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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4차 중동전쟁, 1. 만월의 밤

욤키프르 전쟁. 라마단 전쟁이나 10월 전쟁, 제4차 중동전쟁 또는 1973년 중동전쟁이라고도 한다. 1973년 10월 6일부터 26일까지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연합군이 유대인의 명절인 욤키프르에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개전후 24h~48h까지 이집트와 시리아 군은 이스라엘군에게 우위에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결사적인 방어로 공세가 돈좌되었다. 전쟁 2주째에 들어서면서 시리아는 골란고원 전역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남부전선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주력 2개 군의 연결부위를 돌파해서 수에즈 운하를 도하하고 이집트 제3군을 포위한 상태에서 국제연합의 정전명령이 발호되었다.

이 전쟁은 수많은 국가들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6일전쟁에서 이집트-시리아-요르단의 일방적이고 굴욕적인 패배를 경험했던 아랍권은 비록 결과적으로는 패했지만 전쟁초반에 일련의 승리를 얻음으로써 심리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 이로써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대등한 입장에서 평화노선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고 소련의 영향권을 벗어나 중동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배경

전쟁의 원인

4차 중동전쟁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후 수차례 반복되어 온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충돌의 일부분으로 이다.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고 수에즈 운하를 확보했으며 시리아의 골란고원 절반가량을 점령한 지점에서 휴전을 맞았다.

이듬해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의 점령지를 요새화 하기 시작했고 1971년,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 바-레브 라인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요새시설을 건설하는데 5억 달러를 투자했다. 계획의 발안자인 참모총장 체임 바-레브 장군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이 방어선은 수에즈 운하의 도하점들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수면에서 20~22m 높이에 45도 경사진 방어벽으로 적의 도하시도를 관측하면 장벽 바로 뒤에서 포격을 가할 수 있었다.


바레브 라인의 구조 http://www.irandefence.net/showthread.php?t=6772

24시간 순찰이 이루어지는 이 장벽의 장벽의 배후에는 전차부대와 포병이 대기하고, 7~10km간격으로 30여개소의 화력 특화지점이 존재하여 상호간에 지원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여러겹의 모래를 콘크리트 위에 씌워놓은 방벽은 소모기간 중 이집트가 보여준 맹렬한 폭격이나 포격에도 충격을 흡수해서 타격을 받지 않도록 설계되었고 만약의 경우 방어선이 위태로워 지더라도 수에즈 운하에 기름을 뿌려 운하의 수면을 불로 뒤덮어 도하시도를 차단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바레브 라인 http://www.flickr.com/photos/41809355@N00/877414678/

이러한 방어시설을 통하여 이스라엘군은 기존의 공세전략 대신에 방어전략을 수립함에 따라 새롭게 요구된 동원병력이 증편까지 시간을 확보할 수 있기를 원했다.


한편, 체임 헤르조그에 의하면

1967년 6월 19일, 이스라엘의 연립정부는 만장일치로 무기명투표에서 평화협정의 대가로 골란고원의 비무장화와 티란 해협에 관한 추가 합의가 이루어지는 조건하에서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을 제시하는 데 합의했고, 이와 함께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와 동쪽 국경 문제에 관한 협상을 시도했다. [각주:1]

이스라엘 측의 의견은 미국 정보의 중재를 통해 아랍국가들에 전달되었고, 이집트나 시리아가 이스라엘 측의 제안을 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 이집트와 시리아는 6일전쟁의 패배로 잃은 영토의 탈환을 갈망했지만 67년 8월의 카르톰 아랍 정상회담에서 아랍 8개국 수뇌부들은 "이스라엘과는 평화도, 협상도, 인정도 없다"라는 3無 원칙을 확인한바 있기에 그 시점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나왔을 가능성은 없었다. 결국 이스라엘 정부의 제안은 내부 기밀에 붙여졌고 1967년 10월에는 평화안이 철회되었다. [각주:2]



나세르 대통령의 장례식. 맨 앞에서 양복을 입고 관을 보고 있는 사람이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가 1970년 9월에 사망하면서 그의 직위를 승계한 안와르 사다트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통해 6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회복하기로 결심한다. 1971년 사다트는 귄나르 예링 유엔중재관의 제안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자발적으로 시나이 반도와 가자 지구에서 철수"한다고 선언하면서 UN안보리 결의안 242조의 추가 사항들이 실행된다면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67년 6월 5일의 휴전선에서 철수하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각주:3]

사다트는 이스라엘에게 제한적인 형태로라도 승리를 거두고 협상을 통해서 현상을 타개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반면에 시리아의 지도자 하피즈 알 아사드(Hafiz al-Assad)는 이와 달리, 협상보다는 오직 군사력에 의한 전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골란고원을 되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6일전쟁 이후 아사드는 빠르게 군비를 확장하면서 시리아가 아랍권에서 군사적인 패권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아사드는 자신의 새로운 군대가 이집트의 지원이 있다면 이스라엘 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시리아의 입지를 굳건히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골란고원을 무력으로 탈환하고 이스라엘이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를 포기하는 경우에만 협상이 시작될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사다트는 중대한 국내문제 때문에도 전쟁이 반드시 필요했다. "사다트가 권좌에 오른후 3년간은 ... 이집트가 역사상 최악의 사기저하를 경험하고 있던 시기였다 ... 경제붕괴가 국가의 새로운 걱정거리가 되었다. 전쟁은 절망적인 상황에서의 선택이 되었다." [각주:4] 라파엘 이스라엘리는 사다트 전기에서 사다트가 문제들의 근원을 6년전쟁에서의 대참패로 인한 국가적 수치감에서 찾았고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개혁도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었다고 적었다. 이집트의 경제의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중대한 개혁이 필요했지만, 사다트는 자신이 이를 수행할 수 있을정도로 국민에게 인기가 있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사다트는 군사적 승리를 통해서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고 변혁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국민적 지지를 얻어내야 했다. 대학생들을 비롯한 이집트 지식층 상당수도 사다트가 권좌에 있던 처음 3년간 시나이 반도의 탈환에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불만의 분위기가 팽배했다.


한편, 다른 아랍국들은 다시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훨씬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요르단 국왕 후세인은 인구의 거의 절반을 상실한 6일전쟁의 경험으로 전쟁에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하게 했다. 또, 사다트는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를 지원하고 있었으며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인정했지만, 반면에 후세인 국왕은 요르단 서안을 자국영토에 편입하기를 원했다. 게다가 1970년의 검은 9월단 사건으로 PLO와 요르단 정부간에는 거의 내전에 가까운 상황이 발생하였으며 시리아가 PLO의 편을 들게되자 아사드와 후세인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틀어진 상태였다.

이라크도 시리아와 관계가 좋지 않아서 이라크는 초기 아랍측의 공세에 참가하기를 거부하였다.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레바논은 자국의 약소군대로 더이상의 아랍전쟁에 참여해서 정국북안을 야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전쟁 개시전에 사다트는 전쟁이 외교적인 지원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1973년 가을까지 사다트는 아랍연맹, 비동맹국가, 아프리카 연합기구 등을 비롯한 백여개 국가의 지지를 얻으며 시나이 반도를 반환을 요구하는 외교적 압력을 강화했다. 동시에 사다트는 유럽국가와의 관계개선에도 나섰으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영국과 프랑스는 처음으로 UN안보리에서 이스라엘에 반대하여 아랍을 편들기도 했다.




전쟁으로 가는 길

1972년 안와르 사다트는 "이집트 군 백만명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이스라엘과 전쟁을 수행할 준비가 되었다고 공언했다. 1972년 말부터 이집트는 소련으로부터 Mig-21 제트기, SA-2, SA-3, SA-4, [각주:5] SA-6, SA-7 지대공미사일, RPG-7, AT-3 새거(Sagger) 대전자유도미사일, T-55, T-62전차 등을 인도받으며 군사력 증강에 전력을 기울였다. 동시에 소련식 교리에 의 맞추어 자국군의 전술수행 능력을 강화하면서  1967년 전쟁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던 장군들의 무능을 개선하기 위하여 정치적인 이유로 군에 남아있던 장군들을 퇴진시키고 보다 실력있는 신진 장교들로 대체하여 물적, 인적으로 군사력 강화에 나섰다. [각주:6]



소련제 대공미사일, SA-6 "Kub" 나토측 명칭 Gainful


SA-7 "Strela-2" 대공미사일 나토측 명칭 Grail

강대국들의 대응도 전쟁발발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소련의 미적지근한 정책도 이집트의 군사적 약세의 원인으로 하나로, 과거 나세르는 모스크바를 직접 방문하고 크레믈린에 통사정을 하고서야 간신히 지대공미사일방어체계 건설에 필요한 필수자원을 획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세르는 만약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집트에 돌아가서 국민에게 모스크바가 자신들을 버렸다고 선언하고 보다 친미적인 사람에게 정권을 이양해야 할 판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이 이 지역에서 주도권을 갖는 상황을 모스크바가 용납할 수는 없었다.

사실, 이집트가 소모전을 수행한 숨겨진 이유중 하나는 소련에게 이집트가 원하는 진보된 무기체계와 전쟁물자를 제공하도록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이집트는 소련 지도자들에게 더 이상의 항공기와 대공무기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이스라엘에 공급하고 있는 선진무기에 대한 무기실험장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1967년의 패배 이후 나세르의 정책은 소련과 상충되고 있었다. 소련은 당시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이 충돌하여 미국과 새로운 대치국면을 만들지 않기를 원했고 오슬로에서 미소 양국이 현상 유지를 기본으로 점령지의 완전반환 대신 시나이 반도의 분할에 동인하면서 이는 명확해졌다. 하지만 이집트 지도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더 이상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도하하는 군사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누출되지 않게 하려면 러시아 군사고문단을 이집트에서 축출하는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사다트는 1972년 7월, 전쟁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되는 약 2만여명의 소련 군사고문단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보다 미국과 친밀한 관계로 외교방향을 재설정한다. 이때부터 소련의 이 지역에서 주된 동맹자는 이집트가 아닌 시리아가 된다.

소련은 사다트가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고 당시의 데탕크 분위기에서 중동의 분쟁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소련측 군사고문단들은 고도로 요새화되어 있는 수에즈를 돌파하려는 시도는 심각한 피해를 입힐 것이라고 경고했고, 이스라엘이나 이집트 어느 일방이 패권을 장악하는 것보다는 불안한 균형을 유지하게 하기 위하여 공격을 위한 장비, 특히 도하작전용 장비들의 수출은 통제하고 있었다. 소련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1973년 6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이스라엘이 1967년 국경선으로 돌아갈 것을 제시하고 "그러지 않는다면, 군사적인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발언하기도 하면서 간접적으로 소련이 사다트의 계획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암시를 주기도 한다. [각주:7]


1973년 4월 9일, 뉴스위크지와의 인터뷰에서 사다트는 재차 이스라엘을 위협한다. 1973년에 아랍군은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이스라엘 군도 수차례 최고경계태세를 취했다가 해제하는 일을 반복한다. 6일전쟁까지 이스라엘 군의 기본전략은 공격을 통해서 적의 선수를 제압하는 것이었으나 전후에 획득한 넓어진 영토는 이스라엘군에게 충분한 전략적 종심을 제공하였고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국의 공군력을 중동최강 수준으로 유지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만약 아랍의 공격이 있더라도 중동최강을 자랑하는 이스라엘 공군이 이를 격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스라엘 공군의 F-4E 팬텀 전폭기 개전까지 127기 보유.

걸작공격기 A-4E 스카이 호크

전쟁 개시 약 1년전인 1972년 10월 24일, 사다트는 군최고지휘관들과의 회의에서 소련의 적절한 지원이 없더라도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겠다고 선언한다. [각주:8] 모든 계획은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여 심지어 상급지휘관들에게도 공격개시 수주 전까지 비밀로 유지되었으며 병사들은 발발 몇시간 전까지도 상황을 알지 못했다.



전쟁 직전의 이집트 군 배치도 http://www.irandefence.net/showthread.php?t=6772

마호메트의 이슬람군이 메카의 퀴라시 부족을 격파한 만월의 날을 상기시키는 기습작전 "Operation Badr(만월 작전)"은 무르익고 있었다.

  1. Herzog, Chaim (1989) Heroes of Israel. Boston: Little, Brown. ISBN 0-316-35901-7 p.253 [본문으로]
  2. Shlaim, Avi (2001). The Iron Wall: Israel and the Arab World. W. W. Norton & Company. ISBN 0-393-32112-6, p.254. [본문으로]
  3. The Jarring initiative and the response," Israel's Foreign Relations, Selected Documents, vols. 1?2, 1947?1974 (accessed June 9, 2005). [본문으로]
  4. Rabinovich, 13 [본문으로]
  5. 이들은 전쟁 발발 전에 신형으로 교체되었다. [본문으로]
  6. Heikal, 22 [본문으로]
  7. Rabinovich, 39 [본문으로]
  8. Rabinovich, 2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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