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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사토시, 일본장기에 생명을 걸다

무라야마 사토시(村山聖) (1969년 6월 15일 - 1998년 8월 8일) 장기 기사. 혈액형 AB, 기사 번호180. 히로시마 현 아키 군 후츄우 출신. 모리 노부오 7단 문하. 하부 세대라고 불리는 기사들 중 한명.

인물

3남매 중 차남으로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5살에 히로시마 시민병원에서 ‘네프로제’라는 신장계통 난치병에 걸린 것이 발견되어 죽기까지 병마와 싸웠다. 당시에는 이 병의 치료법이 안정을 취하는 것 뿐이라 소아병동에 입원해 이곳에서 친구들이 사망하기도 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입원중에 아버지에게 장기를 배웠고 몸에 지장을 준다는 주의를 받으면서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몰두했다.

이후에 눈에 띄게 두각을 드러내어, 쥬고쿠 어린이 명인전에서 4년 연속 우승, 타이틀 보유자인 모리야스 히로미츠(기성)를 상대로 비차 떼는 장기에서 이기거나 중학교 1학년때 우연히 만난 전설의 진검사 코이케 쥬메이를 이기는 등의 일화가 남아있다.

타니가와 코지가 명인이 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프로기사를 목표로 장기에 매진하게 되었다. 부모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지만 ‘좋아하는 것을 시키고 싶다’는 생각에서 스승을 찾기 시작했으나 원래 소속되어 있던 장기도장의 주인은 아직 장려회에 들어가기에는 이르다고 주장해서 스승을 소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래없이 어려운 스승찾기를 시작해 일본장기연맹 히로시마 지부장에게 모리 노부오를 소개받아 어머니가 무라야마를 데려가 인사시켰다. 당시 30세이던 모리는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좋아하는 타입으로 보통의 아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1982년 모리 노부오를 스승으로 장려회에서 수험을 치르고 합격했으나 원래 친분이 있었던 나다 렌쇼가 제자 신청을 해둔 상태여서 입회가 인정되지 않았고, 미나미구치 시게카즈의 중재로 이듬해 재수험을 치르고 입회했다.

입회후에는 오사카에서 단신으로 생활하는 단신으로 병마에 시달리던 그를 스승이 부모처럼 돌보아주었다. 무라야마는 언제나 열이 있어서 ‘40도가 되면 죽는다’고 주의를 주었지만 나중에 실제로 41도가 되자 ‘40도는 아니야. 괜찮아.’라고 말하며 안심시켰다. 무라야마의 컨디션이 나쁠때에는 모리가 돌보아 주는 생활로, 순정만화를 읽고 싶다고 하면 어디서 파는지도 모르던 모리가 서점을 돌아다니며 찾는 등, ‘어느쪽이 스승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런 스승의 집에서 1분 떨어진 곳에서 약 3천권의 만화책에 둘러쌓여 독신으로 살았다. 주문할 때에는 읽기용, 장식용, 보관용으로 3권씩을 주문했다고. 독서에도 대단히 열중해서 제임스 티프트리 쥬니어를 대단히 좋아했다고 한다. (생사와 장렬한 최후를 묘사하는 것이 특징적인 작가)

1986년 11월 5일에 프로 기사로 데뷔했는데 장려회 입단부터 프로까지 2년 11개월은 타니가와 코지나 하부 요시하루도 뛰어넘는 이례적인 속도로, 질병때문에 종종 부전패를 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경이로울 정도다. 풍모나 이미지로 "괴동"이라는 발명으로 불리웠지만 그다지 평판이 좋지는 않았다. 무라야마는 손톱이나 머리카락에도 생명이 있다는 생각에서 자르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에서 불결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어느날 모리에게 ‘저 불결하다는 말을 듣고 있는데 나쁜 걸까요?’라며 울것같은 얼굴로 상담하면 ‘불결한 것은 누구나 싫어하지. 하지만 강해지면 그런 소리 안들어도 된다.’며 격려했다. 하루는 오자키 요시오(나중에 무라야마 사토시의 일대기를 적은 작가.)와 함께 모리가 공원을 걷고 있다가 무라야마를 만났는데, 무라야마는 ‘아차’ 싶은 듯한 바보같은 표정으로 얌전히 서있는 것을 밥은 잘 먹는가, 머리는 깍았느냐, 손톱 길이는 그럭저럭이구나’라고 모리가 다그치는 것을 보고 모리의 제자사랑을 실감했다고도 한다.

사제로 야마자키 다카유키가 있는데, 무라야마는 고기공(肉丸), 야마자키는 찐공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장려회 시절에도 "종반은 무라야마에게 물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종반의 읽기가 강하기로 정평이 있어서, 대표적인 에피소드로 관서 일본장기 회관 대기실에서 기사들이 진행을 검토하고 있을 때, 장기회의 중진이며 묘수풀이 작기이기도 한 나이토 쿠니오가 와서 ‘대기마가 이렇게 많으니 외통이다’라고 말해 다들 외통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무라야마 혼자 ‘외통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실제로 외통이 아니었다. 나중에 나이토는 그 상황에서 외통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실력과 자신감’이라고 술회했다

무라야마의 목표는 다른 기사들처럼 "명인"이 되는 것이었지만 10대 말이 되면서는 "명인이 되어 빨리 장기를 그만두고 싶다"는 발언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1989년 6월에는 모리가 지내는 집에 찾아와 스무살이 되었다면서 스무살까지 살았다는 그 자체를 기뻐하기도 했다.

기사로서 대단히 격렬한 투쟁심이 있고, 라이벌 기사들에게는 대국 이외에도 적의를 내비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하부 요시하루에게는 특별히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당시, 하부 요시하루를 필두로 10대로 프로기사가 되었던 그룹은 대단한 기세로 이겨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신인류, 차일드 브렌드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하부 요시하루, 사토 야스미츠, 모리우치 토시유키, 무라야마 사토시의 4명이 당시의 유력한 멤버였고 이 세대는 후일 하부 세대라고 불리며 장기계의 중심멤버가 된다.

1989년 젊은사자전 결승에서 하부에게 패배, 그 6일후의 C급 1조 순위전에서도 하부에게 패했다. 검토가 끝난 후 하부는 자리를 뜨면서 ‘열심히 승급하세요’라고 말을 했다고.

이듬해인 1990년 10월 1일, 제13회 젊은사자전 결승에서는 사토 야스미츠를 상대로 기전 첫 우승을 달성.

1992년에는 제42기 왕장전의 도전자가 되어 타니가와 코지를 상대로 싸웠는데 대국에 사용할 일본전통옷의 장만이 늦어서 제3국쩨에야 입을 수 있었다. 이 대국은 서로 망루 전법으로 상대했지만 첫수부터 마지막까지 비차를 사용하지 않는 보기 드문 한판이 되었다. 비록 4-0 스트레이트 패를 당했지만 ‘무라야마 답지 않은 막판의 실수’라는 이야기를 타니가와가 할 정도로 아쉬운 대전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무라야마의 최초이자 마지막 타이틀 도전이 되었다. 순위전에서는 이 시기 좋은 성적을 거두며 2년 연속 승급, 1993년 봄에는 B급 1조까지 승격했다.

1994년 1월 12일, 스승인 모리 노부오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무라야마는 피로연에서 ‘신문에 나오기 까지 제자가 모르고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이라고 웃는 얼굴로 너스레를 떨어 참석자들을 폭소케 했다.

그런 무라야마가 관서에서 관동으로 이적을 결심, 모리도 무라야마 자신을 위해서 찬성했다. 오자키가 아파트 몇 채를 후보로 골라준 중에서 무라야마는 일본장기회관까지 도보로 5분 거리인 곳을 거처로 잡았다. 도쿄로 옮긴 뒤에는 즐기는 것들도 늘어서 센자키 마나부, 고다 마사타카 등과 마작, 술을 즐기고 인생을 논하거나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1995년 4월 A급 8단까지 승격해 명인위를 사정권에 두었으며 1996년에는 제30회 속기 일본장기 선수권에서 우승. 이것은 무라야마에게는 신인 기전 이외의 유일한 우승이다. 같은 시기의 1997년 2월 28일 용왕전 1조 1차전에서는 하부를 상대로 70수째의 △7五비까지 우세를 점하며 제124수로 하부에게 승리, 통산전적 6승 6패를 이루었다. 그러나, 체력적인 문제로 탈진이나 혈뇨로 고생하는 등, 제한시간이 긴 순위전에서는 성적이 부진해 1997년 B급 1조로 강등되었다.

게다가 직후에는 진행성 방광암이 발견되어 히로시마 대학병원에 입원, 무라야마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는 것을 우려해 수술을 거부했지만 수술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경험담을 듣는등 의사의 노력에 설득되어 결국 수술을 받았다. 한쪽 신장과 방광을 적출하는 8시간 반의 대수술을 받고도 휴장없이 대국을 계속했고 "정신에 악영향이 있어서 장기를 두기 어렵게 된다"며 항암제 치료와 방사선 치료 및 진통제도 거부했다.

수술 후 첫대국인 제56기 B급 1조 순위전 2차전은 마루야마 타다히사가 상대였는데, 각행교환 봉은의 심각한 전개에서 심야에 이르는 혈투를 벌였다. 제한시간을 다 쓰고 1분 장기가 된 상황에서 무라야마는 억지로 마루야마의 옥에 외통을 걸었으나 결국 잡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33수의 수순으로 마루야마의 승리. 그러나 병마에 시달리면서 치른 대국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격전으로 전설처럼 남은 명국이 되었다. 의사에게는 ‘도망쳐서라도 가겠다’라고 말하며 의지를 보여 비록 첫 대국에서는 패했으나 집념으로 1기만에 A급에 복귀했다.

같은해 NHK배에서는 결승까지 올라 하부 요시하루를 상대했다. 무라야마가 종반까지 우세했지만 초읽기에서 실수(68수째의 △7六각)로 우승을 놓쳤다. 방송후 인터뷰에서 ‘우승할 수도 있었는데’라고 너스레를 떨은 이 대국이 하부와의 마지막으로, 처음에 3연패를 당한 이후 꾸준히 뒤를 쫓아 6승 7패로 마감했다.

그러나 1998년 봄, 암이 전이되어 재발한 것이 발견되어 ‘1년간 휴양에 전념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모리는 ‘1년쉬면 약해진다’고 말했지만 무라야마는 ‘생명이 더 소중합니다’라고 대답해 모리는 변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3월의 마지막 대국을 5전 전승으로 마치고 대국을 떠나 A급 복귀 축하뒤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해 일본장기연감의 ‘금년폭표’에는 ‘삶’이라고만 적었다.

이후 히로시마 대학병원의 이름표 없는 병실에서 휴양하던 중 29살의 나이로 사망. 희미한 의식속에서도 기보를 외우고 있었으며 마지막 남긴 말이 "...2七은"이었다고 한다. A급에 제적한 상태로 사망한 것은 오오야마 야스하루, 야마다 미찌요시, 무라야마 사토시 3명 뿐이다. 본인의 희망에 따라 장례는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루었지만 그의 죽음이 일본장기계에 전달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장기연맹은 그의 공적을 기려 서거한 다음날인 8월 9일부로 9단을 추증했다. 또한 일본장기 연맹이 발간하는 잡지 "장기세계"는 98년 10월호를 "특별추도호, 잘가시오 무라야마 사토시 9단"이라는 제목으로 발행해서 무관 기사의 죽음을 애도했다.

무라야마 사토시를 그린 작품

2000년, 그의 생애를 그린 "사토시의 청춘"(오사키 켄쇼 저)가 출판되어 제 13회 신초 출판사 학예상, 장기 펜클럽 대상을 수상했다. 이것이 2001년에는 신춘 스페셜 드라마 "사토시의 청춘"(쥬고쿠 방송국 제작)로 TBS 계열에서 전국으로 방송되었다. 연극 대본이 되어 몇번이나 무대에서 상연되었다.

1991년 1월 29일에 방송된 "20세기의 놀라운 일들"과 2001년 2월 11일 방송된 "알고계시나요?"에서도 그의 생애를 그린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국내에서 소개되어 있는 학산출판사 출판의 "천재기사 사토시"는 "사토시, 천재기사 - 하부 요시하루가 두려워한 남자"를 만화로 만든 것이다.)

월하의 기사에 등장하는 무라모리 사토시의 모델이기도 하다.

만화 ‘3월의 라이온’에 등장하는 ‘니카이도 하루노부’의 모델도 무라야마 사토시다.

http://ja.wikipedia.org/wiki/%E6%9D%91%E5%B1%B1%E8%8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