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럴 해저드
오늘날의 무한경쟁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최선의 가치로 삼는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개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기적 욕망 충족을 추구할 때 사회 전체의 후생 또는 국부의 증진이라는 공동선이,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할 때보다 더 잘 이루어진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사익 추구가 곧 공익 추구’라는 명제를 신앙의 경지로 끌어올렸고 신자유주의는 이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는 모럴헤저드의 위험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고 우리사회에서 모럴 해저드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모럴 해저드는 본래 경제학 용어로 도덕적 해이를 의미한다. 이?현상이 보험시장에서 처음 인식되었다. 보험은 통계적으로 잠재적 위험 확률을 계산하고, 그 위험이 현실화되었을 때의 경제적 비용을 분리하는 장치다. 보험회사는 사고 확률과 비용을 계산한 다음 보험료를 정한다.
화재보험을 예로 들어보자. 보험회사는 실화율을 추산하고, 실화에 따른 평균적 손실을 추정한 다음, 보험료와 보험금 지급 수준을 결정한다. 문제의 모럴 해저드는 여기서 시작된다. 우선 화재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불이 나도 보험회사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경우에 비해 불조심을 덜 하게 된다. 이것은 곧 보험가입자의 실화율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단 불이 나면 집 주인은 보험에 들지 않은 경우와 피해액을 줄이는 데에도 소극적이다. 다 타버려도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최선의 가치로 볼 때 모럴 해저드는 합리적 선택이다. 모럴 해저드는 모든 종류의 보험에서 발생하며,?만연하게 되면 보험회사는 보험료를 올리든가, 보험금 지급 수준을 내리든가, 아니면 두 가지를 다 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할 경우 모럴 해저드를 저지르지 않을 가입자, 다시 말해서 보험에 들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조심하는 ‘우량 가입자’들은 보험계약을 연장하지 않게 되고 결국 불량 가입자만 남게 되면 보험회사는 망하고 만다. 바로 이와 극한 상황에 처하기 전, 불량 가입자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우리사회다.
정의를 찾아서
올해 1/6이 지나기도 전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초가 붕괴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법치질서의 공정성 상실을 보여준 미네르바 사건, 치안유지기관의 공정성 상실을 보여준 용산 철거민 사건 그에따른 사회 전체의 모럴 해저드를 보여주는 것이 연쇄살인범 강씨 사건이 그것이다. 사회의 정의를 지켜야 하는 마지막 보루인 사법적 정의가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미네르바 사건에서 만인에게 평등해야 할 법률은 행정기관의 필요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적용되었다. 인터넷에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이 몇명인데 그 중의 한명을 붙잡아 본보기 삼아 처형하는가. 애초에 적용된 법률 자체의 정당성조차 의심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명의 네티즌이 일반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해서 처벌을 받게 된다면 누구보다 영향력이 큰 대통령은 왜 처벌을 받지 않는가.
용산 철거민 사건은 더욱 심각하다. 자가 휘어져있다면 어떻게 길이를 잴 수 있겠는가.?누구보다 정직해야 할 치안유지기관이 불법을 행하고도 사실을 은폐했다. 경찰이 폭력배와 손잡고 민간인을 공격했다. 근대사회의 사법체계는 개인이 폭력을 국가에 위임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사법체계가 정의로워야 한다.
연쇄살인범 사건에서 이 나라의 보도기관은 적법한 절차를 무시했다. 법률적으로 확정범의 신상공개는 공익을 위해서 가능할 수도 있다고 해보자. 하지만 확정판결이 내려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누가 보도기관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신상을 불법으로 공개할 권능을 주었는가.
행정부, 사법부, 언론, 여기서는 거론하지 않지만 입법부에서도 정의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문제는 그 정도로 그치는게 아니다. 진짜 문제는 국민들의 정의가 무너진다는, 이 사회의 정의에 대한 공감대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아테네에서 정의를 찾아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녔다. 우리는 멸종 직전의 정의를 찾아 현미경을 들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법을 지키는 것이 얼간이 취급을 받고, 자신의 이익에만 충실한 것이 합리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얻는다. 오죽하면 살인마가 자신의 신상이 공개되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다고 투덜대며 살인을 바탕으로 돈을 벌 궁리를 하겠는가. 하지만 그걸 욕하고 있는 우리는, 또 나는 그럼 정의로운가.
7kill 0 death를 걸어놓은 살인범 팬카페
일부 보도기관들이 아직 확정판결이 내려지지도 않은 한 개인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었던 뒤에는 살인범의 인권은 없다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알고싶다는 욕망을 위해서 그런 식으로 불법을 행하는 것이 정당화 된다면 이 사회의 정의와 사법체계는 무너지고 이것은 살인보다도 더 심각한 범죄일 수 있다. 대중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폭력이 합리화 될 경우에 우리는 법의 보호를 벗어나서 각자가 개개인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 이미 미네르바 사건에서 평범한 개인에게 법률이 어떤 식으로 확대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았는데 우리는 살인범에게 돌려진 칼날이 우리 각자를 향해서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대로 가다가 우리의 사회의 미래는 이제 제로썸게임에서 서로가 붉은카드만 내는 최종상황에 데드앤드에 도달할 것이다.
희망을 찾아서
그 때문에 우리사회의 미래가 걸려있는 젊은 층의 60%는 미래의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이민을 가고 싶다는 사람이 1/3에 달하고 있는 이 상황의 타개책은 무엇일까. 그에 대한 대답을 말하기 보다 간단한 연구결과를 적으려 한다.
2차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아우슈비츠의 가혹한 환경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존원인을 조사했다. 그 결과 생명의 유지력과 신체적 강인함의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확인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의 특징은 신체적 능력보다는 다음과 같은 정신적인 능력들에 기인한다.
우선 가혹한 환경에서도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아우슈비츠의 전원이 기아로 고통받는 환경에서도 자신의 부족한 음식을 환자를 위해서 주저없이 나눠주는 인류애가 있는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았다.
다음으로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아름다움”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철창 너머로 보이는 새싹,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낙엽의 움직임을 아름답게 느끼는 마음이 남아있던 사람들이 끝까지 생존했다.
마지막으로 끝까지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나면 베를린 번화가에 빵집을 다시 열어 독일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팔겠다, 이 수용소를 나간다면 카네기 홀의 무대에서 쇼팽을 연주해 관객의 박수를 받고 싶다는 등의 꿈을 가진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았다.
佐久間章行 ‘인류의 멸망과 문명의 붕괴의 회피’ p.218-219(으)로부터의 인용.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지 말라. 사랑과 아름다움 그리고 희망을 찾아라.
참고글
모럴해저드 : http://www2.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09/nd98090290.html
의식조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051818425&code=9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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