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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note

악플과 개신교

한국사회와 개신교

오늘날 인터넷에서 개신교인이 자기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약간 과장하면 조선시대에 기독교인이라고 인정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했던것과 비교할 수도 있겠다. 사실 기독교 신자가 미움을 받는 것은 성서에도 씌여 있는 말이니 별로 이상할 것은 없겠지만 문제는 지금 일어나는 것은 박해가 아니라 자초한 문제라는데 있다.

교회와 한국사회가 이토록 등을 돌리게 된 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부 개신교인들이 말하듯, 우리사회가 관용하는 문화가 없이 한번 미움을 사면 용서가 없고 계속해서 미움이 피드백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개신교인들 중 일부가 저지른 잘못들을 전체에 소급해서 적용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기실 신학교에서 매년 배출되는 수많은 목사님들이 교인들이 기대하는 만큼, 또 사회가 기대하는 수준에 부합할 정도로 성직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지가 의문스러우며, 또 시장논리가 도입된 교회라는 이름의 시장이 되어버린 현실에 살아남는 과정에서도 타협적인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그 중에 일부가 함량미달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일부 악영향을 주었을 뿐 보다 근본적인 수준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부의 문제라던지 사회적인 시선의 문제만으로 치부하기에는 그동안 벌어진 감정의 골이 너무 깊다. 그리고 그렇게 감정의 골이 깊어진데에는 개신교인들 자신의 문제를 벗어나서 말할 수가 없다.

교회에 다녀보면 참 사람들이 좋아 보인다. 고민도 없고 서로를 위로하고, 돕고 살아가는 작은 사회같고 특히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인상이 더욱 강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행동이 밖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질까

한 악플러의 초상

실제로는 착하지 않은 사람이 무리하게 착한척을 하다보니 무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문제가 있지만 모두 은혜가 넘치는 듯한 얼굴로 살아가는 앞에서 자신의 문제를, 치부를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문제를 숨겨두는 사이에 상처는 더더욱 썩어간다.

왼쪽에 있는 글들은 모두 같은 사람이 대형포털 사이트에 올린 글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한 개인의 잘못을 지적하자는 것이 아니므로 아이디는 동일인임을 확인할 수 았는 부분만 남기고 지웠다.

전체적인 리플들을 검색하다 보면 이 사람이 상당히 격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아주 쉽게 욕을 하며, 정치적으로도 어느 정도 편향된 견해가 있고 저속한 표현도 서슴치 않는 전형적인 악플러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좀더 확인해 보면 그는 아들이 있고 결혼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그러하듯 힘든 삶을 살아가고 우리사회의 술문화에도 꽤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고, 평범한 고민들이 있으며, 평범한 죄악을 지으며 살아간다. 어쩌면 일상생활에서는 남에게 욕도 안할지 모르는, 평균 이상으로 선량해 보이는 사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인터넷에서의 활동은 문제가 있는 편이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사랑을 말하고, 일부이단의 문제를 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개신교를 비난하기 보다 일단 교회에 한번 나와보라고 말하고 있다는데 있다. 기실 그는 나와 그렇게 많은 차이가 있는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도 한두번은 다른 사람에게 악플로 보일만한 리플을 달아보았고, 인터넷에서 만난 다른 사람에게 욕도 해보았다. 비꼬기도 하고, 비웃기도 한다. 때로는 그런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내 행동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면서 반대쪽의 얼굴로는 주님안에서 승리하세요 라고 말할때, 오늘날 처럼 정보가 널리 공개되어 사실을 숨기기 어려운 세상에서 그 말의 가치는 얼마쯤 될까.

개신교와 악플러

몇년전의 일이다. 기독교계에서 제법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목사님 한분이 설교를 하면서 농담조로 인터넷 문화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리플이라는 것을 발명한 사람은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가 예약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당시는 모 유명연예인의 자살때문에 악플의 사회적 악영향에 대해서 한창 논란이 심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분은 진지하게 인터넷에서 실명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실제로 실명제를 적용하는 한 거대포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그다지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설교의 핵심은 사회가 어려워 지고있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실명제를 실시하여 모든 인터넷 사용자들의 신상이 공개된다면, 악플러 중에 독실한 개신교 신자들이 얼마나 많을지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생각 이상으로 많은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한다. 인터넷에서 개신교 신자로 살아가는 것은 비교적 높은 수준의 비난에 노출될 각오를 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여러가지 상황들을 볼때, 개신교 인들은 악플의 문제를 사회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이전에 먼저 개신교 내부의 행동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었다. 개독이라는 모욕적인 단어에 불만을 표시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의 행동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으리라.

예수는 누가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들이대라고 가르쳤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다. 그가 제시한 도덕적 기준은 너무나 높은 수준의 이상이기에 실제로 지켜내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르지만, 그걸 기준으로 삼아야 할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인 수준의 도덕성을 유지하기에도 쉽지 않다. 그런데도 세상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고 예수는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었지만 교회가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세상보다 더더욱 타락할 수 있을 가능성도 생각했을까

성공신화와 개신교

한국 교회의 내부로 들어가게 되면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성공신화에 좌우되고 있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진영은 그가 모 대형교회의 장로라는 것을 알게 모르게 강조했었고 교회들마다 알게 모르게 그를 지지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장로인 그가 성공을 거두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교회에는 무엇이 도움이 되었을까. 되려 해가 되었으면 해가 되었지 좋은일은 없었으리라. 애초에 기독교란 박해받는 사람들의 종교지, 다른 사람들을 억누를 수 있는 입장에 서면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없다. 이건 단지 기독교의 문제라기 보다는 종교 전체가 그런것이겠지만, 특히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성공신화라는 심각한 허상에 빠져있는 것 같다.

재물을 땅에 쌓기보다 하늘에 쌓으라는 충고나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3박자 구원론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헐벗고 살아가라는 것은 아니더라도,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공 제일주의, 결과 지상주의가 가져온 심각한 병폐들을 살펴볼때, 개신교는 비록 그런 문제들의 원인은 아닐지라도, 현실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려 했다기 보다 현실에 영합해서 더욱 나쁜 방향으로 밀어가는 데에도 기여하고 있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번창하고 번영하는 것이 신의 축복일 수도 있겠지만 교회가 교인들을 숫자로 계산하고, 전도의 성과도 숫자로 따지며, 교회의 화려한 외향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지, 기업화된 대형교회가 지점을 내는 모습들에서 재벌 기업들의 모습이 연상되지 않은지, 돌이켜 볼 일이다. 그것이 교회가 추구해야할 진정한 가치인가

한국 개신교의 미래

현실을 따져볼 때, 한국 개신교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못하다. 수없이 지적되는 내실의 문제는 현실적인 성장율에도 반영되어 전체적인 개신교인의 숫자는 통계적으로 보았을 때 소폭 감소했다. 그런 수치들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실제로 교회들 사이에서는 위기의식도 있지만 그것을 공론화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교회가 요구하는 가치는 소망을 갖는 것이고 현실을 바라보는 긍정의 힘을 강조하다보니 부정의 힘은 죄악시 된다. 하지만, 성서를 읽어보면 현실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며 근거없이 희망있는 관측을 내놓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절대로 작지 않았다. 기적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먼저 철저한 회개가 필요하다. 아시아에서 거의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개신교의 성공에 언제까지 빠져있을 것인가. 지금의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남을 비난하는 것보다 앞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고 반성하는 자세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퇴보로 비추어질 지라도 70년대의 외형적 성장을 생각하기 보다 앞서 숫적으로 줄어들더라도 처음의 자세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개신교가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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