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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Ship and Sail

Clipper

Image:Belle Etoile 1.jpg

4돛대 클리퍼선 벨 에뜨와르의 모형

클리퍼는 19세기에 주로 제작되고 여러개의 마스트에 돛을 장비한 고속의 범선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클리퍼는 폭이 좋고 긴 형태를 띄고 있으며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대량수송능력은 부족하지만 다수의 돛을 조합하여 항해능력이 뛰어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클리퍼는 주로, 영국과 미국의 조선소에서 건조되었으며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범선들을 건조했었다.(네덜란드에서 1859년 건조된 "Telanak"는 자바에 차와 승객들을 실어나르기 위한 배였다.)

클리퍼는 범 세계적으로 활용되던 선박이지만, 무엇보다도 영국과 동방의 식민지들 사이의 무역과 영국-미국간의 대서양 무역에 널리 활용되었다.

기원

Image:Vonstetinalightning.jpg

Lightning

17세기 이후에 조선공들은 대형 쾌속 범선은 "앞쪽은 대구처럼 둥글고, 뒤쪽은 고등어처럼 좁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1836년, 영국의 마크 보포이는 수학적으로 이를 반박하였고 그의 이론에 따라 1840년 뉴욕의 조선공 존 윌리스 그리피스는 고등어 처럼 좁은 고물(배의 뒷부분)은 속도를 저하시키는 소용돌이를 발생시킨다는 것을 입증했으며 그에 기초하여 앞쪽으로 갈 수록 뾰족하고 뒷부분이 둥근 배를 건조했으며, 이것이 바로 삼돛대 클리퍼선(Klipper)가 탄생하게 된 배경으로 1846년 12월 8일, 미국 클리퍼선의 발상지인 뉴욕에서 최초의 진정한 클리퍼인 시 위치 호가 진수되었다. 동시에, 보포이가 주장했던 대로 배가 길 수록 물의 저항이 감소하여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이 모형실험으로 입증되자 이전까지의 선박이 길이와 폭의 비율을 4~5:1로 유지하던 것을 개선하여 7~8:1로 변경했고, 이를 통해서 배의 속도는 거의 3배로 빨라졌다. 흔히 클리퍼 라는 말의 어원은 항해의 시간을 "클립"(단축)했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알려져있으나 이것은 클리퍼 보다는 커터에 적합한 표현이다. 물론 클리퍼도 그와 연관성을 완전히 부인하기는 힘들고, 클리퍼의 좁고 앞부분이 묵직하게 설계된 선체는 파도를 신속하게 뚫고나갈("Clip") 수 있게 해 주었다. 아이슬란드어 'klippa'와 영어의 'to clip'은 자른다 는 의미도 있으며 17세기에, Clip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빠르게 날아가는 날짐승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원래 Clipper는 빠르다는 뜻의 clip에서 파생된 말로, 대단히 빠른 경주마들을 호칭하는데 사용되어 빠르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going at a good clip"라는 표현이 있었을 정도였다. 1830년대의 초기 옥스포드 영어사전에서는 1835년 커틀러 라는 기자가 신문에서 함선을 호칭하는 표현으로 처음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독립전쟁 이전 체샤피크 에서 건조된, 탑슬 스쿠너 경무장 고속 사략선들도 클리퍼라고 불렀다. 클리퍼는 볼티모어의 영국 봉쇄망을 돌파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운반선들이 5노트 정도의 속도를 내었던 것에 비해 평균 9노트의 고속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20노트의 속도를 낼 수도 있었다.

클리퍼는 작고 고속의 선박이었기 때문에 당대에 값어치 나가는 화물이었던 차나 승객들을 고속으로 운반하기 위하여 이용되었으며, 향료, 차, 사람, 편지 처럼 작지만 고가의 화물을 운반하는데 활용되었다.

선주들은 누가 중국에서 비단과 차를 싣고 출발한 클리퍼들 중 가장 빠른 배에 상금을 내걸었고, 클리퍼들 간의 경쟁은 신문의 인기 기사중 하나가 되었다. 이 배들은 대부분 수명이 짧은 대신에 고속과 높은 조종성을 발휘하도록 설계되었으며, 만약에 일어날 수 있는 해적들과의 조우 상황에 대비하여 대포를 싣기도 했다.

클리퍼 카드 "Free Trade" 1860년대 초, 뉴욕의 네스비에서 인쇄된 것.

한편, 뉴욕과 보스톤에서 출발하여 샌프랜시스코로 향한 클리퍼들도 많이 있었으며 이들을 홍보하기 위해서 1850~1860년대에 만들어진 "클리퍼 카드"가 발행되기도 했는데, 이 들은 나무로 조각되었고 색을 입힌 출판물의 일종으로 미국 최초의 상업광고였다. 오늘날까지도 3,500장 정도의 클리퍼 카드가 남아있으며 이들은 그 미술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 때문에 개인 수집가들에게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티 클리퍼와 범선의 황혼

Image:Buttersworth - flying cloud.jpg

"Flying Cloud"

클리퍼 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것은 Tea Clipper라고 불리던 중국 무역용 클리퍼로, 유럽과 동인도 간의 무역로에 사용되기 위하여 건조되었으며, 지금도 영국, 그리니치의 드라이 도크에는 가장 유명한 티 클리퍼 중 하나인 커티 샥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1890년대 후반, 티 클리퍼들은 범선의 황혼기를 장식했으며 4개의 주 돛대와 2개의 보조 돛대를 합쳐서 6개의 횡범을 장비하고, 탑갤런트 세일과 자이브, 스테이세일을 포함하여 4개의 보우 스프릿을 장비하고 고물에는 개프 스팽커를 장비하는 복합돛들을 이용해서 풍력을 최대한으로 짜낼 수 있었다.

클리퍼들은 무역풍을 이용하는 전장범선으로 12시간 이상 7노트의 평균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들이 은퇴하자 범선이 무역에 활용되는 시대는 종막을 고했지만 범선 기술은 현대의 대양항해용 요트에 계승되었다.

클리퍼들의 최후

1857년, 골드 피버의 열풍이 휩쓸고난 미국에 닥쳐온 혼란이 있은후에 증기선이 폭넓게 도입되기 시작했다. 클리퍼는 빈번하게 석탄을 보급해야 하는 증기선에 비하여 속도면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클리퍼의 항해는 바람에 좌우되기 때문에 증기선처럼 신뢰성있는 활동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1857년에 건조된 로얄 챠터 호 처럼 평소에는 풍력을 사용하되 증기를 보조적으로 활용하는 증기 클리퍼도 개발되었지만,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름길이 생겨나자 홍해를 거슬러 갈 수 있는 증기선에 비해, 바람이 약한 홍해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는 클리퍼들은 멀리 아프리카를 돌아야 했기에 범선의 시대는 조종을 고했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수많은 클리퍼들 중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커티 샥 뿐이다. 1878년에 화물선으로 사용되던 훨즈 오브 클라이드 호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클리퍼보다 후기의 것이다.

커티샥

스코틀랜드인들은 여성용 짧은 속옷을 커티 샥이라고 부르며 이 배의 이름은 로버트 번즈의 시 Tam o'Shanter에 등장하는 매혹적인 마녀, 내니가 커티 샥을 입고 있는 데서 따온 것이다.(그래서 커티 샥의 선수에는 마녀 내니가 조각되어 있다.) 커티샥은 1869년 11월 22일에 스코틀랜드의 Scott & Linton조선소에서 진수되었으며 설계자는 허큘리스 린턴으로, 건조비는 25,000파운드였으며 초대 선장은 존 "조크" "화이트 햇" 윌리스였다.

커티샥은 차 무역에서 최고의 속도를 내기 위해 건조되었으며 1년 전에 건조된 "세계 최고속 범선" 테르모필레 호를 많이 의식해서 건조되었지만, 쉽게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두 배는 1872년 6월 18일에 동시에 상하이를 출발하여 영국으로 떠났으나 커티 샥이 2주 후에 순다 해협을 통과하다가 키가 파손되어 테르모필레호보다 1주일 늦은 10월 18일에 122일 간의 항해를 마치고 도착했지만, 파손된 키를 가지고 이 정도의 속도를 낸 것만으로도 가능성은 입증된 셈이었다.

Image:Cutty-sark.png

커티 샥

적재량 : 575톤, 총 등록톤수 963톤.

제원 : 길이 64.8m, 총 길이 85m, 폭 11m, 흘수 6.4m, 주 돛대 높이 44.5m

승무원 : 50~60명.

돛 장비 : 전장범선으로 포어마스트에 5개, 메인마스트에 6개, 미즌마스트에 5개의 스퀘어세일 장비, 돛의 총 개수는 38개, 돛의 총 표면적 3,035평방m, 최대풍력 3,000마력, 최고 속도 17.5노트./

재질 : 복합건조방식으로, 38x43cm의 용골은 느릅나무, 늑재와 버팀목은 볼트로 이중으로 조인 철재, 선판은 15cm의 인도 말라바르 산 티크.

사실 커티 샥이 진수된 1869년 11월 22일에는 이미 그보다 5일 앞서서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고, 이곳을 통과하면 기선들은 불과 60일만에 항해가 가능했지만 영국인들은 기선으로 차를 운반할 경우 맛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에 여전히 클리퍼선들은 경쟁력이 있었고, 무엇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클리퍼 선에게는 천문학적인 내기가 걸렸기 때문에 기록을 달성하는 면이 의미가 있었지만 187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점차 기선에 밀려난 다른 클리퍼들 처럼 커티 샥은 석탄선으로 개조되어 태평양을 항해하는 기선들에게 석탄을 공급하는 창고선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커티 샥에게 불운이 거듭되었다. 일등 사관 시드니 스미스가 선원 1명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고 선장 제임스 스미스 윌리스가 자살했으며 그의 뒤를 이은 것은 알콜중독자 윌리엄 브루스로 그의 지휘하에 있는 동안 배 안에서 콜레라가 발생하고 순다 해협에서 배가 난파될뻔한 위기가 있었고, 불운 끝에 1882년 4월 10일, 커티 샥이 뉴욕에 입항했을때, 선원들의 절반은 굶어 죽었고 돛은 모두 찢어졌으며 삭구가 썩어버렸다. 그 후, 이 배는 오스트레일리아 회사에 양모 운반선으로 매각되었으며 새로운 선장 프레데릭 무어의 지휘하에 커티샥은 런던-시드니 구간을 80일만에 항해하는 신기록을 세웠고, 1885년 커티 샥의 선장이 된 리처드 우드짓은 이 배를 지휘하여, 73일만에 런던-시드니 구간을 도착하여 숙적인 테르모필레 호를 꺽고, 영연방에서 가장 빠른 배로 만들었으며 4년 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선 브리타니아 호를 제쳐 불후의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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