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괄
UN의 분리독립안이 발표되자 마자 유대인 사회는 기쁨에 겨웠고, 그에 반해 아랍인 사회는 불만을 표명하여 대조를 이루었으며 곧바로 폭력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하여 점점 분쟁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살인, 보복, 재보복이 꼬리를 물고 발생하여 양측 모두 수십명이 살해당했고 피비린내 나는 보복이 반복되는 동안 어떤 세력도 폭력의 악순환을 정지하려 들지 않았다.
분쟁이 시작된지 2개월 만에 사망자 1천명, 부상자 2천명에 이른 인명피해는 3월 말이 되자 두배로 증가했다. 1 당시 인구가 2백만명이었던 지역에 한주마다 100명이 사망하고 200명씩 부상을 당할 정도였다. 2
1월부터 아랍해방군(Arab Liberation Army)이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어 해안 지역의 각 담당구역에 주둔하게 됨에 따라 분쟁은 점차 군사작전화 되었다. 아랍군은 갈리리와 사마리아를 통합된 가운데 수백명의 성전군(Army of Holy War)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진격한 압드 알 콰디르 알 후세이니는 현지에서 수천명의 자원병을 뽑아 예루살렘에 10만여명의 인구가 상주하는 유대인 거주구역을 봉쇄했다. 3 이에 대응하여 이슈브(Yishuv, 아랍정착민단) 책임자들은 100여대의 장갑차량을 동원하여 도시에 생필품을 공급하려고 노력했지만 노상에서 공격을 받음에 따라 보급은 난항을 겪었고 사상자의 수도 증가되었다. 3월까지 알후세이니의 전술을 맹위를 떨쳐 하가나의 거의 모든 장갑차량이 파괴되었으며 수백명의 하가나 단원들이 봉쇄망을 뚫고 도시에 보급품을 전하다가 사망했고 4 네게브나 북부 갈릴리처럼 더 철저히 고립된 지역에서는 더욱 상황이 심각했지만, 유대인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현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5 지켜내었다.반면에 아랍계 인구는 제반 상황의 변화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 편이라서 하이파, 야파, 예루살렘과 유대인 지역의 상류, 중류 계층은 팔레스타인 외로 이주하거나 아랍인 거주지역으로 이동했다. 6 7
미국이 분리 독립안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다는 소식에 고무된 아랍연합은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어 있는 아랍 해방군을 증파함으로써 분리안을 중지시킬 수 있다고 보았으며 영국은 1948년 2월 7일 팔레스타인의 아랍지역을 트렌스 요르단이 합병하는 것을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8
이 단계에서 이슈브는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 원인이 소극적인 대책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잠정적으로 결정지었으며 벤구리온은 하가나를 재 조직하고, 징병제도를 확립하여 이스라엘 내의 모든 유대인은 남녀를 막론하고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골다 메이어가 미국에서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스탈린이 시오니즘 운동을 지원함에 의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사회는 동구권과의 접촉을 통하여 절실히 필요한 무기를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가나의 무기 조달책들은 2차대전 때 사용되던 무기의 재고품을 확보하는데 주력하여 이스라엘 군의 무장과 보급체계를 개선했고,이에 의하여 3월 말에 있었던 발라크 작전(Operation Balak)까지는 화기와 장비류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벤 구리온은 아랍 파견군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를 이갈 야딘에게 일임하였고, 그의 분석 결과는 4월부터 시작된 달렛 플랜(Plan Dalet)에서 효과를 보이기 시작하여 전쟁은 하가나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계획의 첫작전이 된 나흐손 작전(Operation Nachshon)은 예루살렘 봉쇄망을 돌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하가나의 기바티 연대(Givati brigade)와 팔마흐(Palmach)의 하렐 연대(Harel brigade)에서 차출한 1500명의 병력을 중심으로 도시로 향하는 통로의 소개작전을 4월 5일부터 20일까지 실시하여 2개월 분의 식량을 봉쇄되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 거주 지역에 반입 하는 데 성공한다. 이 작전은 부분적으로, 알 하세이니가 전투중에 사망하여 반사이익을 얻은 것이기도 하다. 이 기간에 하가나의 지시나 달렛 플랜의 기본틀과는 관계없이 이르군과 레히의 비정규 부대가 상당한 숫자의 아랍인을 학살하는 데이르 야신 사건이 일어나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팔레스타인의 아랍측 민간인들이 공황상태에 빠지는 효과를 불렀으며 그와 함께, 아랍 해방군의 대규모 작전은 미스마 하에멕(Mishmar Ha'emek) 키브츠에서의 패배 9와 드루즈 족이 동맹에서 탈퇴함으로 인하여 "와해"되었다. 10 11
달렛 플랜의 기초 계획은 유대인 거주지역의 경계를 확립하는 것으로 하가나와 팔마흐, 이르군의 연합이 유대인-아랍인이 함께 사는 지역을 점령함에 따라 티베리아스, 하이파, 사피드, 베이산, 야파, 아크르 등이 점령되는 와중에 팔레스타인 사회는 크게 동요되었고 25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12
이 시점에 이르러 영국은 군대를 철수하였고 그에 따라 주변 아랍국 지도자들은 간섭의 강도를 높여갔지만 아랍측은 아직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감수할 수준의 준비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아랍계 주민은 트렌스 요르단 왕국의 압둘라 1세에게 기대를 모았지만 그는 팔레스타인을 독립시키려는 의도가 없었고, 영국과의 협의 하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합하려는 의도하에 아랍 연합국과 유대 지도부 사이에서 이면교섭을 시도하고 있었다.
공세를 준비하면서 하가나는 이프타 작전과 벤아미 작전을 실시하여 갈릴리의 유대인 정착촌을 확보하고, 키르손 작전으로 예루살렘에 대한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하가나는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이프타 작전(Operation Yiftah) 과 벤 아미 작전(Operation Ben-'Ami) 13 을 통하여 갈릴리의 유대인 거주지를 확보했고 키르손 작전(Operation Kilshon)으로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통합전선을 형성했다. 이 상황에서 14골다 메이어와 압둘라 1세와의 회견이 무위로 돌아가자 5월 13일, 아랍측의 크파르 엣지온(Kfar Etzion) 공격은 예루살렘 전투가 격렬해 지리라는 것을 예언하는 듯 했다.
1948년 5월 14일, 다비드 벤 구리온은 신생국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고, 그와 함께 아랍연합군이 전면전을 선언함에 따라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은 제 1차 중동전쟁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1948.05.20, 이슈브 관리 지역.(비교대상은 5개월 전)
배경
1920년 영국 관리중에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대 시오니스트 민족주의자들과 팔레스타인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영국의 "점령"을 반대하는 대결의 장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아랍계의 반발은 1936~1939 아랍 폭동에서 정점에 달했으며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는 시오니즘과 영국 위임통치에 반발하여 범 아랍민족주의를 지향하였고, 영국과 시오니즘 조직은 폭동에 저항했지만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의 반발로 유대인 이민은 1939년 백서를 통하여 극단적으로 제한되게 되어 부분적으로 성공한 듯 했지만 이 폭동의 결과는 참담했다. 5천명 이상의 아랍인과 500여명의 유대인이 사망했고, 시오니스트 조직의 골격은 강화되었으며 아랍최고평의회 의장 무하마드 아민 알 후세이니 등 팔레스타인 정치층의 핵심부는 나찌 독일과 협력하여 이슬람교도들을 무장친위대에 편입시키는 등의 활동이 문제시 되어 추방되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홀로코스트의 공포로 인하여 시오니즘 운동에 동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팔레스타인에는 우익 시오니즘 그룹들이 영국 점령에 맞서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은 조직 재정비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조직력은 시오니스트들과 비교할때 낮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아라비아 국가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된 것도 아랍연방이 신생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 호의적, ; 기권, ; 반대, ; 불참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관한 상이한 관점의 외교적 조절에 실패한 채로 영국은 1947년 2월 18일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겠다고 밝힌 11월 29일 유엔총회는 영국이나 아랍을 제외한 강대국들 대부분의 지지로 분리독립안을 결의한다.
내전의 시작(1947.11.30 ~ 1948.04.01)
UN분리안이 발표되자마자 유대인 사회는 기쁨의 물결로 가득찼지만 반대로 아랍계는 전국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고, 12월 1일이 되자 아랍 최고회의(Arab higher Commitee)는 3일간의 총파업을 결의했다. 15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폭력의 바람" 16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고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내전을 방불케 하는 갈등에 들어갔다. 17 18
폭동의 확대
벤 예후다 거리. 폭발사고로 53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한 뒤.
유대계와 아랍계가 혼재하고 있는 예루살렘이나 하이파 같은 지역에서는 상호간에 폭력행사가 증대되었고, 총기까지 동원되어 아랍측이 유대인이 탑승한 버스 등을 공격하면 이르군과 레히는 시장이나 버스 정거장에 폭탄을 장치하는 등 재보복이 점점 더 확대되었다. 12월 30일, 이르군은 정제소 앞에서 대기중이던 아랍 노동자들에게 폭탄을 던져 6명이 사망하고 42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영국군이 소요를 진정시키기 까지 이에 대한 보복으로 39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으며 19 20 다시 팔마흐와 카르멜 연대의 병사들이 보복으로 발라드-알-세이크(Balad-al-Sheikh)와 하와서(Hawassa) 마을을 공격하여 21~7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21 22
1948년 2월 22일, 영국군 탈영병 출신의 무하마드 아민 알 후세이니(Mohammad Amin al-Husayni)의 지지자들이 유대인이 거주하는 과격시오니즘 지 "예루살렘 포스트" 본사와 벤 예후다 시장(Ben Yehuda St. market), 유대인 정보부 사무실 마당에 3회에 걸쳐서 자동차 폭탄테러를 실시하여 각기 22, 52, 13명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당했다. 23 이에 대하여 레히는 카이로에서 하이파로 향하는 라호보트 철도 선로에 지뢰를 부설하여 28명의 영국 병사들이 사망하고 35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을 일으켰으며 24 3월 31이는 이와 비슷한 일이 반복되어 카에사레아 마리티나 근교에서 40여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당했으며 이 사건의 피해자 대부분은 아랍 민간인이었다. 25 26
1947년 12월에서 1948년 1월까지 약 1천명이 사망하고 2천명이 부상당했으며 3월 말에는 사망자 2천에 부상자 4천명으로 더욱 피해가 증대되었는데 27 총인구 2백만인 지역에서 1주일에 평균 100명이 사망하며 200명이 부상당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28
전쟁으로 가는 길
유대인 거주지의 지리적 상황
1947년 12월 1일, 유대인 거주지의 위치와 연결로를 표시한 지도
이슈빔이라 불리우는 유대인 정착지들은 해안 근처에 분포되었으며 정착지에서 가장 발달되고 번영한 정착지들은 도로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었다. 이 연결로들은 대부분 아랍인 밀집지역 주변을 지나고 있었기에 아랍인에게 좋은 공격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10만여명의 유대인이 거주하는 예루살렘이나 해안가를 벗어나서 위치하는 키부츠들의 고립상황은 심각했다. 특히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있는 크파르 엣지온 키부츠나 네게브 남부 지역의 27개 정착촌, 갈릴리 북부의 정착지들은 이슈브의 전략적 취약지였다. 29
이 지역을 방어하는 것은 수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었지만 하가나의 정책을 결정하는 다비드 벤 구리온은 "유대인들 모두는 자리를 지키십시오. 누구도 허가없이 자신의 집을, 농장을, 키부츠, 직업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기지, 어떠한 정착지라도 고립되어 있건 아니건간에, 텔아비브라고 생각하고 지켜내야합니다." 라고 발표하여 현위치 고수를 강경하게 주장했다. 1948년 5월 외국군이 침공하기 까지 단 한개의 유대인 정착지도 포기되지 않았으며 구쉬 엣지온을 비롯한 갈릴리 지역의 몇몇 키부츠들 만이 여자와 아이들을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시켰을 뿐이었다. 30 벤구리온은 그와 함께 크파르 다롬(Kfar Darom)과 야드 모르드카이(Yad Mordechai) (둘다 가자 지구 북쪽), 레비빔(Revivim)(브엘셰바 남쪽), 크파르 엣지온(Kfar Etzion) 키브츠를 비롯한 네게브 지역 정착촌에 인원과 물자를 증파하고 31, 네게브 지역의 위험성을 고려하여 하가나 최고사령부는 팔마흐 연대 전체를 해당 지역에 주둔시켰다. 32 33
예루살렘에서는 문제가 더 복잡했는데, 유대인 정착민의 1/6이 거주하는 이곳에 텔아비브와 연결된 통로는 너무 길고 위험했다. 특히 훌다에서 유대인 지역을 떠나 라트룬 계곡을 지나고 난 다음에는 바브 엘 와디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28km에 달하는 아랍인 거주 지역(사리스 Saris, 콸루니야 Qaluniya, 알 콰스탈 Al-Qaastal, 데이르 야신 Deir Yassin)을 통과해야했다. 34
아브드 알 콰디르 알 후세이니(Abd al-Qadir al-Husayni)의 전략안
Abd al-Qadir al-Husayni, 팔레스타인 내전의 걸출한 지도자
알 콰디르 후세이니는 유대인 공동체를 포위하고 고립시키기 위하여 전쟁이전부터 시리아에서 준비한 지지자들을 장교로 하는 준군사조직을 이끌고 예루살렘 남서쪽의 수리프에 들어와 수백명의 아랍 청년들과 영국군대의 아랍계 참전군인들로 성전군(Jihad al-Muqadas)을 조직했다. 35 그의 민병대는 순식간에 수천명까지 증가했고 36 본부를 라말라 근처의 비르 자이트로 옮겼고 영향력은 점점 증대되어 하산 살라마(Hasan Salama 1936~1939 아랍 폭동 지휘자 중 한명) 가 1천여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는 리다와 라멜라 37까지 이르러 공조태세를 구축하고 도로 교통을 마비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38 39 40
12월 10일에 베들레헴에서 크파르 엣지온으로 향하는 수송차량을 공격하여 10명을 사살한 첫번째 조직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41
1월 14일에는 아브드 알콰디르 본인의 지휘하에 1천여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연합부대가 참가하여 크파르 엣지온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200여명의 병력이 전사했으나 이스라엘 측도 증원되는 중에 복병을 만나 35명의 팔마흐 연대원이 사망했다. 42
1월 25일에는 아랍 마을 알 콰스탈(al-Qastal)에서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어 알 후세이니의 지휘하에 예루살렘 북서부의 수많은 아랍계 정착지에서 다수의 인원이 공격에 가담했으나 일부는 보복을 두려워 하여 참가하지 않았다. 점진적으로 연결로의 통제권을 둘러싼 작전은 군사작전화 되었고 아랍의 전쟁수행에서 핵심을 담당하게 되어 43 3월 22일 이후에는 30여대의 차량이 바브 엘 외드 계곡(the gorges of Bab-el-Oued)에서 파괴됨에 따라 예루살렘에 대한 공급이 중단되었다. 44 45
3월 27일, 크파르 엣지온에서 출발한 주요 보급대가 예루살렘 남부에서 기습을 당하여 무기와 탄약, 차량 일체를 알 후세이니 부대에게 빼앗겼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전투 24시간 후에 영국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는데, 영국측 보고에 의하연 예루살렘에서는 식량 배급제가 실시되었고 5월 15일까지 식량상황이 절망적인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46
다른 지역의 상황도 예루살렘 만큼이나 심각해서 네게브 지역의 정착촌들은 아랍인 거주 지역을 거쳐야 하는 남쪽 해안도로의 이용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완전히 고립되었다. 3월 27일에, 보급대(예히암 수송대 the Yehiam convoy 47)가 북서 갈릴리 지역의 고립된 키부츠에 물자를 수송하던 중 나하리야 부근에서 공격을 받아 교전중에 42~47명의 하가나 대원이 사망하고 아랍해방군 수백명이 전사했으며 사용된 차량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48 49 50 51
사상자 분석
3월의 마지막 한주동안에는 하가나의 사망자는 폭증해서 3개의 주요 수송대가 기습을 당해 100여명이 사망하고 모든 장갑차량을 잃는 피해를 입게되어 결국 예루살렘 서부는 서서히 질식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갈릴리 정착지는 아랍 측에 점령당한 요르단 계곡과 나하리야 가도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었으며 하이파는 북서부의 텔 아비브와 연결된 해안 도로가 중간의 아랍정착지 때문에 차단되었다. 남부의 엣지온 근처 4개 정착지도 포위당한 상태였고 송수관도 파괴당하여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52 53
5월까지 아랍측의 포위망을 돌파해야만 했고, 영국의 철수 준비는 하가나에게 4월부터 적용된 달레스 계획에 의하여 공세를 준비하도록 했다.
http://en.wikipedia.org/wiki/1947%E2%80%931948_Civil_War_in_mandatory_Palestine
- Special UN commission (16 April 1948), § II.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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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nry Laurens (2005), p.83 [본문으로]
-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p.369-38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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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av Gelber (2006), p.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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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 Morris, 2004, 'The Birth of the Palestinian refugee problem revisited', p. 6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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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papers of the time: The Palestine Post, 1st April 1948 and The Times, on the same day, attribute the incident to Lehi.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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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fraim Karsh (2002), p.34 [본문으로]
- Yoav Gelber (2006), p.28 [본문으로]
-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214 [본문으로]
-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p.122-123 [본문으로]
-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chap.7, pp.131-15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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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fraim Karsh (2002), p.2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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