升田幸三 (1918.03.21 ~ 1991.04.05) 기사번호 18. 히로시마 현 후타미 군 마리사카 쵸 출신. 실력제 4대 명인, 이름을 정확히 읽으려면 고소(こうそう, 일본어 표기법에 따르면 고소 지만 발음은 코오소오에 가깝다.)라고 해야 하지만 보통은 당대의 유명인이던 사람의 이름을 따서 고조라고들 읽었고 이것이 굳어졌다. 기미 킨지로 9단 문하. 3관왕 독점 등의 화려한 전적은 물론 그 독창적인 전법, 성격, 다양한 일화 등으로 일본장기계의 역사를 말할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인물
부친 마쓰다 에이치와 모친 가츠노의 사이에서 4남(이름을 보면 3남일 것 같지만 4남이다.)으로 태어났다. 1932년 7월에 일본 최고의 장기기사를 목표로 가출하면서 사랑하는 어머니가 사용하는 자의 뒷면에 먹물로 "이 코조, 명인에 향차를 떼어~"라고 결의를 남겼다.
히로시마에서 음식점이나 세탁소의 견습생으로서 우여곡절을 거치며 오사카의 기미 킨지로 8단의 문하생이 된다. 동문 선배로 오노 켄이치, 츠노다 미츠오가 있고 후배가 평생의 라이벌 오오야마 야스하루 였다. 초단으로 프로가 되기까지(당시의 프로기사는 초단부터였다. 오늘날은 4단부터)가 길었지만 초단이 되자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었고 이즈음에 사카다 산키치에게서 지도를 받으면서 "너의 장기는 큰 장기라, 키무라 요시오를 꺽을 수 있는 것은 너뿐이다"라고 격려를 받았다.
그후, 전쟁을 사이에 두고 기무라와 사투를 벌였으며 그의 은퇴 후에는 오오야마와 패권을 다투었다. 훗날 ‘고야의 결전’으로 유명해진 제7기 명인전 3번국에서 우세하던 상황에 실수로 엄청난 악수를 두고 패하자 ‘착각하지 마라. 잘 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장기 사상 최초로 3관왕(명인, 왕장, 구단)제패를 완수했을 때에는 "더듬어오니, 아직도 산등성이"라는 하이쿠를 남기기도 한다.
"매료시키는 장기"를 중시했고, 기존의 정석에 사로잡히지 않고 "신수일생(일생동안 새로운 수법)"을 내걸어 항상 혁신적인 수를 추구했다. 앉은비차, 몰이비차 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수법을 고안해서 "장기라는 게임에 수명이 있다면 그 수명을 300년은 줄인 사람"이라고 평가된다. 당시에는 잘 몰랐던 것도 있지만 나중에 조명을 받은 것까지 포함해 유명한 신수로 마쓰다식 이시다류, 참새물기, 급전 망루, 봉은, 비차 비틀기, 대 비차 비틀기용 금, 각행교환 봉은의 마쓰다 정석, 역마차 정석, 앉은비차 혈웅 등이 있다. 이러한 공적을 기념해서 매년 일본장기대상에서는 새로운 수법이나 전법을 짜낸 기사를 표창하는 "마쓰다 고조상"을 주었다.
각행 교환의 명수이고 좋아하는 말은 자진에서 멀리있는 각행
장기의 발전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지만 전쟁중의 얻은 병 때문에 체력이 저하되어 휴식이 많고, 타이틀 획득의 실적에서는 오오야마에게 밀려 영세명인의 칭호를 얻지는 못했지만 순위전 A급에서는 한번도 떨어진 적이 없는 상태로 1979년 은퇴했다. 이 때문에 장기연맹에서는 마쓰다를 위하여 새로운 칭호를 만들어 "실력제 제 4대명인"의 칭호를 주고 있다. 1
실질적인 후계자로는 가토 히후미가 꼽히고 있지만, 그 외에도 그의 유풍을 그리워하는 기사가 많아 하부 요시하루도 마쓰다의 장기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고 있으며 장기를 두어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에 "마쓰다 선생님과 두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장기연감에서 ‘대국하고 싶은 기사’를 전기사를 상대로 설문조사했을 때에도 ( 2하부 세대의 기사들은 오오야마와 대국한 일이 별로 없다.) 마쓰다의 이름을 언급한 기사가 오오야마를 언급한 기사보다 많았다. 타니가와 코지는 페어 장기에서 대국한 적은 있지만 일반적인 대국을 한적이 없었다.
은퇴 후인 1982년 2월 27일에, 프로에 필적하는 실력을 가진다던 진검사 코이케 쥬메이와 각행을 떼고 대국해서 이겼다. 마스다의 공식전 마지막 대국 이후 3년이 된 마쓰다에게 앞날이 창창한 코이케가 도전한 것이라서 코이케의 우세가 점쳐지고 있었으나 마쓰다가 새로운 수법인 "봉옥"을 사용해서 대항했다. 비차의 앞에 옥을 내세워 전진하는 이 기책앞에 코이케는 49수 째에 8五보를 두는 단계에서 승리를 확신했으나 마쓰다가 9四금으로 도망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시원스럽게 8五동금으로 토금과 바꿔 버리는 바람에 그만 승기를 놓쳐버린 코이케가 패했다. 대국 후 마쓰다는 코이케에게 ‘8五보는 역시 아마추어의 수에 불과하다. 내가 프로 기사라는 걸 잊었는가’라고 말하자 코이케는 ‘은퇴해서 장기가 약해지셨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야말로 끝까지 새로운 수법을 출현시키는 인생이었다. 3
만년에는 하부나 센자키 마나부 등의 신진 강호들이나 관전 기자와 바둑을 즐겼다고 한다.
에피소드
대단한 골초로, 하루에 200개비를 피운 적도 있다. 또 폭주가라서 타니가와 코지에게 "나는 5살부터 술을 마셔서 기억력이 감퇴했다. 술은 삼가해라"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그런 반면에 도박은 몇번 해보고 ‘운에만 좌우되는 것은 승부가 아니다’라고 일생 좋아하지 않았다.
평생의 라이벌인 오오야마 야스하루에 대해 왕장전에서 기록원을 맡았던 나이토 쿠니오는 ‘마쓰다 씨는 담배를 피우면서 큰 재떨이에 꽁초를 꽃잎처럼 둥글게 꼽아놓았는데 반면에 오오야마 명인은 턱을 끌어당기고 가만히 앉아서 으음…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또 훌륭하더군요. 부동이라는 느낌. 그래서 전혀 질리지가 않았습니다. 이 두사람의 대국은 기보만이 아니라 대국 자체도 하나의 그림이 되더군요’라고 술회했다.
종전직후에 GHQ와 불화가 있을 때에 장기를 옹호해서 직접 담판을 했다는 설도 있다. 일본장기는 체스나 장기와 달리 잡은 말, 즉 포로를 상대방과 싸우게 하는 것이 비인도적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각자가 필요한 위치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반론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장기금지의 위기 참고
여자는 장기를 두지 못한다고 발언하기도 했지만,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마스다 자신도 여성에게 상냥했다. 당시의 여류 명인 코지마 아키코가 마쓰다에게 싸인을 부탁하자 기분좋게 응해주었다. 아직 사춘기였던 나카이 히로에에게는 ‘여자는 장기가 강하지 않아도 마음이 선량하면 된다’고 말했다.
바둑에도 강해서 아마츄어 대회 등에 출장해서 단체전에 나올 때에는 자신이 주장을 맡지 않으면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사후에 후배의 요네나가 쿠니오 들이 노력해서 일본 기원이 바둑의 아마 8단을 수여했다.
검호의 이야기를 아주 좋아해서 텔레비전의 시대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참의원 선거에 출마를 권유를 받았을 때, "본업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정치가가 되지 않는다"라며 거절했다.
전일본 선수권전(후의 10단전과 용왕전)에서 대전한 기무라 명인에게 "명인은 결국 쓰레기 같은 것"이라고 야유했다. 이에 발끈해서 화를 내는 키무라는 "그럼 너는 대체 뭐냐?"라고 반론하자 "쓰레기에 모여드는 파리다"라고 하는 등 독설가이면서도 유머러스한 면이 있었다.
쓰카다 마사오와 사이가 좋아서 함게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마스다가 "나는 태양이고 너는 달이다"라고 하자, 평상시에는 과묵한 츠카다도 화가 나서 "왜 내가 달이냐"라고 반론해서 서로 내가 태양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만년에는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노 소호처럼 3살때부터 장기를 배워 명인에게 각행을 떼고 이기고 싶다” 라고 술회했다.
아사히 신문에서 일본장기 해설을 맡아 명인전에서 아사히 측의 지원을 받곤 했다.
20대에 일본군에 입대했다. 그때 마쓰다는 담배와 술, 불규칙한 생활로 이미 몸이 상당히 약화되었는데 ‘군대에 들어가 규칙적인 생활, 규칙적인 운동을 한 덕분에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만약 입대하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또 총검술 시합 등에서 고참병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지만 요령을 알면서 부터는 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 요령에 대해서 마쓰다는 ‘상대의 호흡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숨을 내쉬었을 때에는 공격해도 소용이 없다. 상대가 숨을 다 내뿜은 그 순간 기합을 넣어서 찌른다. 주로 인간은 숨을 마시거나 들이쉬거나 호흡이 시작되는 순간에는 무방비하다’라고 말한적이 있는데 ‘마쓰다가 장기에서 강했던 것은 상대의 습관을 철저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에피소드다.
대국의 종반에서 마쓰다가 힘을 주어 내리치며 강한 승부수를 두었을 때 마쓰다는 자신만만하게 ‘외통’이라고 한마디 중얼거렸다. 상대는 대기사 마쓰다가 자신만만하게 외통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투료해버렸다. 그런데 대국후에 검토를 해보니 사실은 외통이 아니었다. 상대는 후회하는 말을 했는데 마쓰다는 ‘프로가 되어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내 한마디에 투료했다면 너의 기력은 그 정도에 불과하다’라는 말로 납득시켰다.
수많은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이 다소 사투리를 쓰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것도 마쓰다의 매력이었다.
명인에게 향차를 떼다
마쓰다가 장기기사를 목표로 해서 집을 나올 때, 어머니가 사용하는 자의 뒤에 썻다고 하는 말이 있다.
‘이 코조, 명인에게 향차를 떼고 두어 이기면 오사카에 간다’라고 쓰여져 있었다는데, 향차를 떼었다는 것은 접장기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이것으로는 의미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이기면"은 이기기 위해 라는 말을 잘못 사용했다는 추측도 있지만 본인의 자서전과 장기계 2004년 12월호 부록 "신수일생 마쓰다의 한수"에 의하면 마쓰다는 어린 시절이라 명인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히로시마나 오사카등 각지에 하나씩 명인이 있다고 잘못 생각해서 먼저 히로시마 명인을 이기고 오사카로 가겠다고 생각했던가 아닌가 싶지만 그 때 정확히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술회했다.
1952년, 제 1기 왕장전에서 당시의 명인이었던 기무라 요시오와 7번의 승부를 겨루었다. 당시의 왕장전은 3번을 먼저 두는 것으로서 3승째가 되면 다음 대국은 향차를 빼고 두도록 하고 있었다. 마쓰다는 기무라를 상대로 4승 1패가 되었기에 제6국에서 향차를 빼고 싸우게 되어 명인에게 향차를 떼고 대국하게 되었지만, 이 때는 대국을 거부하고 부전패가 되었다.
1956년, 사제인 오오야마 명인과의 왕장전에서는 다시 명인에게 향차를 떼고 두었으며 이번에는 실제로 대국을 벌여, 그 상태로 오오야마에게 이겼다. 그야말로 "명인에게 향차를 떼고 이긴다"를 실현한 순간이었다.
명인에게 향차를 떼어주고 대국한 것은 마쓰다 한명뿐이고 당연히 이긴 것도 마쓰다 한명 뿐이다. 이때의 심정에 대해서 마쓰다는 만년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쁨이 말이죠, 날마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겁니다. 또 사람은 죽고, 언제 죽어도 괜찮지만, 수백 수천년이 지나도 내 이름은 남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역시 장기가 시작된 이래 명인에게 장기를 떼어주고 이긴 것은 나뿐이다라는 건 좋지요.’
진가게 사건
앞에서 말한 것처럼 1952년 당시, 왕장전의 규정은 반드시 7국까지 시합하게 되어 있었고 또, 3번수 돕기 라고 어느 쪽인가가 3승차를 내고 앞서면 향차를 떼고 두도록 했다. 이 시점에서 마쓰다 당시 8단은 4승 1패로 키무라 왕장(겸 명인)에게 왕장위를 빼앗는 중이라서 제 6국은 마쓰다가 향차를 떼고 두게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마쓰다의 증언에 의하면 대국 전날에 진가게 여관에 가서 현관의 벨을 몇번 눌렀는데도 관계자가 마중나오지 않아서 무례에 화가나서 다른 여관으로 향했다고 한다. 이를 알게된 관계자들이 마쓰다를 부르러 갔는데도 완강하게 거부해서 대국이 실시되지 않았다. 일본장기 연맹은 이를 중대한 사건으로 보아 마쓰다의 제명도 검토하고 이사회는 1년간의 대국금지를 결정했다. 그러나 마쓰다가 소속된 간사이 중심의 기사들이 강하게 반발한 데다가 이사 전원이 사표를 내면서 장기 연맹의 동서 분열 사태도 예상되었다.
최종적으로는 기무라 명인의 판단에 맡겨지게되고, 마쓰다와 이사회 쌍방이 유감의 뜻을 표명하여 마쓰다는 당일 복귀했고 이사들의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다. 결국 제6국은 마쓰다의 부전패, 제 7국은 예정대로 평수로 대결을 벌였다. 진 가게 여관 관계자에 따르면 여관에는 원래 벨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건의 진상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명인에게 말을 떼고 두는 것이 권위를 더럽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 마쓰다가 벨이 울리지 않는 것을 구실로 대국을 거부한 것이 아닌가싶다고 한다
마쓰다는 장기계에 들어갈 때, 친가의 자에 "명인에게 향차를 떼고 이긴다"라고 메모를 했으나 반면에 왕장전의 3번수 치유제를 도입할 때에 명인에게 향차를 떼고 두는 것은 권위에 상처를 내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했다.
후일, 마쓰다는 진 가게 여관에게 무례를 사죄하는 의미인지 "허풍이 눈에 묻어 되돌아본다"라는 사인지를 진 가게 여관에 남기고 갔다고 한다. 진 가게 여관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종업원을 부르는 북을 달았으며 장기 기사이면서 관전기자이기도 한 하타 야마모토의 펜 네임인 "진퇴를 알리는 북"은 이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록
- 아무튼 다시 태어난다면 2살이건 3살이건 빨리 장기를 배워서 또 다시 해보고 싶다. 이번에는 튼튼한 몸이 되어서 명인에게 각을 떼어주고 장기를 둘 정도로. 농담이라도 이 정도는 해보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 호조라는 것은 실력이 없는 사람이 운이 좋아서 이기는 것이다. 내 경우는 순조라고 해야 옳다.
- 강한 쪽이 이긴다.(난해한 국면에서 어느쪽이 유리한 가를 물었을 때)
- 장기란 창작이다. 무엇이건 단 1보라도 발전하는 쪽이 이긴다. 만약 항상 새로운 수법을 매번 생각해낼 수 있는 기사가 있다면 불패의 명인이 될 것이다. 불과 몇분의 1초라도 좋다. 전문가라면 밤낮없이 새로운 수단을 발견할 때까지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된다.
- 나는 불리하다,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에 도전하는 버릇이 있다. 전부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에는 새로운 형태가 되고 새로운 전법을 낳아 그것으로 장기를 진보시킬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안전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선배의 모방을 하게 될 뿐이다.
- 기사라는 것은 없어도 되는 존재다. 그러므로 기사는 팬들에게 재미있는 대국을 할 의무가 있다.
- 아마추어는 말을 움직일 뿐, ‘둔다’라는 것과는 다르다.
- 단 오니로쿠가 마쓰다 고조에게 비차를 떼고 둔 접장기에서 진 뒤의 소감
마쓰다 : 도중까지는 네가 우세했다.
단 : 어디까지인가요?
마쓰다 : 말을 늘어놓을 때까지. 이몸에게는 비차가 없으나 너에게는 있었다.
단 : 어느 수가 나빴느냐는 겁니다.
마쓰다 : 네가 말을 움직인 그 자체가 패인이라는 것이다.
http://ja.wikipedia.org/wiki/%E5%8D%87%E7%94%B0%E5%B9%B8%E4%B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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