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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1차 중동전쟁, 5. 하가나의 공세

하가나의 공세(1948.04.01 ~ 1948.05.15)

4월부터 하가나가 공세에 나서게 되자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면서 다음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 단계에서 아랍군은 아랍 해방군의 자원 병력 3~5천여명을 포함한 병력 1만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각주:1] [각주:2] [각주:3]  하가나와 팔마흐의 병력은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3월에는 약 1만5천여명에 달했고 [각주:4] 5월에는 조직, 훈련도, 장비 면에서 우세한 3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한다.[각주:5] [각주:6] [각주:7]

팔레스타인 군은 점진적으로 패배에 몰렸고 이슈브는 유대 정착지들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게 되면서 예루살렘은 다시 보급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역으로 팔레스타인 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야파를 비롯하여 유대계와 아랍계가 혼재되어 있는 주요 도시들이 하가나에게 점령되었고, 그에 따라 대규모 아랍계 피난민이 발생했다.




나흐손 작전(
Operation Nachshon) 4월 5일~ 20일


 
작전 지역

 
1948년 4월 5일, 알 콰스탈의 유대인 병사


1948년 3월 말, 후세이니의 부대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보급차량들을 차단하고 있었으며 포위된 상태에서 유대인들은 배급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달레스 계획의 첫 작전으로 벤 구리온은 나흐손 작전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보급품을 제공하고 유대계 정착지들을 해방하기로 한다.[각주:8]

4월 5일부터 20일까지 기바티와 하렐 여단에서 1500여명을 동원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로의 통제권을 확보하여 [각주:9] 3~4회 가량 보급차량을 도시 내로 보낼 수 있었다.  [각주:10]

작전은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도로를 차단하고 있는 모든 아랍 마을들은 점령되거나 파괴되었고 교전에서 유대계는 전승을 거두었지만 목표로 하던 3천톤에 못미치는 1800톤만이 수송되었기 때문에 작전의 목표가 달성된 것은 아니었고, 2개월 이상 배급제가 실시되어야 했다. [각주:11]

한편, 알 콰스탈(Al-Qastal)을 점령하는 도중의 교전으로 4월 7일~8일 밤사이에 압드 알 콰디르 알 후세이니가 사망하여 그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이 상실된 것은 예루살렘 지역에서 아랍측의 전략과 조직력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각주:12] 후세이니의 후계자인 에밀 구리(Emil Ghuri)는 도로에서 기습작전을 실시하는 대신에 바브 엘 오드에 대규모 차단선을 설치하는 것으로 전술을 변경했고 이에 의하여 예루살렘은 다시 고립되었다.[각주:13]

나흐손 작전은 팔레스타인 민병대가 빈약한 조직력과 식량과 탄약을 비롯한 보급부족 때문에 본기지에서 수시간 거리 내로 작전능력이 제한되어 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각주:14] 이 상황에서 아랍 최고회의는 알란 커닝햄에게 이 상황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무프티(아민 알 후세이니)의 복귀를 허락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허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프티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의 영향력이 감소됨에 따라 예루살렘 지역에서 아랍해방군과 화지 알 쿼크지의 위상이 커지게 된다. [각주:15]




데이르 야신 학살

데이르 야신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진 마을로, 1948년 4월 9일, 나흐손 작전과는 관련이 없지만 하가나의 양해하에, 120여명의 이르군과 레히 부대원이 데이르 야신을 공격하여 100~120여명이 사망했고,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 [각주:16] 당시의 보도들은 사망자가 254명에 달한다고 보고했으며 이 때문에 국제사회는 더더욱 격분하고 있었고, 벤구리온은 완곡하게 이 사건을 비난했으며 [각주:17] 하가나와 고위랍비회의, 이스라엘 유대계 정보기관등도 이에 동조하여 비난의 성명을 내는 한편, 요르단 국왕 압둘라 1세에게 사과와 위로의 서한을 보낸다.[각주:18]

역사가 베니 모리스에 의하면, "이 잔학행위와 언론보도에 의한 가장 중요한 즉각적 효과는 팔레스타인 마을과 정착지들에 두려움이 퍼져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곧이어 패닉상태의 피난민들이 발생하기 시작했"[각주:19]으며 아랍계 인구들과 주변 아랍국가 사이에서는 그 반향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야 한다는 여론의 압력이 다시금 강해졌다. [각주:20] [각주:21]

또, 4월 13일에는 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예루살렘의 스코푸스 산(Mount Scopus)에 있는 하다사(Hadassah)로 향하는 의료차량이 아랍측에게 공격을 당하여 80여명의 유대계 의사들과 환자들이 사망했고, 분쟁을 막기 위하여 몇몇 영국 병사들이 개입하였지만 실패했다.[각주:22]




미쉬마르 하에메크 전투(1948년 4월 15일~ 4월 4일)


미쉬마르 하에메크에서 훈련을 받는 이스라엘 여군


미쉬마르 하에크(
Mishmar HaEmek)는 1930년 제즈릴 계곡(Jezreel Valley)에 마팜에 의하여 건설된 키부츠로 메기도 키브츠(Megiddo kibbutz)를 거쳐 하이파에서 예닌으로 향하는 도로 가까이에 있었으며 당시 하가나의 장교단이 유대계 정착지에 대한 "아랍계의 주공"이 침투할 주요 축선의 하나로 판단하고 있었던 지역이었다.[각주:23] [각주:24]

4월 4일, 아랍해방군은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키브츠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이스라엘 측은 하가나 병력의 지원을 받아 키브츠 구성원들로 방어에 나섰으나 포격으로 키브츠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고, 맥밀란 장군(General MacMillan)의 명령으로 도착한 영국군 사절에 의하여 중지되어 4월 7일 파지 알 콰크지가 24시간의 휴전협정을 수락할때까지 포격이 계속되었다. 키브츠의 구성원들은 자녀들을 텔아비브로 이동시킨 뒤에 항복을 거절했다. [각주:25] [각주:26] 4월 8일부터 9일까지 하가나는 달렛 플랜에 의거하여 반격작전을 계획하여 이츠하크 사데(Yitzhak Sadeh)가 해당 지역을 "정리"하라는 명령하에 작전을 책임지게 되었다. 전투는 4월 15일까지 계속되어 아랍 해방군은 야바의 기지로 후퇴했으며 사데의 부대는 키브츠 주변의 모든 아랍계 마을을 포위하여 해당지역 거주민의 대다수는 피난을 떠났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투옥되거나 예닌으로 축출되었고, 건물들은 키부츠 주민들에게 파괴되고 폭발물로 땅까지 파헤쳐졌다. [각주:27]

베니 모리스에 따르면 아랍해방군 병력은 데이르 야신 학살과 압드 알 콰디르 알 후세이니의 사망 소식으로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 전투에서 철수할 때, 마을 주민들을 방치하는 경향이 보였다.[각주:28] 도미니끄 라피에르와 래리 콜린스는 6인 소대의 지휘관 조슈아 팔몬(Joshua Palmon)이 포대를 사수하는데 실패하고는 화지 알 쿼크지에게 이스라엘이 120대의 탱크와 6개 비행대의 전투기와 폭격기에 더해 1개 대대규모의 러시아 지원병으로 공격해왔다고 허위 과장보고를 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각주:29] 전투가 끝난 후에도 팔마흐 부대는 4월 19일까지 이 지역에서 "소탕"작전을 계속하여 수개의 마을을 파괴하고 거주민들을 쫓아내었고, 일부는 아랍 당국의 인도하에 소개시키도록 넘겨주었다.[각주:30]

이후 5월중에 이르군은 이 지역에서 몇차례의 작전을 펼쳐서 거주지를 파괴하고 정착민들 일부를 죽였으며 골라니와 알렉산드로니 여단 지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각주:31]




라마트 요하난 전투(The Battle of Ramat Yohanan)와 드루짐(Druzim)의 이반

미쉬마르 하에메크에서의 "실수"(fiasco)[각주:32]이후, 화지 알 쿼크지는 아랍해방군의 드루즈 연대에게 우회작전을 실시하도록 지시하여 드루즈 병사들은 하이파 동쪽 12km지점의 아랍 마을들에 주둔하며[각주:33]  라마트 요하난을 포함한 유대인 정착지들과 교통로를 공격하도록 되어 있었다. [footnote Benny Morris (2003), p.244  [/footnote]  이에 키부츠 정착민들과 하가나 병력은 협력하여 이들을 쉽게 격퇴했고, 공격의 근거지가 되는 마을들을 소개하자 드루즈 부대는 탄약이 고갈되어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는 샤파아므르(Shafa'amr) 의 본부까지 후퇴했다.[각주:34] [각주:35]
그리고 전부터 유대계 정보원들과 몇차례 접촉을 가져왔던 드루즈 부대의 장교들은 라마트 요하난의 패배 이후로, 하가나에 동일 계급으로 편입되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이갈 야딘은 토론끝에 이 제안을 거부하고, 대신 아랍군 배후에서 작전에 태업을 시도하면서 전체적인 부대군기를 약화시킬 것을 제안하게 된다. 5월 초가되자 212 와하브(Wahab) 병사들이 탈주하여 5월 9일에는 유대 모병 장교와 접촉하고는 하가나와 협력하기로 동의하면서 유대계와 아랍계가 대결중인 상황에서 갈릴리 중부의 와하브가 중립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와하브 군은 아크에서 하가나 점령군과 싸우라는 요청을 무시하고 영국 통치기간 중에 샤파아므르에 하가나가 치안초소를 점령하는 것을 방치했다. ==[각주:36]

드루즈인들이 전쟁중에 보인 태도는 전후의 운명에 영향을 주어 아랍최고회의와의 관계가 단절된 대신 1930년대 이후로 이어온, 유대계 정착민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벤구리온은 드루즈에게 코카서스계나 마로니트 계와 동등한 대우로, 다른 아랍계와 달리 대우했다. [각주:37]




유대 아랍계 혼합지역의 포위

달레트 플랜의 계획안에 의하여 혼합거주 도시 중심부와 유대계 정착지의 경계지역은 유대계 병력에 의하여 포위-공격을 당했다. 4월 10일에는 티베리아스가 공격을 당하여 6일 후 함락되었고, 하이파는 4월 23일 하루만에 함락되었고, 4월 27일에는 야파가 공격을 당했지만 영국이 후퇴한 후에야 점령될 수 있었다. 샤페드(Safed)는 5월 11일, 이트파 작전(Operation Yitfah)의 골조를 따라 함락되었고, 베이산(Beisan)과 아크(Acre)는 벤 아미 작전(Operation Ben Ami)으로 각기 5월 13일과 17일에 순차적으로 함락되었다.
이 지역의 아랍 거주민들은 집단으로 피난을 떠났고 5월 말에는 이상 6개 도시에서서 177,000명의 아랍계 주민 중에 13,000명 만이 남았고, 주변의 주요 아랍 거주지역에서도 유사한 상태가 발생했다.




이트파 작전 (Operation Yiftah 4월 20일 ~ 5월 24일)


작전 지역


티베리아스 호수(Lake Tiberias)에서 메툴라(Metula) 사이의 북서부 갈릴리 지역은 갈릴리의 손가락이라고 불리우며 유대계가 밀집되어 있는 해안지역에서 가장 멀고, 고립되어 있는 유대계 정착지로, 북으로는 레바논,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나머지 갈릴리 지역에는 아랍계가 둘러싸고 있어서 아랍군대의 잠재적인 공격 목표로 설정되어 있었다. [각주:38]. 따라서 이갈 야딘은 달렛 플랜의 기조에 따라 이프타 작전의 총책임자이며 팔마흐 사령관 이갈 알론에게 해당지역의 통제권 확보와 5월 15일로 계획된 아랍측 공격에 대응할 준비를 명하게 된다. [각주:39]

알론은 정원부족상태의 2개 팔마흐 연대로 10여개의 아랍마을과 사페드의 민중을 통제해야 했고, 비록 철수중이지만 영국군이 존재한다는 점도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이 지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랍인을 모두 축출하는 것이 불가피하며 피난민이 발생한다면 아랍군의 진격을 방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각주:40] 4월 20일 부터 알론은 영국이 철수한 지역에서 전초기지의 확보와 공격, 선전을 동시에 실시하면서 아랍 마을들을 점령하고 파괴하기 시작했으며 5월 1일에는 아랍측이 유대계 정착지에 반격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5월 1일, 사페드는 함락되었고, 5월 24일에 작전이 종료되기까지 훌라 계곡(valley of Hula)의 모든 정착지는 파괴되었다. 시리아 군은 이 지역에 공세를 계획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6월에 티베리아스에서 메툴라에 걸친 모든 지역에서는 아랍계 인구가 전무해졌다. [각주:41]




골다 메이어와 요르단 국왕 압둘라 1세와의 만남(5월 10일)


1943년의 골다 메이어


요르단 국왕 압둘라 1세


5월 10일, 고다 메이어와 에즈라 다닌은 비밀리에 암만의 왕궁에서 압둘라 1세를 만나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당시 압둘라가 처한 상황은 복잡해서 한편으로는 그의 개인적인 야심과 1947년 이슈브와 합의했고 영국도 인정했듯이 이스라엘과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고 팔레스타인의 아랍지역을 합병하는 선택과 다른 한편으로 데이르 야신 학살에 대한 자국민들의 반발과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대한 고려, 또한 다른 아랍 연맹국가들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협력하라고 압력을 넣는 데 따르는 상황에서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각주:42] 게다가, 게다가 그는 아랍 연합의 군사적 지원 뿐 아니라 영국의 지원도 얻을 수 있다는 이점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벤구리온은 이 회의에 대한 골다 메이어의 반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5월 10일에) 우호적으로 회견을 가졌으며 그는 근심이 많고 피로해 보였다. 그는 우리가 과거에 (팔레스타인의) 아랍부분에 대한 만족할만한 합의점에 대한 이해를 나누었고 대화를 했음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압둘라는 그가 5월 10일, 당일에 이르러 유대측에 제의할 수 있는 것은 요르단 왕국(Hashemite Kingdom of Jordan) 내의 유대 자치구(autonomy)에 관한 것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당시의 격변하는 상황속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개입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지만 요르단과 이슈브가 분쟁이 잠잠해지면 평화적인 합의안에 동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각주:43]

이 회담의 동기와 결론에 대한 역사가들의 분석은 다양한 의견으로 엇갈린다.

도미니끄 라피에르와 레리 콜린스 및 이스라엘 역사편찬가들에 의하면 [각주:44] 이슈브의 제안은 협상으로 평화를 획득하고 아랍측의 공격을 회피하려는 의도였으며 당시의 세력 균형은 아랍측에게 유리하지 않았지만 메이어가 압둘라 국왕에게 그 사실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베니 모리스에 의하면 [각주:45] 압둘라는 11월에 분리안에 반대하지 않겠다던 협약에 대하여 재고하고 있었지만 메이어에게 본인은 이스라엘에서의 내전이 종료되면 유대국가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한다.

아비 샬렘(
Avi Shlaim) [각주:46]은 요르단과 이슈브 사이에 팔레스타인의 분할에 관한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고 보고 있으나 요압 겔베는 전체적인 맥락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이에 대한 반대를 표시하기도 했다. [각주:47] [각주:48]

피에르 라주(Pierre Razoux)는 벤구리온과 압둘라 국왕이 팔레스타인의 분할에 관하여 양해가 있었을 가능성을 전문가 대부분이 인정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아랍측이 압둘라 국왕에게 가할 수 있는 압력은 약속을 지키라는 것 뿐이었다고 보고 있다. 라주에 의하면 이것이 밸푸어(Arthur Balfour) 선언을 통해 이슈브와 요르단 같에 맺어진 협약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분리안에 따른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영국이 점령하고 있는 전략지점 근처에 아랍군 병력이 5월 15일 이전에 위치할 수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각주:49]

일란 파페(Ilan Pappe)는 압둘라 행정부나 아랍세계가 이슈브와 밀약을 맺은 것처럼 보인 적이 없다고 역설하면서[각주:50] 압둘라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야심이 널리 알려져있었지만 동시에 알렉 커크브라이드 경과 글룹 파샤는 물론이고, 적어도 아랍 연맹의 총무 앗잠 파샤는 압둘라의 2중 계약에 대해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5월 13일, 아랍 연맹이 헤브론과 예루살렘 사이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크파르 엣 지온을 점령한 것과[각주:51] 5월 17일에 압둘라가 아랍 연합군 지휘관 글룹 파샤에게 성도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 것으로 볼 때 골다 메이어와 압둘라 국왕이 이 회담에서 예루살렘의 위치에 대한 동의를 도출해내지는 못했다는 것도 분명하다.

  1. Benny Morris, in the Birth revisited, 2003, p.34 [본문으로]
  2. Yoav Gelber, Palestine 1948, 2006, p.51. [본문으로]
  3. Ilan Pappe, 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 2006, p.44. [본문으로]
  4. David Tal, War in Palestine 1948, 2004, p.362. [본문으로]
  5. Benny Morris, in the Birth revisited, 2003, p.16. [본문으로]
  6. Yoav Gelber, Palestine 1948, 2006, p.73. [본문으로]
  7. Ilan Pappe, 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 2006, p.44 병력의 수를 5만 내지 3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문으로]
  8.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369 [본문으로]
  9.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372  [본문으로]
  10. 베니 모리스(Benny Morris, Benny Morris (2003), p.236)는 3회의 보급차량으로 추산하고 있지만 Lapierre와 Collins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456)는 300대의 로리차량으로 되어 있는 4번째 보급이 4월 20일 미명에 크파르 비오우를 출발했다고 지적한다. [본문으로]
  11.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457 [본문으로]
  12.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455  [본문으로]
  13.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456  [본문으로]
  14. Yoav Gelber (2006), p.89 [본문으로]
  15. Yoav Gelber (2006), p.89  [본문으로]
  16. Yoav Gelber, Palestine 1948, Appendix II [본문으로]
  17. Yoav Gelber (2006), p.317 [본문으로]
  18. Benny Morris (2003), p.239 [본문으로]
  19. Benny Morris (2003), p.239 [본문으로]
  20. Benny Morris (2003), p.239   [본문으로]
  21.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528 [본문으로]
  22.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p.429-442  [본문으로]
  23. Yoav Gelber (2006), p.403 [본문으로]
  24. Benny Morris (2003), p.240  [본문으로]
  25. Benny Morris (2003), p.240  [본문으로]
  26.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426 [본문으로]
  27. Benny Morris (2003), pp.242-243 [본문으로]
  28. Benny Morris (2003), p.242 [본문으로]
  29.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427 [본문으로]
  30. Benny Morris (2003), pp.243-244 [본문으로]
  31. Benny Morris (2003), p.244 [본문으로]
  32. 이 단어는 Yoav Gelber의 표현을 인용한 것이다. (Yoav Gelber (2006), p.93) [본문으로]
  33. Shafa 'Amr, Khirbet Kasayir et Hawsha [본문으로]
  34. Yoav Gelber (2006), p.93 [본문으로]
  35. Benny Morris (2003), p.245 [본문으로]
  36. Yoav Gelber (2006), p.93 [본문으로]
  37. Yoav Gelber (2006), pp.225-226 [본문으로]
  38. Yoav Gelber (2006), pp.134-135 [본문으로]
  39. Benny Morris (2003), p.248 [본문으로]
  40. Benny Morris (2003), pp.248-250 [본문으로]
  41. Benny Morris (2003), pp.249-252 [본문으로]
  42. Ilan Pappe (2000), p.167 [본문으로]
  43. War Diary 1948-1949, ed. Elhanan Orren and Gershon Rivlin, Israel Defence Ministry Press, Tel Aviv, 1982, p.409 [본문으로]
  44. Dominique Lapierre et Larry Collins (1971), pp.525-530 [본문으로]
  45. Benny Morris (1881), p.221 [본문으로]
  46. Henry Laurens (2005), p.83 [본문으로]
  47. Avi Shlaim, Collusion Across the Jordan : King Abdullah, the Zionist movement and the Partition of Palestin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  [본문으로]
  48.   Yoav Gelber, Israeli-Jordanian dialogue, 1948-1953 : cooperation, conspiracy or collusion, Sussex Academic Press, 2004. [본문으로]
  49. Pierre Razoux (2006), p.523 [본문으로]
  50. Ilan Pappe (2000), pp.168-169 [본문으로]
  51. Efraim Karsh (2002), p.5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