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시타 타쿠(森下 卓, 1966년 7월 10일 ~ ) 기사 번호 161. 후쿠오카 현 키타큐슈 출신. 고 하나무라 모토지 9단 문하.
기력
10살때 아버지에게 배워서 일본장기를 시작해 불과 2년만인 1978년 장려회에 입회했다. 1983년 17세 9개월에 프로데뷔, 이후 하부 세대라고 불리는 동료 기사들과 함께 차일드 브랜드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1990년, 신인왕전 결승 3번국에서 오노 야이치오를 2-0으로 꺽고 우승 이듬해에는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 결승 5번국에서, 키리야마 키요시를 3-1로 꺽고 우승했다. 2007년에는 JT장기 일본시리즈에서 와타나베 아키라 용왕, 사토 야스미츠 기성, 모리우치 토시유키 명인을 연파하고 우승,
23, 24살 무렵에는 강하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우승은 당연하다고도 생각했지요. 완벽한 수로, 완벽하게 이기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장기를 두었죠. 각행교환이 최신유행일때에 수도없이 연구를 거듭하던 무렵에는 ‘승부술’이라는 말 자체가 싫더군요.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없는사람의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요즘에 들면서 그런 생각이 바뀌더군요. 젊어서는 체력도 충실하고 기력도 강했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26살 쯤부터는 그 반동이랄지 느슨해지면서 살아가는 동안 "군살"이나 "잡동사니"같은 것이 따라붙기 시작하고, 열심히 하려고 해도 쉽지 않더군요.
전에는 생애 1,500승을 목표로 내걸었고 공언도 하고 있었습니다. 오오야마 야스하루 선생님의 통산 1,433승을 의식한 것이었습니다만,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죠. 하지만 다 말뿐이고 공염불이 되어갔습니다. 우승에는 완전히 멀어졌는데 초조하지도 않았죠. 초조하다는 건 열심히 하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완되었다랄지, 잔재주랄지, 그저 타성적으로 이어질 뿐이고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되다보면 역시 안되었구나 라는 생각에 저 자신도 싫어질 정도였죠. 그래서인지 A급에서 강등되었을 때(36세)에도 솔직히 말하면 별로 아프지 않고, 오히려 잘도 지금까지 버텼구나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금년 3월, 복막염으로 수술을 했습니다.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라고 의사에게 들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40세도 넘고 중병도 앓으면서 기사로서 이대로 끝낼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대로일 수는 없겠더군요. 지금부터는 한번 더 원점으로 돌아가 반상 외곬로 살고 싶습니다. 프로를 목표로 하던 30년전의 장려회 당시와 같이요. 역시 기사는 "장기가 강해지고 싶다"는 기분을 잃으면 마지막이니까요. (우승 당시의 인터뷰)
이듬해에도 동문인 후카우라 코이치를 꺽고 2연패를 달성했다.
불명예스러운 별명
젊은시절 용왕, 명인, 기성, 기왕(2회), 왕장 까지 모두 6번 타이틀 매치에 도전했지만 전부 패해서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고 있다. 타이틀 도전 6회는 타이틀 미 획득자 중에는 최고 기록으로 모리시타가 타이틀 보유자가 아니라는 것은 일본장기계 불가사의 중 하나.
- 1990년, 기성전(후기)에서 야시키 노부유키에게 1-3으로 패배.
- 1991년, 용왕전에서 타니가와 코지에게 2-4(비김 1회)로 패배.
- 1994년, 기왕전에서 하부 요시하루 에게 0-3으로 패배. 영세 기왕위 획득의 제물이 됨.
- 처음 참가한 1994년 A급 순위전에서 나카하라 마코토와 플레이오프를 거쳐 승리하고 1995년의 명인전에서 하부에게 도전했지만 1-4로 패배.
- 1996년, 기왕전에서 하부에게 0-3으로 패배.
- 1998년, 왕장전에서 하부에게 1-4로 패배.
1990년 신인왕전에서 우승할 때까지 결승까지는 많은 승리를 거두어 신인왕전 클래스 이상의 실력을 보이면서도 어째서인지 결승전에서는 져버리는 일이 반복되어 "준우승의 남자", "실버 컬렉터"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다. 일본장기계의 콩라인. 그 후로도 몇번이나 준우승을 맛보아야 했다.
- 1985년, 신인왕전 결승 3번국에서 1-2로 이노우에 케이타에게 패배.
- 1986년, 조지명 신예전 결승에서 오노 슈이치에게 패배.
- 1987년, 조지명 신예전 결승에서 츠카다 야스아키에게 패배.
- 1987년, 조지명 장기 선수권전 결승에서 아리요시 미치오에게 패배.
- 1991년, 조지명 신예전 결승에서 사토 야스미츠에게 패배.
- 1991년, 신인왕전 결승 3번국에서 모리우치 토시유키에게 0-2로 패배.
- 1991년,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 5번국에서 하부에게 2-3 패배.
- 1992년, 은하전 결승에서 고다 마사타카에게 패배(당시에는 비공식 기전)
- 1996년,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 결승 5번국에서 타니가와에게 2-3 패배
타이틀 도전과 기전 준우승은 그만큼 승수가 많다는 뜻이며 우승 경험이 없는 30대 기사지만 ‘8단 승단 이후 250승’이라는 규정으로 9단에 승단하는 진기록을 세웠다.(2000년대 들어 최초) 획득 상금랭킹의 단골 상위권이기도 하며 2010년 8월에는 사상 14번째로 800승을 달성했는데 타이틀전 우승 경험이 없는 기사로는 최초이다.
기풍
연구중심의 앉은비차파지만 맞비차등의 몰이비차도 종종 사용한다. 망루 전법의 대가로 모리시타 시스템을 고안해서 2005년 마쓰다 고조상을 수상했다.
기본적으로 수비형 장기로, 먼저 상대방에게 공격하게 하고 받아치는 것을 장기로 한다. 1
"말의 이익은 배반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길정도로 말의 수적인 이익을 중시한다. ‘보 1개 손해보면 나는 8개 상대는 10개니까 말 2개분 손해다. 보 셋을 손해본다면 6:12로 2배로 불리하다’는 것이 입버릇.
에피소드
스승인 하나무라 모토지는 진검사 출신으로 변칙적인 수가 특기였지만 모리시타는 하나무라에게 친절하고 자상하면서 정중한 지도를 받아 몇백차례라도 연습대국을 했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모리시타 본인은 완전한 정통파 기사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지극히 예의가 바르고, 아는 사람을 만나면 100m 떨어져 있어도 인사를 한다는 소문이 나올 정도로 장기계에서 가장 고지식하고 의리가 두터운 사람으로 통하며 규칙적인 생활에 매일 아침 5시 기상할 정도로,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은 프로기사들 사이에서는 이례적인 모범적인 생활을 한다. 또, 30세 생일에 꽃을 보내준 여성팬에게 바로 그 다음날 소인이 찍힌 답장이 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여성에게 상냥하고 예의바르다. 여류기사들 사이에서도 대화가 재미있는 기사로 인망이 높다.
그런 반면에 하부 요시하루가 전관왕을 달성했을 때에는 주변에서 칭찬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기사 모두의 굴욕이다’라면서 기개를 보이기도 했다.
한번은 스즈키 다이스케에게 "(컴퓨터)게임은 뭐가 재미있는가?"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게임의) 캐릭터가 성장한다던지 하는 면이 아닐까요"라는 대답에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실제의 자신이 발전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노래 실력이 훌륭한데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의 특훈 덕인지 나날이 실력이 발전하고 있다는 소문
http://ja.wikipedia.org/wiki/%E6%A3%AE%E4%B8%8B%E5%8D%93
- 스승인 하나무라가 기발한 공격적 장기를 좋아하던 기사였고, 또 장기계에서는 드물게 제자에게 직접 장기를 대국하는 (장려회에 재적하고 있는 제자와 장기를 둔다.) 일이 매우 많았기에 모리시타는 그 하나무라의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몸에 붙은 것이 아닌가 라는 설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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