 질 것을 우려한 알 후세이니는 협상과정에서 강력히 반대하기도 했다. [foootnote] Daniel Carpi, The Rescue of Jews in the Italian Zone of Occupied Croatia, Shoah Resource Center, page 39 [/footnote]

프라이부르크의 독일 외무성과 국방부가 최근 공개한 나찌 관련 문서를 통해 슈트투가르트 대학의 클라우스 미하일 말만(Klaus Michael MAllmann)과 루드비히스부르크 대학의 마틴 퀴퍼(Martin Cuppers)가 밝혀낸 바에 의하면 [각주:28], 북아프리카의 엘빈 롬멜 원수가 영국군을 격파했을 경우 나찌 독일은 이집트 경비대(Einsatzkommando Agypten)라는 이름의 부대를 파견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을 절멸시키고, 아랍인들이 유대인 국가를 건설을 방해하는 것을 도울 계획을 세운바 있음이 확인되었다. 연구자들은 책에서 "예루살렘의 법률고문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는 나찌의 가장 중요한 협조자이며 대표적인 아랍 반유대주의자"라고 결론짓고 있다. [각주:29]



선전과 모병활동


보스니아 이슬람 SS를 사열하며 나찌식 경례를 하는 아민 알 후세이니


2차세계대전 말기에 접어들면서 알 후세이니는 아랍의 여론을 움직이는 선동가인 동시에 독일 무장 친위대의 이슬람 지원자를 선발하기 위한 업무에 종사했다. 1941년 초 알 후세이니는 보스니아를 방문하여, 그곳의 이슬람 지도자들에게 무슬림으로 구성된 SS 부대를 창설하는 것이 이슬람의 이해 관계와 일치한다고 설득했으나 그의 노력과 다양한 선전활동에도 불구하고 기대치의 절반에 불과한 2만~2만5천여명의 무슬림이 지원했다. [각주:30]

알 후세이니는 보스니아 무슬림을 모병하여 수개 무장친위사단을 구성하는데 관여했으며 그 중 가장 큰 것은 1944년 2월 부터 발칸반도에서 공산주의 계열 저항군을 제압하는 작전에 동원되었던 21,065명 규모의 제 13 "한샤르(Handschar)"사단으로 [각주:31],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유대인의 학살에도 관여하고 있다. [각주:32]

1944년 3월 1일, 알 후세이니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베를린 라디오 방송으로 발표했다. "아랍인들이여. 최후의 단 한명까지 봉기하여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투쟁하라. 유대인을 찾아내는 족족 죽여라. 이것은 신과 역사와 지역을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명예를 지킬 것이며, 신께서 그대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각주:33] [각주:34] [각주:35]






2차대전 이후의 활동


체포와 재판

2차대전이 종료된 이후에, 알 후세이니는 스위스로 도주했으나 체포되어 독일로 추방된 다음 프랑스 군에게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 최고 법정에서 전쟁범죄로 3년형과 2년간의 자격정지를 선고 받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중에 아이히만의 부관 디터 비슬리세니는 알 후세이니가 유럽 유대인들의 절멸에 관여한 인물들 중 하나이며 아이히만과 히믈러가 '최종 결정'에 착수하는데 조언을 한 인물 중 하나라고 증언하였다. 1946년 후세이니는 유고슬라비아 감옥을 탈출해서 이집트로 망명했고 유대인 단체는 영국에게 그를 전쟁 범죄로 체포할 것을 탄원했지만 그런 걸정이 여전히 알 후세이니에게 지지를 보내는 자들이 존재하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서 불러올 파문을 고려하여 기각했다. 이집트에서 알 후세이니는 영국 첩보부에 고용되어 아랍에서 선전을 담당했다. [각주:36]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

이집트에 체제하는 중에 알 후세이니는 이집트 군에게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참전토록 권유했으며 1948년 2월 다마스커스에서 팔레스타인의 야전 사령관과 성전군 사령관을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포함하여 전쟁전과 전쟁중에 아랍지도자들 간의 고위 협상 대부분에 참가했다. 아민 알 후세이니의 사촌 압드 알 콰디르 알 후세이니(Abd al-Qadir al-Husayni)와 하산 살라마(Hasan Salama)는 각기 예루살렘과 리다 지구의 지휘관이 되었으며 아랍국가간의 토론에서 아민 알 후세이니의 지휘는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그러나 다마스커스 회담에서 4일 후인 2월 9일, 아랍연맹의 카이로 회담에서 팔레스타인의 자치권 요구안과 팔레스타인 출신자를 연합의 참모장으로 임명하는 제안이 거부된 것에 좌절했다. 게다가 영국이 기초한 팔레스타인 아랍계 내각과 행정부 구성을 위한 자금지원과 아랍 고위 위원회가 전쟁으로인한 팔레스타인 피해의 구조지원금에 대한 권한 요청도 거부되었다. [각주:37] 여러가지 면에서 아민 알 후세이니의 권한은 제한되었으며 징병도 제한되었지만 [각주:38] 사촌이며 아랍 연합의 가장 카리스마적인 지휘관 알 콰디르 알 후세이니가 4월 8일 사망하자 이 제한은 해제되었다.

한편 트렌스요르단의 국왕 압둘라 1세가 전부터 맺어온 연락선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이면교섭을 재게하리라는 소문이 퍼지자 이집트가 주도하는 아랍 연합은 1950년 9월 8일, 알 후세이니를 명목상의 지도자로 내세운 팔레스타인 정부를 가자지구에 설립했다.
아비 샬람은 이에 대하여,
"가자 지구에 팔레스타인 정부를 구성하고 무장부대를 정부 통제하에 구성하려는 시도는 이들에게서 동의없이 전쟁을 수행하거나 팔레스타인에서 병력을 철수할 수 없는 제한을 둠으로써 제재를 받았다. 장기적으로는 팔레스타인에 독립된 아랍정부를 형성하려는 계획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집트측 후원자들의 당면한 목표는 압둘라의 대항세력을 만들어서 트렌스 요르단이 아랍연방을 형성하려는 의도를 좌절시키는 것 이었다." [각주:39]

압둘라 국왕은 알 후세이니의 성전군을 재건하려는 의도를 그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10월 3일 요르단 국방부는 요르단 군 통제에 있는 지역에 침입한 모든 무장단체를 해산시키도록 지시하였고 글룹 파샤는 그의 명령을 효율적이면서도 무례한 방법으로 수행했다.[각주:40]




예루살렘에서의 추방

압둘라 국왕은 예루살렘의 최고법률고문 직에 새로 후삼 알딘 야랄라를 임명하였으며 1951년 압둘라 국왕이 알 후세이니 가문의 다오우드 알 후세이니가 지휘하는 팔레스타인 지하조직 구성원에게 암살된 후에야 아랍 협의체와 접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압둘라를 계승한 타랄 국왕은 알 후세이니가 예루살렘에 발을 들이지도 못하게 했고 1년 후 능력부족을 선언하고 타랄이 물러난 뒤에 그를 계승한 후세인도 여전히 알 후세이니는 예루살렘에 들어올 수 없다는 금지조치를 재확인했다.

1974년 7월 4일, 알 후세이니는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사망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매장되기를 원했지만 1967년 6일전쟁에서 동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스라엘 정부는 이 요청을 거절했다.

  1. Nicosia (2000) p.85-86 [본문으로]
  2. Ami Isseroff and Peter FitzGerald-Morris, 'The Iraq Coup of 1941, The Mufti and the Farhud';http://www.mideastweb.org/iraqaxiscoup.htm   [본문으로]
  3. Mattar, 1984. [본문으로]
  4. The Iraq Coup Attempt of 1941, the Mufti, and the Farhud Isserof, Ami; Peter FitzGerald-Morris. MidEastWeb [본문으로]
  5. Lewis (1999), p. 150 [본문으로]
  6. Lewis (1995), 351. [본문으로]
  7. Lewis (1999), pp. 150-151 [본문으로]
  8. Lewis (1984), p.190. [본문으로]
  9. Lewis (1999), pp. 151-152 [본문으로]
  10. Segev (2001), p. 463 [본문으로]
  11. Lewis (1984), p.190. [본문으로]
  12. Lewis (1999), p. 152 [본문으로]
  13. Yisraeli, David The Palestine Problem in German Politics, 1889-1945 p. 310 quoted in Browning, Christopher R. (2004). The Origins of the Final Solution: The Evolution of Nazi Jewish Policy, September 1939-March 1942.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ISBN 0803213271 p. 539. [본문으로]
  14. 2차대전 기간중 나찌의 유대인대학살에서 실무책임을 담당한 인물. [본문으로]
  15.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에 관한 논쟁은 국내에서 출간된 홀로코스트 관련 서적을 참고할 것 [본문으로]
  16. Eichmann trial: The Judgment [본문으로]
  17. Eichmann had, indeed, been sent to Palestine in 1937, but that was on office business at a time when he was not even a commissioned officer. Apparently it concerned the Ha'avara Agreement for Jewish immigration into Palestine from Germany. As for contacting the Arab rebels in Palestine, or their leader the Mufti, Eichmann was turned back by the British authorities at the Egyptian border. It is doubtful whether Eichmann made contact with the Mufti even in 1942, when the latter resided in Berlin. If this fallen idol makes an occasional appearance in Eichmann's office correspondence it is because Eichmann's superiors at the Foreign Office found the Mufti a very useful sacred cow, always to be invoked when the reception of Jewish refugees in Palestine was under discussion. Dieter Wisliceny even believed that Eichmann regarded the Mufti as a colleague in a much expanded post-war Final Solution.' G.Reitlinger, The Final Solution, ibid. pp. 27-28 [본문으로]
  18.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1963) Viking Press, New York 1965 p.13 [본문으로]
  19. Medoff, Rafael (1996). The Mufti's Nazi Years Re-examined. The Journal of Israeli History, vol. 17. No. 3. [본문으로]
  20. Lewis (1999), p. 156 [본문으로]
  21. 치안부대라는 이름의 이 독일부대는 동유럽 각지에서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했다. [본문으로]
  22. Hatte Erwin Rommel 1942 die Truppen seines Gegners, des britischen Feldmarschalls Montgomery, in Agypten geschlagen und ware anschließend bis nach Palastina vorgedrungen, hatte das Einsatzkommando den Auftrag erhalten, die Juden in Palastina zu toten. Das Einsatzkommando sollte nach dem Muster der NS-Einsatze in Osteuropa arbeiten; dabei waren hunderttausende von Juden in der Sowjetunion und anderen Landern Osteuropas ermordet worden. Die Nationalsozialistischen Machthaber wollten sich die Deutschfreundlichkeit der palastinensischen Araber fur ihre Plane zunutze machen. ?Bedeutendster Kollaborateur der Nationalsozialisten und zugleich ein bedingungsloser Antimsemit auf arabischer Seit war Haj Amin el-Husseini, der Mufti von Jerusalem‘, schreiben Mallmann und Cuppers. In seiner Person habe sich exemplarisch gezeigt, ?welch entscheidende Rolle der Judenhass im Projekt der deutsch-arabischen Verstandigung einnahm.‘ El-Husseini habe unter anderem bei mehreren Treffen mit Adolf Eichmann Details der geplanten Morde festgelegt.“ (‘If Erwin Rommel had defeated the troops of his opponent, the British Field Marshal Montgomery, in Egypt in 1942 and then advanced into Palestine, the task force (Einsatzkommando) would have received the order to kill the Jews in Palestine. The task force was meant to operate according to the model of the Nazi task forces in eastern Europe: in this process hundreds of thousands of Jews in the Soviet Union and other countries of eastern Europe had been murdered. The Nazi rulers wanted to make use of the pro-German sentiments of the Palestinian Arabs for their plans. “The most significant collaborator of the National Socialists, and at the same time an absolute anti-Semite, on the Arab side was Haj Amin al-Husayni, the Mufti of Jerusalem,” to quote Malmann and Cuppers. “What a decisive role hatred of the Jews occupied in the project of German?Arab understanding” was exemplified in the person of al-Husayni, who during several meetings with Adolf Eichmann had, among other things, established the details of the planned murders.’) (http://www.uni-stuttgart.de/aktuelles/presse/2006/36.html   [본문으로]
  23. Raul Hilberg,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 (1961) New Viewpoints, New York 1973 p.504 [본문으로]
  24. Joseph Schechtman, The Mufti and the Fuhrer, ibid. pp.154-155 [본문으로]
  25. http://www.wymaninstitute.org/articles/2003-03-chemical.php [본문으로]
  26. Walter Laqueur The Origins of Fascism: Islamic Fascism, Islamophobia, Antisemitism 2006 [본문으로]
  27. Ami Isseroff and Peter FitzGerald-Morris, 'The Iraq Coup Attempt of 1941, the Mufti, and the Farhud,' http://www.mideastweb.org/Iraqaxiscoup.htm. [본문으로]
  28. http://www.us-israel.org/jsource/biography/mufti.html [본문으로]
  29. http://www.passia.org/palestine_facts/personalities/alpha_h.htm#hajamin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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