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케 쥬메이(小池重明) 본명은 코이케 시게아키(1947년 12월 24일 - 1992년 5월 1일) 아이치현 나고야 출신의 아마츄어 장기기사.
아마츄어 최강의 기사로 불리며 내기장기를 전문으로 하는 진검사로 전설적인 기력을 자랑했다. "신주쿠의 살인청부업자", "최후의 진검사", "프로 죽이기"등등 수많은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인물
출생
1947년,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말년의 기억에 의하면 부친은 건강한 신체가 있으면서도 상이군인을 가장해 구걸을 하거나 도박을 일삼았고 모친은 집에서 손님을 상대하는 창녀였다고 한다. 어느날 "남자라면 도박도 하나는 알아둬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장기에 열중하게 되면서 10대에 이미 근방에는 적이 없다고 할 정도 능숙해졌다.
진검사의 길로
코이케는 "장기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싶다"는 일념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상경해 우에노의 일본장기센터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며 프로기사를 목표로 장기를 연습했다. 그러나 이것이 좌절되어 나고야로 돌아가 장의사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즈음 현지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하고 다시 도쿄로 주거지를 옮겨 몇년간 트럭 운전사로 근면하게 일했다. 하지만 몇년 뒤 아내가 낳은 아이가 출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자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기 장기를 시작했다.
신주쿠 장기도장에 적을 둔 코이케는 내기 장기에서 연전연승하며 "신주쿠의 살인청부업자"라는 별명이 붙어 놀라운 솜씨의 진검사로 유명해졌다. 비슷한 시대에 역시 진검사로는 최강이라고 주목받던 오사카의 카가 케이지와 일본최강의 진검사를 결정한다는 이유로 1979년, 오사카의 통천각 장기도장에서 시합을 가져 7승 7패라는 호각의 기록을 세웠다.
진검사로써의 명성은 높아졌지만 부인과는 별거끝에 이혼, 연일 만취상태로 지내는 등 점점 난폭한 생활을 하게 되어 그걸 보다못한 지인이 ‘내기장기는 아니지만 우승하면 상금이 나온다’고 권유해서 아마추어 장기대회에 출전, 당당히 우승했다.
아마추어의 정점과 좌절
진검사를 그만두고 아마추어 장기계에 뛰어든 코이케는 1980년부터 2년 연속 아마 명인의 타이틀을 획득하여 명실공히 아마 장기 최강자로 군림했으며 프로기사를 상대로도 차례로 승리를 거듭해서 잡지 기획으로는 오오야마 야스하루 명인과 대국에서 승리하기에 이르렀다. 이일이 계기가 되어 하나무라 모토지 이후 처음으로 특례를 통해 프로에 편입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장기계의 선풍을 일으켰다. 당시 프로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19살까지 장려회라는 기사 양성기관에서 시험을 보고 입단하여 그 후에 소정의 성적을 올려 26세까지 4단 이상의 단을 인정받아야 했다. - 오늘날에는 조건이 조금 완화되었다. - 그러나 당시 코이케는 이미 33살로 필요한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각광을 받은 까닭으로 전부터 가끔 있던 소액 사기소동이나 낭비벽, 여성문제 등등 행실이 나쁘다는 문제가 표면화되면서 프로 편입은 일본장기연맹에 의하여 각하되었다. (이 결정 직전에도 음주 문제로 소동을 일으켜 경찰에 연행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프로 진출을 갈망하고 있던 코이케는 큰 충격을 받아 장기계에서 떠나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장기와 결별
그 후 아마추어 장기계에서 10년 이상 코이케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았다. 당시의 청년지 등에서 "건달"기사로서 코이케를 다루는 일도 있었지만 일반적인 지명도는 낮았다. 게다가 엄청난 실력의 진검사로 지나치게 유명해졌기 때문에 그와 내기장기를 하는 사람이 없어져 버렸고 이 때문에도 더더욱 장기와 이별해야 했다고 한다. 또, 코이케가 오면 야쿠자나 빚장이들이 밀려오는 관계로 출입을 금하는 장기도장도 많았다.
부활
만년에 작가이며 장기 팬으로도 유명한 단 오니로쿠를 의지해서 아마츄어 장기의 세계에 복귀했다. 당시 단은 애로소설 작가를 은퇴하고 장기 잡지 "장기저널"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코이케의 소행이 안좋다는 것은 충분히 알면서도 그의 필사적인 간언과 천재적인 기력을 보고 활동을 후원하기로 약속한다. 그 후, 단 오니로쿠가 기획으로 아마츄어 타이틀 홀더를 상대해 매번 승리를 거두게 되자 "신주쿠의 살인 청부업자, 지금도 건재"라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시절, 코이케의 압도적인 힘을 단 오니로쿠는 "내기 장기에 있어서는 괴물 같다"고 평가했다.
사실 이 대회에서 단은 코이케를 참패시켜 앞으로 장기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으나 코이케는 그해의 아마추어 명인 타이틀 보유자였던 다지리 타카시를 상대로 압승, 2년동안 장기를 잡아보지 않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 후에 한동안 단은 코이케를 자신의 전속 운전기사로 일하게 하고, 나중에는 자신이 경영하는 불고기 집의 점장으로 지명해서 일정한 직업을 가지도록 권유했다. 코이케도 이런 제의를 쾌히 승락했고 천성적으로는 좋은 사람이라는 점과 뜻밖의 손재주로도 좋은 평을 받고 있었으나 불과 반년만에 불륜관계의 여성과 동반실종되면서 다시 소식이 끊기고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그 후에 코이케는 장기를 그만두고 트럭의 운전기사로 운송회사에 근무하는 등 생계를 간신히 이어가고 있었던 듯 하다.
만년
그러나 40대가 되면서 돌연 토혈하는 등, 컨디션이 악화되고, 입원검사의 결과가 중증의 간경화로 진단되었다. 이 때쯤에야 단에게 연락이 통하여 코이케 본인이 단에게 "선생님, 의사가 저는 곧 죽는다고 합니다. 왜 제가 죽어야 합니까. 모르겠습니다. 죽고싶지 않습니다. 무섭습니다. 도와주세요"라며 오열하면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를 들은 단이 입원해있는 병원에 가보았을 때, 코이케는 80이상이던 체중이 절반까지 떨어져서 갈수록 야위어갔고 이미 승부사의 모습은 없어졌다. 그런데도 장기에 대한 구상을 입에 담는 코이케에게 단은 "상대를 준비해서 한번 해볼까?"라고 물으면 "부디 부탁드립니다"라고 대답했다. 코이케는 병원을 빠져나와, 단의 자택에서 당시 아마츄어 장기계의 호프라고 불리우던 아마노 코시와 대국을 가졌다. 당시 아마노 코시는 용왕전 예선에서 아마추어로 출전 프로에 3연승을 거둘 정도였는데 이 시합에서 코이케는 2연승을 거두어 완승을 거두었다. 코이케는 마지막까지도 병마의 고통을 참으면서 웃는 얼굴을 보였고 "이것이 마지막 대국임을 깨닫고 죽는데 후회없는 얼굴이었다"라고 단은 저서에서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마노 코시와 대국한 며칠 후에 병원에 돌아온 코이케는 다시 토혈하고 용태가 급변하자 침대에서 몸에 연결되어 있는 튜브를 스스로 당겨 뜯어 사망했다. 향년 44세.
사후
만년의 코이케를 돌보아주던 단 오니로쿠가 그의 생애를 "진검사 코이케 시게아키"라는 제목으로 정리한 책이 1995년에 발간되어 오니로쿠가 6년만의 복귀작으로 내놓게 되었다.
또 1997년 2월 27일, 아사히 방송의 "놀라운 20세기", 1998년 3월 26일의 일본TV "세기말 프로그램 세계 위인 111인편"에서도 기사전설로 다루어지는 등, 그에 대해 일반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미야자키 쿠니오, 오니로쿠 등이 그를 소재로 한 서적, 기보집, 만화 등을 출판해서 코이케 시게아키 붐이라고도 부를만한 활황이 있었다.
스타일
코이케의 장기는 대단히 독자적인 것으로, 언뜻보면 아마추어가 어설픈 장기를 두는 것처럼 엉망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코이케가 무수한 승부를 통해 고안한 것으로 "초반은 일부러 상대가 공격하게 유도하고 끈질기게 참아 견디어 심리적인 면에서 우위에 선다"라는 치밀한 계산에 근거하는 작전이다.
제한시간이 정해져 있으므로, 그 제한시간을 다 사용한 후의 초읽기에 돌입하면 이때야말로 기풍을 일변하게 되는데, 이런 시간싸움에서는 상식 이상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상대방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을 정도로 행마의 페이스를 올린다. 그런 다음에 룰로 정해져있는 시간을 활용해서 상대방을 압박하고 실수가 나오면 이를 놓치지 않고 공세로 전환해서 단번에 승부를 결정한다는 그 방식 때문에 "살인 청부업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 긴장되는 국면에서 보병을 이용하는 압박적인 수를 좋아해서 상대방이 꺼려하는 곳을 노려서 치는 방식 때문에 이른바 "코이케의 집념의 보"라고 일본장기계에서는 유명해 졌다.
에피소드
일상 생활에는 장기의 연구를 일절하지 않고, 대전 상대의 대책을 구상하는 일도 없었다. 원래 자택에 장기판 자체를 두지 않았다.
사전에 상대에 대한 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다. 대국이 있어도 술에 취한채 대국장에서 자다가 직전에야 관전자가 흔들자 그제서야 일어나 장기를 두었다는데, 그러고도 이겼다.
세기의 대결 이라고 불리워진 카가 케이지와의 장렬한 대결로 이름이 높아진 코이케는, 그 때문에 내기 장기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없어져 버렸다. 후일에 인연이 깊어진 단 오니로쿠도 "빚은 내기 장기로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코이케에게 "당신과 진지하게 내기 장기를 둘 상대는 일본 어디에도 없다"고 일갈했다고 한다.
30대의 무렵에는 연령 제한과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프로입문이 방해되었지만 22세 무렵에 마츠다 시게유키 문하에 입문한 바 있어 전혀 찬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천재적이었던 코이케의 재능 때문에 지인이 추천한 듯 하지만 그 시기에 코이케는 호스테스에게 빠져 카바레를 드나드는 등 점차 행실이 나빠졌고 근무처의 금고에서 돈을 착복하는 불화를 일으켜서 결국 파문당하고 프로가 되지 못했다.
오오야마 야스하루와의 대국 전날 만취해서 폭행사건을 일으켰다가 유치장에 감금당했다. 그래도 알고있는 도의원에게 연락해 간신히 대국 시간에는 맞출 수 있었다. 대국자체는 각행을 뗀 접장기라서 중반부터 코이케가 압도하고 쉽게 이겨버렸다.
오오야마의 평생 라이벌이라는 마쓰다 고조도 각을 떼고 장기를 두었는데 초기에는 코이케가 우세해 보였지만 도중에 마쓰다의 묘수가 나와 코이케는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대국후에 마쓰다는 ‘이몸은 프로다. 넌 결국 아마추어에 불과하지’라고 말하자 코이케도 질세라 은퇴하신다고 해서 기력이 약해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응수했다고.
원조 앉은비차 혈웅으로 당시 최고 승률을 올리고 있던 다나카 토라히코와도 대국해서 승리했다.
무뢰파라고 불릴 정도니 호방뇌락한 성격일 거라고 생각되기 쉬웠지만, 사실은 매우 신경질적인 일면이 있어서 한번은 대국중에 장기계의 중진이 바로 옆에 앉아있는 문제 때문에 완전히 위축되어서, 그 모습을 깨달은 대전 상대가 관전자에게 자리를 비우도록 부탁했다는 일화도 있다.
하부 요시하루가 초등학생 시절에 우연히 코이케의 대국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한다. 후일에 그에 대해서 "이야기로는 많이 들었지만 장기의 형태는 완전히 파격 그 자체였다. 그러나 아무튼 강했던 것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라고 술회했다.
기성 타이틀을 획득하기 직전의 모리 게지 에게 평수로 대국해 승리한 적이 있다. 하지만 같은 해에 당시 중학교 1학년생이던 무라야마 사토시에게는 패했다.
요미우리 신문 주최의 장기대회에 코이케가 출장했던 때의 특이한 에피소드가 있다. 우승상금이 100만엔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이런 큰 돈이 나오는 대회라면 우승할 것은 코이케 말고는 없다"라고 생각한 빚쟁이들이 회장의 밖에서 여러명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훌륭히 우승하여 상금 100만엔을 손에 넣은 코이케였지만 금새 전액을 빚쟁이들에게 빼앗겨 본인의 수중에는 한푼도 남지 않았다.
단 오니로쿠가 운전기사로 일하면 빌린 돈을 갚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해도 무리라고 대답했다. 사실은 빚쟁이에게 도망다닐 때에 면허증의 갱신기간을 넘겨버렸기 때문에 이미 면허는 없었다. 아무튼, 코이케는 완전 무일푼이었지만 면허증은 단이 자신의 돈을 지불하는 형태로 재취득했다.
코이케가 단을 보조해서 지방의 여관에 숙박했을 때, 그 다음날 아침 코이케가 "이것은 선생님 몫입니다"라며 돈을 보내는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단이 "이 돈은 어떻게 얻었느냐"고 따지자, 코이케는 단이 자는 동안에 같은 숙소에 있는 도박을 좋아하는 여행자등을 구슬러서 내기 장기로 닥치는 대로 이긴 것이라고 했다. 이를 들은 단은 "어떻게 돈도 없는데 도박을 할 수 있었나?"라고 묻는데 대하여 "돈은 없지만 사실은, 내기 장기를 거는 상대에게 자고있는 단의 모습을 보여서 이 사람이 고용주로, 만약 자신이 진다면 그가 돈을 지불할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이를 듣고 기가막힌 오니로쿠가 "이겼으니 좋지만 지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가?"라고 물었는데 코이케는 웃으면서 "아마츄어에게 제가 질 리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http://ja.wikipedia.org/wiki/%E5%B0%8F%E6%B1%A0%E9%87%8D%E6%98%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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