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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Ship and Sail

산타마리아와 콜롬부스

이름의 기원

안드리아스 반 에르트벨트 1628.

1492년,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1차 서인도제도 항해에서 사용했던 탐험대의 기함. 이 배의 소유주였던 후안 델라 코사(Juan de la Cosa)도 일등사관 겸 항해사로 탐험에 참가하였다.

원래의 이름은 라 가예가(La Gallega - "The Gallician")로 아마도 Galicia에서 건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선원 사이에서는 마리갈란테(Marigalante -"Dirty Mary")라고 불리웠다고도 한다. 다만 1552년에 신대륙에서 활약했던 스페인의 사제 바르톨로메오 델라 칸사스의 기록에는 한번도 콜롬부스의 기함을 산타마리아, 마리갈란테, 라 갈레가 라고 호칭을 부르지 않고 그냥 나오, 기함 이라고만 언급하고 있어서 이 배가 콜롬부스의 기함이었다는 것이 의심스럽다는 주장도 있다.

'산타마리아' 라는 이름은 동생 바르톨로뮤 콜롬부스가 크리스토퍼 콜롬부스의 아들이며 조카인 디에고 콜롬부스를 위해 만들어준 장난감 배의 이름에서 따와 새롭게 명명한 것이다.

산타마리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선박 중 하나지만 유감스럽게도 산타마리아 호의 실제 외형은 알려져 있지 않고, 동시대의 배도, 배의 설계도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산타마리아호의 돛대가 3개였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고 적재량이 100~120톤이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대체로 길이 23~32미터, 폭 6.7~9.1미터, 홀수 2.8~3미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무장은 대포 18문,(20파운드 포 4문, 12파운드 포 6문, 6파운드 포 8문), 1파운드 짜리 대구경 머스켓 소총 100정으로 무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콜롬부스는 특별히 이물 앞쪽에 돛을 추가로 사용하였고 메인돛대에는 보조돛을 추가하여 추진력을 높이려 한 것이 알려져 있다.

콜롬부스는 이 배가 너무 느리다고 싫어했으며 오늘날, 아이티의 Mole Saint-Nicolas로 알려진 지점에서 선원들의 기강문란으로 1492년 크리스마스에 좌초되었다. 콜롬부스의 항해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2월 25일, 화요일, 잠자리에 들자마자 페랄론소 니노(조타수)가 임무를 견습선원에게 떠넘긴 걸 알게 되었다. 보초를 서야 할 선원들도.... 잠자리에 들었다. 산타마리아 호의 운명은 한 경험 없는 견습선원의 손에 달렸다... 견습선원은 어둡기는 하였지만 모래톱이 몇마일 계속 펼쳐져 있어서 볼 수 있었는 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후안 델라 코사에게 견인밧줄에 묶인 보트에 올라 고물에서 바다에 닻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모두 보트로 달려들어 명령을 수행하지 않은 채 배를 탈출하여 약 2해리 거리에 있는 니냐호로 노를 저어갔다. 그들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배가 다시 항해를 할 수 있게 돛대를 자르게 했다... 그러나 노력도 헛된 것이 되었다." 

산타마리아 호는 완전히 해체되어 신대륙에 남기고 갈 선원들의 요새를 건축하기 위한 재료로 활용되었다. (남아있던 대원들은 다음에 왔을때 한명도 살아있지 않았다.)

콜롬부스

출신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항해자들 중 한명인 크리스토발 콜론에 관한 내용은 의외로 불분명한 부분이 대단히 많다. 출생연도도 1447 ~ 1453년 사이의 언젠가로 알려져 있을 뿐이며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도 알 수가 없다. 이탈리아 역사가들은 제노바 근처의 사보나에서 양모 직조공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지만 스페인 역사가들은 그의 출생지로 스페인의 여러 지역들을 추측하고 있다. 콜롬부스는 억양이 강한 이탈리아 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콜론이라는 그의 성에서 그가 유대인 출신이라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어떤 서적에서 콜롬부스는 자신의 모국어가 카스티야 어라고 하기도 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생애

25세쯤에 동생이 지도 제작자로 일하는 리스본에서 함께 지도 제작자로 근무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1479년에는 포르토 산토 총독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였고 동생인 바르톨로뮤 콜롬부스와 목숨을 걸고 포르투갈의 국립 기밀문서 보관소에서 몇장의 해도를 복사했다. 그의 너무도 확신에 가득한 신대륙에 대한 믿음(인도라고 생각했지만)은 아마도 실제로 신대륙이 그려진 지도에 의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 지도의 출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가 없지만, 수백년 전에 바이킹, 레이프 에릭슨이 빈랜드(바이킹들이 신대륙을 일컫언 명칭)를 탐험했고(바이킹들은 지도를 제작하는 지식이 없었다.) 중국인들도 미국대륙을 발견했었기에 인도를 거쳐서 어딘가의 지도가 흘러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페니키아 인들의 고지도 일부가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다.

콜롬부스는 1484년 포르투갈 국왕에게 대서양 횡단 계획서를 제출하였지만 거부당했고 1485년 스페인으로 망명하였다. 1486년에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을 알현하고 그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계속 설득한 끝에 왕실의 계리관 루이스 데 산탄겔이 자신이 탐험비용을 부담해도 좋다고 발언한 것에 자존심을 자극받은 여왕에게서 드디어 1492년 4월 서쪽으로 항해하여 인도를 발견하라는 임무를 받고 배를 지원받게 되었다. 그는 마데이라 서쪽에 무엇이 있는지를 너무도 명확히 알았던 것 같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항로를 선택한 것이 특히 그렇다. 그가 참고했던 몇몇 서적들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4권의 서적에는 여백에 콜롬부스 자신의 손으로 적어넣은 메모들이 남겨져 있다. 15세기 초의 추기관 피에르 다이가 쓴 "이마고 문디", 의사이며 지리학자였던 파올로 토스카넬리의 서적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크리스토발 콜론의 모든 발견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담했던 인도항로를 가져다 줄 수 없었기에 점차 비난이 강해졌고(그의 골치아픈 성격도 한 몫을 했다) 세번째 항해에서는 궁정 음모로 항해 도중에 해임되어 스페인으로 압속되었다. 네번째 항해에서도 인도 항로를 발견하지 못한 그는 1506년 5월 20일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비참하게 죽었다고 알려져있지만 그의 유골이 세비야, 히스파니올라 섬 중 어디에 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평가

당대 최고수준의 항해자로써 아주 간단하게 미탐험의 대양을 횡단해나간 인물(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도 위대한 인물이지만 인도항로는 비록 위험하기는 해도 곳곳에서 정보를 입수할 수 있고 기항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포르투갈이 국가의 위신을 걸고 추진한 사업이었다는 점에서 비교하기 어렵다.)이며 예언자에 가까운 인물로 너무나 정확하게 미지의 대양에서 목표의 중심부근을 맞춰 나갔고 과감한 이론가이며 예리한 르네상스 적 분석력을 가진 인물이면서도 지구가 표주박(서양 배)처럼 생겼다고 생각한 중세적 인물(그는 안틸 섬을 향해 아조레스 제도를 출발할때, "배는 하늘을 향해 순조롭게 올라갔다"라고 적었다. 서쪽으로 감에 따라 기후가 차츰 따뜻해 지는 것은 배가 조용히 태양 쪽으로 올라간다는 자신의 신념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지구는 둥근 것이 아니라 "축을 따라 경사진 것"이고, 지상의 천국은 "이 배의 축 꼭대기에 있다."고 적었다)인 콜롬부스는 정말로 수수께끼로 가득한 인물이다. 그의 배도 그렇다.

http://en.wikipedia.org/wiki/Santa_Maria_%28ship%29

클라시커 50, 역사와 배. 루츠 붕크 지음, 안성찬 옮김. 해냄.
탐험시대, 타임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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