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 이후
6일전쟁에서의 치욕적인 패배는 국내 정치에서도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67년 6월 9일, 나세르는 이집트 TV와 라디오를 통해 사임성명을 발표하고 부통령 자카리아 모히딘(Zakaria Mohidin)에게 대통령직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했다.
"저는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완전히 선의로 모든 공직과 정계에서 물러나고 민중의 한명으로 돌아가 다른 국민들처럼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려 합니다.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입니다. 저의 마음은 여러분과 함께 있으며 여러분의 마음도 저와 함께 있음을 믿습니다. 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희망과 빛으로 우리의 마음을 보호하시기를."
방송이 나오자 마자 이집트 만이 아니라 아랍세계 전체에서 수백만명의 군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압델 나세르의 사임 성명에 그들은 "우리는 싸우리"라는 구호로 화답했다. 결국, 나세르는 1969~70동안의 소모전 기간에도 계속 이집트를 이끌어갔다.
1969년 개혁적이고 나세르 체제의 권위주의에 비판적인 집단이 이집트 판사 협회에서 선출되자 이들은 나세르 정권에 직접적으로 사법부의 불만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이에 나세르는 "사법 학살"이라고 불리게 되는 일련의 해임을 단행하여 수백명의 현직 판사들을 퇴임시켰다.
사망과 장례
나세르는 1970년 9월 28일, 카이로에서 개최된 대 이스라엘 문제와 요르단의 검은 9월 사건에 관한 아랍지도자 회담 중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평소에 당뇨병과 혈색소침착증으로 심근계 질환을 앓고 있던 그에게 격무에 의한 과로가 가중된 결과였다. 1
나세르는 아랍의 민족주의적 열정을 자극하는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고, 그의 죽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눈물로 애도"케 했다. 10월 1일에 있은 그의 장례식은 5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하여 역사상 가장 큰 장례식중 하나로 기록되었고, 혁명지도부에서 그의 묘소에 이르는 10km를 가야하는 장례행렬은 MIG-21 전투기들이 선도비행했다. 방송중에 아나운서가 울먹거렸고 40도가 넘는 고온속에서 그의 장례행렬을 운구하는 수천명의 병사들도 눈물을 흘리며 "인민의 행렬"을 헤쳐나갔다. 그리고 10월 5일, 나세르의 유고로 부통령인 사다트가 그의 직무를 승계했다. 2
나세르의 유산
나세르 주의
오늘날 까지도 아랍권에서 나세르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많은 이들에게 그는 이집트를 부흥시키고 아랍의 긍지를 내외적으로 재건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은 나세르가 이집트를 유럽의 압제에서 해방시켰으며 농지 개혁을 통해 경제를 재건하고 아스완 댐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실시함으로써 위대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정책을 강압적인 군국주의로 이집트에 평화와 번영대신 전사자의 무덤과 패전의 상처만을 남겼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 나세르의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억압과 과도한 감시, 정보조직 양성은 이집트를 관료주의적이고 경직된 사회로 만들었다는 비판도 따르고 있다. 게다가 6일 전쟁은 나세르의 신화와 중동에서의 영향력에도 큰 악영향을 미쳤고 임기말에 이르러는 과도하게 소련으로부터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던 면도 있다.
다른 한편, 나세르가 빈민을 위한 무료교육 실시와 영화, 음악 산업을 비롯한 예술분야에 대한 지원과 문학분야에 대한 지원으로 이집트의 교육 시스템을 근대화한 것은 이집트 만이 아니라 아랍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나세르의 민족주의는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가다피나 알제리의 아흐마드 벤 벨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등에게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아스완 댐
나세르의 업적 중에 가장 평가가 엇갈리는 것중의 하나는 남부 이집트의 아스완 댐 건설 문제다. 댐의 건설은 중공업 육성 을 위한 대량의 전력을 제공했고 나일강의 범람 위기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누비아 대부분에 관개용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막대한 환경적 문제를 불러일으켜, 나일 삼각주에 비옥한 양분을 공급하던 나일강의 범람이 중지되었을 뿐 아니라 나일 계곡의 기후변화로 전체적인 농업 생산력도 감소했다. 3
그러나 아스완 댐은 이집트의 경제성장과 근대화에 필요한 막대한 전력을 제공해 주었으며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한 전염병의 발생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가족
서재의 나세르
나세르는 이란출신의 점원집 자제인 타히아 카젬(Tahia Kazem)과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세명과 딸 둘을 두었다. (칼리드, 압델 하킴, 압델 하메드, 호다, 모나) 장녀인 호다 압드 엘 나세르는 정치학 박사로, 카이로 대학의 정치학 연구소에서 교수로 근무하고 있으며 그녀가 수집한 다양한 자료들은 비빌로테카 알렉산드리아에 전시되어 있다. 4
차녀인 모나는 이집트 출신의 억만장자 아쉬라프 마완과 결혼하여 2007년 사별하기까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아쉬라프는 이스라엘의 스파이거나 이중첩자로 의심을 받고 있으며 2004년과 2007년 방문시에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에게 환대를 받은 적도 있으며 무바라크는 아쉬라프 마완이 사망한 후에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대접했다.
아쉬라프 마완의 아들 아흐메드는 이집트의 전 수상이자 외무부장관을 지냈으며 현임 아랍연합 사무국장 아므르 무사의 딸 하니아 무사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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