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 계획 (disengagement plan )은 이스라엘이 발표한 가자 지구로부터의 군의 전면 철퇴와 전 유태인 이주자 약 8,500명의 퇴거 및, 요르단 강 서안 지역의 소규모 이주지 해체를 목표로 한 철수 계획을 말한다. 아리엘 샤론 수상이 2004년 2월 2일, 계획을 발표하여 2005년 8월 9일 실시되었다.
경위
1. 계획 발표의 파문
2004년 2월, 샤론 수상은 급작스럽게 가자 지구에 총 21개소, 요르단강 서안의 총 4개소에 달하는 이스라엘 이주지의 해체를 밝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샤론이 2001년 수상으로 취임한 이래 대 팔레스타인 강경책을 유지하고 있던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이 조치에 전부터 팔레스타인에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던 노동당은 즉석에서 계획을 지지했고 팔레스타인의 테러 내지 불응 등으로 염전분위기가 강해지던 국내의 여론도 샤론의 계획에 호의적이었다. 미국도 이에 대해 환영의 의사를 표시하여 2004년 4월의 정상회담에도 이스라엘에 대한 전면적 지지가 확인되었다.
2. 균열·분열에의 서곡
그러나, 이런 지지와는 반대로, 자신이 당수로 있는 우익정당 리크드 당의 반응은 정반대로 샤론의 행동을 정치적 배신으로 보이고 있었다. 당시 샤론은 철수 계획을 당원 투표를 걸쳐 당내에서 신임을 확인한 다음 국회에 상정할 계획이었지만, 샤론의 정적인 네탄야후 전 수상은 이를 공공연히 거부했고 최측근인 리브 너트 교육부 장관도 이를 성토하며 사직했으며 5월 2일의 당원 투표에서는 60%에 가까운 반대의사가 나와 계획의 실시가 어렵게 되었다.
3. 각의 결정·국회 상정
당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높은 여론의 지지를 기반으로 샤론은 6월 6일, 리크드 당의 각료를 해임하는 강수로 이를 내각의 결정으로 하며 10월에는 국회에 성정, 67:45로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당내의 강경파와는 결정적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4. 계획 실행
2005년 8월 7일, 계획의 세부내용이 최종 결정을 통과하고 실행에 옮겨져 8월 15일에는 이스라엘 방위군이 가자 지구를 전면적으로 봉쇄한 뒤, 48시간 내로 이스라엘 정착지 거주민에게 자주적 퇴거를 요구했으며 8월 17일, 이스라엘 군은 끝까지 "칩거"를 계속하는 거주민과 이를 지지하는 유대교 원리주의자를 실력행사로 강제배제했다. 가디드나 쿠필 다롬 등에서 이스라엘 군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있었으나 8월 22일에는 최후까지 반대한 넷트림도 제압하여 불과 1주일만에 전 이주자를 퇴거시켰다. 8월 23일에는 요르단 강 서안의 소규모 이주지 4개소를 해체하기 시작했고, 호 메쉬나 사누르에서는 이주민이 오스만투르크 시대에 건조된 요새에서 농성까지 하며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1일 500명 규모로 퇴거시켜 9월 12일까지는 계획을 완수하고 이스라엘 군도 가자 지구 및 요르단 강 서안 지역에서 철수했다.
철퇴의 내막
1. 인구문제
강경파인 샤론이 철수를 결정한 데는 아무래도 이스라엘 사회의 최대 문제 중 하나인 인구 문제를 들 수 있다. 선진국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여성의 사회진출이 진행되면서 그에 부수적으로 출생율이 저하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에서 이스라엘 여성의 출산율은 평균 2인 정도로 현상 유지 수준인데 반해 아랍이나 팔레스타인의 출생율은 6~20인에까지 이르고 있으므로, 이스라엘 내부의 아랍, 팔레스타인 계가 다수를 이루는 지역을 이스라엘 영토로 계속 유지하는 경우, 지금도 문제시 되고 있는 아랍, 팔레스타인 비율이 유대인을 능가하게 되고, 그런 경우에 의회 내부의 문제 등을 고려해서 이런 결정을 했으리라는 관측.
2. 기소 회피
2004년 1월, 이스라엘 검찰은 샤론이 외무장관으로 근무하던 1999년 리쿠드 당의 후원사로부터 그리스의 리조트 개발에 편의를 제공하는 대가로 10만달러 상당의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의 수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고 있었으며, 이 사건에는 당시 예루살렘 시장이었던 예후드 오르메르트의 관여도 소문이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샤론과 예후드에게는 정치적 생명의 중요한 갈림길이었던 상황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샤론의 차남인 기라드 샤론에게만 기소가 되어 있고 샤론 자신은 일체 관련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으며 당시 담당 검사는 샤론 부자를 대상으로 소장을 작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르단 강 서안의 고착화
가자 지구에서 8,500여명이 철수했으나 요르단강 서안에서는 계획이 발표되던 시점에만도 23만, 동예루살렘까지 계산한다면 40만을 능가하는관계로, 종교적인 배경이 크지 않고(유대경전에서 이스라엘의 땅은 단에서 브엘셰바 까지로 하고 있으며 가자 지구는 이 지역을 벗어나고 있다.) 가자 지구는 하마스의 거점인데다 100만이 넘는 팔레스타인 인구에 둘러쌓여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비용을 절감하여 종교적인 배경이나 넓이, 자연환경적인 면에서 서해안에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계획 이후에 요르단강 서안에 6개소의 정착지에 대한 확대가 이루어졌으나 이에 샤론은 요르단강 서안의 이주지 확대는 재개발이며 확대는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리쿠드 당 내부의 문제
샤론이 지금까지의 강경입장을 돌변한데 대하여, 리크드 당의 강경파는 배신감을 안고 있다. 파혼 계획이 발표된 시점에서 당내의 대립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고 당 분열의 시나리오는 몇차례 있어왔는데, 그중 하나는 베냐민 네타냐후 전 수상을 정점으로 당을 개편한다는 것이었으나 네타냐후는 내각에 계속 남았기에 실현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집단 탈당하여 우파 신당을 결성하고 다른 우파 정통파 정당과 제휴하여 새로운 정당을 구성한다는 것으로 그 당수로는 리쿠드 당의 루벤 리빈 국회의장을 옹립할 생각이었으나 이것도 리빈의 사양으로 실패했다.
http://ja.wikipedia.org/wiki/%E5%A9%9A%E7%B4%84%E8%A7%A3%E6%B6%88%E8%A8%88%E7%94%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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