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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무하마드 아민 알 후세이니 1. 팔레스타인 폭동의 법률고문(Mufti)

젊은 시절


1895년 [각주:1] 예루살렘의 법률고문이며 초기 시오니즘의 격렬한 반대자인 아버지 타히르 알 후세이니(Tahir al-Husayni)의 아들로 태어났다.  [각주:2] [각주:3] [각주:4] 알 후세이니 가문은 남부 팔레스타인 유대인 지역의 부유한 지주로, 1864년부터 1920년에 걸쳐서 13명의 시장을 배출했으며 아민 알 후세이니의 형, 카말 알 후세이니도 카이로의 이슬람 법률 고문직을 맡았었다.

아민 알 후세이니는 예루살렘의 공립학교를 나와 카이로의 알 아자르 대학에서 [각주:5] 1년간 이슬람 법을 공부했지만 학과를 마치지는 않았고, 1913년 19세의 나이로 메카에 들러 명예 하즈(Hajj)의 칭호를 얻었으며 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이스탄불에서 행정학교를 다녔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알 후세이니는 오스만 투르크 군으로 참전해서 포병장교로 배속되어 그리스의 스미르나 근처에 주둔중인 47 여단에 배속되었으나 1916년 11월 전치 3주의 부상으로 오스만 투르크 군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영국와 마호메트 군대 [각주:6] 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 오스만 투르크를 몰아내던 1918년, 팔레스타인에서도 투르크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고, 이들을 모병한 브른톤 대위(C. D. Brunton)는 "영국에서 온 하그 아민 엘 후세이니"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각주:7] 이 시기에 후세이니는 아랍 반란 기간중에 예루살렘과 다마스커스에서 파이잘의 군대를 위한 모병업무에 기여하고 있었다.



정치활동 초기

1919년에 알 후세이니는 다마스커스에서 개최된 범시리아 의회에 출석하여 파이잘 왕자(Emir Faisal)를 시리아 국왕으로 지지했으며 이 해 알 후세이니는 비밀 협회 예루살렘 아랍 클럽(El-Nadi al-Arabi)에 참석하고 아마도 설립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또, 남부 시리아(Suriyya al-Janubiyya)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여 1919년 9월 초 이후에 같은 아랍 클럽 맴버인 무하마드 하산 알 부다이리 발행, 아레프 알 아레프 편집으로 간행되었다.

1920년 4월,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나비 무사 연례행사 기간 중에 예루살렘 라시디야 학교에서 교사로 있던 알 후세이니는 아랍 군중들에게 유대인을 적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군중을 선동해서 폭동을 일으킨 죄로 궐석 재판에서 트랜스요르단으로 도주한 후세이니에게 10년형이 언도되었다. [각주:8]

1921년 말 까지 알 후세이니는 수도를 다마스커스에 두는 아랍 국가 건설을 위해 팔레스타인을 대 시리아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대 시리아는 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영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와 관련된 논의는 영국이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을 1920년 7월에 사이크스 피콧 협약(Sykes-Picot Agreement)에 의거, 프랑스에 할양함에 따라 제반 사항으 급변하게 되었고 다마스커스로 진군한 프랑스군은 파이잘 왕의 정부를 전복시키고 대 시리아 건국의 의도를 와해시켜 버렸다.

이후로 알 후세이니는 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하는 범아랍 국가 건설 계획을 예루살렘 중심으로 수정하면서 이를 위해 유대인과 외국계를 팔레스타인에서 축출해야 하고, 다르 알 이슬람 시기를 회복해야 한다고 신념을 굳히게 되었다.


예루살렘 법률고문

1921년 3월, 예루살렘의 법률고문이었던 카밀 알 후세이니(Kamil al Husayni)가 사망하자 영국의 고등 판무관 허버트 사뮤엘은 그의 동생 아민 알 후세이니와 접촉하여 유죄판결이 언도되기 전에 망명했던 아민 알 후세이니와 다른 아랍인들에게 일반적인 사면을 허가한다. 그리고, 이들이 참가하는 가운데 4명의 후보자가 참가하여 법률고문 선거를 거치게 되었으며 알 후세이니는 이 투표에서 최저득표 밖에 얻지 못하지만, 알 후세이니 가문과 라이벌이 되는 나샤시비 가문 간에 균형을 잡고 싶어하던 사무엘은 [각주:9] 백여년 이상 알 후세이니 가문이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의 최고법률고문 직위에 아민 알 후세이니를 임명했다. [각주:10]


허버트 사뮤엘. 유대인이었으나 민족보다는 조국에 충성을 다했던 그는 아민 알 후세이니를 법률고문으로 임명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분쟁을 악화시키는 우를 범했다.

1922년 알 후세이니는 새롭게 구성된 무슬림 최고 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수십만 파운드 규모의 Waqf 자금과 약 연간 5만 파운드 규모의 고아 자금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된며 동시에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법정에 대한 영향력도 확보하게 되어 종교적 교사와 선교사들을 임명할 수 있는 권리도 얻게 되었다.
이에 알 후세이니는 반석의 돔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오늘날의 예루살렘 황금사원을 재건하고 개선하기 위한 국제 이슬람 운동을 시작하여 결과적으로 충분한 활동자금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1931년에는 신설된 세계 이슬람 협회의 의장으로도 활동했다.

초기에 영국은 아민 알 후세이니를 법률고문에 임명하거나 예루살렘 시장 무샤 알 후세이니(Musa al-Husayni)를 라그헤브 알 나샤히비(Ragheb al-Nashahibi)로 대신하는 등, 마힐리지야(Majlisiya) 또는 의회 지지파 라고 알려진 후세이니 지지파들과 무아리둔(mu'aridun) 또는 반대파로 알려진 나샤히비 지지자들 간의 균형을 유지해 나갔다. [각주:11]

알 후세이니 가문과 달리 무아리둔은 유대계에게 비교적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수년동안 유대계 기구로부터 정기적인 보조금을 지원받고 있었다.[각주:12] 이 두가문의 대립은 영국 식민통치기간 내내 팔레스타인의 단합을 저해했으나 1936년에 이들은 알 후세이니가 의장을 지낸 아랍 최고 위원회(Arab higher Comittee)라는 실행조직으로 통합되게 된다.


1929 팔레스타인 폭동

임명된 이후, 알 후세이니는 황금사원을 범 아랍 운동과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삼았으며 벨푸어 선언에 의한 영국령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유대 이민을 방해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서쪽 벽에 대한 관리권을 획득하려는 것은 황금사원을 무너트리려는 의도라고 비난하면서 당시 팔레스타인의 아슈케나지 최고 랍비였던 아브라함 이삭 쿡(Abraham Isaac Kook)에게 성전산이 유대교의 손에 있던 시절로 되돌리려는 의도가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들이 성전지역을 점령하려는 확고한 정치적 계획을 수립해두었다고 발언하곤 했다. [각주:13] 황금사원을 무슬림 세계의 정신적 지주로서 자리매김 하려는 많은 노력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서쪽 벽의 광장으로 통하는 통로로써 그 근처를 지나고 있는 현실과 조화를 이루기 힘들었고 이 떄문에 두 공동체 사이에는 점차 분쟁이 증가했다. 그리고, 현상태를 개선하려는 소수 양식인들의 노력들은 영국 측의 통제를 받기 전에 무슬림 책임자들에 의하여 심한 방해를 받았다.

1928년 9월 28일, 무슬림과 충돌하던 영국 경관들이 예배중인 남성과 여성 무슬림들을 갈라놓은 가림막을 물리력으로 제거해버렸다. 이것이 엉뚱하게 유대인 사회에 대한 야유로 번지게 되었으며 알 후세이니는 유대인들이 예배중인 곳에 방해할 목적으로 당나귀들을 풀어놓는 등 일련의 폭동을 계획하였다. 사건 발생 수일 후, 당국에 제출된 비망록에서, 이슬람 최고회의는 "유대인들의 목표"가 서쪽 벽으로 가기 위해서 이 지역을 지나야 한다는 것을 구실로 점진적으로 알 아크사 모스크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각주:14] 국제 유대인 사회는 영국에 서쪽 벽 근처에서 이루어진 폭력행위에 대하여 항의했고, 국제 유대인 협회(Jewish National Council) 바드 루미(Vaad Leumi)는 영국에게 서쪽 벽 지역을 유대계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각주:15] 하지만 11월에 무슬림 사회에 보낸 공개 편지에서 협회는 성지에 대한 무슬림의 권리를 침해할 의도는 없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한다. [각주:16]

다음해에도 유대인 참배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해 행동이 재발되어 호전적 유대계 조직 베타르는 "서쪽벽은 우리의 것(The Wall is Ours)"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데모를 시작했다. [각주:17] 상호 비난이 거듭되며 수위를 높여갔고 비난과 폭력이 점점 가열되면서 알 후세이니는 유대인들이 이슬람 성지를 점령하려는 강경한 연설을 거듭하면서 아랍인과 유대인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학살이 유발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유대계 지도층은 이슬람의 종교적 성지들을 강탈하려는 의도가 없으며 성벽 근처에서 종교행사를 거행할 권리를 얻으려는 것 뿐이라고 반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알 후세이니는 회의적인 자세를 유지했으며 전통적으로 시오니즘 정책의 주류의 정책과 관점에 반대해온 비종교적이고 과격한 소수파의 행동도 배반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판단할 정도였다.

한편, 알 후세이니는 유대인들의 음모가 진행중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며(쇼 협의(Shaw Commission) [각주:18] 이전에 시온 의정서(the Protocols of the Eders of Zion)을 입수하고 있었다.) [각주:19] 그의 선동에 의하여 유대인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는 폭력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헤브론과 사페드에서는 인명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대 지도부는 알 후세이니를 폭력 선동혐의로 기소했으며, 두건의 폭력 선동 혐의 중 하나는 신중하고 조사된 뒤에 기각되었지만, 쇼 보고서는 "알 후세이니에게 명백한 책임이 있음"을 지적했고 [각주:20] 소수의견으로 헤리 스넬(Harry Snell)은 알 후세이니가 종교적인 선동행위로 인해 발생할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폭력 발생을 막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종교 지도자로서의 관한을 악용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각주:21] 국제연합의 영구식민지 관리 위원회는 알 후세이니의 유대인에 대한 고소가 부정직하고,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쇼 보고서에는 이러한 관점이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고 있었고 [각주:22] 결론적으로 알 후세이니의 선동행위가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결론짓고 있다.

샤 라크만(Shai Lachman)에 의하면 법률고문 알 후세이니는 이즈 앗 딘 카삼(Izz ad-Din al-Qassam)을 1921년 이후 서로 잘 알고 있었고 그의 테러행위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1920년대에 양측은 상호간의 정체성에 대한 관점과 존경심에 기초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알 카삼은 알 이스티칼 사원의 성직자 였으며 임명되기 위해서는 법률고문의 동의와 관리기구에 의한 재정지원이 승인되었어야 했다. 이들의 공조행위는 1929년 폭동의 결과로 더욱 확대되었고, 알 카삼의 부하들은 유혈 폭동에 상당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양측의 관계가 소원해지는데, 그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알 카삼의 독립활동에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테러활동이 유대인들을 직접적인 표적으로 행해지는 동안에는 법률고문은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반유대 정책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알 후세이니는 비밀리에 알 카삼이 지휘하는 조직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격려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각주:23]


1936-1939 아랍 폭동

1936년 4월 19일, 유대인에 반대하는 일련의 아랍계 폭동이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했다. 초기에 폭동을 지도한 것은 파르한 알 사다(Farhan al-Sa'da)였으나 알 후세이니는 곧 자신이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당시 waqf와 고아 기금을 통해 연간 11만 5천 팔레스타인 파운드의 자금을 통제할 수 있었던 그는 폭동이 시작되자 곧 이 자금을 전국에 걸쳐있는 그의 조직망이 활동할 자금으로 돌렸다. 폭동이 발생한 첫 한달동안에, 알 후세이니가 고용한 게릴라들은 유대인에게 공격을 가했고 나중에는 화지 알 쿼크지가 지휘하는 주변 아랍국가의 지원자들도 참가했다. 동시에 알 후세이니의 주도하에 그를 의장으로 하는 팔레스타인의 아랍계 부족들 대표자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아랍 최고회의가 구성되어 5월 15일부터 유대인 이민허용 중지를 요구하면서 조세거부 운동과 총파업을 일으켰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최고 감독관 아서 워쇼프 경(Sir Arthur Wauchope)은 알 후세이니나 아랍 최고회의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이 대화는 무의미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법률고문 알 후세이니는 유대계 이민이 즉각 중단되지 않는다면 "전능한 알라신의 복수"가 있을 것이라고 수차례 협박과 경고를 보내었으며 아랍계와 관련된 공공기관, 공공교통, 사업체, 농업기관 등이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다. [각주:24]

그러나 기세등등했던 것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수입의 부족으로 파업에 의한 삶의 질 저하에 시달리게 된 것은 아랍측이었다. 식민당국은 아랍 평의회와 중재에 나서 폭동을 종결짓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알 후세이니와 아랍 평의회는 트렌스요르단 국왕 압둘라는 영국이나 시오니스트 들과의 친분관계 때문에 중재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이라크 외무장관 누리 앗사이드(Nuri as-Said)를 중재자로 선택했다. 워쇼프 경이 군대를 투입하여 진압에 나설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한편으로 아랍측의 불만사항을 처리할 왕립 진상조사위원회를 조속히 구성하겠다는 강온양면전술을 구사함에 따라 아랍 최고회의는 10월 11일에 파업을 중단했고, [각주:25] 11월에 개최된 왕립 진상조사위원회(Royal Commission of Inquiry)에서 알 후세이니는 아랍측 증인 대표로 증언에 나섰다. [각주:26]

1937년 7월에 영국 경찰은 알 후세이니를 아랍 폭동의 주도자로 체포하려했으나 알 후세이니는 이미 영국이 그에게 접근할 수 없는 성전산으로 도주한 뒤였다. 그는 그곳에서 3개월간 체재하면서 재 폭동을 지휘했고 앤드류 조사관의 암살이 있었던 9월 이후에 알 후세이니는 체포 면책특권은 유지되는 조건으로 이슬랍 최고회의(Muslim Supereme Council)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아랍 고위 위원회는 불법단체로 규정되었고 다수의 단체의 지도자들이 투옥되자 10월 중순 후세이니는 야음을 틈타 여자로 변장하고 레바논으로 도주, 그곳에서 위원회를 재조직했다. 여전히 알 후세이니는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아랍계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지지를 바탕으로 경쟁자인 나샤시비 가문을 억누르는데 힘쓰면서 레바논에서 2년간 체재하였으나 프랑스와 시리아 당국간에 협조가 이루어지게 되자 그는 다시 1939년 10월 이라크로 도주했다.

팔레스타인 폭동은 1939년에 영국군이 개입되어 진압되기 까지 계속되었으나, 폭동만이 아니라 당시 나찌 독일이 활발한 확장을 시작하면서 세계 각국의 분쟁에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도 정책의 수정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영국은 아랍측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유대인의 이주는 엄격한 제한을 받게 되어 5년간 7만5천명으로 제한되었고, 제한기간의 연장은 아랍측과 협의를 거치기로 한다. 영국은 전략적으로 아랍측의 지지와 충성을 보장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며 유대계의 지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아랍측의 지지를 확인하는 것이 더 우선적인 문제가 되었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계 이민을 제한함으로써 영국은 동요하는 아랍측의 지지를 회복할 것을 기대했다. [각주:27] 알 후세이니는 영국측의 양보가 충분치 못하다고 보았고 그는 이러한 새로운 정책들도 반대에 나섰다.

  1. Philip Matter explains there is a controversy about his birth date that is due to the transcription from the Islamic calendar and concludes he was born in 1895 and not in 1893. [본문으로]
  2. Sachar (2006), p. 170 [본문으로]
  3. Mattar (1988), p.6 [본문으로]
  4. Pappe (1994)p.2 [본문으로]
  5. Huneidi, Sahar "A Broken Trust, Herbert Samuel, Zionism and the Palestinians". 2001 ISBN 1-86064-172-5, p.35. [본문으로]
  6. 파이잘 왕자의 가계는 하시미트라 하여 마호메트의 직계후손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7. Huneidi, Sahar "A Broken Trust, Herbert Samuel, Zionism and the Palestinians". 2001 ISBN 1-86064-172-5, p.35. [본문으로]
  8. Sachar (2006), p. 170 [본문으로]
  9. See, the rivalry Benny Morris, Righteous Victims,pp.111ff. [본문으로]
  10. Sachar (2006), p. 170 [본문으로]
  11. Glenn E. Robinson, Building a Palestinian State: The Incomplete Revolution. Indiana University Press,1997 p. 6 [본문으로]
  12. Benny Morris, Righteous Victims ibid. p.111 [본문으로]
  13. Rabbi Kook had preached as early as 1920:'The Temple Mount is Israel’s holy place, and even should it be under the hand of others for long days and periods of time, it will finally come into our hands . .' This could merely mean that, in rabbinical thought, with the coming of the Messiah, the Temple would automatically revert to the Jews. See Meron Benvenisti, City of Stone: The Hidden History of Jerusalem,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pp.77ff. [본문으로]
  14. Shaw Report [본문으로]
  15. Ritchie Ovendale, The Origins of the Arab-Israeli Wars. Pearson Education, London 2004 p.71 [본문으로]
  16. Shaw Report에서 재인용, 전게서 p.30 [본문으로]
  17. Walter Laqueur, A History of Zionism, p.255ff [본문으로]
  18. 1929년 팔레스타인 폭동에 관하여 원인을 조사한 보고서 [본문으로]
  19. Palestine Commission on the Disturbances of August 1929, Minutes of Evidence (London 1930), Vol 2 page 539 paragraph 13,430, page 527 paragraph 13,107 (interview on 4/12/1929 [본문으로]
  20. Sachar (2006), p. [본문으로]
  21. The Shaw Report, Minority Opinion by Mr.Snell p.174 [본문으로]
  22. Permanent Mandates Commission (page sourcing required), citing Shaw Report p. [본문으로]
  23. Lachman, Shai (1982). Arab Rebellion and Terrorism in Palestine 1929-39: The Case of Sheikh Izz al-Din al-Qassam and His Movement. in "Zionism and Arabism in Palestine and Israel", edited by Elie Kedourie and Sylvia G. Haim, Frank Cass. London, 76.  [본문으로]
  24. Sachar (2006), pp. 199-200 [본문으로]
  25. Sachar (2006), pp. 200-201 [본문으로]
  26. Sachar (2006), pp. 202-203 [본문으로]
  27. Raul Hilberg,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 (1961) New Viewpoints, New York 1973 p.71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