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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Ship and Sail

북방항로 도전기 6. 북서항로의 선구자

북서항로의 선구자

1492년 크리스토발 콜론은 신대륙을 발견하여 인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 전에도 신대륙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있는 모험을 한 사람들은 꽤 있었다. 8세기 경에 코라틀을 타고 아이슬랜드를 발견했다는 아일랜드의 수도사 성 브랜든이나 그린랜드까지 정착한 바이킹 중 일부가 서쪽으로 진출해 이누이트들과 교역을 한 기록이 있다. 특히 레이프 에릭슨이 발견한 빈랜드가 뉴펀틀랜드 근처였을 가능성은 고고학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각주:1] 하지만 14세기 부터 이어진 소빙기와 이누이트와의 대립 때문에 바이킹은 그린랜드를 포기했고 신대륙 발견의 영광은 역사의 중대한 변혁을 이루게 된 크리스토발 콜론에게 넘겨지게 된다.

이탈리아가 낳은 이 위대한 항해자는 신대륙을 발견했지만 그곳을 인도라고 착각했거나 또는 스스로와 투자자를 기만하여 에스파냐 국왕으로부터 "돈 크리스토발 콜론 대양의 제독, 인도 제국에서 발견된 섬들의 부왕 겸 총독"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받았다. 이 이야기는 유럽 각국에 퍼져나갔고 수많은 항해자들이 제2의 크리스토발 콜론을 꿈꾸었다.

카보토 부자

그 중에는 콜롬부스와 같은 제노바 출신의 항해자 지오바니 카보토가 있었다. 젊은시절 베네치아에서 활동했던 그는 1484년 영국으로 이주했고 1495년 그는 크리스토발 코론의 발견에 관한 정보와 그 항로를 추적해나갈 계획을 세운다. 이미 1480년대부터 대서양 건너편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이 나돌던 브리스톨 상인들의 지지와 국왕 헨리 7세의 특허장을 얻어 지오바니는 1497년 5월 범선 메튜호를 타고 브리스톨을 출항하여 긴 항해 끝에 북아메리카를 발견한다. 지금에 이르러는 그의 항해, 발견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그가 탐험한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서 아마도 카보트가 도달한 곳은 뉴펀틀랜드와 노바 스코티아 사이로 추측할 수 있다.

크리스토발 콜론이 그러했듯 낙천적인 성격의 카보트는 자신이 도착한 곳이 카타이의 변경이라고 믿었으며 돌아와서 자신이 귀중한 비단을 입수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덕분에 그는 1498년에는 카타이의 중심부에 도착하기 위해 다시 항해에 나설 수 있었지만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더이상은 알려진 것이 없고 항해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불분명한 항해업적은 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모험가의 대부로 떠오른 아들 세바스챤 카보트에게로 넘어간다. 세바스챤은 1508년 북미 동해안을 탐사해 허드슨 만이나 허드슨 해협을 발견했고 플로리다 근처에 도달했다. 그의 탐험으로 영국은 향신료나 비단을 얻지는 못했지만 어떤 의미로는 그보다 더 중요한, 뉴펀틀랜드 앞바다의 그랜드 뱅크스 어장을 발견했고 이곳에서 발견된 방대한 어군으로 어업활동이 잦아지면서 영국은 북미해안에 대한 탐사를 꾸준히 파견하지만 새로 즉위한 헨리8세는 항해 관련 출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탐험활동은 이후 한동안 침체기를 맞는다.

1513년 발보아가 태평양을 발견했고 6년후에는 마젤란이 세계를 일주함으로써 아메리카 대륙이 아시아와 다르다는 것이 입증되었지만 유럽에는 여전히 아시아-태평양-아메리카의 지리적 관계, 특히 태평양의 끔찍할정도로 넓은 거리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고 카보트가 1497년 확인한 육지가 중국의 최북동부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관측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1523년, 사반세기가 지난후에도 여전히 이 꿈을 추구한 죠바니 다 베라차노라는 피렌체 출신의 프랑스 항해사가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모험항해를 떠나게 된다.

  1. 그 외에도 바스크나 잉글랜드 어부들중 일부가 멀리 항해하여 신대륙 근해의 풍성한 어장에서 조업을 하다가 우연히 신대륙에 도달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며 중국도 신대륙에 도달했었을 가능성이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