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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욤키프르 전쟁

1973년 10월, 이스라엘과 이집트,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 아랍 제국과의 전쟁을 제4차 중동전쟁, 10월전쟁, 욤키프르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은 속죄절(욤 키프르)에 일어난 전쟁이기에 욤키프르 전쟁이라고 부르고, 아랍측에서는 10월 전쟁이라고 부른다. 6일전쟁에서 선제공격으로 압승을 거둔 이스라엘에게 이번에는 아랍측이 선제공격을 실시해 우수한 소련제 무기와 기습과 포위라는 전략적 이점을 활용하여 초반에 우세를 거두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양진영이 산업전쟁으로 맞선 몇안되는 사례로 아랍군은 각지에서 일부전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지만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역습을 허용하여 패배했고 미국과 소련이 중제에 나서 정전이 이루어졌다.

배경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만월의 밤 참고.

이집트 혁명의 주역 나세르는 1970년 9월 28일 심장병으로 급사했고 그 후계자가 된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과의 군비경쟁과 전쟁 때문에 경제성장이 소홀히 되었다고 판단했다. 나세르는 취임 후 이스라엘과의 소모전을 중단하고 이집트의 경제를 안정화시키려 노력했다. 먼저 아랍간의 결속 강화에 나선 사다트는 1971년 9월에 시리아, 리비아와 아랍 연방 공화국이라는 느슨한 연방국가를 결성하고 1972년 4월에는 PLO를 추방한 요르단과 단교하는 등 아랍 맹주의 지위를 굳혀나갔다. 같은해 7월에는 소련의 군사고문단을 국외로 철수시켜 소련과의 연관도 줄이면서 이스라엘에 영향력이 있는 미국이 중동 평화에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당시 미국은 베트남 문제나 워터게이트 사건등으로 분주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뮌헨 올림픽의 검은9월단 사건, 적군파의 텔아비브 공항 난사사건 등으로 국제여론이 아랍측에 불리해지자 이집트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통해 잃어버린 영토와 위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된다.

1973년 3월, 사다트는 수상직을 겸임해서 강압적인 통치체제를 굳히고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고 유리한 전황에서 그대로 강화에 들어갈 계획을 구상했다.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들과 동시 개전해서 다방면에 대처하느라 이집트 군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게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한 사다트는 시리아의 아사드, 리비아의 카다피 등과 제휴해 73년 8월에는 리비아를 끌어들인 국가통합 구상안을 발표하고 대 이스라엘 포위망을 강화했다. 또, 소련의 군사고문단을 다시 받아들이고 소련으로부터 최신병기구입을 진행했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전쟁전야 참고.

한편, 이스라엘의 첩보기관 모사드는 사다트의 전쟁 계획에 대한 정보를 경고했지만 군참모부는 사다트는 강경수단을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판단하여, 이집트의 침공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국제정세도 변화해서 제3차 중동전쟁으로 "기습"에 의해 전례없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이스라엘과 유대인은 홀로코스트 이후에 유지해온 국제적 동정과 신뢰를 상실했다. 게다가 이 승리로 중동의 군사적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한 프랑스와 영국은 아랍의 경제 제재 영향도 있어서 이스라엘에 무기 관련 금수조치를 취했고 미국도 표면적인 원조를 할 수는 없었다. 1973년 10월, 이집트, 시리아군은 이스라엘에 침공을 결정하고 욤 키프르를 공격 개시일로 예정 10월 6일에 만월 작전을 실시한다.

전쟁의 추이

기습의 성공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시나이 전선 참고.

1973년 10월 6일, 당일은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휴일인 욤 키프르로, 이스라엘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날이었다. 이날, 이집트와 시리아 연합군은 이스라엘 국방군에 대해 기습공격을 시시했다.

이집트 군은 수에즈 운하에서 격렬한 포격을 실시하고 소방펌프를 이용한 창의적인 작전으로 이스라엘의 "바레브 라인"을 단숨에 돌파해서 시나이 반도로 진출, 이스라엘의 거점을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기습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여 초반에 대패를 당했고, 10월 8일에 있은 이스라엘 측의 반격도 대전자 미사일과 지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이집트 군에게 격퇴되었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골란전역 참고.

골란고원의 시리아군은 이스라엘 국방군의 2개 여단 및 11개 포대에 대하여 5개 사단과 188문의 야포로 공격해 나왔다. 서전에서 약 180대의 이스라엘 군 전차가 1,400대 이상의 시리아군 전차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압도적인 전력차에 더해 시리아군 전차대의 장비 우수성으로 열세에 있었지만 분투끝에 이스라엘 군 기갑대는 골란 고원의 방어에 성공했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스라엘의 반격 참고.

골란고원 전선

이스라엘은 기습공격으로 짧은기간동안에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의 일부를 상실하고 자국령까지 침공당할 위험에 놓였다. 그러나 미국에게서 병기를 지원받는 등, 체제를 정돈해서 반격에 나섰다. 10월 10일부터 이스라엘군은 골란고원의 시리아군에 공세를 개시해 시리아군의 일부는 괴멸되었고 일방적으로 방어전이 된 시리아 군은 시리아 영내로 철수했지만 이스라엘 군은 수도인 다마스커스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다마스커스를 함락시킨다면 소련이 직접 개입하겠다는 위협 앞에서 정지했다.

사다트는 원래 점령한 시나이 반도 서부에서 더 진출할 생각은 없고 이스라엘의 점령이 아니라 시나이 점령이라는 목표를 달성, 이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소모전으로 몰고갈 생각이었지만 시리아의 아사드는 사다트에게 시리아의 수도를 구하기 위해 시나이 반도

서부에서 내륙으로 침공하도록 요청한다.

시나이 전선

시리아에서 진군을 멈춘 이스라엘 군은 시나이 반도에서 공세에 나섰다. 시나이 반도 서해안 중앙부에서 격전이 전개되어 이집트 군을 격파한 이스라엘 군은 10월 16일, 수에즈 운하 중앙부를 역도하한다. 이로써 이집트 군은 시나이에 고립되었고 수도 카이로 100km앞까지 무인지경을 질주한 이스라엘 군은 그 위치에서 정지한다.

아랍 제국의 참전

아랍 제국은 무기 공급과 자금 지원 등으로 이 전쟁에 관여했다. 어느 정도의 지원이 이루어졌는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복수의 정보통에 의하면 이라크는 이집트에 헌터 전투기 소대를 파견했고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18,000명의 병사로부터 사단과 수백대의 전차, 미그기를 파견했다. 전차대는 골란고원 중앙부에 전개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금융지원을 실시하여 수개의 전투부대를 파견했고 사우디 아라비아는 소수의 부대를 시리아에 파견했으며 요르단은 정규사단을 시리아에 파병, 이스라엘군과 교전했다.

1971년부터 73년까지 리비아는 미라쥬 V 전투기와 약 10억 달러 상당의 지원을 이집트에게 제공했으며 알제리는 전투기와 폭격기 부대, 무장여단, 전차 다수를 파견했고 튀니지도 1천명 이상의 병력을 파견하여 나일강 삼각주에 배치했다. 수단은 3,500여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모로코는 3개 여단을 최전선에 파견하고 있다.

정전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종전으로 가는 길 참고.

이스라엘의 반격이 성공하자 국제 여론은 정전을 요구해왔고 미국과 소련의 중재로 10월 22일에 정전이 선언되었다. 전후 이스라엘 사회는 전쟁 피해를 놓고 격론이 시작되어 국방장관 모세 다얀에게 비난이 집중되었다. 1974년 다얀은 골다 메이어 수상에게 사표를 제출했고 수에즈 도하를 성공한 아리엘 샤론은 국민적 인기를 얻어 나중에 수상이 되었다.

1974년 1월,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에서 병력 철수 협정에 조인했고 유엔 정전감시단은 이집트의 이스라엘의 정전을 감시해 국경에서 순회 경비를 실시했다.

전후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머나먼 평화 참고

석유전략과 석유위기

아랍의 주요 산유국들은 1971년부터 73년까지 리비아, 이라크, 이란을 포함한 산유국이 차례로 석유자원의 국유화를 발표했고 10월 17일 일제히 석유 수출을 금지하면서 원유가격을 상승시켰다. 이로써 그때까지 공급과잉 상태로 저가였던 원유가격은 순식간에 4배 이상으로 상승, 세계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평화로 가는 길

이 전쟁으로 이집트는 이스라엘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할 수 있었다. 제한적이나마 위신을 회복한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평화 수립에 나섰고 1975년 6월 제3차 중동전쟁 이후 8년만에 수에즈 운하의 통항이 재개되었으며 양국은 2차 병력 철수 협정에 조인하여 시나이 반도의 비군사화를 진행했다. 1976년 3월, 시리아가 레바논 내전에 간섭하자 이집트는 대소 우호 조약의 파기를 통고하고 소련과 결별하면서 미국에 접근했다. 국내에서는 경제 자유화를 진행시켜 서방진영으로 선회했다. 1977년 6월 메나헴 베긴 내각이 이스라엘에 성립하자 사다트는 급속히 접근하고 11월, 그는 아랍 수뇌로는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공식 방문해 12월에는 정상회담을 실시했다. 이에 아랍의 카다피, 아사드 등은 트리폴리 선언을 발표, 이집트를 격렬히 비난했다. 1978년 9월, 미국은 캠프 데이비드로 미국, 이집트, 이스라엘 대표를 모으고 이 회담에서 염원하는 평화협정이 수립되었다.

사다트 암살

1979년 3월,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평화조약에 조인하였고 베긴과 사다트는 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중동의 상황은 이란 혁명으로 다시 일변하고, 1980년 9월에는 혁명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 전쟁이 개전했다. 1981년 10월 6일, 대 이스라엘 전승 기념 퍼레이드 중간에 사다트는 이집트 과격파에게 암살당했다. 그러나 그의 평화 정책은 후계자에게도 계승되어 이집트는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었고 1989년까지 시나이 반도는 모두 반환되었다. 한편, 시리아의 골란고원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이 1981년부터 자국령 편입을 선언한 것이 국제적 비난을 받아 이듬해 2월 유엔으로부터 침략으로 규정되었다. 골란고원에 대한 교섭이 시작된 것은 레바논 내전이 수습된 1995년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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