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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예루살렘의 역사 3 (오스만 후기 부터 현대까지)

오스만 통치기(1800 ~ 1917)


1895 예루살렘의 유대인


예루살렘의 다양한 복식들. 1870년대.

예루살렘의 근대는 19세기 중반 오스만 투르크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다. 당시 이 도시는 침체되어 있었고 인구는 8천명을 넘지 못했으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이 극단적으로 복잡하게 혼재되어 있는 독특한 도시로, 크게 유대교, 기독교, 무슬림[각주:1], 아르메니아인의 4부류로 나뉘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성묘교회는 그리스 정교회, 카톨릭, 아르메니안 교회, 콥트 교도, 에티오피아 교회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고 각 그룹들 간의 갈등관계는 무슬림들의 "중립적" 안전보호의 토대위에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 각각의 공동체들은 주로 자신들의 성역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는데, 무슬림들은 성전산(Haram ash-Sharif, Temple mount)을 둘러싸고 북동쪽에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기독교인들은 주로 북서쪽 성묘교회를 거점으로 공동체를 형성했다. 유대인들은 주로 남동쪽 경사면에서 서쪽벽을 둘러싸고 공동체를 구성했고 아르메니아 인들은 남서쪽의 시온 문(the Zion Gate)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4구역 분할 구도는 도저히 혼합되지 못한채 영국이 식민지를 다스린 1917 ~ 1948년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1883 예루살렘 지도

19세기 중엽에 이르게 되면 이후 예루살렘의 운명에 큰 영향을 주어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유발시킬 분쟁의 싹이 생겨난다. 가장 먼저 중동과 동유럽에서 유대계 이민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처음 이민을 시도한 것은 동유럽 정교회 계통의 유대인들로, 이들 중 나이 많은 이들은 감람산(Mount of Olives)에 매장되기 시작했고, 비교적 젊은 층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기 위하여 가족들과 이주하여 이 지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동시에 유럽의 식민제국들도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으며 노회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을 길을 찾기 시작했다. 또, 이 시기에 기독교도들도 부흥을 맞이하여 많은 교회들이 건설되고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무슬림과 유대인들 중에 개종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또, 종교적인 열정과 낭만주의는 성경의 땅, 특히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켰고, 고고학자들과 다른 탐험가들이 몇가지 고대 유적을 발굴함에 따라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은 더더욱 커져가ㅣㅆ다.

1860년대에 이르러, 이 도시의 넓이는 1제곱킬로미터에 불과했지만 인구과잉 현상을 겪기 시작했고, 신시가지의 건설이 시작되어 도시 성벽 밖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야파 문(Jaffa Gate)에서 멀지 않은 곳에 러시아 정교회가 복합거주지역을 건설하기 시작했고(오늘날 러시아 거주지역, Russian Compound) 유대인들은 성벽 밖으로 진출하여 지온 문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힌놈 골짜기(Valley of Hinnom)를 따라 거주지역을 건설했다. 이 거주지들은 미쉬케노트 샤아나님(Mishkenot Sha'ananim)이라고 불리우며 구 시가지의 북쪽과 서쪽으로 확장되어 각각의 공동체들은 지형적으로 연결되어 예루살렘 신시가지(New City)를 형성했다.



영국 위임 통치기
(1917 ~ 1948)


1917년 영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때, 서쪽 성벽 앞의 "유대인 연대" 병사들.

1차대전에서 영국이 중동지역에서 투르크에 승리를 거두자 1917년 12월 11일 이집트 파견군 최고사령관 에드문드 알렌비 장군(General Sir Edmund Allenby)은 이 "신성한 도시"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도보로 입성했다. 그 즈음 예루살렘 신시가지는 각종 종교적, 인종적 집단이 누더기처럼 이리저리 모여 집단을 형성하는 중으로, 영국 통치기간 중에 예루살렘 신시가지는 구 시가지 성벽 밖으로 크게 확장되었어고 구시가지는 성벽 사이로 하여 신시가지와 연결되었다. 영국 관리기의 유산 중 하나는 도시 계획을 통하여 사암 지대를 깍아서 건물을 건축하게 된 것과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건축이 금지되었다는 점이며 1930년대에는 하다사 의료센터(Hadassah Medical Center)와 히브리 대학(Heberew University)라는 두 중요한 새 기반시설이 스코푸스 산에 건립되었다.


1947년 예루살렘의 주요 공공지역

예루살렘에 있어 영국의 통치시대는 불만을 키워간 시대였다. 영국의 통치에 대한 아랍계의 불만과 유대계 이민의 폭증은 1920년, 1929년, 1930년대의 반유대폭동에 원인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가 발생했다. 유대인 사회는 1920년 4월의 아랍인들의 박해에 대응하여 자경단을 조직하는 한편으로는, 또 다른 유대인들은 영국에 대하여 아랍계와의 연계와 2차대전 기간 동안 1939년 백서에서 드러난 이민자 제한정책에 항거하는 한 폭탄 테러를 시도했다. 폭력의 수위는 1930년대와 40년대를 거치면서 나날이 증가 일로를 달렸고 1946년 7월에는 시오니스트 지하조직 이르군이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던 킹 데이비드 호텔(King David Hotel)을 폭파하여 수많은 민간인들까지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44년 영국이 재건한 구 시가지 성벽 내의 야파 문(Jaffa Gate)

1947년 11월 29일, UN총회는 영국령 팔레스타인 식민지를 유대와 아랍, 두개 국가로 분리 독립하는 안건을 결의한다. 양측 모두 복잡한 인구비를 고려하여 중립 도로들로 연결되는 세부분으로 나뉘게 되어 있었으며 아랍측은 야파를 둘러싸는 지역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근교 지역은 국제연합 관리구역으로 되어 있었다.
분리독립안 발표 이후, 예루살렘에서는 분쟁이 격렬화되어 영국, 유대인, 아랍인 모두에게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1948년 3월, 영국군이 철수를 앞두고 마지못해 중재를 맡고 있을때,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로는 아랍 비정규 부대에 의하여 두절되어 예루살렘의 유대계 인구는 포위되어 1948년 5월 영국 식민통치가 끝나고 아랍-이스라엘 전쟁(1차 중동전)으로 포위가 풀리까지 수많은 양측 민간인들의 희생이 발생하게 된다.



요르단 이스라엘 분리 관리(1948 ~ 1967)

국제연합의 1947년 팔레스타인 분리독립안에서 예루살렘은 국제연합 관리하의 도시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이 주변은 "아랍 영역"으로 둘러쌓여있었고 예루살렘 지역으로 통하는 고속도로 하나만이 "유대 영역"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1948년 1차 중동전쟁의 결과로 예루살렘은 분리되어 신시가지의 서쪽 반은 신생 이스라엘의 관리하에 들어갔고 구시가지를 포함하는 동쪽 절반은 요르단에게 통합되었다. 데이비드 귄(David Guinn)에 의하면
"유대인에게 이 지역이 성지로 인식되는 점을 고려하여 요르단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 토론할 위원회를 구성하여 1949년 4월 3일부로 조인된 휴전협정 조항 8조 2항에 따라 자국의 통제 하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서쪽 성벽과 감람산 등지의 유대인 공동묘지 지역 등, 주요 지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할지를 의논했다. 요르단 측은 묘소로 향하는 신 도로의 건설을 허용하는 한편, 비석들은 요르단군 기지를 만드는 데 이용했고, 시몬 동굴은 마굿간으로 개조했다. [각주:2]

제랄드 M. 스타인버그(Gerald M. Steinberg)에 의하면 요르단은 57개소의 고대 유대회당과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종교적 연구시설과 도서관을 약탈해서 12개는 완전히 파괴했으며 건물의 잔해는 사람과 동물들의 숙박시설로 이용했다. 이 때문에 국제연합의 항의가 제기되었고 국제사회는 예루살렘 구시가지를"개방도시"로 선언하여 파괴를 중지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에 대한 답변은 없었다. [각주:3]

한편으로 데이비드 귄은
"요르단이 유대인들의 성지를 대한 것처럼 이스라엘 관리하의 서예루살렘에 존재하는 수많은 무슬림 성소들(모스크와 묘역)도 모욕을 당했다. 몇몇 구역들은 이스라엘의 개발계획으로 파괴되었으며 예를 들어 마밀라 지역(Mamillla area)의 무슬림 묘소는 예루살렘 중심부의 독립공원(Independence Park)의 건설 때문에 훼손되었고 ... 그에 대한 유일한 해명은 (모스크들의 훼손이 진행되는 것에 대한) "아랍 시민들 슬픔을(덜어주기 위하여) [각주:4]
"였다.

1950년 1월 23일, 크네세트(Knesset, 이스라엘 국회)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이며 국내에서 가장 큰 도시임을 선언하했다.




이스라엘 관리기 (1967년 이후)

1967년 6일 전쟁에서 동 이스라엘은 IDF(Israel Defense Force, 이스라엘 군)에 의하여 점령되었고, 많은 유대인 들은 이 날을 도시 해방일로 기념하여 새로운 휴일인 "예루살렘 데이(Yom Yerushalayim)"가 제정되었으며 가장 유명한 히브리어 노래인 "황금의 예루살렘"(Yerushalayim shel zahav)가 만들어져 이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 점령으로 모로코인 지역(Moroccan Quarter)에서는 수백채의 집이 파괴되고 거주민들이 축출되었으며 예루살렘 서쪾 성벽을 둘러싸고 광장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Waqf(슬람 기구)는 성전산(Temple mount)의 관리권을 인정받았으며 이스라엘과 Waqf 양측에 의하여 유대인이 이곳에서 예식을 드리는 것은 금지되었다.

오늘날에는 이곳에서 장교선서식과 욤 하지카론(Yom Hazikaron, 전몰장병 기념식), 욤 하츠마우트(Yom Ha'atzmaut, 이스라엘 독립기념일)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수많은 국가행사가 개최되고 있으며 유대인 명절이 되면 수만명의 군중이 몰려들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다.

이스라엘 통치 하에서 모든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순례는 광범위하게 허용되고 있으나 요르단 서안(West Bank)나 가자지구(Gaza Strip) 출신의 팔레스타인 인이 성지에 접근하는 것은 이들이 예루살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로 엄격하게 규제되고 있으며, 동시에 유대인이 성전산을 방문하는 것도 제한되어 있고,(소규모로 성전산을 걷는 것은 허용되어 있으나 기도를 하거나 연구를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유대교에서는 칙령을 통하여 유대인들이 지성소 지역을 침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1969년 오스트리아 원리주의자 기독교인, 마이클 데니스 로한(Michael Dennis Rohan)에 의하여 알 아크사 모스크에 방화사건이 발생한 이후, 규제는 더욱 엄격해 졌으며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수상의 전임자인 벤자민 나타냐후(Benjamin Netanyahu)가 평화안을 제의하기 위하여 들렸을 때에도 서쪽 벽으로 통하는 아랍 인 지역의 입구 쪽에서 폭동이 일어난 적이 있다.

반대로, 이스라엘과 유대인측에서는 Waqf측의 성전산과 비상 출구로 되어 있는 북쪽 솔로몬 마구간(이스라엘 당국에 의하여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에 대한 고고학 발굴이 사원 주변의 유적지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고 염려하고 있다. 몇몇 유대인들은 Waqf의 솔로몬 마구간에 대한 발굴조사가 서쪽 성벽을 훼손하기 위한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으며 2004년의 지진때 동쪽 벽이 파손된 것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동 예루살렘 지역에 관한 논의는 계속 민감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합병한 것을 승인하지 않고 있고,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예루살렘이 공식적인 이스라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텔아비브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미국 의회는 대통령의 제안에 대하여 평화가 구축될 때까지 예루살렘에 대사관을  설립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안 478호는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가 1980년 제정한 "예루살렘 법"에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이스라엘의 수도로 규정한 점에 대하여 "국제법상 무효인 법안이고, 즉시 폐지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결의안은 회원국에게 외교적인 사절을 항의의 의미로 예루살렘에서 철수시키도록 권고하고 있으며 동 예루살렘을 포함한 1967년의 점령지역에 대하여 승인하지 않고 있다.(UNSCR 452, 465, 741)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Jerusalem

  1. 이 세 종교의 신도들은 다시 출신국가 종파별로 셀수 없이 많은 하부 그룹으로 재분류되었다. [본문으로]
  2. Protecting Jerusalem's Holy Sites: A Strategy for Negotiating a Sacred Peace by David E. Guin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p.35 ISBN 0521866626 [본문으로]
  3. Jerusalem - 1948, 1967, 2000: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Gerald M. Steinberg (Bar-Ilan University) [본문으로]
  4. Protecting Jerusalem's Holy Sites: A Strategy for Negotiating a Sacred Peace by David E. Guin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p.35 ISBN 052186662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