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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오드리 햅번

오드리 햅번(1929.05.04 ~ 1993.01.20) 영국-네덜란드계 영화 배우, 연극배우, 발레리나, 패션모델, 인도주의자. 1951년 브로드웨이에서 지지 역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 1953년 로마의 휴일에서 앤 공주 역할로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며 50~60년대 헐리우드의 인기배우가 되었다. 이후로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4번 오르는 등 작품활동을 활발히 했고 1964년작 마이페어레이디에서는 뮤지컬을 영화에 도입하여 호응을 얻기도 했다.

1988년부터 1993년 사망하기 까지 유니세프의 대사로 일한 공로로 자유훈장을 수상. 1999년에는 미국 영화계에서 3번째로 위대한 여배우로 꼽혔다.

http://en.wikipedia.org/wiki/Audrey_Hepburn

생애

유년기

벨기에 브뤼셀 출신으로 어릴적 이름은 오드리 케이틀린 러스튼. 조셉 빅터 앤소니 러스틴과 그의 둘째부인 엘라 판 헤임스트라 남작부인(네덜란드 령 기아나 전 총독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조모인 케이틀린 햅번의 성을 이어받으면 오드리도 성을 햅번-러스틴으로 고쳤다. 두명의 이부 형제가 있다. 오드리 햅번은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와 친척간이기도 하며 스코틀랜드 보스웰의 제4 백작인 제임스 햅번의 상속 서열에 올라있다.

햅번의 아버지가 영국의 보험회사 중역으라 햅번은 브뤼셀과 영국, 네덜란드 등을 오가며 자랐고 1935~1938 동안 햅번은 켄트의 사립여학교를 다녔다. 1935년 부모가 이혼하면서 나찌 동조자였던 아버지가 가족을 떠났다. 나중에 햅번은 어릴적의 삶이 트라우마였다고 술회했으며 오랜시간이 흐른 후에야 적십자를 통해서 아버지가 더블린에 있다는 걸 알게되어 아버지가 죽기까지 돈을 보냈다. 1939년 어머니 엘라가 중립국인 네덜란드는 독일의 공격에서 안전하리라 생각하여 이부형제들과 함께 외할아버지가 있는 네덜란드 아른헴으로 이사했고 햅번은 1939~1945 동안 아른헴 음악학교에서 정규 발레교육을 받았다.

1940년,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영국식 이름때문에 위험해질 것을 우려한 어머니 때문에 "에다 반 헤임스트라"라는 가명을 쓰게 되었으나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에다는 모친의 이름인 엘라의 애칭중 하나)

1944년, 햅번은 직업 발레리나가 되었고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를 위한 비밀모금활동을 위해 몇차례 공연을 했었는데 후일, "음악만이 아니라 내 춤에 환성을 보내준 최고의 청중들"이었다고 말했다.

D-day의 연합군 상륙 이후, 독일 점령지에서의 삶은 더 가혹해졌으며 1944년 겨울, 네덜란드에서는 기근이 심해져 연료와 식량 배급이 제한되는 바람에 아사자가 대량으로 발생했고, 햅번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튤립 구근과 밀가루를 섞어만든 음식으로 연명했다. 마켓가든 작전 중에 아른햄이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 폐허가 되자 햅번의 외삼촌가 외사촌들이 눈앞에서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총살당했고 이부오빠 이안 반 어포드도 독일 강제노동수용소에 글려갔다. 햅번도 무사하지 못해서 영양실조 때문에 심한 빈혈과 호흡기 질환, 부종에 시달려야 했다.

"역에서 유대인들이 이송되는 것을 봤던 기억이 있네요. 머리가 객차위로 나와 있었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어린 아이 하나가 플랫폼에 아버지와 함께 서 있었는데 아주 창백하고 엷은 금발머리에 자기 몸보다 더 커보이는 코트를 입고 그 기차에 올랐는데 나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죠" 1991년.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안네 프랑크와 동갑내기였죠, 전쟁이 일어났을때는 10살, 끝날때 15살이었죠. 1946년에 네덜란드에서 그 책을 읽었는데 참혹한 느낌이 들더군요. 제게는 그게 그냥 인쇄된 종이책에 불과한게 아니라 제 삶과 같았죠. 읽자니 마음이 너무 아팠었고... 그 뒤로 그렇게 감동적이었던 책이 없었죠.?

...?사람들이 보복당하는 장면을 본적도 있는데, 길거리에 젊은사람들을 세워놓고 사람들이 보고 지나다니는 앞에서 총살했습니다. 안네의 일기 중에 다섯명의 유대인이 길거리에서 처형되었다는 대목이 나오는 부분에 표시를 해두었는데 그날이 제 삼촌이 총살당한 날이었지요. 그날의 기억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랐는데, 방안에 갇혀서 내 경험과 느낌에 대해 기록한 리포트를 읽는 느낌이었어요

... 살아남는 다는 것은 안네에게 아주 중요한 가치였죠. 안네는 자전거를 탈 수 없는 좌절감에 대해서 적었는데 그게 상징적인 표현으로 다가오더군요. 제 삶을 죽음에 직면해야 하는 이들에게 헌신하기로 결심한게 그때였습니다." 안네 프랑크에 대해

연합군에 의해 아른헴이 해방되자 구호물품을 실은 트럭들이 들어올 수 있었고 너무 오랫동안 굶주려서 농축우유 한통을 다 마셨다가 배탈이 났던 생생한 기억들은 나중에 햅번이 유니세프에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초창기

1945년 전쟁이 끝나고 햅번은 아른헴 음악학교를 떠나 암스테르담에서 소니아 카스켈과 발레수업을 받다가 1948년에는 런던에서 니진스키의 스승으로 유명한 마리 램버트에게 발레 교육을 받았다. 하루는 햅번이 스승에게 장래를 상담했는데 167cm의 비교적 큰 키에다가 전쟁기간 중의 영양실조 때문에 발레리나로 대성하기는 어렵겠다는 조언을 듣는다.?

그 때문에 햅번은 발레리나를 그만두고 연기자의 길을 걷게 되지만 램버트는 나중에 "(햅번이)좋은 학생이었고 계속 했으면 괜찮은 발레리나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했다. 하지만?햅번의 모친은 허드렛일로 자녀들을 부양했고 햅번도 계속 돈을 벌어야 했기에 발레수업으로 3파운드씩 내는 것보다는 배우로 돈을 버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영화에 처음 출연한 오드리 햅번

오드리 햅번은 '네덜란드의 7가지 교훈' 이라는? 교육용 영화에서 연기생활을 처음 시작했고, 그 뒤에도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면서 1951년 영국영화 '원 와일드 오트'에서 호텔 접수원 역할을 맡아 활동사진(Motion Picture)에 데뷰했다. 이후 젊은 아내들 이야기, 낙원에서의 웃음, 라벤더 힐 폭동, 몬테 카를로 베이비 등등의 영화에서 단역을 맡았는데, 몬테 카를로 베이비를 찍는 중에 햅번은 브로드웨이의 연극 '지지'에서 주역을 맡는 기회를 얻게된다. 극작가 시드니 가브리엘 콜레트가 햅번을 보고 "이게 바로 우리 지지야! 보라구!"하며 말했다는 이 연극이 호평을 받으며 6개월간 공연하게 되면서 햅번은 자신의 브로드웨이 데뷔작으로 뉴욕시가 수상하는 상을 받았다.

햅번은 헐리우드에 1952년작 '은밀한 사람들'로 데뷔해서 경험을 살려 직접 연기한 발레리나 역활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햅번은 그레고리 펙과 '로마의 휴일'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게 되는데 원래 제작자는 앤 공주 역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낙점해 두었지만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햅번의 스크린 테스트[각주:1]에 엄청난 감명을 받아 햅번에게 이 역을 맡겼다.

와일러는 "햅번은 내가 찾고 있던 모든걸 갖춘 배우였습니다. 매력, 순진무구함과 재능, 정말 재미있고 대단히 매력적이었어요. 우린 모두 바로 이사람이라고 동의했죠"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에게 매료되었고 촬영이 끝나고 그레고리 팩도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걸어서 엔딩에 햅번을 자신과 동격으로 놓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오스카를 수상할거라고 예언할 정도였다.

로마의 휴일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햅번은 스타덤에 올랐으며 촬영 이후에도 햅번과 그레고리 펙이 함께 있는게 자주 보여서 둘이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공식적으로는 부인했다. 나중에 햅번은 "사실, 약간은 연애감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랑에 관한 영화를 찍다보면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죠. 하지만 그런 감정을 무대 밖에서도 가지고 다녀서는 안되겠죠"라면서 연애설을 부인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햅번은 1953년 9월 7일, 타임지의 표지인물로 선정되기에 이른다.

"비록 완전 신인은 아니었지만 이 영국 여배우는 가냘프고, 장난꾸러기 같으면서도 무언가 동경하는 듯한, 당당하면서도 어린아이 같은 독특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나중에 나오는 용감해 보이는 지적인 미소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생각할 때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모습에 사랑을 느끼게 한다." A.H. 와일러의 뉴욕 타임즈 1953.08.28 평론

'로마의 휴일'을 4개월 동안 촬영하고 햅번은 뉴욕에서 8개월간의 '지지' 연장공연에 들어가서 로스앤젤리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후 연기를 하는 12개월 동안 파라마운트 사에서 7편의 영화에 출연제의를 받을 정도로 인기가 치솟았다.

작품활동

로마의 휴일 다음으로, 다시 빌리 와일더의 사브리나에 험프리 보가트, 윌리엄 홀딩과 함께 출연하게 된 햅번은 지방시(Givency)의 협찬을 받게 된다. 당시, "미스 햅번"을 만난 지방시는 원래 캐서린 햅번을 만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했다지만 이후로도 허버트 드 지방시와 햅번의 우정은 계속되었다. 한편 사브리나를 촬영하면서 홀딩과 햅번은 사랑에 빠졌고, 햅번은 그와 결혼하여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홀딩이 정관수술을 받은 것을 알게 된 후 두사람의 관계는 식어 버린다.

1954년, 물의 요정 운디네 역으로 무대에 서게 된 오드리 햅번은 멜 화라와 만나고, 로마의 휴일로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6주 후, 햅번은 운디네 역으로 토니 상까지 수상하는데, 오스카와 토니상을 같은 해에 받은 여배우는 햅번을 포함해서 세명 뿐이다.[각주:2]

1950년대 중반이래 햅번은 헐리우드 최고의 영화배우를 넘어서는 패션 아이콘이 되어 그녀의 장난끼 있고 말괄량이 같은 깜찍한 외모에 독특한 스타일은 당대의 유행을 이루었다. 헐리우드 최고의 흥행배우로서 오드리 햅번은 사브리나의 험프리 보가트, 퍼니 페이스에서의 프레드 어스테이어, 모리스 쉬발리에, 오후의 연정에서의 개리 쿠퍼,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죠지 페퍼드, 샤레이드의 캐리 그랜트, 마이 페어 레이드의 렉스 해리슨, 백만달러를 훔치는 법에서 피터 오툴, 로빈과 마리안에서 숀 코너리 등등과 협연했고 출연한 남자 주연 대부분과 염문설이 돌았다.

렉스 해리슨은 오드리를 최고의 여배우로 불렀고[각주:3] 캐리 그랜트는 그녀를 사랑해서 한번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오드리 햅번과 영화를 한번 더 찍고 싶군요"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또 그레고리 펙과는 일생동안 친구로 지냈으며 그녀가 죽은뒤에 그레고리 펙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가 좋아했던 타고르의 "끝없는 사랑"을 읊을 정도였다. 간혹 보가트와 햅번은 잘 안맞았다고 하지만 사실 보가트는 햅번과 가장 친하게 지낸 배우라서 햅번도 "때로는 터프가이라는 사람이 가장 부드러운데 보기(보가트의 애칭)가 나한테 그랬다"고 말하기도 했다.

- 1957년, '퍼니 페이스'는 그녀가 가장 좋아한 작품중 하나인데, 여기서 프레드 어스테어와 함께한 춤을 좋아했다.

- 1959년, '수녀 이야기'도 호평을 받았으며 "그 동안 통속적인 어린소녀 역할의 상징처럼 여기던 이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루크 수녀역의 햅번은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고 평했다.

- 1961년,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연기한?홀리 골라이틀리는 그야말로 20세기 미국 영화계의 상징이 되었으며 햅번도 "내 연기 경력 중 가장 신나는 캐릭터이면서 정말 연기하기 힘들었던 역이기도 하다"고 회상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지방시에서 특별 디자인한 옷을 협찬받았고 살짝 금발로 염색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햅번은 헐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자리를 확고히 했고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가 축가를 불러주던 관습으로 마릴린 몬로가 그랬듯이 JFK의 마지막 생일(1963.05.29)축가를 불러준 것도 그녀였다. 하지만, 이런 유명세에도 햅번은 여전히 가족들과 조용한 집(저택 말고)에서 정원을 꾸미며 소박하게 살았다.

- 1963년, 햅번은 샤레이드에서 로마의 휴일과 샤브리나에서 딱지를 맞은 캐리 그랜트와 처음이자 유일하게 공연을 했다.

- 1964년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후 가장 관심을 불러모은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일라이자 둘리틀 역을 맡는다.?원작에서 주연을 맡았던 쥴리 앤드류스를 제치고 캐스팅 된 햅번은 원래 배역을 줄리 앤드류스에게 양보하려고 했으나 제작진이 줄리 앤드류스는 배제하기로 처음부터 결정했고 만약 햅번이?맡지 않는다면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주겠다는 말을 듣고 그 배역을 맡았다.

당시의 잡지들은 "줄리 앤드류스가 영화에서 그 역을 맡기에는 적절하지 않고 햅번이 좋은 선택이라고 대부분 동의한다"고 했고, 쥴리 앤드류스는 같은 해의 메리 포핀스에서 주역을 맡고 있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햅번은 노래를 포함해서 모든 부분을 녹음했지만, 결국 대역 전문의 마르니 닉슨의 목소리로 전부 더빙했는데 그 소식을 듣자 햅번은 무대를 뛰쳐나갔고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돌아와서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다. "Just you wait", "I could dance all night"를 포함한 햅번의 원곡은 DVD판 마이 페어 레이디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렇게 목소리가 다른 사람이 자기 배역의 곡을 녹음한다는 걸 듣게 되자, 햅번은 "어쩜... 어쩜 그럴 수 있어요. 렉스(남자주연)는 연기랑 노래를 그대로 녹음했는데, 다음에는..."까지 말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더빙 되었지만 비평가들은 대체로 햅번의 연기가 훌륭했다고 인정했으며 진 링골드는 "오드리 햅번의 연기는 매우 훌륭했으며 그녀가 일라이자 역할을 하는게 나이에 맞다"고 평했다.

한편, 이 문제는 1964~65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불거지게 되어 햅번은 여우주연상 후보도 되지 못한데 반해 앤드류스는 메리 포핀스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당시의 언론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라이벌 구도로 바람을 넣었지만 둘다 불화설을 부인했고 어찌되었건 쥴리 앤드류스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다음에도 둘은 사이좋게 지냈다.

-?1967년 출연한 "언제나 둘이서"는 비전형적이고 독창적인 이혼에 관한 영화였는데 감독인 스텐리 도넨은 햅번은 여전히 즐거워 보였다고 말하고 하지만, 같은 해의 "어두워 질 때까지"는 햅번이 맹인여성 역할을 맡아야 했던 데다가 제작자인 멜 화라와 이혼하면서 대단히 스트레스가 심해서 15파운드나 체중이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협연한 리차드 크레나와 감독인 테렌스 영 덕분에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도 있었는데, 크레나는 23년전, 아른헴에서 영국군 기갑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한테 포탄을 퍼부었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고, 여기서의 연기로 헵번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67년, 이혼을 한 후, 15년간의 성공적인 연기생활을 정리하며 햅번은 활동을 줄였다. 이혼 이후, 심리학자 안드레아 도티 박사와 재혼하고 불임으로 고생하다가 둘째 아이를 낳았다. 도티와 몇차례 별거 생활을 하면서 1976년, 로빈과 마리안에서는 숀 코너리와 협연하여 성공적인 복귀를 했지만, 터닝 포인트에서의 전직 발레리나 역은 거절했다.[각주:4]

햅번은 1979년, 작가인 시드니 셸던이 자신의 책을 영화화 하면서 각본과 주역을 맡은 '블러드라인'에서 실제보다 나이들어보이는 역할로 스크린에 복귀했는데 평은 좋지 못했고 흥행에도 실패했다.

햅번의 마지막 극장용 영화 출연은 벤 가자라와 협연한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의 "뉴욕의 연인들"로, 감독의 여자친구 도로시 스테튼이 연기한 한 스타가 살해당하는 내용이었는데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1987년, 로버트 바그너와 텔레비전영화 Love Among Thieves에서 샤레이드와 백만달러를 훔치는 법을 변형한 몇몇 단편에 등장했는데 코믹한 연기로 약간 성공을 거두었다.

햅번은 1988년작, 스티븐 스필버그의 얼웨이즈에서 천사역으로 카메오 출연하는 것이 마지막 필름 연기였다. 그후, 죽기 전에 햅번은 PBS에서 제작한 자신의 삶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고,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 녹음을 마지막으로 기나긴 연기 경력을 마무리했다.

헐리우드의 1652 Vine Street에는 명예의 전당에 오른 그녀의 별이 새겨져 있다.

결혼, 가족, 말년의 삶

1950년대 초, 그녀는 제임스 한슨과 약혼했는데, 그녀 스스로 "한눈에 반했다"고 말했지만, 드레스를 맞추고 날짜까지 잡은 상황헤서 결혼하게 되면 연기 생활을 그만둬야 한다는 부담감에 파혼했다.

이후, 햅번은 미국 배우 멜 화라와, 또 이탈리아인 의사와 결혼했고 두 사람에게서 각각 아들을 하나씩 낳았는데 장남의 대부가 루체른에서 햅번의 이웃이었던 소설가 A..J. 크로닌이다.

햅번은 멜 화라를 그레고리 팩이 주관하는 파티에서 만났는데, 그녀는 전에 영화 "릴리"에서 본적이 있고, 외모에 반했다고 한다. 화라가 나중에 햅번에게 연극 운디네의 대본을 보내주자 햅번은 운디네 역을 맡기도 했고 1954년 1월에 리허설을 가진 다음, 9월 24일에 결혼했다. 결혼히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가쉽 기사들에도 불구하고 함게 오랫동안 행복했는데, 멜 화라가 성격적으로 맞지 않았다고 나중에 인정하기는 했다. 화라는 그녀의 스케쥴을 너무 간섭했고 그녀를 "최면술사"라고 불렀는데 윌리엄 홀딩은 "내 생각에는 오드리가 멜이 그녀를 휘두르도록 내버려 둔 것 같다"고 나중에 언급했다.

첫 아이를 낳기전, 햅번은 두번 유산했는데, 1955년, 영화 언포기븐을 찍는 도중 말에서 낙마하여 바위에 부딪혀서 병원에 실려갔고 1959년에는 물리, 심적 장애로 다시 유산되었음을 들었다. 집에서 쉬는 동안 멜 화라는 그녀에게 영화 그린 맨션을 찍던 중 받은 아기 사슴을 애완동물로 주었고 피핀을 줄여서 입이라고 불렀다.

햅번은 1969년, 다시 임신했을때는 훨씬 더 주의를 기울여서 그림만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고 제왕절개 수술로 분만했다. 재혼한 다음인 1974년 마지막 유산을 하게 된다. 햅번은 아들에게 애송시 "Time Tested Beauty Tips"를 자주 들려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시는 그녀가 자작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사실 샘 레이븐슨이 지은 것이다.

시 전문 보기. http://kr.blog.yahoo.com/rrain413/1062

햅번은 애완동물을 좋아해서 Mr. Famous라는 이름의 요크셔 테리어를 길렀는데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녀를 달래기 위해서 멜 화라는 Assam?of Assam이라는 다른 요크셔를 데려오기도 했고, 둘다 목욕을 시키거나 함께 재우곤 했다. 아들도 코키라는 이름의 코커 스패니얼을 키웠고 나이가 들어서 햅번은 두마리 잭 러셀 테리어를 키웠다.

멜 화라와의 결혼은 1968.12.05까지 14년간 지속되었으며 아들의 말에 의하면 햅번은 결혼생활에 만족했었다고 하지만 멜 화라는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이 돌았고 햅번도 "언제나 둘이서"에서 협연한 엘버트 핀리와의 염문에 시달렸다. 그녀는 소문들을 부인했지만 감독인 스텐리 도넨에 의하면 "앨버트 핀리와 함께 있을때는 새로운 사람처럼 보이곤 했다. 그녀와 앨비는 잘 어울렸고 훨씬 젊어 보였다. 화라가 없을때는 사이 좋더니 멜 화라가 촬영장에 오면 오드리와 앨비는 남남처럼 행동해서 웃기곤 했다"

둘은 별거하다가 이혼했고, 햅번은 날이 말라가면서 이탈리아 심리학자 안드레아 도티에게 치료를 받다가 그리스를 여행하던 중 사랑에 빠졌다. 아이를 많이 갖고 일을 그만두고 싶어했던 햅번은 1969.01.18, 재혼했고, 아들은 서로 사랑했다고 하지만 도티는 계속 젊은 여자들과 염문설이 나돌았다. 둘의 결혼은 13년간 지속되었지만 루카와 션이 이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싶을 즈음에 끝났다. 비록 햅번은 화라와 모든 관계를 청산했지만(이혼한 다음 션의 졸업식과 결혼식에서만 멜 화라와 대화를 나누었다) 도티와는 아들과 함께 자주 만났다.

죽기 얼마 전에도 그녀는 메를 오베론과 결혼했던 네덜란드의 미남배우 로버르 왈더스와 자주 만났는데 도티와 결혼하고 있던 시기에도 친구로서 만나고 있었으며 햅번이 마지막으로 이혼한 다음 함께 살기 시작했지만 결혼하지는 않았다. 1989년, 9년간 함께 지내고 그때가 그녀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바바라 윌터스가 왜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질문했는데 이미 결혼을 해봤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유니세프 여행을 함께 계획했고 그녀가 연설을 할때마다 참석해서 가끔 눈물을 흘리곤 했다.

암투병

1992년, 소말리아에서 스위스로 돌아왔을때, 급작스러운 고통에 시달리게 되자 그녀는 10월에 전문가에게 진단을 받기 위해 로스앤젤리스로 갔으며?11월 1일, 의사는 내시경 검사를 통해 맹장에서 퍼진 종양을 발견했다. 암은 수년간 천천히 진행되었으며 내장기관으로 전이되었으며 수술후 항암치료를 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고 12월 1일에 재 수술을 했지만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햅번이 비행기 여행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지자 지방시는 L.A에서 자가용 제트기를 대절하여 스위스의 집으로 보내주었다. 오드리 햅번은 1993년 1월 20일, 암으로 스위스의 토론체나에서 사망하고 그곳에 뭍혔다. 향년 63세였다.

유니세프 활동

연기생활을 마치고, 오드리 햅번은 유니세프(United Nation's Children's Fund, UNICEF)에 자원봉사자로 지원했으며 어린시절 독일점령기간에 살아남은 행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생을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돌보며 살기로 결정했다. 햅번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네덜란드어와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았고 덕분에 여행하기 더 쉬웠다.

1950년대에도 UNICEF에서 활동했으며 1954년에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훨씬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여생동안 불쌍한 어린아이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고 그녀와 친한 이들은 증언하고 있다. 1988년 에디오피아를 방문한 그녀는 메켈레의 고아원을 방문해서 500명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식료품을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절망감을 느껴요. 음식이 남아도는 세계에서 2백만의 아이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참을수가 없습니다. 지난 봄에 적십자사와 유니세프의 작업자들은 내전으로 북부지역에서 철수해야 했습니다. 저도 반군 지역에 가서 음식을 찾아 10일동안, 때로는 3주동안이나 걸어온 아이들과 엄마들을 보았습니다. 너무 끔찍하고 견디기 어렵습니다."

"'제3세계'라는 단어를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인간다움이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으면 합니다."

1988년 9월, 햅번은 터키의 난민촌을 방문했고, 이곳이 유니세프 활동의 "가장 훌륭한 모델"이라고 표현했다.

"군인들이 트럭을 제공했고 , 생선장수가 백신을 담도록 수레를 주었습니다. 날자에 맞출 수 있어서 나쁘지 않았네요"

10월에는 햅번은 남아프리카와 베네주엘라, 에쿠아도르를 돌아보았다.

"산동네, 빈민굴, 판자촌에 수도시설이 들어서자 기적처럼 생각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유니세프는 기적입니다. 아이들에게 학교를 제공하도록 벽돌과 시멘트를 유니세프가 제공합니다." 의회 연설

햅번은 1989년 2월 중앙아메리카를 돌며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의 지도자들을 만났고 4월에는 왈더스와 함께 수단을 방문하여 "생명선 작전"에 참가했다. 당시 수단은 내전으로 인해 식량과 응급 의료지원이 차단된 상황이었으며 이들은 수단 남부에 음식을 지원했다.

"저는 한가지 사실만을 볼 뿐입니다. 이곳의 비극은 자연이 아닌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이 만든 재해의 해결책은 오직 하나 평화 입니다"

10월, 햅번과 왈더스는 방글라데쉬를 방문했다.

"어린아이들이 때로는 구름처럼 몰려들어 귀찮게 할때도 햅번은 아이들을 안아주었는데 나는 그런 걸 전에는 본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망설이기만 하지만 그녀는 달랐고 아이들은 그녀의 손을 잡고 만지며 즐거워 했다. 마치 어릿광대 같았다." - UN 사진작가 John Issac.

1990년 10월, 햅번은 베트남에 방문하여 유니세프가 지원하는 예방접종과 정수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1992년 9월, 죽기 4개월 전에 햅번은 소말리아에 들렀으며 그곳을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악몽 속으로 걸어들어온 것 같습니다. 에디오피아와 방글라데시에서도 기근을 보았지만, 여기 같지는 않습니다. 상상했던 이상으로 끔찍하고...? 정말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네요." "지구의 적신호 입니다, 정말 최악의 적신호죠. 마을과 난민 수용소를 사람들은 모른척 합니다. 묘지. 이곳에는 묘지들이 어디든지 있습니다. 길가에도, 오솔길에도, 강가에도, 수용소 근처에도, 어디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상황에서도 햅번은 여전히 희망을 나타냈었다.

"아이들은 정책적으로 방치되어 있지만, 시간이 흐르고, 인도주의적 지원이 정책화 된다면, 정치도 인간적이 될 것입니다.""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은 현실주의자가 아닙니다. 저는 유니세프에서 생명수를 실제로 보았습니다. 수백년 동안 어린소녀들과 여자들은 물을 긷기 위해 몇길로 미터씩 걸어야 했던 곳에서 이제 그들은 집에서 나오는 맑은 물을 마시게 됩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맑은 물은 마을 아이들의 건강을 가져옵니다."

"이곳 사람들은 오드리 햅번이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니세프를 압니다. 유니세프를 보면 사람들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밝아집니다. 수단에서 사람들은 물펌프를 유니세프라고 부릅니다."

1992년, 미국 대통령은 그녀에게 유니세프에서의 공로로 자유훈장을 수여했고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여가 결정되었으며 그녀의 아들이 대신해서 수상했다.

2006년, 환경보존협회는 오드리 햅번상을 제정하여 세계 어린이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사람에게 수여하기로 했고, 이 상의 최초 수상자는 오드리 햅번에게 사후 수여되어 오드리 햅번 아동 기금이 되었다.

햅번 스타일

오드리 햅번은 아직도 아름다움과 패션의 상징이며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히곤 한다. 여전히 햅번 스타일은 인기가 있으며 오늘날의 이미지와 달리, 햅번은 패션에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고 편안한 옷을 즐겨 입었다. 게다가 본인 스스로는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1959년의 한 인터뷰에서 "때떄로 저는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너무 살이 쪘거나, 너무 키가 크거나... 또는 평범하고 못생긴 것 같아요. 제가 느끼는게 괜한 열등감 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연기하면서도 이런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어요. 너무 심해지면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이런 생각들을 해소하곤 해요"라고 말했다.

오드리 햅번의 자서전을 토대로 만들어진 2000년의 미국 영화 "오드리 햅번 스토리"에서는 제니퍼 러브 휴이트가 햅번 역할을 맡아서 미니시리즈로 방영되었으며 10대시절의 헵번 역은 에미 로섬이 맡았다.

2003년, 미국우편협회는 그녀의 인도주의와 헐리우드에서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사브리나의 햅번을 모델로, 마이클 J 디의 일러스트를 우표로 만들었으며 비 미국인으로서는 이례적인 명예다.

햅번은 여전히 범세계적으로 인기있으며 일본에서는 로마의 휴일을 디짙널 채색한 영상을 기린 흑차 선전에 활용하였으며 미국에서도 2006.09.07~2006.10.05동안 Gap 광고에서 퍼니 페이스에서의 춤추는 장면을 이용하여 스키니 블랙 진 선전에 햅번을 등장시켰다. 이 광고를 위해 Gap는 오드리 햅번 아동 기금에 기부를 했고 이 광고가 상당히 유명해 져서 YouTube에서는 20만명의 이용자가 시청하기도 했다.

지방시가 디자인한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검은 드레스는 2006.12.05, 크리스티 경매에서 467,200파운드(92만 달러. 경매가의 7배)에 낙찰되었으며 영화에서 사용된 드레스 가격으로는 사상 최고 가격이고 수익금은 인도의 유랑하는 아이들을 돕기 위한 City of Joy 기금에 사용되었으며 자선기관에서는 "놀라운 여배우 한분의 옷을 판 대금으로 아이들에게학교를 지어줄 벽돌과 시멘트를 살 수 있게 되니 눈물이 흐릅니다."고 말했다. 이 드레스는 실제로 햅번이 입은 드레스 2벌 중 한벌로, 다른 한벌은 마드리드의 지방시 의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작자가 이 곡을 빼자고 말했을때, 오들희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돼"라고 말했다고 할 정도로 사랑한 노래, 오들희의 음역에 맞춰서 만들어진 이 아름다운 곡은, 실은 오들희님께서 부른 버전이 아니다.(그 곡은 1993년에야 공개되었다.) 그 덕분에, 아카데미 음악상과 주제가 상을 받고도 여우 주연상을 수상하지 못했지만 아무렴 어떤가.(신은 공평했다. 캐서린 햅번에게는 오드리 햅번의 얼굴을 주지 않으신 대신 4번의 오스카와 12번의 노미네이트를 선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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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의 미스 골라이틀리가 보여주는 원조 된장녀, 원조 진상녀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오들희 님이시기 때문에 미워할 수 없다. 아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없지만 영원한 그대에게.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I'm crossin' you in style some day
달빛이 흐르는 강 저편 멀리, 나 언젠가 그대에게 가리.

Oh, dream maker, you heart breaker,
그대 꿈꾸는 이여, 그대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여.

wherever you're goin' I'm goin' your way;
그대가 가는 곳 그 어디라도 따르리

Two drifters off to see the world there's such a lot of world to see

We're after the same rainbow's end
우리는 떠돌이. 세상 속에서 무지개의 끝을 찾아 떠나네

Waitin' 'round the bend?My huckleberry friend Moon river and me
여기서 그대를 기다리네. 나의 오랜 친구, 달빛이 흐르는 강과 나.

  1. 카메라가 켜져 있는 상황에서 햅번이 촬영되는 줄 모르는 상태에서 연기한 것 [본문으로]
  2. 다른 2명은 셔얼리 부스, 엘렌 버스틴 [본문으로]
  3. 렉스 해리슨의 아내이고 영국 여배우이며 무용수인 케이 캔달은 햅번과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본문으로]
  4. 셔얼리 멕클레인이 그 역을 맡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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