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월드컵 유치경쟁
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94미국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북한, 사우디, 이란, 이라크, 일본과 티켓 2장을 놓고 경쟁했다. 한국은 이란에게 3:0승리를 거두고 이라크와 사우디에 무승부를 기록해 1승 2무로 4차전에서 철천지 원수 일본과 맞붙었다. 그런데 10월 25일, 40$의 시청율을 기록한 이 시합에서 한국은 시종일관 무기력한 경기를 벌인 끝에 0:1로 패했고 이로써 한국은 조3위로 떨어졌다.
10월 28일 운명의 5차전은 승부조작 여지를 없애기 위해 모두 같은 시간에 시작되었는데 한국이 월드컵에 진출하려면 일본이 이라크와 비기고 한국이 북한에게 대승을 거둬 동률이 된 다음 득실차를 노리는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은 북한에게 3:0 대승을 거두었지만 같은 시간에 일본은 이라크에게 2:1로 앞서나간 채로 로스타임에 들어갔고 월드컵의 꿈은 무산되는 듯 했지만 불과 10초를 남기고 이라크가 동점골을 성공시키면서 '도하의 기적'으로 한국은 월드컵 3회 연속진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뜻하지 않게 한국이 월드컵 유치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2002년 월드컵 개최지를 결정하는 1996년까지 적어도 한번은 월드컵에 진출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무산되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돈으로 월드컵 진출권을 사간다는 비난을 받게 될 상황이었다.
이미 89년부터 월드컵 유치를 선언하고 91년에는 월드컵 유치위원회를 발족시키며 축구붐 조성을 위해 93년 J리그까지 발족시킨 일본에게 축구협회의 정몽준 회장은 1993년 10월 28일, '도하의 기적'이 이루어진 바로 그날에 도하에서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선언하며 도전장을 던진다. 94년부터 본격적인 로비활동에 들어간 정몽준은 쿠웨이트의 셰이크 아메드를 1표차로 제치고 불과 4개월의 선거운동으로 FIFA 부회장이 되었다. 이후 1996년 5월 31일, 2002년 월드컵 개최지 선정까지 정몽준이 비행기로 여행한 거리는 무려 150만 km, 2년반 동안 390일 동안 밖에서 자며 지구를 38바퀴 도는 대장정이었다.
2. 96년 팬을 위한 축구의 해
그와 함께 사회 각지에서는 월드컵 유치 광풍이 불어닥쳤다. 전통적인 라이벌 의식에 더해 94년 월드컵에서 보인 한국팀의 선전은 기폭제가 되었고 사회각계 각층이 여기에 뛰어들었다. 개신교에서는 개최지 표결 100일을 앞두고 국제축구연맹 집행위원 21명을 교회마다 1명씩 담당토록 해서 100일기도에 뛰어들었고 불교, 기독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대종교 등등 종교인들은 '범종교인 월드컵 유치 대회'를 열었다. 심지어는 초등학교 어린이 들까지 나서서 애원조의 편지 보내기 운동까지 벌어지는 상황에서 프로축구도 급격히 관심을 받게 되었고 96년을 '팬을 위한 축구의 해'로 선포한 축구협회는 굵직굵직한 개선방안들을 내놓았다.
- 팀수 및 경기수 증가 ; 90년에 불과 5개팀이던 것이 96년에는 수원 삼성의 창단으로 9개까지 늘어나 총 114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 전임 심판제 도입 : 판정시비를 줄이기 위해 A급 심판들 중에서 K리그 전담 심판을 16명 선정한다.
- 용병 출장 제한 ; 국내 GK 보호 및 육성을 위해 용병 GK의 출장시간은 팀당 경기수의 2/3으로 제한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가장 중요한 골자가 된 것이 지역연고제 정착으로 이를 위해서 기존의 팀명들에서 모기업의 이름 대신 지역명을 우선시해서 통일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기존의 서울 연고 3개팀(유공, 일화, LG)을 지방으로 이전시켜 서울을 공동 관리구역으로 지정하는 이른바 '서울 공동화 정책'을 실시한다.(이것은 물론 J리그에서 실패로 끝난 도쿄 공동화 정책을 모방한 것이다.) 이로써 유공은 부천으로, LG는 안양으로, 일화는 천안으로 옮겨가 각기 자리를 잡았고 훗날 생길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다.
3. 프로축구의 발전
이런 변화의 움직임에 힘입어 96년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수원 삼성은 96년에 창단하자 마자 초특급 신인 박건하와 고종수를 확보하면서 적극적인 구단운영을 실시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지역팬들에게 어필하면서 게임당 평균 15,000명의 관중을 불러모으는 대형구단으로 급성장해 후기에는 리그 우승을 이루어 챔피언 결정전 까지 진출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비록 울산에 막혀서 창단첫해 우승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수원이 일으킨 돌풍은 신선했고 획기적이었다. 그와 함께 각팀들도 축구열풍에 힘입어 지역 연고 정착을 이루기 시작했다.
창단 2년차를 맞이한 전남은 허정무를 감독으로 영입해서 팀분위기를 일신하고 광양전용구장에 조명타워를 설치해서 지역축구 활성화에 앞장섰으며 안양은 다양한 수입원 개발을 통해 연간 19억원의 수익을 내면서 흑자경영의 토대를 마련해 96년에는 최하위의 성적을 기록하는 가운데에도 평균관중 1만명을 넘기며 많은 기대를 받았다.
97년에는 최초의 시민구단(엄밀히 말하면 컨소시엄 형태)인 대전 시티즌이 창단되어 프로축구팀은 15년만에 10개로 늘어났다.
90년대 들어서면서 급격한 소비사회로 전환되면서 슬램덩크와 NBA의 돌풍으로 농구가 새로운 경쟁자로 떠오르는 상황에서도 축구는 그동안 계속되던 혼란을 어느 정도 정리하면서 발전의 기틀을 다졌고 이것은 98년의 한국축구 르네상스에 발판이 되었다.
4. 르네상스
98년 IMF의 한파가 한국사회에 휘몰아치는 가운데 국민들은 스포츠에서 위안을 찾았다. 박찬호는 메이저 무대에서 진출했고 박세리는 다리를 걷어올렸다.
그리고 축구에서는 차범근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이 파죽지세로 월드컵 지역예선을 통과했다. 차범근의 영광은 멕시코와의 1차전에서 하석주가 처음으로 선제골을 선보이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하석주는 백태클 때문에 곧바로 퇴장당했고 그 때부터 차범근의 끝모를 추락이 시작되었다. 멕시코에서 1-3으로 역전패를 당하더니 그 다음에는 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네덜란드에게 0-5로 치욕적인 대패를 당하면서 차범근은 대표팀에서 경질되고 한국축구의 레전드에서 하루 아침에 K리그를 모함한 배신자, 매국노로 낙인이 찍힌채 중국으로 쓸쓸히 떠나갔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다음 월드컵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한국축구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위기감은 프로축구에게는 오히려 축복이었다.
98년 프로축구는 출범 16년만에 한국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하루 관중수 10만명을 돌파하면서 폭발적으로 10대 팬들을 불러모았다. 이동국, 고종수, 안정환, 김은중, 정광민 등등 관중을 불러모을 무서운 아이들이 스타로 떠올랐고 고정운이나 김현석은 40(골)-40(어시스트) 클럽을 만들며 구세대의 위엄을 보였다. 일화가 기록후유증으로 부진에 빠져있는 동안 K리그의 절대강자 자리를 차지한 삼성은 98년에 창단 3년만의 우승을 거두더니 이듬해에는 슈퍼컵, 대한화재컵, 아디다스컵, 정규리그를 모조리 휩쓸면서 4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다른 팀들도 분발하면서 99년에는 총관중 275만명을 기록해 98년의 211만명이라는 기록을 갱신하면서 프로축구에 대한 기대감은 점차 커져갔다.
비록 2000년에는 안정환, 고종수, 이동국, 서정원, 고정운, 김현석, 김은중, 이관우 등등 각팀의 스타들이 부진하거나 해외 진출, 대표팀 차출등으로 빠지면서 상승세가 한풀 꺽였고 일화가 천안에서 성남으로 연고지를 이전하는 등 이런 저런 악재 때문에 입장객 상승세는 한풀 꺽였지만 2부리그가 10년만에 부활하는 등 프로축구는 오랜 방황을 접고 월드컵 열풍을 받으며 순항을 계속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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