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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Ship and Sail

해군 전술 -2

3. 청일전쟁

1886년 8월 1일의 나가사키. 청나라의 최신예 전함 정원, 진원호가 순양함 제원, 위원을 동반하고 입항했다. 명목상으로는 수리를 위해서 기항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군함외교로 무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당대 최강의 이 거함은 배수량 7,400톤에 주포는 12인치포. 3000톤 급 함을 사들이는 것도 버거워 하던 일본에게는 페리 제독의 흑선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청난 충격이 되었다.

당대 최강의 거함.

방어구조가 특징적으로 함선의 중앙부에 citadel을 설치, 핵심보호 구역에는 두터은 크루프 강철을 덧대어 침몰되지 않는 강력한 방어력을 확보했다. 배의 좌우측에 12인치 주포 포탑이 설치되어 있고 전공함 사상에 따라 충각과 포를 배치한 것이 특징.

정원/진원이라는 명칭의 의미는 각기 먼곳을 정벌/진압 한다.는 뜻.

충각이 대단히 두드러져 보인다.

게다가 이 거함을 배경으로 청국 병사들은 13일에 상륙을 개시해서 육지에서 마음껏 행패를 부리고, 말리러 온 일본 순사들을 베어버리는 등 심한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이것이 충격이 되어 일본은 같은 해 제 6차 조함계획을 서두르기 시작한다. 한반도를 이익선에 편입시킬 것을 목표로 당시 일본의 국가예산 7천만엔 중 2천만엔을 군사비로 지출하고 있었는데, 그 중 1/6에 해당하는 330만엔을 뚝 잘라서 해군 건조비에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서남전쟁 이래 군사비를 계속 확충해온 결과였고 일본으로서는 1,700만엔의 공채를 발행하면서 시도한 엄청난 무리였지만 그 당시 정원급 장갑포탑함 1척의 가격은 387만엔이었다.

결국 그에 대응할만한 군함을 사는 것은 무리였지만 어떻게든 해군국인 일본으로서는 중국에게 해군만은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어야 발언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던 중에 프랑스에서 초빙된 에밀 베르탱이 일본에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4전함 합체작전."

당대에 천재 설계사로 이름이 높던 에밀 베르탱이지만 그는 나중에 3경함 부포를 영국제 암스트롱포로 변경한다는 설계변경 사항제안을 듣고, 삐져서 돌아가버렸다. 

청년 학파의 영향을 받은 에밀 베르텡의 제안은 정원급의 대형함 대신에 중형함에 대구경 포를 장착해서 완벽한 조함으로 두대를 한대처럼 사용해서 (주포도 하나는 앞에 하나는 뒤에 달려 있다.)거함을 제압하자는 것이었고, 이것이라면 단함가격이 250만엔 전후라는 것이 해군대신 가와무라 스미요시의 관심을 끌었다.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3척만 의회가 허가를 내어주었지만 아무튼 이듬해 일본 내각은 749만엔의 조함공채 발행을 승인했고, 이리하여 삼경함 이츠쿠시마, 마쓰시마, 하시다테가 등장하게 되었다.

마쓰시마. 주포가 뒤에 있다.

이츠쿠시마. 주포가 앞에있다. 동형함인데! 이것은 원래 2척이 세트를 이루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4척이 세트가 될 예정이었지만 의회가 3척만 허가를 내주었기 때문.

포탑이 밀폐식이 아니라 바베트 식이라서 방어력이 약하고, 전체적으로 측면장갑을 포기하고, 안쪽에 기관과 탄약고를 보호장갑으로 따로 보호한다.

에도시대에 일본을 유람한 유학자 하야시 슌사이가 일본국사적고에서 일본 3대 절경이라고 칭송한 히로시마의 이츠쿠시마, 교토의 하시다테, 도호쿠의 마쓰시마에서 따온 이름으로, 이 배들은 일본해군의 주력으로 12.5인치 주포는 포구초속 700m/s로 정원과 진원의 장갑판을 무난히 관통할 수 강펀치로 기대를 모았지만 현실은 엄청난 문제투성이의 배를 떠안게 된 일본이었다.

먼저 문제를 일으킨 것은 엔진 부위로 프랑스에서 준공되어 일본으로 회항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결함을 일으켜 인도에서 긴급히 프랑스 기술자를 불러 수리한 것을 시작으로, 잦은 기관 고장이 끊이지를 않는데다가 설계상의 속도보다 낮은 11~12노트가 최대속도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지만 한계에 가까울 정도로 무거운 중포를 탑재한 나머지 포탑을 선회하는 것만으로 항행에 지장이 오는 밸런스 문제가 지적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준이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발사속도도 느린데다 한번 발사하면 침로가 바뀌는 등 골치아픈 데다가 가난한 일본으로서는 예비 포열도 확보하지 못해 실제로는 제대로 사격훈련도 못하고 청일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무튼, 3경함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일본은 영국에게 건함을 맡기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 고속의 순양함들 위주로 건함계획을 짜나가면서 그 1번 타자로 25노트의 세계 최고속함 요시노를 암스트롱 사에 발주하고 이것이 청일전쟁의 스타로서 대활약하게 된다.

경순양함의 선조 뻘. 당대최고속 함.

청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일본해군의 핵심과제는 어떻게든 북양함대를 격멸하는 것이었다.

청나라와 전쟁이 발생할 경우 서전이 이루어질 조선의 빈약한 도로 사정상, 전개한 사단에 보급을 유지하고 중국군의 증원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해야 하는데, 문제는 북양함대와 일본 해군의 전세력은 비슷한 정도라는 점이었다. 각개격파의 위험을 무릎쓰고 수색을 벌인끝에 일본해군이 북양함대의 주력과 격돌한 황해 해전에서 리사 해전의 전훈을 염두에 두고 구성한 자매함 단횡진을 펼치고 있는 북양함대에게(실제로는 양익이 약간 느려서 꺽인 모양) 단종진을 형성한 일본함대는 상대의 우익을 치고 유격대와 보낻가 갈라져서 협격하는 형태가 되었지만, 이것은 유격함대 사령관 츠보이 고조 소장이 독단적인 지휘를 한 결과로 애초의 작전과는 좀 다른 진행이 된 것이다.

이 해전에서 일본함대는 12척 중 경원, 치원, 양위, 초응 등 4척을 격침시키고 광갑 1척을 좌초시키는 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정원에는 159발, 진원에는 220발이나 명중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북양함대도 일부함은 충각돌격을 실시했으며 정원과 진원은 각기 120발과 77발을 발사하며 분전했지만 마쓰시마를 제외하고는 일본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일본군은 대구경 거포 보다는 다수의 속사포를 탑재해서 상대의 함상 구조물만 파괴, 무력화시킨 것으로 명중탄은 많지만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citadel은 무사했고 그 때문에 북양함대는 잔여세력을 이끌고 여순방면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또, 고속함의 속사포 공격으로 무력화된 적함에 결정타를 날려야 할 3경함은 12.5인치 거포의 조작훈련 부족으로 1시간 1발을 발사하는 정도에 불과했고, 이런 느린 발사속도를 개선하기 위해 포탄을 포탑 주변에 쌓아두었다가 기함인 마쓰시마의 4번 부포에 정원의 12인치 포탄이 명중, 포탄들이 유폭되는 대폭발을 일으켜 사령장관 이토 스케유키는 후속함 하시다테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실 3경함은 잦은 기관고장과 빈약한 방어력, 주포가 균형을 깬다는 치명적인 결함은 있었지만, 기본적인 데미지 컨트롤 능력은 좋아 끝내 침몰되지 않고 어떻게든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무튼, 황해해전의 결과가 라사해전과 달라진 것은 기술적인 발전으로 소구경포와 중구경포의 발사속도가 많이 개선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고, 아직 불완전한 면은 있지만 함선간의 의사소통 효율이 향상되었으며 비교적 고속으로 함대가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북양함대가 패한 것은 기함인 정원의 마스트가 파괴되는 등 각 함간의 병사 숙련도가 부족했다는 점, 병사 개개인의 임무에 대한 수행능력과 의지에서 일본측이 우위에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지만, 이런 정신론이나 운에 따르는 요소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역시 이화원 개축비용으로 서태후가 해군 예산을 유용해서 정원과 진원을 보조할 고속순양함의 구입이 불가능했고, 훈련비용이 부족해서 사격이나 기동의 연습이 미비했다는 점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리사해전 이후의 기술적 발전을 보여준 이 해전으로 충각돌격의 무력함이 확인되었고, 속도를 중심으로 본대와 고속함을 구분해서 편성하는 것 또한 러일전쟁까지 이어지는 전훈이다. 특히, 장갑의 편성에 있어서 적어도 현측에는 충분한 장갑을 설치하지 않으면 내부에서 화재가 일어나는 2차피해가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장갑대 순양함(belted cruiser)의 개념에서 기관의 출력을 향상시켜 속도와 항속거리를 늘린, 프랑스의 신형함 드푸이 드 롬이 등장하고 러시아에서는 류리크가 진수되었다. 이로서 전함보다는 공, 방에서 약하지만 현측에 충분한 장갑을 두르고 순항성능이 뛰어난 장갑 순양함(armored cruiser)이 등장하게 된다.

이후 북양함대는 웨이하이웨이에 잔존세력을 보존하고 함대를 온존시키는 전략으로 나갔으며, 일본군이 만주를 거쳐 직례평원으로 전진해 감에 따라 해상 보급선이 길어지게 되자 이를 위해 일본군은 웨이하이웨이의 봉쇄에 나섰다. 어떻게든 북양함대의 잔존세력을 격파할 것을 명령받고 있었던 일본 함대의 활동중에 이 시점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어뢰정을 실전에 투입해서 웨이하이웨이 항내로 잠입시켜 어뢰공격을 실시했다는 점으로, 2차대전에서 일본 최후의 수상이 된 스즈키 칸타로 대위가 지휘를 맡은 이 공격은 시계가 안좋았고 경험이 부족한 탓에 어뢰만 발사하고는 허둥지둥 회피했을 뿐이지만,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의외로 북양함대의 기함인 정원호를 좌초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 확인되어 기뢰공격의 가능성을 잘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4. 러일전쟁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전부터 러시아의 상황을 주의깊게 살펴보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막강한 러시아 제국과의 일전을 준비했고, 전쟁의 시기가 1904년이 된 것은 이미 한계에 달해가는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이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는 사이에서 도출된 시점으로, 일본의 국가적 흥망이 이 전쟁에 달려있는 상황이었다.

이 전쟁의 승패는 한반도 주변해역에서의 해상권 확보가 관건으로, 러시아의 해군은 크게 태평양 함대, 발틱함대, 흑해 함대로 구성되었다. 태평양 함대는 러시아 해군 중에서도 정예로 그것만으로도 일본의 전해군세력 70~80%에 달하는데, 전쟁이 시작된다면 본국에서 증원함대를 파견해서 이것이 여순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태평양 함대와 합류할 경우, 세력비는 2:1로 완전히 압도될 상황이었다.

일본 해군이 격파당해 해상권을 상실하면 만주에 전개될 일본육군은 그렇지 않아도 강대한 러시아 육군에게 압사될 것인데다가, 이겼다 하더라도 빈약한 일본의 재정사정으로는 압승을 거둘 수 없다면 국제여론상 전비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될 상황. 따라서, 일본은 총력을 기울여 선전포고 없이 기습공격을 가하고, 상대방에게 선수를 이어나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예정대로 몇배의 전력을 투입해서 계속 승승장구 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여순에 도사린 태평양 함대의 동향이었다. 전쟁 이전에 일본해군의 초기 전략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산티아고 항을 봉쇄(시도)한 것처럼 여순 항의 좁은 입구를 낡은 증기선 등을 가라앉혀서 막아버리고, 소수의 경계병력을 남겨두어 요새병력의 진출을 막아버린다는 것이었지만 결과가 신통지 못하자, 결국 해군은 여순항을 봉쇄한채로 요새 육군에게 부탁하여 노기 마레스케의 지휘하에 제 3군을 편성 요새 공략에 나섰다.

노기 마레스케. 군신으로 유명한데 전투 지휘는 서툴다. 나름대로 (일본관점에서는) 훌륭한 인격자. 메이지 일왕이 죽자 자신도 따라 죽었다. 군인의 재능보다는 시인쪽에 재능이 있었던 듯.

여기에서 기관총 앞에 보병을 닥돌시키는 무모한 전술을 반복하여 시체의 산을 쌓아나간 노기와 함께, 또 한명의 일본군이 전후에 군신으로 추앙받게 되니 그 이름, 히로세 다케오.

이 사람... 근성의 황제.

그는 자원해서 여순항 폐쇄 작전을 지휘하여 2차례에 걸쳐서 위험한 작전에 나섰으나 부하가 행방불명되자 그것을 찾으러 갔다가 실종되었다.

유도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강도관에서 유도를 배웠고 강도간의 홍백 대항전에서 최초로 5명을 연속으로 격파하고 6명째와 비기는 기록을 세운 호남아였다. 또 강직한 인품이나 러시아 유학 시절의 애인과 결혼이 약속되어 있었다던지 하는 드라마틱한 부분이 히로세 다케오 본인에게 있었던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이 군신으로 추앙된 것은 전후 일본의 프로퍼겐더의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래로 만들어져서 업적이 칭송되고 동상이 되셨다.

마카로프 제독. 발틱함대 사령관 로젠스트벤스키랑은 연적관계. 일개 수병으로 시작해서 제독까지 올라갔다. 은영전에서 나오는 뷰코크의 모델이 아닐까 생각하는 중.

아무튼, 폐쇄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러시아 최고의 제독으로 이름이 높던 마카로프 제독은 함대를 온존시키되 항구 밖으로 진출, 일본 함대를 도발하는 함대기동을 하여 휘하 함대의 사기를 높이고 기동 훈련을 반복하고 있었으나, 이를 역이용한 일본군이 정해진 기동로에 기뢰를 설치하여 마침내 기함 페트로파블로스크와 함께 마카로프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여, 기뢰의 유용성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번에는 일본해군이 기뢰의 유용성을 입증하게 된다. 러시아 해군이 보복으로 항구 외해에 설치한 기뢰에 걸려 주력인 미카사 급 전함을 포함해서 전함 2척을 상실하는 대 피해를 입은 것.

야시마.

이로서 해전의 주전력이 되는 전함전력의 1/3이 상실되는 대 피해를 입은데다가, 육군의 항구 공략은 계속 늦어지고 피해만 늘어나는 데다가 장기간의 항구봉쇄로 함대의 기동력이 저하되는 등, 초조한 상황에 일본해군은 몰리고 있었다. 그러나 요새 내의 러시아 군도 보급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의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일본군의 의표를 찔러 거의 성공한 듯 보였으며 만약 성공했다면 일본군의 작전 수행은 엄청난 지장을 겪었겠지만, 러시아 측에는 대단히 불행하게도 비트게프트 소장이 탑승한 기함 레트위잔의 사령탑에 12인치 주포가 명중, 함대 사령부가 전멸하고, 통솔체계가 엉망에 빠지면서 탈출은 무위로 돌아갔다.

레트위잔. 미제. 사령탑에 크리 맞고 작살남.

체사레비치. 프랑스제. 발틱함대의 보로디노 타입은 이것의 발전형.

이 해전은 압록강 해전 이후 10년만의 본격적인 대 해전이었던 관계로 각국의 무관들이 관심을 갖고 조사를 나섰으며 그들은 피해를 입은 러시아 측의 선박들을 조사하여 전훈을 도출하려고 했다. 그리고, 단 한척도 포격에 의해 침몰된 적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이것은 아직 동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의 노시베에서 본국의 훈령을 기다리고 있는 발틱함대에게는 어떤 의미로는 희망을 줄 수 있는 사건이었다. 발틱함대의 주력전함중 보로디노 타입 4척의 전함은 태평양 함대의 어떤 전함보다도 신형이었기에 다시 일본함대와 교전을 벌이더라도 최소한 침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비록 침몰되지는 않더라도 태평양 함대의 각 함정들은 일본해군의 포격에 의하여 상부구조물이 완전히 무력화되고 기동성이 최소화된 상태로 간신히 피해나왔다는 점이었다.

어찌되었건 러시아 해군은 아직 최후의 카드를 남겨두고 있었다.

이후, 여순 공략전 최대의 격전지 203고지를 점령한 일본육군의 포격으로 항내의 태평양 함대가 괴멸되면서,

일본해군은 마침내 멀리 희망봉을 돌아오는 발틱함대를 만전의 태세로 기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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