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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츠비카 그린골드

Zvika Greengold 츠바이 "츠비카" 그린골드(1952~) 로하미 하게타오트(Lohamey HaGeta'ot, 게토의 투사들) 키브츠  [각주:1] 출신. 17세인 1969년에 군에 입대해 1970년부터 이스라엘 제7기갑여단에서 근무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중 제188 바라크 기갑여단 예하에서의 분투로 일약 이스라엘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티벌 채소류 식품 회사의 창립자중 한명이며 지금은 후루타롬(Frutarom) 화학회사 [각주:2] 의 전무이사로 [각주:3] 갈릴리 근처의 힐탑 마을에 거주한다.

욤키푸르 전쟁

전쟁이 발발한 속죄절 휴일 당시, 고등 군사과정에 입교예정으로 2주간의 휴가가 주어져서 계급은 중위지만 부대에 임관하지 않았던 [각주:4] 츠비카 그린골드는 14:00 키브츠의 자택에서 [각주:5] 라디오에서 전황을 들은 그린골드는 즉시 군복으로 갈아입고 하프트랙에 올라타 골란고원 방어의 최종선이 될 나페크(Nafekh) 기지로 향했다.

수많은 이스라엘 부상병들과 고장난 전투장비로 가득한 상황에 아연해진 츠비카는 아무도 명령을 내릴 상황이 아니자 우선 부상자들을 후송하는 일을 돕다가 파손된 전차 3대를 포함해서 4대의 전차가 곧 도착하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반파된 두대의 센츄리온 전차를 확보하고는 움직일 수 있는 인원들을 지휘하여 즉석에서 부대를 편성했고 바라크 기갑여단 부여단장 이스라엘리 중령은 그에게 즉시 송유관 도로(Petrolum Road)를 통해 벤 쇼함 여단장에게 합류하도록 지시했다. [각주:6] 10월 6일 21:00, 7기갑여단 사령부에 자신이 "전차 집단"을 지휘하고 있음을 무선으로 보고하고 임무지시를 요청했다. 골란 남부에서 시리아 군의 제파공세에 맞서 치열한 야간교전을 벌이고 있던 이스라엘 군 대부분이 "츠비카 부대"가 작전에 투입되었다는 말을 들었고, 한 전차승무원은 후일 "고무적인 소식이었습니다. 증원군이 도착하고 있다는 생각에 힘이 나더군요." 라고 회상했지만 츠비카 부대는 대대가 아니라 두대의 반파된 전차에 불과했다.

츠비카 부대

골란고원의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9:1에 가까운 절망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 분전하고 있었고, 일부는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 혼란의 와중에 츠비카 중위는 전쟁 발발 후 첫 20시간 동안 때로는 혼자, 때로는 다른 전차들과 함께 6번을 전차를 바꾸어가면서 초인적인 분투를 계속한다. [각주:7] 혼란스러운 상황속에서 그는 어떻게 해서든 접근하는 시리아 군 기갑부대를 막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상대해야 하는 시리아 군 전차의 수는 수백대에 달했다.

교차로로 이동중인 시리아 전차를 발견하고 명중시켰습니다. [각주:8] 피격당한 첫번째 적전차가 타올르는 불길을 뒤로 하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는데, 발시시의 충격으로 무선장비가 고장났더군요. 그래서 다른 전차로 옮겨서 그걸 지휘전차로 삼았죠. 저를 따라오는 후속 전차에게 '무조건 나를 따르고 내가 하는 걸 그대로 행동해라'라고 지시했습니다. [각주:9] 잠시 뒤에 또 한대가 보였는데 우리는 전방과 우측에서 포위당해 있더군요. 몇백 m 정도 전진했는데 그제서야 방금전까지 옆에 있던 아군 전차가 모두 피격당했음을 알았습니다. 전 후퇴하면서 양쪽 다 무작정 쐈습니다. 그 쪽에서도 라이트를 비춰가면서 우리를 확인하려고 하더군요. 전 계속 피격당했습니다. 여단 사령부에서 우리 쪽에 전차가 몇대나 남았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우리쪽 상황이 별로 안좋아서 얼마 남았는지 알릴 수없다고 응답했습니다.

츠비카 부대가 시리아 군에게서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은 벤 쇼함 대령의 바라크 기갑여단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나파크 기지로 철수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여단의 모든 교신음은 절망적이었고 곳곳에서 연료와 탄약이 부족하다는 보고가 들려왔으며 이미 예비대를 모두 투입해버린 지휘부는 상황을 타개할 수단이 없었다. 츠비카는 전장으로 향하는 중에 길을 잃은 전차들을 찾는대로 규합해서 일종의 임시 "전투단"을 형성했다. 교전중 츠비카 중위는 자신이 지휘하는 전차가 한대뿐이라도 "츠비카 부대(Koah Zvika, Zvika Force)"라고 호칭해서 시리아 군에게 마치 수대의 전차집단이 활약중인 것처럼 기만했다.

50:1

츠비카에게 남은 전차는 1대 뿐이었으나 잠시후, 그는 보급품과 탄약을 실은 시리아군 트럭들과 30여대의 전차들을 발견했다. 선도전차에 사격을 가했을 때, 이 전차는 불과 2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상태였고, 츠비카 전차는 도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기동중에 빠르게 포격을 가하여 마치 여러대의 이스라엘 군 전차가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혼란에 빠진 적을 상대로 숨바꼭질을 벌이며 10여대의 시리아 전차를 파괴하자 서서히 시리아 전차부대는 퇴각했고, 바라크 기갑여단 부여단장 이스라엘리 중령은 탭라인 송유관 도로 상에서 시리아 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모든 이스라엘 전차부대의 통제권을 쥐고 제 17동원 기갑여단에서 막 도착한 전차 6대를 증파했다. 동원되어 파견된 첫 부대였고, 이 부대의 지휘권은 우지(Uzi) 중령이 맡아 시리아군을 격퇴하기 위해 전진했다. 우지 중령은 츠비카 중위의 상황보고를 참고해서 송유관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고, 츠비카는 새로 합류한 전차 3대와 함께 송유관 도로를 보호하는 철조망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평행전진했다.

그러나 이후 3시간 동안 우지 중령이 이끄는 7대의 전차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시리아 전차들과 절망적인 전투를 벌였고 7일 새벽 01:00 까지 골란고원 방어전에서 가장 절망적인 위기의 시간 동안 시리아 군을 막아내었지만 거의 전멸되었다. 우지 중령의 지휘전차는 시리아 보병의 대전차 화기에 명중 폭발했고 우지 중령은 전차 밖으로 탈출했지만 두 눈과 왼팔을 잃었다.

츠비카 중대는 소대를 뒤로 후퇴시켰고 지휘하의 전차 2대가 천천히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 츠비카는 시리아 군에게 기습을 가하기 위해 철조망 울타리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시리아 군 전차와 교전중에 맹렬한 사격을 당하여 상당수 전차의 피해를 입은 상태로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려고 할 즈음 선도전차가 시리아군 보병의 대전차 화기에 명중되어 위치가 발각될 상황에 놓였다.

부상당한 전우를 구출하기 위해 츠비카가 포함된 우지 중령의 부대는 접근을 시도했지만 갑자기 츠비카와 그의 휘하전차 2대를 포함한 3대가 모두 불길에 휩싸였다. 전차를 탈출하여 간신히 밖으로 기어 나왔지만 츠비카가 탑승한 전차의 포수는 부상을 당했으며 츠비카 자신도 몸 오른쪽이 심각한 화상을 입고 파편에 왼쪽 얼굴과 위쪽 팔을 다쳤지만 철조망 울타리를 넘어서 반대편의 다른 이스라엘 군 전차를 향해 달려가 상황을 전달하기도 전에 전차장석에 앉아 전차장은 부상자 후송차량에 옮겨 타도록 했다. 츠비카는 헬맷을 쓰고 여단장을 호출한 다음 "츠비카 부대"의 건재를 보고했다.

부상으로 가물가물해가는 정신을 붙잡으며 계속 시리아 기갑부대의 파상공세와 맞서 싸운 끝에 악몽같은 밤이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03:00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해가 떠오르자 증원부대와 공군지원이 시작되기를 기다릴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었다.

나파를 둘러싸고

10월 7일 새벽이 밝아오자 여단 사령부는 즈비카 중위 지휘하에 전차 몇대를 증파할 수 있었고 골란고원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태플린 도로를 방어했다. 츠비카 부대는 이제 16대로 늘어났지만 시리아군은 1개 기갑사단 전체를 이 지역에 투입한 상황이었다. 시리아 군은 이 지역을 돌파하기 위해 맹렬한 포격을 가한 다음 전차가 직접 돌격해왔다. 1,500야드 거리에서 치열한 전차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피해를 입으면서도 간신히 시리아 기갑부대의 전진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리아 군의 양동작전에 불과했고, 기갑부대가 "츠비카 부대"와 교전하는 중에 다른 부대는 정오 무렵 나파(Nafah) 교차로로 향하는 통로 쪽으로 진격해서 더 이상의 예비 기갑전력이 없는 지휘부 근처까지 진출해 있었다. 츠비카는 이 상황을 듣자마자 나파로 급히 되돌아 갔다. 도중에 합류한 79 동원기갑여단의 다른 전차 1대를 대동하고 그가 나파에 돌입했을때, 이스라엘 잔존부대는 시리아군의 제파공격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각주:10]  그의 운전수는 더는 못하겠다며 해치를 열고 뛰쳐 나가버렸다. 츠비카는 부상당한 상태에서 운전수가 없는 반파된 전차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0시간 동안 기갑전투를 벌이면서 간신히 나파 기지로 돌아온 츠비카가 최후의 절망적인 분투를 벌이며 브노트 야코브 다리(Bnot Yakob Bridge)가 시리아 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안간힘을 다해 저지하는 중에 드디어 제 79동원기갑여단의 증원병력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구원 병력의 자살에 가까운 돌격은 다리를 향해 쇄도하는 시리아 군의 기갑부대를 막아서는 데 성공했다. 그 시각 나파로 달려가던 증원부대의 지휘관은 "나파에서 누군가가 전차 한대로 미친듯이 싸우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10월 6일부터 7일에 걸쳐 츠비카 그린골드는 30시간 동안, 6대의 전차를 갈아타면서 60대의 시리아 전차를 격파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본인은 20대 격파만을 인정하고 있다.

전쟁중에 그는 이미 전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고 전후에 Medal of Valor를 수여받았다. (이스라엘 전군에 이 훈장을 수여받은 사람은 총 32명 뿐이며, 욤-키프르 전쟁에서 이를 수상한 사람은 6명 뿐이다.)

http://www.amazingben.com/arf0123.html

부록- 인터뷰

1988년 이스라엘 독립 40주년을 기념해서 츠비카 그린골드를 인터뷰한 내용. 여기서 나오는 적군은 시리아 군을 말한다.

...(생략)

질문 : (10월 6일 오후에)나파크 기지는 아직 공격을 받지 않았겠군요.

츠비카 : 내가 아는 한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골란고원에 있는 다른 부대들은 시리아 공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질문 : 그러면 나파크 기지에 도착한 후에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츠비카 : 최초에는 여단 작전참모가 저와 같이 휴가 복귀한 사람들과 동원 예비역들에게 여러가지를 지시했습니다. 예를들면 부상자를 태운 장갑차가 도착했다는 보고가 있을 경우 저는 수용작업을 감독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전방에서 온 몇대의 전차가 부대 정문 밖에 있다고 하면서, 그들을 전방 전투부대에 재보충하라는 지시가 있어 나가보니 센츄리온 전차 1개 소대가 정문에 선 채로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2명의 승무원이 부상당했고 시리아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살아남은 인원들은 전원 쇼크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사용가능한 전차를 확인해보니 1대 뿐이었습니다. 운좋게도 전혀 고장이 없는 다른 여단의 전차 1대가 우리에게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중략)

저는 여단장 벤 쇼함 대령에게 무전보고를 한 후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의 명령은 탭라인 송유관 도로 남동쪽으로 이동하여 후시니아 교차로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단장의 부대는 이 교차로 남동쪽에 있었으며 이 때 사단규모의 시리아군 기갑부대가 골란고원에 들어왔는데도 그 당시 여단장은 그것을 우리 부대로 저지 가능한 적 규모라고 오인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탭라인 송유관 도로 지역은 언덕이 연결되어 있고 또한 수십m에서 수백m 되는 능선이 있는 애로지역이 곳곳에 산재한 곳이었는데 어느 곳이든지 주위를 감제 관측할 수 있는 지형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야간에 한 지역에서 다음 지역으로 이동시 장애물이 있는지 없는지, 적군의 통제하에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면서 전진해갔습니다. 마침내 저는 아주 근거리에 적 전차 1대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사격명령을 하달하여 그 전차를 명중시킨 후 후방으로 이동하였는데 그 당시 제 전차의 상태가 좋지 않아 다른 전차로 옮겨 탔습니다.

...(중략)

질문 : 그날 밤을 지샌 야간 전투에 대해서 조금 들려주십시오.

츠비카 : 벤 쇼함 여단장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데 시리아 대부대가 수십대의 T-55전차로 대형을 이루고 후시니아부터 예후디아 도로 방면으로 진격해오고 있는 걸 알았습니다. 그 대부대는 랜 대령의 동원기갑여단과 조우하였고 그 때문에 밤을 새워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 나는 한밤중까지 단 1대 전차로써 고군분투를 계속하였는데 나중에 동원전차부대가 합류해왔습니다. ... 돌연 선두전차 3대가 피격되고 내 전차도 당하고 말았습니다. 내 전차가 맞은 것은 정말 이상했습니다. 전진하지도 않았거든요. 나중에 알았지만 제 후방에 있떤 동료전차 몇대가 공황에 빠져 모든 방향으로 전차포를 닥치는 대로 쏘아댔기 때문에 당하고 말았던 거죠. 조종수가 사망하고 다른 승무원은 전차에서 날아가 버렸고 저도 양손과 얼굴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또다시 기동이 가능한 다른 전차로 옮겨 탔습니다. 그게 그날 밤에 탔던 세번째 전차였습니다. 남겨진 2~3대는 부상자를 모아 나파크 기지로 후퇴하였습니다. 저는 또 전차 1대만 남게 되었습니다.

...(중략)

질문 : 첫날 야간전투 이후 주간전투에서는 상황이 꽤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까?

츠비카 : 그렇습니다. 우리 전차는 야시장비가 없어 어떤 경우 야간에 10m 내외에서 전투한 적도 있었는데 [각주:11] 주간에는 1,000m 이상의 사거리에서도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 상황이 역전되는가라고 느낄 무렵 시리아 군은 북쪽에서 우리를 포위하였는데 당시 최신예인 T-62전차와 보병으로 나파크 기지를 공격해왔습니다. 우리들은 송유관 도로의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나파크 기지 방어를 위해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날 오후 바라크 기갑여단 지휘부가 나파크 기지로 이동하다가 시리아 전차의 공격을 받아 여단장, 부여단장, 여단 작전참모 등 전원이 전사했습니다. 그래서 전차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나파크 기지에 도착한 전차는 제 전차를 포함해서 겨우 2대 뿐이었습니다.

질문 : 그렇다면 그 시점에서는 당신이 지휘관이었습니까?

츠비카 : 네, 살아남은 지휘관은 저 뿐이었습니다.

질문 : 나파크 기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츠비카 : 적군과 아군의 파괴된 전차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기지 옆 언덕 위에는 시리아 전차 몇 대가 버티고 있었지만 우리가 그들을 파괴해서 나파크 기지의 잔류 병력들이 장갑차에 나눠 타고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저와 항상 같이 행동하던 전차 조종수가 전투 스트레스를 참아내지 못하고 퇴각하는 장갑차를 타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질문 :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츠비카 : 그땐 저도 너무 피곤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여단 인사장교에게 연락했더니 다른 조종수를 보충해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지프차로 나파크 기지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후 여단의 정보참모 도브 소령과 통신장교 하난 대위가 도착하여 지휘하면서 나파크와 알레이카 사이에 설치한 급조된 방어진지에서 최후방어를 같이 하기로 하였지만 저는 정보참모의 팔에 안겨진 채로 쓰러져서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후략)

골란고원의 영웅들 에서.

  1.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대 나찌 게릴라 부대원 출신들이 모여서 형성한 키브츠 [본문으로]
  2. 조미료 등을 만드는 다국적 기업 [본문으로]
  3. Abraham Rabinovich. "Shattered Heights: Part 2", Jerusalem Post, 1998-10-02. Retrieved on 2006-08-20. [본문으로]
  4. Abraham Rabinovich. "Yom Kippur War: Shattered Heights", Jerusalem Post, 1998-09-25. Retrieved on 2006-08-20. [본문으로]
  5. Zvika's Story. The Department for Jewish Zionist Education. Retrieved on 2006-08-20. [본문으로]
  6. Abraham Rabinovich. "Yom Kippur War: Shattered Heights", Jerusalem Post, 1998-09-25. Retrieved on 2006-08-20. [본문으로]
  7. Abraham Rabinovich. "Yom Kippur War: Shattered Heights", Jerusalem Post, 1998-09-25. Retrieved on 2006-08-20. [본문으로]
  8. 10월 6일 21시 20분 [본문으로]
  9. 상태가 나쁜 첫 전차는 나파크 기지로 복귀했다. [본문으로]
  10. 당시 시리아군 사령부는 골란 북부에서는 심각한 저항에 직면하고 있는데 반해 남부지역에서는 거의 완벽히 돌파에 성공한 것을 확인하고 전과 확대를 위해서 이미 투입된 1개 기갑사단에 더해 제3기갑사단의 기계화 보병여단도 추가 투입을 지시한 상황이었다. 즉, 이스라엘 군은 고립되어 있는 12대의 전차로 600대의 시리아 전차를 맞아 싸워야 했다. 이후 나파 기지를 방어하는 중에 바라크 기갑여단의 여단장과 부여단장이 모두 전사했다. 나파 기지의 이스라엘 군은 몰려드는 시리아 기갑부대를 상대로 대전차 포로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본문으로]
  11. 당시 시리아 군의 주력전차들에는 야시장비가 있었다. 이스라엘 군의 전차에는 서치라이트만 있어서 육안이나 조명탄에 의존해야 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