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영국해군이 건조한 6번째 HMS Dreadnought는 근대 건함사에서 가장 큰 충격과 영향을 준 전함이다. 드레드노트가 가져온 개념 변화가 너무 혁신적이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전함들은 "pre-Dreadnoughts"로 규정되어 구형함 취급되었으며 드레드노트 이후의 전함들은 이 전함에 큰 영향을 받았다. 새로운 개념의 전함이 도입됨으로써 대대적인 건함경쟁이 발생하였으며 영국해군의 새로운 라이벌 독일해군과의 격렬한 건함경쟁은 1차대전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하게 되었다.
드레드노트는 단일 거포로 함포를 통일하고 부포를 배제한 동시대 최초의 전함이며 스팀터빈을 추진기관으로 하는 최초의 대형전함으로 당대에 최고속 전함이었다.
개념적 기초
전형적인 Pre-dreadnought 전함, 제인 연감에 수록된 Mikasa호의 도면.
당대의 전함들은 일반적으로 2연장 주포를 앞뒤로 장비하여 4문의 주포를 탑재하고 양측면에 다양한 구경의 부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이런 무장형태에는 몇가지 약점이 있는데, 측면에 장비된 부포들은 장비된 방향으로만 포격을 가할 수 있었으며 원양에서 심한 요동이 발생할 경우 포문으로 해수가 들어오기도 했다. 더욱이, 함포의 구경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일괄적인 함포통제를 할 수가 없고 각각의 함포가 독자적으로 포격을 가해서 자신의 탄착점을 찾아내야한다는 점에서 사거리와 측정과 조준을 어렵게 해서 함포의 명중율을 낮추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무장형태로 부포가 중시된 것은 청일전쟁때의 압록강 해전에서 소수의 대구경포를 장비했던 중국의 북양함대가 다수의 부포를 장비한 일본해군의 속사포를 상대하면서 주포 사격의 딜레이로 고생했던 전훈을 고려한 것이었다.
1884년 영국의 기술자 찰스 알게논 파슨즈가 증기 터빈 엔진을 발명하였으며 실험적으로 증기터빈 엔진을 탑재한 터비니아 호는 무려 34노트(시속 64km/h)라는 기록으로 1897년, 세계 최고속 기록을 세웠으며 영국해군은 1905년 구축함 HMS Viper와 HMS Cobra에 증기터빈 엔진을 시험적으로 장착했다.
단일거포함 (All-big-gun) 개념
전함의 포 구경을 모두 동일한 대구경으로 통일하여 어뢰가 닿지 않는 원거리에서 함교가 통제해야 사격한다는 이론은 이탈리아의 해군 기사 비토리오 쿠니베르티가 1903년 처음으로 도입한 개념이다.(영국의 재키 피셔 경은 자신이 이 아이디어를 1900년에 이미 구상했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 해군이 이 견해를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쿠니베르티는 제인 연감에 자신의 구상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고, 그가 구상한 17,000톤 급 배수량에 12문의 12인치 포, 12인치 핵심 방어구역에 24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전함의 컨셉은 영국해군에게 채택되었다.
일본의 개발 (1904-1905)
러일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쓰시마 해전에서 영국제 전함을 주축으로 하는 일본해군은 러시아 해군에게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이 해전의 결과로 앞으로의 해전에서는 최대구경의 주포만이 실효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으며 주포와 구경이 다른 부포들은 사격통제를 어렵게 만들 뿐이라는 원칙이 도출되었다. 쓰시마 해전에서 함포의 위력은 전함의 방어력을 뛰어넘기 시작했음이 입증된 동시에 사격통제 장비의 발달로 교전거리가 부포의 사정거리 밖에서(11km)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미국, 일본, 영국은 즉시 단일거포함의 건조에 돌입했다.
1904년 건조되기 시작하여 1905.05.15에 진수된 한 일본해군의 전함 사쓰마는 단일 거포함을 추구한 최초의 전함이지만, 건조에 필요한 대구경 포의 부족으로 계획과는 달리 4문의 12인치 포만을 장비하여 이전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중간한 형태가 되어 버렸다.
미국의 개발
윌리엄 S. 심스에 영향을 받아 미국도 드레드노트가 건조되던 시기에 단일 거포함 컨셉으로 1904년 USS Southcarolina와 USS Michigan의 건조를 추진했지만, 의회의 승인이 1905년 봄까지 내려지지 않았기에 실제적인 건조는 1906년 가을에 드레드노트가 건조된 이후에 시작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급 전함은 모든 주포를 중심축선에 배치하고 영국이 선호하던 측선에서 쳐진 포탑을 채택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보다 선구적인 개념이 도입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영국의 챨스 A. 파슨즈가 개발한 강력한 증기 터빈 추진기관 대신 기존의 3단 확장 엔진을 채택하고 있었으다. 건함 개념에 있어서는 오히려 앞서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Dreadnought보다 건조개시가 늦어졌고 배수량이 적은 형태로 완성되었다.
영국의 개발
영국의 제1해군경 존 "재키" 피셔 경은 9104년 "건함 위원회"에서 신조함 건함계획을 수립하고, 드레드노트의 설계에 들어갔다. 피셔는 재정적인 지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드레드노트 급이 보다 적은 비용으로 고성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알리는데 힘썼고 포트머스 왕립 조선소에서 불과 14개월 만에 완성하는 놀라운 속도로 건조되어 1906년 12월에 공개되었다. 이 신형전함은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여기에 도입된 혁신적인 개념들로 인하여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원래 재키 피셔는 영국 해군이 잠수함과 고속 어뢰 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전함보다는 단일거포를 장비한 순양전함을 위주로 전함과 순양함을 속도로 제압하고 그보다 소형함은 장갑의 방어로 제압하는 개념을 더 중시했다. 순양전함 개념은 1차대전 시기에 널리 각광을 받았지만, 피셔는 해군경으로 재직한 기간동안 단일거포 전함의 건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기술
1913년 해군연감의 HMS Dreadnought 개념도.
HMS Dreadnought의 설계개념 자체는 단순하고 수년간 해군 기사들 사이에서 논의되어 온 것이며, 기존의 3단 왕복 추진 엔진 대신에 증기 터빈을 사용하여 순항속도로 21노트의 고속을 낼 수 있는, 동시대의 전함들과 대등한 화력에 압도적인 속도를 낼 수 있으며, 포레스트의 공리(포레스트는 기동전 개념을 최초로 구상한 사람들 중 하나로, 그의 전략관은 "필요한 곳에 도달할 수 있는 전력이 최고의 전력이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에 따라 그보다 빠른 배들도 제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화력면에서는 대구경 포를 장비하기 위하여 부포의 수를 크게 줄여버렸고, 잠수함은 일반적으로 무시되었다. 드레드노트에는 5문의 2연장 포탑이 장비되어 있었으며 그중 셋은 배의 중심축선을 따라서 앞쪽에 1(A), 뒤쪽에 2문(X, Y)을 장비했고, 후부 포탑들은 마스트의 뇌격 통제실에서 개별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양측면의 윙 터렛(P, Q)은 함교구조물의 양측면에 배치되었으며 배치된 방향의 현측으로만 포격을 가할 수 있었다.
모든 포탑을 중심축선에 위치시키자는 제안은 포탑이 밀접하게 위치했을때 유폭이 일어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하여 거절되었지만 결국, 불필요한 선입견이었음이 훗날 입증되었다.
드레드노트는 양측면에 8문의 부포를 장비했으며 그 중 6문은 앞쪽을 향해서 사격할 수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화망이 좁은 편이었다. 12인치 주포들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10문의 주포를 하나의 목표물에 동시 발사할 수가 없었지만 현측사격을 중시했던 재키 피셔의 영향으로 이런 디자인 개념은 드레드노트를 계승한 초기의 순양전함들에도 이어졌다. 이런 배치로 장사정 주포와 단거리 부포의 조합으로 드레드노트는 예전의 전함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포격전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나중에 건조된 오리온 급 수퍼드레드노트 전함들은 효율성을 보다 개선하기 위하여 Superimposed 배치를 통해서 중심부에 계단식으로 높이를 달리하여 포탑을 배치하고, 부포를 중점적으로 방어구역에 배치했다.
드레드노트 급 전함은 주포의 구경을 동일화 하여 모든 주포가 단일한 사격특성을 가지게 하고, 동일한 구경의 포탄을 사용함으로써, 착탄을 확인하고 탄도를 수정하는 작업을 단순화 하게 되자 사격통제가 확실히 용이해 져서 서로 다른 구경의 함포를 사용하던 구식 전함에 비하여 발사속도와 명중율이 상승했다.
또한, 드레드노트는 명령계통에 전자식 통신장치를 도입한 최초의 군함들 중 하나이며 이런 개선의 결과로 예전에 사용되던 전성관보다 전투중 의사소통이 보다 확실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관측장치로는 비커스 사의 거리 측정기를 이용하였으며 관측소에서 측정한 거리 정보는 함내에 가장 방어가 철저한 사격통제소에 전달되도록 했다. 드레드노트 호가 시험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며서 거리측정기를 4.5피트의 표준측정기로 교체했고 이것이 이후의 표준 거리 측정기가 되었다. 퍼시 스콧 제독이 발명한 사격통제장비를 이용하여 통제관이 거리를 측정하고 지시하면, 각 포탑이 명령을 받아 사격을 하는 구조는 1909년에 드레드노트가 처음으로 도입했지만 곧 제거되고 1차대전 이전까지는 다시 활용되지 않았다.
이 외에도 드레드노트에는 전투중에 수직통로는 폐쇄되는 데다가 이런 연결구조가 함대 기동연습 중,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내용을 반영한 결과로 주갑판과 하부의 거주구역 사이에 수직 통로를 제거하는 구조를 채택했다. 범선들은 배들은 배의 선수부 사관실에서 통제되므로 사관실이 앞쪽에 배치되지만, 기선은 함교에서 통제되므로, 사관실이 앞쪽 1/3 지점에 위치하게 되었고, 이를 반영하여 드레드노트는 장교실과 엔진기사실을 가까운 위치에 배치하는 설계를 도입했다.
건함과 작전초기
HMS Dreadnought의 1:450 스케일 3면도.
피셔는 자신이 추진한 새로운 전함 디자인에 확고한 신념이 있엇기에 획득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이 신형전함의 건조에 투입했다. 새로운 선체가 항력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진 것도 운이 좋았으며 피셔 경은 건함 당시 예정된 21노트의 속도에 만족하여 더 이상 속도를 향상시키기보다는 장갑을 강화하는 쪽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최종 디자인에서는 1년전의 초기 디자인보다 강화되어 측면 장갑은 11인치, 포탑은 3인치의 장갑으로 방어되었다. 1905년 10월에 건조가 시작되어 4개월 뒤인 1906.02.10에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진수식을 거행했고 1906.10.03. 건조가 시작된지 불과 1년 하루 만에 완성되었다. 이런 경이적인 건함속도는 드레드노트의 후계함으로 예정되어 있던 넬슨 급 전함의 주포까지 유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이 놀라운 건조 속도와 드레드노트의 기술적인 가능성은 세계 각국 해군에 경종을 울리게 된다.
1906.12월, 시험항해를 마치고, 1907.01월, 지중해의 스페인령 트리니다드 까지 처녀항해를 나섰고 그곳에서 기술대령 레지널드 베이컨 경이 엔진과 주포 전체를 검사한 끝에 "위원회가 시도한 이 획기적인 디자인의 전함은 실제로 성공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보고했으며, 항해를 마치고 포트머스로 귀환한 드레드노트는 1907~1912동안 영국 본국함대의 기함이 되었다. 드레드노트는 현역기간 중, 대체로 스페인이나 지중해를 향한 일시적인 외유를 제외하고는 본국 근처에서 머물렀다.
드레드노트가 건조되고 시험항해를 마치자 전세계 해군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신조함의 디자인은 추후의 모든 전함들에 영향을 주어 "드레드노트급"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 지고, 이전의 모든 전함들은 "pre-dreadnought"로 분류되게 되었다.(넬슨급을 비롯하여 드레드노트와 동시대나 약간 뒤에 건조되기 시작한 전함들도 디자인 개념이 예전 형태를 따르고 있으면 모두 프리드레드노트 급으로 분류된다.) 동시에, 건함기술의 진보가 경쟁적으로 가속되어 드레드노트가 다른 전함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던 시기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무서운 기세로 신형전함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영국과 독일의 건함경쟁이 가속됨에 따라 잠시 뒤에는 디자인이 개선되고 부포가 강화된 벨러로폰 급을 필두로, 세인트 빈센트 급, 넵튠 급, 콜로서스 급이 연달아서 등장했다. 미국도 새롭게 선체 중앙에 모든 포탑을 위치시킨 슈퍼파이어링 개념을 도입한 플로리다 급 드레드노트 전함을 건조했으며 독일은 드레드노트와 비슷한 개념으로 윙 터렛을 비롯하여 8문의 주포를 장비한 카이저 급을 진수시켰다.
현역 활동 시기
1907~1912 동안 HMS Dreadnought는 영국 해군 본국함대의 기함이었다.
1910년 이 유명한 전함에 눈독을 들인 악명높은 사기꾼 호레이스 데 베르 콜은 영국 해군에게 아비시니아 왕족에게 이 배를 견학할 기회를 제공해 달라고 청원했다. 사실, "아비시니아 왕족"이라는 이들은 콜의 친구들이 가장을 한 것이었으며 그 중에는 어린 버지니아 울프와 블룸즈버리 그룹의 친구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사건은 드레드노트 사기 사건으로 유명해졌다. 콜은 나중에 이 배가 영국 해군력의 상징으로 가장 유명한 배였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밝혔다.
1910년에는 최초로 13.5인치 주포를 장비한 "수퍼 드레드노트"급 전함 HMS Orion이 취역했다. 이 전함은 12인치 포의 드레드노트 보다 강력한 화력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활용성과 동시에 당대의 전함들이 추구하던 국가적 위신에도 크게 기여했지만, 드레드노트가 빠르게 구형화 되었듯이 마찬가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다음 세대의 전함들에 비교해 본다면, 드레드노트는 어뢰의 공격에 방어력이 부족했으며 구축함에 대응하기 위한 부포 무장이 빈약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어 상부구조물에 76mm 12파운드 포를 14문으로 늘리고 포탑 상부에 10문을 추가했다. 1906년에는 이런 화력 증강에도 불구하고 신형 구축함들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따라 부포를 4인치 포로 강화했다.
대부분의 동시대 전함들 처럼 드레드노트는 뇌격 방어망을 장비하고 있었으나 그물망 제거기가 부착된 어뢰에게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속도를 현저하게 늦춘다는 점이 확실해지자 전쟁 초기에 제거되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드레드노트는 북해의 스캐퍼플로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제4 전함전대의 기함이 되었지만 근대 군함사에 불멸의 명성을 남긴 이 전함의 전공은 1915.03.18, U-29를 충각으로 들이받은 것 뿐이다.(드레드노트는 잠수함을 직접 침몰시킨 유일한 전함이다.) 1916년에 재 개장되어 1916.05까지 템즈강의 셔네스에 기지를 둔 제3전대의 기함으로서 독일 순양전함대가 해안을 포격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1차대전 기간 중 영국 해군의 가장 중요한 작전이었던 유틀란트 해전에 참가할 수 없었다.
드레드노트는 1918년 3월에 영국해군의 주력인 Grand Fleet에 제 4전대의 기함으로 일시 복귀했지만 북해에서의 잦은 순찰활동으로 함체가 손상되어 7월에 다른 구형 전함들과 함께 다시 퇴역하고 1919년 2월까지 로지스에 예비역으로 대기하던 중 1920.03.31, 4만4천 파운드에 매각되어 1921.05.09, T.W. Ward&Company가 스코틀랜드에서 폐기처분했다.
Dreadnoughts와 노급전함
Dreadnought라는 말의 의미는 Dread+Nought의 결합으로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영국해군의 전통대로 여러 대에 걸쳐서 전함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 6번째로 만들어진 Dreadnought가 가장 유명하여 근대식 전함의 세대를 pre-dreadnoughts, dreadnoughts, superdreadnoughts로 구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드래드노트 급을 일반적으로 노급 이라고 호칭하며 이것은 일본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본어로 弩(쇠뇌 노)라는 한자는 "도"라고 읽히며 드레드노트를 발음하기 어려웠던 관계로 노급이라고 일본식으로 조어한 것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쇠뇌는 강력한 병기로서 성벽도 파괴할 수 있는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견해도 있지만, 최초의 드레드노트가 16세기에 건조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어의 弩가 Dreadnought에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는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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