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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야스미츠, 1억3수의 天馬行空

사토 야스미츠 (佐藤康光) (1969년 10월 1일 - ), 장기기사. 기사번호 182. 교토 야와타시 출신, 고쿠가이인 고교 졸업. 다나카 가이슈 9단 문하. 통산 타이틀 획득수 6위. 통칭 하부 세대의 한명.

기력

프로입단이전

1981년 봄 6학년때 초등학교 장기 명인전에 출전해 3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무라야마 사토시를 상대로 승리했으며 이 대회의 준우승은 나카이 히로에였고 하부 요시하루도 이 대회에 출전했다.(당시 5학년)

1982년 12월, 6급으로 오사카 장려회에 입회했다. 반년후 타니가와 코지가 사상 최연소로 명인이 되었다. 장려회원들과 머리를 싸매고 어려워하던 묘수풀이를 몇 초만에 해결해서 어린 마음에 ‘A급의 무서움’을 알았다고.

장려회에서는 입회 1년만에 2급으로 승급했으나 아버지가 전근가면서 관동 장려회로 이적했다. 이때, ‘명인 후보를 도쿄에 뺏겼다’고 오사카 기사들이 한탄했다고 한다. 덧붙여 장려회 시절에 학교를 빈번하게 빠졌기 때문에 "학교빠지미츠군"이라고 불려기도 했다. [각주:1]

소년 시절에 동경하던 기사는 요네나가 쿠니오. 스승인 타나카의 장기 교실에 다닐때도 "요네나가의 장기"라는 책으로 공부해서, 그 독특한 감각이나 종반의 예리함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장려회 시절, 시마 아키라가 주최한 이른바 ‘시마 연구회’에 하부 요시하루, 모리우치 토시유키와 함께하면서 실력을 닦았다.

그리고 17세에 2단리그에서 8연승을 거두며 3단이 되고 계속해서 13승 1패로 4단에 진출, 합계 21승 1패로 프로에 입문했다.

프로무대

프로입단 3년만인 1990년, 5단으로 제31기 왕위전에서 타니가와 코지에게 도전해 첫 타이틀 전을 치르었으나 3-4로 패배. 같은 해의 제9회 신예전의 결승에서 모리우치 토시유키를 이기고 기전 첫 우승을 달성한다. 이듬해에도 모리시타 타쿠를 꺽고 2연패를 달성하며 1990년의 장기대상 신인상 수상.

6단 시절, 1993년의 제6기 용왕전에서 도전자가 되어 7단으로 승단했다. 당시 상대는 5관왕이던 하부 요시하루로, 7번의 대국으로 4-2로 이겨 첫번째 타이틀, 용왕위를 획득. 그러나 이듬해의 제7기 용왕전에서는 반대로 하부에게 2-4 패, 하부 요시하루의 사상 최초 6관왕 달성을 바라봐야 했다. 그 다음회(제 8기) 이번에는 반대로 사토가 하부에게 도전하여 3회 연속 동일대전이 이루어졌지만 용왕위를 빼앗지 못했고, 하부는 이 직후 왕장을 차지해 7관왕에 올랐다.

1996년 A급 8단이 되고 이듬해의 A급 순위전에서 6승3패로 플레이오프에서 하부 요시하루를 이기고, 제56기(1998년) 명인전에서 타니가와 코지 명인에게 도전권을 얻었다.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처음으로 명인위를 획득하고 9단으로 승급했다. 1999년의 제 57기 명인전에서도 타니가와 코지와 2년 연속 대결을 벌여 이번에도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끝에 4-3으로 명인위를 방어한다. (이듬해에 마루야마 타다히사에게 3-4로 패하여 실관)

2002년, 제 51기 왕장전에서 하부 요시하루에게 도전하여 4-2로 왕장위를 획득 같은해의 제 73기 기성전에서 고다 마사타카에게 도전해서 3-2로 탈취, 처음으로 2관왕이 되었으며 왕좌전에서는 하부에게 도전했으나 아깝게 패퇴하여 단숨에 3관왕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왕장의 방위전에서는 하부를 도전자로 맞이했고, 전년과 같은 대결에서 0-4로 하부에게 패배 기성에 그쳤다.

2003년, 제 74기 기성전에서 마루야마 타다히사의 도전을 3-0으로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 하부 7관왕이 기성위를 잃고 나서, 기성위 보관유지자격은 7년 연속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지만 이 방위로 종지부가 내려졌다. 같은 해에 제 11기 은하전에서 나카가와 다이스케를 이기고 우승. 타이틀전 이외의 전기사 참가 기전에서는 첫 우승을 차지한다.

2004년, 제75기 기성전에서 모리우치 토시유키의 도전을 3-0으로 꺽고 기성위 방어. JT장기 일본 시리즈 결승에서는 쿠보 토시아키를 상대로 첫우승. 이듬해의 제76기 기성전에서 하부 요시하루의 도전을 3-2로 꺽고 방어했다.

2006년에는 하부 요시하루에게 도전한 제 55기 왕장전에서 0승 3패에 후 3연승을 거두어 일본장기 타이틀전 사상 최초의 3연패후 4연승이 기대되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해의 제77기 기성전에서 스즈키 다이스케의 도전을 3-0으로 꺽고 방어해 5번째로 기성위를 유지하면서 규정에 따라 영세 기성의 칭호를 얻는다. JT장기 일본시리즈 결승에서 고다 마사타카를 이기고 2번째 우승, NHK배 결승에서는 모리우치 토시유키를 이기고 우승하는 등, 이 해에 타이틀전만 5연속 도전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모리우치 토시유키에게서 기왕을 탈취, 다시 2관왕이 된었다. (기성, 기왕) 성적만이 아니라 ‘사토 신수’의 개발 등 수많은 참신한 수를 선보인 것이 높이 평가되어 장기 대상의 최우수 기사상과 마쓰다 고조상을 첫 수상.

2007년, 제 78기 기성전에서 와타나베 아키라 용왕의 도전을 3-1로 꺽으면서 방어해 6연패를 달성. 같은해의 용왕전에서는 반대로 와타나베에게 2년 연속도전에 2-4로 패하여 탈취에 실패하고 서로 자신의 타이틀을 방어했으며 2007년의 NHK배 결승에서는 스즈키 다이스케를 상대로 우승, 하부 요시하루 이후 9년만에 3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2007년의 순위전에서는 개막부터 타니카와 코지와 함께 4연패를 당하여 "이대로 둘다 강급되는가"가 일반지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타니카와는 최종국을 앞에두고 잔류를 확정했으나(8회전에서 미우라 히로시에게 승리) 사토는 그후에도 계속 패해서 설마하던 개막 6연패를 당한다. 이미 A급 잔류를 절망적이었지만 이때부터 3연승을 거두어 간신히 A급에 잔류한다. (만약 최종전의 키무라가 패하고 상성관계였던 쿠보가 이겼다면 B급 1조가 되었을 것이다)

제68기 (2009년) 순위전 A급 8강전에서는 후지이 타케시에게 패배하면서 B급 1조로 강등이 결정되었다. A급 연속 재적은 14기로 중단되고 순위전과 용왕전을 통틀어 첫 강등을 경험했다. 이튿날 쿠보 기왕에게 도전해 상해에서 대국을 치렀으나 풀세트 끝에 제5국에서는 190수까지 가는 열전끝에 아쉽게 지난해 빼앗긴 기왕위 탈취에는 실패했다.

기풍

본래는 앉은비차파지만 몰이비차도 적극적으로 채용하면서 전법의 폭을 넓히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정석에 충실했지만 2005년을 전후해서는 새로운 초반전략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일반적으로는 그런 장기가 "힘싸움"이나 "변칙전법"이라고도 불리고 있지만 본인의 표현으로는 모두 논리적인 귀결이기 때문에 단순한 힘싸움이 아니라고 한다. 새로운 수법이 행마가 마치 천마가 하늘을 날아가듯 독창적이라 하여 2006년에는 최우수 기사상과 마쓰다 고조상도 수상했다. 그때부터 부채의 휘호로 "天馬行空"을 자주 선택한다.

사토의 신수나 새로운 구상 대부분은 이색적인 전법으로 따라하기가 어렵지만 고키겐 중비차를 상대로 보인 서반의 새로운 수법, 9수째의 ▲9六보는 많은 기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치밀류’나’ 1초에 1억3수를 읽어낸다’ [각주:2] 는 깊이있는 수 읽기에 정평이 있다. 공격적인 기풍이 강해서 후수차례에 각행 교환이 예상되는 경우에도 비김수를 노리지 않고 과감하게 공격을 선택하는 스타일로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서도 천일수를 노리는 과감함이 하부 요시하루의 부드러움과 대조적이고 위험한 변화에도 주저없이 뛰어드는 성향 때문에 "치밀하다기 보다 야만적이다", (센자키 마나부) "자신의 왕이 위험해지지 않으면 힘이 나지 않을 정도로 혼전에 강하다"(카와구치 토시히코) 는 평이 있다.

좋아하는 말은 계마. 사용하지 않는 말이 없도록 항시 생각하는 동안에 계마가 좋아졌다고 한다.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남기지 않는 것이 어렵다)

에피소드

대국에 관해

타니가와 코지를 리턴매치의 도전자로 맞이한 1999년의 제57기 명인전에서 2-3으로 코너에 몰린채 맞이한 제6국은 둘째날 자정까지 계속되었다. 결과를 요약해서 전하려던 NHK의 중계는 생방송이 되었고 사회자는 ‘설마 하셨겠지만 이 시간까지 열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국 제189수 째에서 사토의 옥이 외통에 몰린 난해한 최종반에 해설을 맡은 다나카 토라히코는 ‘22년간 프로기사로 생활한 9단이지만 도저히 모르겠는 국면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난해한 상황에서 203수째에 사토가 이기며 명인위를 방어했다. 타니가와의 투료는 23:54로 대국 후에 말도 못할 정도로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사토의 표정이 텔레비젼에 비췄다.

2000년의 제58기 명인전의 도전자는 마루야마 타다히사였는데 상대가 자신있는 전법(선수에서는 각행 교환, 후수일때는 횡보잡기 8五비)을 당당하게 받아내어 명인위를 방어하려고 했다. (타니가와 코지와의 대결에서도 이런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3-4로 명인위를 빼앗겼고 이 패전이 기풍을 바꾸는 계기었다는 설도 있다.

와타나베 아키라에 도전한 2006년의 제 19기 용왕전 제 6국에서 와타나베의 최초 7六보에 대하여 2번째 수에서 급작스럽게 3二금을 선보여서 와타나베를 도발했다. (이 수는 상대가 진비차일 때에는 적합하지 않은 방식으로 여겨지는 전법이다.) 결과적으로 도발에 넘어가서 서투른 진비차로 싸운 와타나베가 패했다. 최종전인 제 7국에서도 후수인 사토는 다시 제 2수로 급작스러운 3二금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망루 울타리를 짠 와타나베가 이겨 용왕위를 방어했지만 사토가 가진 책사로서의 일면이 보이는 대결이었다. 그리고 와타나베에 2년 연속 도전한 제 20기 용왕전 6국에서도 사토는 다시 2번째 수로 3二금을 내놓았다. 이 1국은 프로기사 대국에서는 매우 드물게 보이는 상중비차(서로가 중비차로 진행하는 것)가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와타나베가 승리를 거두었다.(이로써 와타나베의 용왕위 4연패가 결정되었다.)

제 51기 왕장전에서 간식으로 대량의 키위를 계속 먹으면서 하부 요시하루에게서 왕장을 탈취했다. 이 때문에 2ch등에서 "키위"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된 것에 대하여 본인은 "화제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고집스럽게 계속 키위를 먹었다"라고 한다.

2004년 NHK배 2회전에서 여류기사인 기사 나카이 히로에에게 질뻔했다. 결과적으로는 나카이가 애매한 수를 두어 사토가 역전승을 거두었지만 본인이 "내가 져도 이상하지 않은 장기였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사회를 맡았던 치바 료코는 도중에 나카이가 승리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인물

특기는 바이올린 연주로 장기보다 먼저 배웠다고.

장기 매거진의 1996년 2월호의 기획으로, 눈을 가린채로 5면대국에 도전해 반칙없는 5전 전승을 거두었다. 매년 정월에 방영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대역전 장기"에서도 뇌내대국 (프로간에 눈을 가리고 10초 시간제한으로 이어지는 장기)에서 불패를 자랑하고 있으며 공연자로 5연패를 관전한 타니가와 코지도 사토의 대단함을 극찬했다. 그러나 2010년에는 하부 요시하루를 상대로 고전하다가 2보 반칙을 저질렀다. 하지만 하부도 같은 착각을 해서 이걸 주의하지 않았다고 대국후에 말했다.

열혈한이라서 알기 쉽다는 일면도 있고, 대국에서 패할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분개하기도 한다. 친구인 센자키 마나부의 글에 의하면, 자주 조롱당해서 역으로 "마테미츠"(가질수 있는 야스미츠)라는 별명이 있다. 게다가 일부 팬 사이에서는 "모테미츠"(인기있는 야스미츠)라고도 불린다.

대국중에 기침이 자주 있기 때문에 관계자들이나 팬의 걱정이 많지만 사실 몸이 불편해서라기 보다는 흥분했기 때문인 것 같다. 또, 기침을 하는 것은 종반에 승리가 보이고 있을 때라는 설도 있어서 대전하는 기사중에는 사토가 기침을 하면 고개를 숙이게 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또, 승부를 확신하면 기침이 자연스럽게 멎는다고도 한다.

하부 요시하루는 때때로 종반전에서 말을 집은 손을 떠는 버릇이 있는데 2008년의 명인전에서 방송 해설 중에 ‘(자신은 하부의 대국상대로) 떨게해본적이 아직 없어서 부럽다’고 흔치않게 익살스러운 발언을 했다. 하부와의 통산대국수는 130국으로 동일 대국 통산 6위인데 대 사토전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하지만 같은달 열린 제79기 기성전에서 제3국 종반에 하부의 손이 떨리며 꿈을 달성했다.

2004년 2월, 당시 회사원이던 아내와 약혼하고 같은해 8월에 결혼했다. 부인은 "밋군"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첫 데이트는 가부키좌.(전통극을 공연하는 극장)였다고. 5년뒤인 2009년 6월, 장녀가 탄생해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는데 은하전에서 ‘딸이 너무 귀여워 장기가 안된다’는 말을 했다고.

국학원 고등학교 교사에 의하면, 그곳으로 진학한 이유는 장려회나 대국장소인 장기회관이 근처에 있어서 여기라면 다닐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국학원 고등학교에는 장기부가 없다.)

http://ja.wikipedia.org/wiki/%E4%BD%90%E8%97%A4%E5%BA%B7%E5%85%89

  1. 가코야스미쯔 ; 일본어로 가코는 학교, 야스미는 쉬다, 미쯔는 야스미츠 [본문으로]
  2. 현실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캐치 프레이즈로 친구인 무로오카 카즈히코와 유럽을 여행하던 중에 "컴퓨터는 1억수를 읽는다"라는 말이 나오자 무로오카는 "그렇다면 이 사람은 1억 3수를 읽어낸다"라고 농담을 섞어서 말한 것이 유래가 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