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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나세르

이집트 제2대 대통령. 통합아랍공화국(UAR, United Arab Republic) 초대 대통령, 집권기간 1956.01.16 ~ 1970.09.28. 1918년 1월 15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생 1970년 9월 28일. 향년 52세. UAR 카이로에서 사망.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54년 이집트의 제2대 대통령이 된 이래 1970년 사망하기 까지 재임한 인물. 1952년 나세르가 주도한 이집트 혁명으로 국왕 파루크 1세를 퇴위시키고 무하마드 나귀브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며 이집트의 새로운 공업화를 주도하고, 한때는 일시적으로나마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합하는 등 아랍 민족주의의 확고한 기초를 다졌다.

나세르는 알제리와 리비아, 이라크, 예멘의 범 아랍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1964년 PLO를 결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국제사회에서 비동맹 운동의 전개하는데 기여한 바 있다. 이러한 공로로 나세르는 현대 아랍사와 20세기 개발도상국 정치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아랍권에서 큰 지지를 얻었던 그의 범아랍민족주의는 나세르 주의라고 불리우고 있다. 비록 범 아랍권의 지도자로서 그의 지위는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겪은 치욕적인 대패로 인하여 많이 훼손되었지만 대다수의 아랍인들은 여전히 나세르를 아랍의 숭고함과 자유의 상징으로 여긴다.

경력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집트 혁명의 지도자 참고

나세르는 1918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우편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부터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했으나 영국의 보호국이 되어 있던 이집트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민족운동에 관심이 컸다고 한다.

군경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자유장교단 결성에 참가해서, 지도자가 된 나세르는 1948년의 1차 중동전쟁에도 소좌로 참가했지만 아랍연합군이 패하면서 귀국했다.

1952년 7월 23일, 자유 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1953년 국왕제를 폐지(이집트 혁명)하면서 1차 중동전쟁의 영웅 무하마드 나기브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 지도 평의회를 결성하고 권력을 잡았다.

대통령 취임

그러나 곧 대통령이 된 나기브와 자유 장교단 리더인 나세르의 대립은 표면화 되고 1954년 나기브를 지지하는 이슬람 형제단에 의한 나세르 암살 미수를 거쳐 나기브는 대통령 직에서 해임되고 나기브 파를 추방하면서 스스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정책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국내정책을 참고

1952년의 농지개혁으로 부터 나세르는 군주제 치하의 구체제에 정치, 경제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외교적으로 범아랍주의에 따른 정책을 취해, 이라크를 비소한 중동 제국을 통합해 나갔다. 바그다드 조약 기구에 반대하여 아랍 제국 사이의 단결을 주창하고 주도권을 잡았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대외정책을 참고

또, 비동맹주의를 주창하여 제 1회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반동 회의)에 출석, 제 3세계의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1956년 7월에는 아스완 하이 댐 건설자금 마련을 비롯한 복합적인 목표의 달성을 위해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고, 그로 인하여 제2차 중동전쟁이 촉발되었다.

전쟁에는 패배했지만 정치적 역학관계로 이집트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나세르의 위상은 드높아졌고 1958년에는 시리아와 함께 아랍 연합 공화국을 수립하였으나 3년 후에 시리아가 탈퇴하면서 연합은 붕괴하고 나세르의 위신은 위협받기 시작했다. 특히 1967년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치욕적인 대 패배를 겪고 시나이 반도를 상실하면서 이에 책임을 지고 사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민은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통령에 머물 것을 요구함으로써 실각은 면했다. 그 후로도 이집트는 나세르의 지도하에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책을 계속하면서 승인없고, 교섭없고, 평화없는 3무 정책을 유지해 나갔다.

사망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사망과 평가를 참고

서구사회의 지원 감소와 수에즈 운하의 수입 상실로 인플레가 진행되자 나세르 체제는 붕괴되었다. 내부 문제 속에서도 아랍세계에서 1970년 요르단 내전에 중재를 하는 등 활동을 유지하는 중에 나세르는 심장 발작으로 52살이라는 나이로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 나세르의 후임으로는 사관학교 이후의 동지이고 부통령인 사다트가 취임했고 나세르 체제에 반하는 경제 자유화를 진행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