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부 요시하루, 최강의 기사 본문

Shogi/Player

하부 요시하루, 최강의 기사

아르미셸 2008.03.21 15:39

하부 요시하루(羽生善治) (1970년 9월 27일 ~ ) 후타카미 타츠야 9단 문하. 기사 번호 175. 1996년 일본장기계 최초로 7관왕에 올랐다.

개요

사이타마현 토코로자와 출생 (출신지는 도쿄 하치오지). 통산 타이틀 획득수는 오오야마 야스하루에 이어 역대 2위. 총 7개 타이틀 중 사상 최초의 영세 6관 칭호 자격 보유자. 하부 본인 외에도 비슷한 연배의 기사들 중에 실력자들이 집중되어 있어 이들을 ‘하부 세대’ 라고도 부른다.

프로 데뷔까지의 이력

초등학교 1학년 때 장기를 배워 그 이후에 하치오지의 장기 도장에 다니면서 실력이 부쩍 자랐다. 부모가 쇼핑을 할 때에는 장기 도장을 탁아소로 이용했다고. 초등학교 3학년때 아마 초단, 4학년에 4단, 5학년에 5단으로 장기실력이 급상승해 이때 이미 아마추어 강호 수준의 실력이 되었다. 일반인의 수준으로는 너무 강했기 때문에 가족끼리 장기를 두다가 불리해지면 장기판을 180도 회전해서 그때까지 열세이던 쪽을 요시하루가 두게 한다는 룰이 있었다.

5학년 때에는 이미 관동 각지의 유년부 장기 대회를 제패했다. 모친이 아이를 쉽게 찾기 위해서 언제나 히로시마 카프의 붉은 모자를 씌웠고 이 때문에 "공포의 빨간모자"라고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덧붙여 본인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이라고.

마찬가지로 유년부 장기대회의 단골 상위권인 모리우치 토시유키와는 이 때부터 이미 라이벌 관계 였다. 1982년 초등학생 명인전에서 우승했고 토시유키는 3위. 당시의 해설자가 타니카와 코지(당시 19세로 8단)였다.

초등학생 명인전에서 우승하고 장려회에서는 1년만에 6급에서 초단이 되는 경이로운 속도로 승급, 승단을 거듭한 끝에 가토 히후미, 타니가와 코지에 이어 사상 3번째 중학생 기사가 되었다.

전적

데뷔와 스타덤

1985년 프로에 입문한 이듬해에 전체 기사중 최고승률인 .741을 기록하며 장기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하부를 필두로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동년배의 강호기사들과 이른바 "차일드 브렌드"라는 신세대의 강호그룹을 형성하고 그 대표격이 되어 유명해졌다.

그리고 1988년 5단으로 NHK배에서 오오야마 야스하루, 가토 히후미, 타니가와 코지, 나카하라 마코토 이상 4명의 명인 경험자를 차례로 꺽으며 우승, 마치 연출한 듯한 세대교체극으로 많은 일본장기 팬들의 뇌리에 하부 요시하루의 존재를 강렬하게 심어주며 스타덤에 올랐다. 특히 가토 히후미와의 대전에서 나온 5二은의 수는 대단히 유명해서 해설하던 요네나가 쿠니오도 경탄한바 있다. 동년도에 대국수, 승리수, 승률, 연승 4부문의 기록을 독점, 무관인데도 불구하고 장기 대상의 최우수 기사상을 최연소로 수상했다.(당시 나이 18세) 그해 NHK배의 우승 외에도 신인왕전, 올스타 토너먼트전에서 우승

1989년 12월 제2기 용왕전에서 3조의 승자가 되어 도전자 결정 토너먼트를 통과하고 맞이한 첫 타이틀 매치에서 ‘시마 연구회’의 스승이며 전년도 초대 용왕에 오른 시마 아키라에게 도전해 4승 3패 1무로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해 당시로는 최연소인 19세 2개월에 타이틀을 획득했다.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은, 불과 1년이도 안지나서 야시키 노부유키가 갈아치웠다.) 이듬해인 11월에 타니가와 코지에게 1-4로 패배하며 무위가 되지만 (그때 직함은 "전 용왕") 3개월 후인 1991년 2월 기왕전에서 미나미 요시카즈에게 3-0으로 기왕위를 획득, 그 이후에 무관인 적이 없다.

7관왕을 향하여

1992년 제40기 왕좌전에서 후쿠사키 분고를 꺽고 첫 2관왕이 되었다. 하부의 왕좌전 연패 기록은 여기서 부터 시작된 것으로 나중에는 오오야마의 동일 타이틀 최장기간 연패기록을 갱신하기에 이르렀다. 같은해의 제5기 용왕전에서도 타니가와에게 승리, 3관왕대 2관왕의 텐노잔 [각주:1] 대결을 제압했다.

1993년, 기성과 왕위를 각기 타니가와와 고다 마사타카에게서 탈취해 5관왕(오오야마, 나카하라에 이어 3번째)이 되었다. 하부는 이 시점에서 처음으로 7관왕을 의식했다고. 하지만 용왕위를 사토 야스미츠에게 빼앗겨 4관왕으로 머물렀다. 한편 순위전에서는 1991년도의 B급 2조에서 2분기 연속 승격하며 A급 기사가 되었고 이어서 맞이한 제52기 A급 순위전에서 타니가와와 나란히 7승2패로 1위에 올라 플레이오프 끝에 타니가와를 누르고 A급 기사가 된 첫 해에 명인위 도전권을 얻었다. 1994년의 제52기 명인전 상대는 지난해에 명인위에 오른 사상 최고령 명인 요네나가 쿠니오로 하부는 3연승 후 2연패를 당한 6국에서 승리, 명인이 되었다. 같은 해에는 용왕위를 사토 야스미츠에게서 탈취해 일본장기사상 최초로 6관왕이 되었다. 이제 전관왕까지 남은 타이틀은 타니가와가 보유한 왕장위 하나만을 남겨둔 상태에서 고다 마사타카와 왕장리그 플레이오프를 겨루어 승리하고 왕장 도전권을 얻었다. 이 때 통산 타이틀 획득수는 타니가와의 20기를 넘어 오오야마, 나카하라를 뒤따르는 역대 3위로 1995년 전관왕을 목표로 타니가와 왕장에 도전했다.

이 제44기 왕장전과 함께 진행된 기왕전 5번국에서는 모리시타 타쿠를 상대로 일찌감치 3-0 스트레이트 승을 거두며 최고조에 오른 하부는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제7국을 맞이했다. 서로 망루 전법을 사용해서 일단 천일수가 성립, 재경기를 치르게 되자 전 대국과 똑같은 수순으로 40수까지 진행하다 41수째를 타니가와가 바꾸면서 명승부를 펼친 끝에 결국 타니가와의 111수에 하부가 투료, 전관제패는 한발만을 앞둔 상태에서 저지되었다. 한신 대지진을 극복한 타니가와의 투지 앞에 패한 하부는 이제 2, 3년 동안 7관왕의 기회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하부는 기왕전(대 모리시타 타쿠), 기성전(대 미우라 히로유키), 왕위전(대 고다 마사타카), 왕좌전(대 모리 게지), 용왕전(대 사토 요시미츠)의 6개 타이틀을 모조리 방어하고 제45기 왕장리그에서 나카하라에게 1패를 당했으나 무라야마 사토시, 모리우치 토시유키, 마루야마 타다히사, 고다 마사타카, 아리요시 미치오 를 차례로 꺽으며 5승1패로 1위를 차지해 2기 연속으로 타니가와 왕장에 도전권을 따냈다.

운명의 제45기 왕장전 7번국은 작년과는 달리 깔끔한 하부의 3연승을 거두며 기세좋게 밀어붙였고 특히 제4번국에서는 저단 시절에 타니가와가 주특기로 사용해 어린 시절의 하부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횡보잡기 대결에서 이긴 것으로 감회가 남달랐다. 타이틀이 7개로 늘어난 1975년 이후, 전관제패는 사상최초의 쾌거로 다음날 일간지의 1면을 장식했고 종국직후에는 생중계로 뉴스 속보가 나오는 등, 장기의 세계를 넘어 사회 전체에 대대적인 이슈가 되었다. 직후에 기왕전 방위에도 성공하여 그 해의 전7관왕 제패도 달성했다. 이 해에는 텔레비전 기전의 NHK배, 장기 선수권까지도 우승해서 그 해의 승률은 타이틀전 때문에 강호들과의 대국이 끝없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역대 2위인 0.8364라는 경이로운 수치였다.(46승9패 가운데, 타이틀전만으로는25승5패(.8333). 그 해의 최종전에서 만약 이겼다면 이전의 최고승률이었던 나카하라의 0.8545 47승 8패와 동률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관제패를 달성한 4개월 후, 제67기 기성전에서 미우라 히로시에게 2-3으로 패배, 전관독점은 167일로 막을 내린다.(1996.02.14~07.30) 최종국면에서 선수인 미우라가 당시로는 보기 드문, 서로 걸치기 2八비 전법을 사용했다. [각주:2]

7관왕 이후

미우라에게 기성위를 빼앗긴 해의 제9기 용왕전과 이듬해 1997년 제55기 명인전에서 양대 타이틀을 모두 타니가와에게 빼앗기며 4관왕으로 후퇴했다. 이 명인전에서, 타니가와는 명인위획득 통산5기가 되어, 17대 명인 자격을 얻었다. 이 즈음부터 획득 상금, 대국료 랭킹 1위는 하부의 지정석처럼 되어 있었지만 1997년만은 양대 타이틀을 차지한 타니가와 용왕 명인의 차지였다.

같은해 제47회 NHK배 결승에서는 무라야마 사토시와 대국, 종반에서 무라야마가 둔 악수에 힘입어 4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한때 하부와 자웅을 겨룬다던 무라야마와의 마지막 대결로 5개월 후 무라야마 사토시는 병마로 사망했다.

2003년도의 제51기 왕좌전에서 젊은 도전자 와타나베 아키라를 맞이해 고전끝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종반에 승리가 확실시 되었을 때 손을 심하게 떨며 말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

같은해에 용왕전, 왕장전, 명인전을 모리우치 토시유키에게 모두 빼앗겨 영세 용왕, 영세 명인 획득도 멀어졌고, 이 시점에 11년 9개월 만에 왕좌의 1관만을 쥐는 상태가 되었다. [각주:3] 당시의 일본장기계는 모리우치 용왕명인(왕장까지 합해 3관왕), 타니가와 왕위기왕(2관왕), 사토 기성, 하부 왕좌로 이어지는 상황이라 하부 요시하루는 일본장기계 최강의 자리를 빼앗기고 무관으로 떨어질 위기까지 맞이한 듯 했다. 하지만 2004년에 왕위, 왕장, 기왕을 탈환하여 왕좌까지 방위 금새 4관왕으로 되돌아온다.

2005년 제53기 왕좌전에서는 사토 요시미츠를 꺽고 [footnot] 이 때 3연승후 3연패를 당해 하마터번 일본장기 기전사상 최초로 3연승후 4연패를 당할 뻔 했다. 3연승 3연패로 최종국을 맞은 것은 1978년의 10단전에서 나카하라 마코토 10단이 요네나가 쿠니오 8단의 도전을 받아 방위한 이후 2번째 장기계에서는 드문 일이지만 일본 바둑에서는 그 정도로 드물지는 않다. 참고로 하부는 영세용왕위를 건 와타나베 아키라와의 대국에서 결국 3연승후 4연패를 당한다. [/footnote] 왕좌전 14연패를 달성, 오오야마 야스하루의 동일 타이틀 13연패 기록(1959 ~ 1971)을 넘었다. 한편 같은 해의 순위전에서는 8승 1패의 성적을 거두고도 타니가와 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패해 명인도전을 놓쳤다. 8승으로 명인위에 도전할 수 없었던 유일한 케이스. 이 플레이오프의 1국은 상당히 내용이 높게 평가되어 제 34회 장기대상 명국상을 수상했다.

2006년 왕위, 왕좌, 왕장을 방어해서 삼관왕. 왕좌 방위. 이 시점에서 통산 타이틀 획득 65기로 나카하라 마코토의 64기를 넘어 통산 타이틀 획득수에서 단독 2위에 올랐다. 이듬해 후카우라 코이치에게 왕위를 빼앗겨서 2관왕으로 후퇴했지만 제7국의 종반전이 높게 평가되어 2년 연속 장기대상 명국상을 수상했다.

2007년, 12월20일, 제66기 A급 순위전 6회전에서 쿠보 토시아키를 격파하고 사상 8번째로 최연소, 최고속, 최고승률 통산 1000승을 달성. 다시 2개월 후인 2008년, 2월28일, 제57기 왕장전 제5국에서 쿠보 토시아키를 물리쳐, 사상 2번째로 기전 우승 100회도 달성했다. (타이틀 획득68기, 일반 기전 우승32회)

2008년, 6월 17일 제 66기 명인전에서 모리우치 명인을 꺽고 명인위를 획득해 3관왕으로 복귀, 통산 5회 명인위 획득으로 영세 명인위를 획득하면서 오오야마 야스하루와 나카하라 마코토의 영세5관왕을 뛰어넘는 최초의 영세 6관왕(영세 명인, 영세 기성, 영세 왕위, 명예 왕좌, 영세 기왕, 영세 왕장)을 달성했다. 같은해 12월 17일에는 또하나의 영세타이틀을 걸고 와타나베 아키라에게 도전했다. 와타나베가 이긴다면 연속 5기 규정으로, 하부가 이긴다면 통산 7기 규정으로, 어느쪽이 이기건 초대 영세 용왕이 탄생하는 이 7번국에서 3연승후 4연패로 패배해, 일본장기계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이로써 영세 7관왕과 초대 영세용왕위 획득은 실패. 다만, 최종국 종반전의 형태가 높이 평가되어 3년 연속으로 장기대상 명국상을 수상했다.

2009년 제67기 명인전에서 고다 마사타카를 물리치고 방어, 통산 6기로 타니가와를 물리치고 현역 기사중 명인 재위수로 1위, 역대 4위에 올랐다. 같은 해에는 제57기 왕좌전에서 야마자키 다카유키를 3-0으로 꺽고 타이틀을 방어.

2010년에는 제51기 왕위전에서 도베 마코토를 꺽고 통산 1100승 달성. 그해 타이틀전 출장 100회째가 된 기성전도 스트레이트 승을 거두었으며 제58기 왕좌전에서도 후지이 타케시를 상대로 역시 스트레이트 승, 동일 타이틀전 연패 기록을 19기로 연장하고 동일 타이틀 6기 연속 스트레이트 방어 성공이라는 기록도 달성했다. (종전 기록은 본인이 달성한 4기 연속).

2008년의 제58회 부터 2010년의 제60회까지 NHK배 장기토너먼트 결승전에서 사상 첫 3연패. 통산 우승 9회로 단독 선두에 오르며 일본장기 사상 최초로 ‘명예 NHK배 우승자’라는 칭호까지 1기만을 남겨두었다.

기풍

앉은비차, 몰이비차, 서로 몰이비차 등등 어떤 전법이라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자타공인 올라운드 플레이어.

좋아하는 말은 공방의 핵심인 은장이라고 한다.

대국에 있어서 종합적인 역량이 강해서 카츠마타 기요카즈에 의하면 ‘오오야마의 수비, 나카하라의 자연스러운 공격, 가토의 중후한 공격, 타니가와의 광속 몰아가기, 사토의 치밀한 수읽기, 마루야마의 돌리기, 모리우치의 받아치기 등 역대 명인들의 장점을 필요한 상황에 사용하는 ‘역대 명인의 장점을 모두 겸비’한다고 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종반으로 이어지는 절묘한 수순, 다른 기사가 생각하지 못하는 독특한 공격순서로 역전하는 것 때문에 "하부 매직"이라고도 부른다.

금장이나 은장을 8三에 치는 대국의 승률이 높기 때문에 이른마 이것을 "하부존"이라고도 부른다. 보통은 사용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본인의 저서에서 밝힌 바로는 ‘보다 성장하기 위해 도망치지 않고 굳이 상대가 잘하는 전형에 도전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밝히고 있다.

오랜 라이벌 모리우치 토시유키는 ‘하부의 대단함은 주위의 수준을 올리면서 그에 맞추어 자신의 수준도 높이는 것에 있다.’면서 ‘승부의 세계에서 주변과의 차이를 벌리는 것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관전 기자들 중에도 ‘감상전에서 하부는 다른 수순을 자주 보여주는데 나중의 대국을 위해서 아껴둔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다.

후카우라 코이치는 2003년 ‘2관왕으로 후퇴했지만 여전히 하부가 최강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비교하면 아직 멀었다’고 말했다.

나카하라 마코토의 경우 제49기 왕위전 특집에서 ‘올라운드 플레이어라는 것이 단점이 아닌 사상 최초의 기사’라고 평하면서 슬럼프에 빠졌을 때의 하부에 대해서는 목표가 없었을 뿐이라면서 이제는 ‘오오야마 선생의 기록을 목표로 정진하고 있다’고 보았다.

타니가와 코지는 자신의 저서 ‘집중력’을 통해 ‘하부 씨는 어떤 전법을 사용할지를 알 수 없는 기사. 변환이 자유 자재로 공수 모두에 강하고 집념이 전혀 없으므로 기풍 자체가 없다’면서 2008년 하부가 영세 명인에 등극했을 때에는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내용 중심의 장기’라고 평가했다. 하부 본인도 2007년부터 이제 승패에 집착하는 장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자신의 포부를 밝힌적이 있다.

발언

- 장기와 인생은 별개. 유희는 예술의 거름이라는 말은 놀기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 잘 모르는 승부처에서는 수를 읽기보다 배짱으로 도전한다.

- 수읽기는 연속해서라면 30~40수, 지엽적으로 나누어 본다면 300~400수.

- 기억력의 정점에 도달한 것은 20세 무렵이었다. (즉, 7관왕 재패시기에는 이미 하락세였다.)

- 1회 대국으로 3kg 정도가 빠진다.

- 자신에게 약점이 있음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것이 승부의 세계

- 지금의 정보화 사회에서 지식은 큰 의미가 없다. 앞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결단력이다.

- 혼자서 달려왔다면 지금의 위치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하부 세대 전체가 함께였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대국에 관한 에피소드

중요대국

첫 타이틀이었던 용왕위를 잃은 1990년의 용왕전 7번국은 타니가와가 3연승을 거둔 뒤, 하부가 1승을 거두고 4-1로 타니가와가 승리해 마무리 되었다. 이때 3연패로 코너에 몰린 제4국은 입옥이 아니었는데도 203수라는 긴 수순의 격전이었다. 이 대국에 대해서 하부는 ‘그때까지는 승급, 승단, 타이틀 같은 기록을 보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대국관을 바꾸게 된 대국’이라며 가장 인상깊은 대국으로 술회했다. 타니가와도 이 때를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은 대국’이었다면서 4-0이었는가 4-1이었는가는 이후의 전개를 생각해보면 큰 차이였을지도 모른다고 술회했다.

영세칭호자격 획득에 있어서 일본장기계의 양대 타이틀인 명인과 용왕의 두개만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영세 명인 자격은 모리우치에게 2연패를 당하며 먼저 내주었고 용왕위도 와타나베 아키라에게 내주었다. 나중에 본인의 저서에서 3연승을 거두면 불안해서 기분이 나질 않는다라고 적기도.

제67기 명인전 7번국의 제1국 2일째에 대국중이던 하부에게 관전기자가 부채에 휘호를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하부는 44수 째를 고려하는 중이었는데 부채를 받아들고 싸인을 해주었다. 이것은 아침 9:45의 일이었으므로 실시간으로 중계되어 파문이 컸다. 하부 본인은 ‘놀라기는 했지만 10초, 15초에 끝났다’고 말했으나 회사측에서는 엄중한 주의를 주었다. 문제를 일으킨 히가시 고헤이는 ‘(전부터 알고지내던 사이라) 그만 이런 일을 해버렸다’고 반성의 뜻을 비추었다. 덧붙여 이 대국에서는 승리했다.

습관

말을 내려놓을 때, 가는 손가락을 곧게 펴서 손등에 골격이 드러난다. 첫수를 둘 때에는 말을 느리게 춤추듯이 움직이며 내려놓는다. 특히 ▲7六보인 경우에는 왼쪽 대각선으로 춤추듯이 올리는데 다른 기사들과는 다른 특징이다.

쳐내린 말을 한층 더 손가락으로 반에 꽉 누르는, 이른바 "그리그리"를 하는 일이 있다. 무의식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승부처나 종반전에서 승리하는 수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2003년도 왕좌전 이후 30대에 들어서면서 간혹 손가락을 떨어 말을 제대로 내려놓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다나카 토라히코는 NHK배에서 하부의 장기를 해설할 때에 ‘입스가 나오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

프로 데뷔 초기에는 안경너머로 상대를 노려보는 듯한 이른바 ‘하부 노려보기’로 상대를 떨게하는 일이 있었다. 사토 야스미츠나 타무라 코스케 등도 이런 ‘주시파’ 나중에 스승인 후타가미 타츠야가 자제하라고 말했다고.

처음으로 용왕위를 획득했을 때 선배기사와 대국하는데 상석에 앉아야 하는지 하석에 앉아야 할지 대국자가 올 때까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1990년 용왕위를 잃은 뒤부터는 타이틀에 걸맞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그 후 1994년의 A급 순위전 8라운드 대 나카하라 마코토 전 (당시 전 명인)에서 하부 4관왕이 윗자리에 앉은 것도 ‘윗자리 사건’이라고 불리며 물의가 빚어졌다. 하부는 그때까지 리그의 성적에서 자신이 앞섰기 때문에 착각했다고 밝혔다.

상대가 나쁜 수를 두면 화를 낸다. 하부가 승리한 제57기 왕좌전 제2국에서 도전자 야마자키 타카유키가 어려운 국면을 잘못읽었을 때에도 ‘하부는 승리에 만족하는 분위기가 없고 오히려 실망하거나 화가 나는 것 같다’고 적고 있다. 본인도 ‘상대와 자신 어느쪽이건 악수를 두면 최선의 수를 노릴 기회가 없어져서 화가 난다’고 발언했다.

기타 대국

첫 5관왕이던 시절에는 후리고마로 선수를 차지할 경우가 많아서 ‘후리고마’에도 강하다는 말을 들었다. 1992년과 1993년의 타이틀전에서는 총 12번에 걸친 후리고마에서 전부 선수를 차지했다.

처음으로 NHK배에 출전했을 때 상괘 전법의 당연한 수순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생각을 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든적이 있다.

1993년 대 타니가와 기왕전 결승에서 초반에 4四보로 4二각을 잡으면서 왕을 사정권내에 두었지만 그 대신 향차를 노리고 8九 9九로 이동시키면서 2수나 말을 ‘퇴각’시키는 장기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수를 사용해서 여기에 응한 타니가와 코지와 난전을 벌인 끝에 종반에만 80수가 넘는 대난전을 벌였다. 결과적으로는 하부 요시하루의 승

1994년 처음 명인위를 차지한 직후, NHK배의 대 하타케야마 전에서 상대의 첫수 ▲2六보에 대해 △6二은을 두었다. 10수째에 △3四보까지 하부의 보는 1개도 움직이지 않는 보기드문 서반이었다. 그야말로 명인에게 정석없음이라는 일본장기계의 격언을 실행하고 그것으로 승리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상대의 ▲7六보에 대한 △6二은인 경우도 여러번 사용했는데 이것은 상대가 몰이비차 파인 경우에 가끔 사용되지만 하부는 실전에서 타니가와 코지, 고다 마사타카, 모리시타 타쿠 등 앉은비차 파의 기사들을 상대로 사용했다. 나중에 본인은 두번째 수의 △6二은은 손해지만 어느 정도 손해인지를 알기 위해서 사용해 보았다. 이제는 알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라고.

2007년, 10월14일 NHK배전에서는 나카가와 다이스케로부터 기적적인 역전 승리를 거두었다. 해설하던 가토 히후미가 ‘NHK배전 사상 초유의 대역전’이라고 말하게 할 정도.

2008년의 제66기 명인전 제3국에서는 검토하는 기사들이 모두 모리우치의 승리를 점치고 있던 상황에서 경이로운 역전승을 이루었다. 마지막에 모리우치의 실수도 있었지만 하부는 계속 불리함을 느끼고 있어서 약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의 수만을 생각한 결과 승리를 끌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입회인을 맡은 후카우라 코이치는 50년에 1번 나올까 말까한 대역전이라고 표현.

사상 초유의 인터넷 공식기전인 다이와 증권배 장기최강전(2008년 5월 11일) 마우스 조작 실패로 반칙패를 당했다. 하부가 우세를 굳히고 있던 상황에서 당한 첫 반칙패로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에피소드

평소에는 담담한 어투를 사용하지만 인터뷰에서 중요한 대목을 추궁하면 ‘그렇지 아, 음… 뭐,’라고 서론을 길게 끌며 단어를 신중히 선택하는 버릇이 있다.

잠버릇이 고약하다고 소문이 나있다. 결혼한 후에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유명한 버릇

‘가자 전파소년’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19매 떼기로 승리했다.

장기 계통의 게임은 전부 할 수 있다. 체스가 취미로 일본 1위를 노리는 굴지의 강호.

월하의 기사의 주인공인 히무로 쇼스케의 모델이다. 다만, 모델로 하는 것은 그 압도적인 힘과 아우라만으로 성격이나 외모는 별 관계가 없다.

대국의 해설을 맡을 때 다른 기사들과 비교해보면 말의 움직임이 특이하다. 예컨데 상대의 말을 잡을 때에 그냥 들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막 장기를 배운 어린아이처럼 말을 쭈욱 밀어서 상대의 말에 부딪히고 대각선 방향으로 밀어내 버린다. 이것 때문에 옆에있는 말들까지 영향을 받아서 다들 삐뚤빼뚤해지는 일이 있다.

기록

타이틀 관련

최장기간 타이틀 보유 19년. 1991년 이후 기왕위 이후
동일 타이틀 연속 보유 19기. 왕좌 연속 재패중.
동일 타이틀 연속 승리 19회. 왕좌. 연승중
영세 타이틀 획득 6개

우승 관련

NHK배 우승 9회
NHK배 연속 우승 3회
올스타전 16연승

연도 기록

최연소 최우수 기사상 18세
최다승 68승(2000년)
최다대국 89국(2000년)
장기대상 4개부분 수상(최다대국, 최다승, 승률1위, 연승) 4회.(하부 요시하루 이외에는 달성한 사람이 없다.)
최우수 기사상 수상 18회

통산 기록

최소기간 1000승
최연소 1000승
1000승 달성시 최고 승률 .7283
통산 600승과 800승 달성시에도 모두 최고 기록

진기록

일본장기 타이틀 전 사상 최초 3연승 후 4연패
최연소 용왕전 1조 강등 (20세 11개월 23일)
타이틀 홀더 최연소 용왕전 1조 강등

상금관련

획득 상금, 대국료 랭킹 13년 연속 1위. 통산 17회 달성

http://ja.wikipedia.org/wiki/%E7%BE%BD%E7%94%9F%E5%96%84%E6%B2%BB

  1. 텐노잔은 일본 전국시대의 유명한 전장으로 이곳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 제패의 기틀을 닦는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는 3관왕이던 타니가와와 2관왕이었던 하부가 타이틀을 걸고 대국해 양자의 타이틀 수가 바뀐것을 비유함. [본문으로]
  2. 하부 요시하루의 전관독점 직후에 장기 매거진이 하부로부터 최초로 타이틀을 뺏어내는 것은 누구일 것인가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니가와나 사토 야스미츠를 들었고, 미우라를 꼽은 사람은 불과 4명 뿐이었다. [본문으로]
  3. 이 용왕전에서는 0-4의 스트레이트 패배. 타이틀전에서 스트레이트 패배를 당한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본문으로]
3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