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USS Cairo. City Class Gunboat
철갑선은 19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증기기관을 추진력으로 사용하며 강철 또는 철 장갑판으로 보호되는 군선을 의미한다.
철갑선은 목조 전함을 유탄이나 철갑탄의 위협에서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으며 최초의 철갑군함 라 글루와는 1859년 프랑스 해군이 건조했고 이로 인하여 영국해군도 철갑선 건조에 뛰어들게 되었다.
철갑선간의 해전이 처음으로 발생한 것은 미국 독립전쟁중의 일이었으며 이 시기부터 철갑선이 목조전열함을 대신하여 최강의 해상함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 확실해졌다. 이후, 철갑선은 대해에서의 작전을 위한 전함으로, 또는 해안방어용, 장거리 통상파괴용 등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군함의 급속한 진화는 해군용 중포의 개발에 의해서 가속되었고, 동시에 동급함이 발사한 포탄의 공격력을 방어하기 위한 강력한 장갑을 장비하게 하여 함선 공격력과 방어력 간의 경쟁을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한 중량증가는 더 강력한 증기기관의 탑재를 요구하게 되어 상호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함선의 급속한 발전으로 대부분의 선박들은 건조가 끝나자마자 구식으로 전락해버렸고 해군의 전술은 더더욱 난황을 거듭해서 진화의 시작은 포격이었으나 그에 따른 방어력의 발전을 능가하는 공격력을 갖추기 위해서 오히려 충각이나 어뢰가 주 공격무기로 채택되기도 했다.
철갑선 시대의 종말에 관한 명확한 기준은 없으나 1890년대 후반에 이르게 되면 철갑선이라는 단어는 서서히 소멸되었고 그 이후의 전함들은 전보다 서로간에 유사한 형태로 설계되면서 전함이나 장갑순양함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역사
철갑선의 등장은 넬슨 시대 이후, 선박 건조에 관한 급속도의 발전이 이루어진 19세기 전반의 기술적 진보에 따른 결과로, 해군사가인 R.D. Hill은 다음과 같이 그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철갑선의 세특징은 금속제 선체, 증기추진, 주무장으로서 유탄포의 채택으로 대표된다. 이 세가지가 결합됨으로써 진정한 철갑선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특징들은 최초의 철갑선이 등장하기 전에 개별적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함대는 전열함과 프리깃, 2종류의 목조함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 생겨난 최초의 변화는 풍력에서 증기력으로 추진력이 바뀌게 된데서 부터 시작된다. 초기의 증기선 군함들은 1830년대 부터 다른 증기선들 처럼 현측에 대형 차륜을 부착하고 여기서 추진력을 얻었으나 이 경우 포격력이 격감되기 때문에 주력이 되기에는 문제가 많았고 1840년대에 스크류 프로펠러가 채용되면서 부터 현실적으로 주력함을 증기선화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840년대 중반에 최초의 스크류 추진 증기기관 프리깃이 건조되었으며 프랑스 해군은 자국의 전열함에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채택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 최강의 해군이었던 영국은 자국의 압도적인 해군력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증기기관의 도입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1828년 영국 해군본부의 비망록에는 "해군본부위원회 위원 일동은 전력을 다해 증기선 채용을 저지한다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있으며, 또한 증기기관을 도입하자는 제안에는 대영제국의 해상패권에 치명타를 가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윌리엄 맥닐, 전쟁의 세계사, pp. 303) 반면에 확장주의적 성향을 보인 나폴레옹 3세는 1839~1841동안 영국해군에게 당한 굴욕을 극복하기 위하여 해군력을 증강시키기도록 하였으며 그의 일환으로 프랑스는 수차례에 걸쳐 영국의 제해권에 기술적인 도전을 하게 된다.
그에 따라 1850년, 증기기관을 도입한 최초의 90문 전열함 나폴레옹 호(Le Napoleon)이 진수되었으며 전통적인 전열함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풍향과 풍속에 상관없이 12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었으며 이것은 해전에서 대단한 이점을 제공할 것으로 평가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해군은 자국의 전열함에 증기기관을 도입하는 군비경쟁을 시작했으며 영국은 우세한 산업력을 활용하여 곧장 프랑스 기술을 따라잡았고 약 10년동안 프랑스가 나폴레옹 호의 자매함 8척을 포함한 10척을 건조하고 28척의 구형 전열함에 증기기관을 도입한데 반해 영국은 18척의 증기기관 탑재 전열함을 신조하고, 41척의 구형 전열함에 증기기관을 탑재함으로써 다시 수적으로 압도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증기추진 전함. 나폴레옹 호.
한편 1820년대와 1830년대에 이루어진 대포의 개선으로 목조 증기전함의 시대는 빠르게 종언을 내렸다. 전열함에 탑재되던 대포는 18, 32, 36, 42파운드 포에서 증기선의 68파운드 포로 대구경화 되었으며, 앙리 조셉 페크상 장군(프랑스 육군 포병대의 장군으로 1822년, "새로운 해군력"이라는 저서에서 대구경 유탄포에 의한 새로운 해전양상이 벌어지리라 주장했으며 1824년 폐선을 상대로 자신의 주장을 입증했다. 프랑스 해군은 1837년 그의 유탄포를 공식 채택했다. 윌리엄 맥닐, 전쟁의 세계사, pp. 304) 에 의하여 유탄포가 프랑스, 영국을 비롯하여 러시아, 미국 등 주요 해군국의 주력 무기가 되자 목조 선체는 충분한 방어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 시노프 해전에서 입증되었다. 게다가, 보다 실질적인 위협으로 가열포탄을 발사하게 되면 목조 선체에 화재를 일으키거나 유폭을 발생시키는 것을 실험을 통해서 확인하되자 기존 목조 전함의 방어력을 개선할 필요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1862년. 부유포대의 모습.
1850년대, 영국과 프랑스의 해군은 목조 전함을 철재로 보호한 부유포대를 만들어 크림 전쟁에 투입했으며 이들은 그 느린 속도에도 불구하고 비장갑 박격포함이나 포함들을 해안포대의 공격에서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스는 1855년, 흑해의 킨번전투에서 러시아 해안 방어군을 상대하면서 부유포대를 이용해 효과를 보았고 영국은 흑해의 크론슈타트 군항을 상대로 부유포대를 투입할 계획을 세웠으며 이 때문에 러시아는 평화협상에 조인했다.
이런 부유포대들을 최초의 전열함으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자체 동력으로는 4노트 밖에 낼 수 없었고 해군에서 사용하기에는 역할이 많이 제한되어 있었으나 이들의 활용에 성공하자 프랑스는 철재에 의해서 보호되는 전함을 함대에 도입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초창기의 철갑선과 전투들
1850년대말, 프랑스가 영국과의 증기 전함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다시 전략적인 우위를 달성하기 위하여 프랑스는 모험을 시도했고, 그 결과 최초의 실용적인 전열함 La Gloire가 1857년 건조되기 시작하여 59년 진수되었다.
라 글루와 호는 기존의 증기추진 전열함들 처럼 목재 골조를 가지고 있었으나 포열을 하나 줄이는 대신 114mm(4.5인치)두께로 장갑판을 둘렀다. 증기력으로 작동되는 1개의 스크류로 13노트를 낼 수 있었으며 36문의 6.4인치 강선포를 장비하고 있었고 프랑스는 이후 2척의 자매함을 포함하여 16척의 철갑선을 건조하고, 2단포열 철갑선으로는 역사상 둘뿐인 마젠타호와 솔페리노 호를 진수시켰다.
최초의 철갑선 La Gloire.
영국해군은 다시 경쟁에 뒤쳐지지 않기 위하여 철갑선 건조에 돌입했으며 속도면에서 더 우위에 있는 신형 철갑선들을 건조하기 위해 전열함 대신 프리깃함을 기초로 전열함보다 강하고 빠른 구조를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그 결과물이 1860년 진수된 HMS Warrior였다. 영국 최초의 철갑선 워리어 호는 라 글루와 호보다 공방력이 우월했으며 14.3노트를 낼 수 있어서 모든 면에서 유리했다.
HMS Warrior
1862년까지 유럽 각국의 해군들은 철갑선을 채용하기로 결정했고,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스페인이 각기 철갑선 건조경쟁에 들어갔으나 철갑선이 최초로 실전에 이용된 것은 유럽이 아니었고 해전에 사용된 군함들은 라 글루와나 워리어 와는 디자인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최초의 철갑선 간의 전투는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이루어졌으며 대규모로 해전이 펼쳐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간의 라사 해전은 철갑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초의 철갑선 전투
철갑선을 최초로 실전에 투입한 것은 남북전쟁으로, 미 해군은 전쟁이 발발한 시점에서 철갑선이 없었고 당시의 주력함은 6척의 증기추진 목조 프리깃 선이었다. 해군의 주력은 북군이 보유하고 있었기에 남군은 해전에서 우세를 점하고 북군의 해상봉쇄를 타개하기 위해, 신형 철갑선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남부의회는 1861년 5월, 해외에서 철갑선을 구입하기 위한 비용으로 200만 달러의 예산을 승인했으며 7월과 8월에는 목조전함의 철갑선으로의 변경과 신예 철갑선 건설을 시작했다.
CSS Virginia의 장갑구조. 목재 구조에 철판을 고정시켰다.
1891.10.12, CSS Manassas는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철갑선으로, 미 해군의 증기추진 슬루프(sloop, 순찰용 소형선박)를 충각으로 들이받았다. 1862.2월에는 프리깃함 USS Merrimack의 해체된 잔해를 모아서 철갑선으로 개조한 대형 프리깃 CSS Virginia가 남부해군에 편입되었다. 이 시기, 북군은 7척의 시티 급(city class) 철갑선 포함을 건조해두었으며 스웨덴의 기술자 존 에릭슨이 설계한 USS Monitor호가 완성되기 직전에 있었다. 북군은 모니터와 동시에 USS New Ironsides와 USS Galena도(3척의 배가 모두 동형함은 아니라서 USS New Ironsides가 가장 크고, USS Galena는 가장 작았다.)건조중이었다.
USS Monitor. 회전포탑을 장비하고 있으며 마치 잠수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철갑선간의 최초의 전투는 1862.03.09, 모니터 호가 버지니아 호의 위협에서 북군의 목조군함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햄튼 수로에서 벌어졌다. 햄튼 수로 전투라고 이름붙은 이 교전에서 양측은 서로가 포화를 교환하는 중에 상대방에게 충각돌격을 계속 시도했고 이를 통해서 목조군함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졌다.
Battle of Hampton Road. USS Monitor vs CSS Virginia
남북전쟁 기간중, 양측은 더 많은 철갑선을 건조했고, 해전에서 철갑선이 활약하는 분야도 결전을 넘어, 상선공격, 포위 돌파 등으로 확대되어갔다.북군은 50척의 모니터 함으로 대규모 함대를 구축했고, 남군도 버지니아 호를 소형화한 철갑선 14척을 건조했으나 유럽국가들이 남부를 위해 건조한 선박들을 압수하여 철갑선을 해외에서 구입하려는 시도는 좌절되었다. 오직 CSS Stonewall호만이 완성되었지만 미국에 도착한 것은 전쟁이 끝난 후였다.
전쟁 중, 철갑선들은 남부의 항구를 공격하기 위해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USS 몬투악을 비롯한 7척의 북군 모니터 함들이 찰스턴에 공략작전에 투입되었지만 남군도 CSS Palmetto State, CSS Chicora를 투입하여 작전은 실패했고 북군 모니터함 1척이 침몰했다. 모빌 만에 대한 후기의 공격에 연합군은 남군의 강력한 철갑선 Tennessee호에 대응하여 4척의 모니터 선과 11척의 목조군함을 투입하기도 했다.
최초의 대규모 철갑선 함대 단위 해전 : 리사
리사 해전도.
최초의 함대규모, 최초의 대양 해전에 철갑선이 투입된 것은 1866년의 리사 해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과 이탈리아 해군이 교전을 벌였고 양측 모두 철갑선과 목조 프리깃, 코르벳이 포함된 상태로 교전을 벌였으며 이 해전은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쓰시마 해전이 발생하기 전, 가장 대규모의 해전이었다.
리사 해전은 3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의 일부로, 프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 군은 베네치아를 오스트리아에서 독립시켜 편입하려고 하였으며 이탈리아 해군은 아드리아 해의 리사 섬에 병력을 이동시키는 수송선의 보호를 위해 12척의 철갑선과 17척의 목조선으로 함대를 구성했다. 이탈리아 해군의 철갑선 중, 7척은 측면포격용 철갑 프리깃 선이었으며 4척은 보다 소형의 철갑선이었지만 새로 진수된 Affondatore호 1척만은 충각과 회전포탑을 장비하고 있었으며, 이에 맞서는 오스트리아 해군은 7척의 프리깃 철갑선만을 보유하고 있었다.(목선은 11척)
오스트리아 해군은 자국군이 포격능력에서 열세하다고 보았으며(강선포의 수에서 276 대 121, 장갑함 총 톤수로도 53,236 대 23,538로 모두 열세)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이탈리아 해군에 근접해서 돌격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함대는 봉시진을 구성하여 함대의 1선에 철갑선을 배치하고 목조선박들이 후속하는 진형을 구축하고 이탈리아 함대에 접근했다. 이탈리아 함대의 사령관은 전초부대에게 의심스러운 함대가 접근중이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리사섬에 실어나르는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한채 기습을 당했으며 전열을 구성하는 주, 일부에 큰 틈이 발생했다. 이를 확인한 오스트리아 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의 전훈에 따라 적함대를 양분시키기 위해 돌격했고 맹포격을 당했지만 성공적으로 이탈리아 군의 전열을 분단시켰다.
양측모두 함포사격의 화력이 방어력에 못미치는데다가 충각돌격의 성공에는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스트리아 해군의 충각돌격은 그나마 성공을 거두어 이후 수년간 세계 해군의 관심은 리사 해전의 전훈에 집중되었다.
오스트리아 함대 지휘관 윌렘 반 타게소프 제독, 39세의 나이로 일약 오스트리아의 영웅이 되었다.
전력상 우세한 이탈리아 해군은 이 해전에서 Re d'Italia와 Palestro, 2척의 철갑선을 손실한대 반해 오스트리아 해군은 2층 목조 프리깃함 Kaiser가 4척의 이탈리아 철갑선과 교전을 벌이면서도 침몰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군이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 인하여 충각은 철갑선 최강의 무기로 새롭게 주목을 받았고, 이 승리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그러나 쾨니히그라츠에서 프러시아 군에게 패했기 때문에 결국 전쟁에는 패했다.)
두번의 실전에 의해서 당대의 해군사관들에는 때아닌 충각돌격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이 전술이 1880년대까지 철갑선에게는 가장 유효한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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