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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6일전쟁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사이에 발발한 전쟁을 제3차 중동전쟁 또는 6일 전쟁이라고 한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포함한 전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일하고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중동의 패권국가로 입지를 굳혔다. 시나이 반도는 반환되었고 가자 지구와 요르단 서안에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들어섰지만 아직까지 골란고원은 이스라엘이 지배하고 있어 중동의 지정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배경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분쟁의 재개 참고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티란해협 봉쇄 참고

신생 이스라엘은 제1차 중동전쟁의 승리로 팔레스타인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성지 예루살렘 동시가지를 포함한 일부 주요지역을 요르단이 점령하고 있는 문제로 유대교 우파를 중심으로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

아랍측에서는 1964년, 요르단의 암만을 본부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결성되어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66년 2월에는 시리아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친PLO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반 이스라엘 분위기를 조성했고 골란고원에서 시리아군이 포격을 가하자 이스라엘도 반격에 나서 7월 공군을 동원해 시리아군과 교전을 펼친 끝에 포대를 파괴하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 상공을 이스라엘 공군기가 비행하는 등 무력시위로 대응했다. 당시 소련은 아랍측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는 일환으로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침공하려 한다는 정보를 시리아와 이집트에 알리면서 양국이 군사적 협력관계를 구축하도록 주선했다. 이에 시리아와 이집트는 전쟁에 대비해 국경 주변에서 방어태세를 강화했고 1967년 4월에는 요르단이 이집트와 공동방위조약을 맺어 이스라엘 정부의 침공에 대응하기로 합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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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스라엘은 모사드의 첩보활동에 의해서 아랍측의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아랍측과 소련의 군사적 긴장강화를 이유로 미국에 중재를 요구했지만 당시 베트남 전쟁에 몰두하고 있던 미국은 이 지역에 간여할 여력이 없었던 이유도 있어서, 아랍제국의 침공은 없다고 판단했다.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 초조해진 이스라엘은 전략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제기습 공격을 시도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개전을 준비했다. 소련측은 이 정보를 입수했지만 아랍측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개전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전쟁의 전개 참고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 공군기가 초저공 비행으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영공을 침범, 각국의 공군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하루만에 합계 410기 이상의 항공기를 파괴하면서 단숨에 제공권을 장악하고 지상군을 투입해 삽시간에 요르단 서안지구,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 골란고원 등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했다. 요르단과 이집트는 6월 8일에 정전했고 시리아도 6월 10일에 정전에 응했다. 이스라엘은 불과 6일만에 4배 이상으로 국토를 확대했으며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전역을 확보해 기쁨에 젖었다. 하지만 국제 여론은 이스라엘의 ‘침략’행동을 일제히 비난했고 이후에 이스라엘은 국제적 신용과 동정심을 잃게 된다.

정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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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전쟁의 결과 참고

1970년은 아랍이 나세르 주의가 몰락하는 전환점이 된 해로 9월에는 요르단이 PLO를 공격했고 내전이 발생하자 요르단은 아랍사회에서 고립당했고 PLO는 레바논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이집트의 나세르가 사망한 뒤 그를 계승한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강화를 목표로 평화회담을 진행하려 한다. 한편,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측은 복수를 다짐하는 아랍측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자만에 빠져 정보수집에 등한시 하고 기습에 의한 국제 사회의 신용 저하를 우려하게 되어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친 이스라엘 정책을 고수하던 영국과 프랑스도 정책을 아랍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전환하여 이스라엘에 무기수출을 정지한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중동에서 다시금 세력 불균형을 불러와 제4자 중동전쟁의 서전에서 이스라엘이 큰 피해를 입는 결과를 낳았다.

소모전쟁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소모전쟁 참고.

일단 정전에 합의했지만 아랍제국은 영토를 뺏긴 수모를 희석하고 국내의 불안을 무마시키기 위해 다시 이스라엘과의 분쟁에 나선다. 성지 예루살렘을 상실한 요르단은 국가적인 위신이 실추되어 정전후 반년만에 PLO를 지원해 요르단 서안을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대치하는 상황이었지만 1968년부터 이집트 군이 산발적인 포격을 개시하여 소모전쟁으로 불리는 포격의 보복전이 계속되었다. 이 포격전으로 수에즈 운하는 사실상 통행불가 상태에 놓였고 2년간에 걸쳐서 소모전쟁이 지속되었지만 1970년 6월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를 도하해서 이집트 군을 공격, 포격진지를 파괴하고 점령한 후 1개월 뒤에 물러나면서 양국은 정전에 합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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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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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중동전쟁

4차 중동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