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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나가 쿠니오, 상쾌한 수렁류

요네나가 쿠니오(米長邦雄) (1943년 6월 10일~) 2003년 은퇴후 현 일본장연맹 회장(2005~). 기사번호 85. 사세 휴우지 명예9단 문하.

영세기성. 타이틀 획득수 19회. 야마나시 현 출신. 나가노 구립 8중, 도쿄도립 사기노미야 고교 졸업, 중앙대 경제학부 중퇴(대학원). 기사로서 전적이 훌륭할 뿐 아니라 캐릭터성, 사상이나 언동, 유머 등으로 일본장기계 밖에서도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인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주위의 어른들을 이길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스승인 사세 휴우지가 생가를 방문해 프로기사가 될 것을 권유하면서 ‘아드님은 명인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8단은 될 수 있습니다.’라 했다고.

형 셋이 모두 도쿄대에 진학했는데 그중 한명인 전일본학생명인전에서 우승하는 등, 아마추어 강호로 유명한 요네나가 야스이 아키타 공대 교수로 도시설계의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일본장기 분석의 일인자로 꼽힌다. ‘형들은 머리가 나빠서 도쿄대학에 갔지만 나는 머리가 좋아서 기사가 되었다’라는 발언이 유명하지만 사실인지가 확실하지 않고 원래는 세리자와 히로후미가 요네나가에 대해서 말한 농담이지 본인이 한 말은 아니라고도 한다. 덧붙여서 형이 ‘바보같지 않으면 저런 놈의 형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제자

- 센자키 마나부(수필가를 겸함), 나카가와 다이스케, 나가오카 유타카야, 나카무리 타이지, 하야시바 나오코(여류기사, 텔런트, 음식점 사장, 역술가, 문필가를 겸함) 등이 제자로 스승을 닮아서인지 다재다능한 재자들이 많다. 특히 센자키 마나부와 하야시바 나오코는 거주하는 제자였다.

교우관계

마쓰다 고조와는 성격이 잘 맞았다. 나이토 쿠니오와도 친하며 나카하라 마코토도 절친한 친구사이라고 한다. 바둑에도 뛰어나 ‘호적수가 울며 아까워 하는 책’이라는 저서도 있다. 바둑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기사는 호방뇌락하기로 유명한 후지사와 히데유키. 대단한 일본장기팬인 야마구치 히토미는 요네나가를 친밀감을 담아서 "오랑우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중에 TV프로그램에서 요네나가 8단의 별명은? 이라는 질문에 대답이 오랑우탄 인것을 알면서도 ‘알랑들롱 입니다’라고 말했다.

1993년, 7번째 도전에서 비원의 명인위를 획득한다. 당시 나이 49세 11개월. 사상 최연장 명인의 탄생이었다. 이 때에 요네나가는 철저하게 자신의 초반전술을 재검토하여 당시 시마 아키라가 주재하던 시마 연구회에 얼굴을 내밀어서, 철저하게 대 나카하라 연구를 거듭했다. 또, 모리시타 타쿠와도 초반전술에 대한 연구를 거듭했는데 이 때는 젊은이들에게 가르침을 청한다는 자세로 훨씬 후배인 모리시타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상

"자신에게는 별것 아닌 시합이라도 상대에게 중요한 대국이라면 전력을 다해서 이긴다."는 이른바 요네나가 철학이 유명하다. 본인의 저서 ‘인간에 있어서 승부의 연구’에서 "명인전보다도 필사적으로 해야 하는 대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제24기 순위전(69년도)에서 나카하라 마코토와 B급 1세트에서 만났는데 1국을 남겨둔 시점에 나이토 쿠니오가 11승 1패로 최고, 58세의 오노 겐이치와 22세의 나카하라 마코토가 모두 9승 3패였다. 이때 오노가 나카하라보다 우선순위가 있으므로 ‘이기면 승급’인 상황에서 만난 것이 요네나가였다. 당시 요네나가 자신은 7승 5패로 승급도 강등도 아닌 상태였다. 그런데 이 대국에 요네나가는 하카마 차림으로 등장해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주었고 결과적으로 요네나가와 나카하라가 승리해 오노는 A급 복귀를 놓쳤고 나카하라는 A급으로 승급했다. 요네나가가 A급으로 승격한 것은 이듬해의 일이지만, 전년도의 대결이 있었기에 승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

‘장기를 생업을 걸게 되면 기력이 약해진다. 별도의 수입이 있으면 순수하게 장기를 둘 수 있다.’는 생각으로 주식에 열중해서 ‘요네나가 류 주식에 이기는 방법’이라는 책을 낼 정도였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요네나가가 라이벌인 나카하라에 비해 만성형인 것은 이처럼 한눈을 파는 일이 많은데에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다만 본인은 ‘여러가지 경험을 해서 인간적인 종합력이 오른 결과 천하를 잡았다’라고 답하고 있다.

2004년 10월 28일 일본왕궁 주최의 가을 원유회에 초대받아서 주고받은 대화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연애

젊은 시절에는 용모가 단정해서 일본장기를 모르는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연애관이 독특해서 여자한테 ‘사귀어 달라’고 조르는 것은 반편이에 불과하고 ‘사귀어 주세요’라고 부탁을 받을 정도로 스스로를 연마해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힌적이 있다. 42살에 주간지에서 돗토리 사구에서 찍은 누드 사진을 게재할 정도.

잡지에서 연재한 인생상담이 독특하고 사건의 본질을 잘 파악하는 회답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 때문에 현역기사시절에도 정계에 진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타도 나카하라 마코토 및 비원인 명인획득을 달성하기 위해 단념했다고 한다.

전적

프로에 입문한 것은 1963년으로 이 시기는 오오야마 야스하루가 5관왕을 독점하고 있던 시기였다. A급 승급은 1971년, 처음 타이틀 획득이 1973년의 제 22기 기성전인데, 각각 28세, 30세의 일이라서 초일류 기사치고는 출세가 늦은 편이다.

1970년 오오야마 야스하루를 상대로 왕위전에 도전한 이래 계속 결승에서 오오야마를 만나 타이틀을 놓쳤지만 1973년 제22기 기성전에서 아리요시 미치오를 꺽고 첫 타이틀을 획득했다. 최종국 종반에 열세인 상황에서 금 죽이기(금장을 따내면서 마를 채우는 것)로 대 역전승을 거둔다. 본인의 표현으로는 "대국 상대인 아리요시 씨가 이 수를 눈치챘을 때, 30cm정도 뛰어 올랐다"라고 한다.

나카하라 마코토는 오오야마 이상의 천적으로 1973년 왕장전을 시작으로 좀처럼 이길 수가 없는 상대였다. 2년 연속 도전자가 된 1975년의 제 24기 왕장전에서 7번 승부 개막 직전의 인터뷰에서 "제1국에서는 나카하라 왕장이 깜짝 놀랄 기책을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선수차례인 제1국에서 3번째 수로 선수 8六보 찌르기라는 각두보 전법을 보였지만 후수번의 나카하라는 냉정하게 후수 4四보로 응수했다. 각두보전법의 핵심인 각행교환이 봉쇄되어버린 요네나가는 참패를 당해 이 전법을 공식전에서는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 이 7번국에서 3승 4패로 패했기 때문에 제 1국에서의 어이없는 패전이 끝까지 영향을 주었다. 덧붙여서 나카하라 마코토는 이때의 7번 승부 제 7국을 "요네나가와 벌인 대국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국"으로 들고 있다. 나카하라의 말로는 "타이틀전의 7번승부 제 7번국에서 쌍방이 모두 초읽기로 몰린 것은 그 전에도 뒤로도 이 때 말고는 기억에 없다"고 한다.

1984년 나카하라 10단과 10단전 7번대국을 하게 된다. 풀세트로 맞이한 최종국(1985년 1월)에서 승리하여 이 시점에서 명인위가 포함되지 않기는 했어도, 7대 타이틀 중 과반수인 4개를 획득하여 오오야마, 나카하라에 이어 사상 3번째 4관왕을 달성하고 "일본장기계 최강의 기사"로 칭해졌다.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당시 톱레벨의 실력이었으나 명인위만큼은 좀처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 80년대 전반은 나카하라와 요네나가의 라이벌 전성기였지만 이때 요네나가와 가장 많이 대국한 것은 의외로 몰이비차의 영웅 모리야스 히데미츠이다. A급 순위전이나 타이틀 전에서 그와의 열투는 앉은비차와 몰이비차의 대항형에서 앉은비차이 급전 정석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85년의 42기 A급 순위전에서는 사기노미야 정석으로 작전승을 거두었다. 당시 이 대국은 모리야스가 이기면 6승 2패로 최종국에서 전적이 같은 나카하라 당시 왕장과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고 요네나가는 이기건 지건 명인전 도전이 결정된 1위가 확정된 상황에서 새로운 정석을 선보이며 승리해 ‘요네나가 철학’을 관철시킨 한판이 되었다.

횡보잡기가 유행하고 있을 무렵인 1990년 왕장전에서 도전자가 되었을 때에 타이틀 보관자였던 미나미 요시카즈 왕장을 의식했는지 "횡보잡기도 안하는 사람에게 지고는 조상님께 미안하다"라는 코멘트를 했다. 이 대국 중에서는 횡보를 집지 않던 미나미가 횡보잡기를 했다. (이 때, 당시 4단이던 제자 나카가와 다이스케의 아파트에 다니면서 미나미 대책을 배웠다고 한다.)

1993년 제51기 명인전에서 7번만에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명인위를 얻었다. 49세 11개월의 일로, 50대 명인은 일본장기 사상 최고령 기록이다. 이 해 신주쿠 케이오 플라자에서 열린 명인위 축하연 장에는 2,000명이 넘는 이례적인 인원이 모여 그의 명인위 획득을 축하했다. 불과 1년뒤에 하부 요시하루에게 명인위를 뺏기고 이때를 기점으로 타이틀 무대에서 멀어진 요네나가는 1998년, 제 56기 순위전에서 4승 5패의 성적이면서 순위 차이로 A급에서 강등되어 26년 연속으로 재적하던 A급 기사자리를 잃었다. 그때 프리클래스 선언을 하면서 이후의 순위전에 참가하지 않는다.

2003년 12월 17일 현역기사를 은퇴했다. 그에 앞서 "전기전에서 패한 시점에서 은퇴"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선언을 한다,(보통은 먼저 은퇴선언을 한 다음, 남은 대국의 예정을 소화한다.) 마지막 기전이 된 2003년 왕장전에서도 본전 리그에서 시합하는 등, 영세 기성의 고집을 보여주었다. (본전 리그에서 6전 6패로 패퇴) 이와 함께 은퇴 표명 직후의 왕장 리그에서 만난 대 사토 야스미츠 전에서 사토는 일본 전통복 정장 차림으로 대국에 임했다. 이에 요네나가도 급거 대국장에 일본 정장을 들여와서 오후부터는 일본옷차림으로 대국했다. 남은 2번의 대국은 모리우치 토시유키고다 마사타카가 상대였는데 이들도 전통복을 입고왔으며 요네나가도 이를 미리 알게 되자 2번 국부터는 전통복으로 대국에 임했다. ‘일본장기계를 대표하는 분에게 경의를 표한것’이라고.

기풍

열세로 몰리면 국면을 복잡하게 만드는 수를 사용해서 역전을 노리는 기풍으로 "수렁류"라고 불린다. 본인의 성격이나 외모 때문에 "상쾌류"라고 불리던 적도 있었는데 요네나가 본인은 "상쾌류" 쪽이 좋다고 한다.

본격적인 앉은비차 파면서도 정석 연구에 의한 초반의 구상보다는 종반의 공방에서 비틀어 힘싸움으로 엎어 누르는 승리가 많아 특히 장기의 종반전법 향상에 공헌했다. 그 독특한 감각은 저서 "요네나가 옥"등에 잘 나타나듯, 자신의 왕은 절대 막히지 않는 상태(‘Z’상태)에서 적극적으로 공격한다는 현대장기의 개념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관왕을 차지하는 등 전성기에 올랐을 때 초반연구에 부정으로 묘수풀이를 통해 단련한 반을 읽어내는 능력과 종반력이 승부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명인 18기라는 오오야마 야스하루 명인과 신수일생을 내건 마스다 고조 실력제 4대 명인의 결과를 비교하며 승부방법의 차이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5년 이후 점차 획득 타이틀 수가 감소하면서 부터는 초반연구에도 골몰했지만 하부시대에 이르러 일취월장하는 초반전술 앞에 요네나가는 프리클래스를 거쳐 현역을 은퇴했다. 젊은 시절부터 "초반에 서투르다"는 야유를 많이 받았으나 하부 요시하루는 요네나가의 초반을 "초반부터 긴장을 풀 수 없고 긴장감을 강요당하게 할 정도로 능숙하다"고 높게 평가한 바 있다.

사관왕이 되기 전에는 "각두보전법"이나 "신 귀신 죽이기"같은 기발한 초반전술도 종종 짜낸다. 특히 "신 귀신죽이기"는 초심자 전용의 수법이던 귀신죽이기(鬼殺し)를 훌륭한 전략으로 확립했고 각두보 전법 자체는 대응책에 의해서 사장되었지만 다테이시류 사간비차의 원천이 되었다.

"망루 울타리는 일본장기의 순수문학"이라는 유명한 표현도 그가 남긴 것이다.

http://ja.wikipedia.org/wiki/%E7%B1%B3%E9%95%B7%E9%82%A6%E9%9B%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