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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하라 마코토, 일본장기계의 태양

나카하라 마코토(中原誠) (1947년 9월 2일 ~ ) 16세 명인. 기사번호 92번. 다카야나기 토시오 명예 9단 문하.

영세 10단, 영세 기성, 영세 왕위, 명예 왕좌 타이틀 획득 수 역대 3위. 돗토리 현 태생. 생후 1개월에 미야기의 시오가마로 이사했다.

전적

약관 24세에 오오야마 야스하루 에게서 명인위를 획득하고 그 후로도 9연패를 달성, 일본장기계의 태양 [각주:1] 이라고 불리웠다. 오오야마의 후계자로서 장기계에 한시대를 쌓아올렸고 요네나가 쿠니오, 가토 히후미 등과 수많은 명승부를 펼쳤다.

데뷔에서 첫 타이틀까지

장려회 시절부터 미래의 명인후보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3단 리그를 좀처럼 통과히지 못하고 6기 3년간 제자리 걸음을 반복해 인간적으로 많은 고뇌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1965년 가을 프로에 입문한 다음, 순위전에서 4년 연속 진급을 거듭해 초고속으로 A급 8단이 되었다.

1967년 후반 제11기 기성전에서 야마다 미찌요시를 상대로 첫 타이틀에 도전해 풀세트 끝에 아쉽게 패했지만 반년후인 제12기 기성전에서 타이틀을 획득, 이후 오오야마, 야마다를 상대로 2기 방어했지만 1969년 후기에 나이토 쿠니오에게 뺏겼다.

오오야마를 대신하여

1970년, 10단전에서 오오야마를 4-2로 꺽고 5관왕 독점을 저지했다. 그 직후에 있은 기성전(후기)에서도 오오야마를 상대로 3-0 승리를 거두며 처음으로 2관왕에 올랐다. 계속해서 1971년도 전기 제18기 기성전에서 오오야마를 상대로 방위에 성공, 이미 기성전 통산 5기로 사상 최연소 영세 타이틀 보유자가 되었다. 이 70년과 71년, 타이틀 홀더는 전부 오오야마와 나카하라 뿐인 양강시대였다.

A급 2년만에 명인도전권을 얻고 1972년, 제31회 명인전에서 오오야마를 풀세트 끝에 꺽으며 명인위에 첫 즉위, 이해에 삼관왕을 달성하고 오오야마를 무관으로 전락시켰다. 이후 오오야마는 다시는 명인위에 오르지 못했다.

라이벌과의 대결

1973년 요네나가 쿠니오, 가토 히후미, 나이토 쿠니오 등 신진 기사들과의 대결이 본격화되었다. 1973년의 제14회 왕위전에서 나이토 쿠니오에게 왕위를 뺏어 처음으로 4관왕이 되었지만 10단전은 오오야마에게 빼았겼다. 이듬해인 1974년에 다시 10단을 탈환해 4관왕에 머무르면서 1974년부터 77년까지 10단, 명인, 왕위, 왕장의 4관왕을 나카하라가 유지하고 기성은 오오야마, 기왕은 다른 기사가 차지하는 구도가 계속되었다.

1975년 명인전에서는 오오우치 노부유키를 상대로 2-3으로 몰리다가 천일수에 의한 무승부 뒤에 맞은 제7국에서 오오우치의 각, 향에 쫓기며 몰리던 국면에 상대방이 둔 통한의 악수에 힘입어 박빙의 승부 끝에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1976년의 제35기 명인전에서도 요네나가 쿠니오를 상대로 승리, 명인전에서 5기 연속 방위에 성공하며 16세 명인 자격을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1977년, 1974년부터 유지하던 4관왕에 더하여 제31기 기성전에서 또다시 오오야마를 이기고 사상 두번째 5관왕을 달성했다. 기왕 타이틀 만을 남긴 상황에서 가토 히후미 기왕에게 도전했으나 아깝게 패하여 6관왕 달성은 실패하고 이때부터 상대적인 부진이 시작되어 1978년에는 왕장을 가토에게 빼앗기고 1979년에는 왕위를 요네나가 쿠니오에게 빼앗겼으며 제40기 명인전에서 접전끝에 패배, 명인은 9연패로 물러났다.

차세대와의 대결

1980년대 중반부터는 타니가와 코지, 55년조의 다카하시 미치오, 나카무라 오사무, 미나미 요시카즈, 스가타 야스아키 등과 타이틀 전을 벌이며 서서히 3관왕 내지 2관왕으로 물러났다.

1985년의 제43기 명인전에서는 전전기에 사상 최연소 명인이 된 타니가와 에게서 명인위를 탈취하고 복위, 이듬해의 제44기 명인전에서는 오오야마 야스하루를 도전자로 만나 방위에 성공했는데, 이것이 오오야마와 세대를 교체한 나카하라와의 마지막 타이틀전이었다.

1987년의 제35기 왕좌전에서 왕좌를 츠카다 야스아키에게 빼앗겨 명인위만 보유한 상태로 물러났고 이듬해의 제46기 명인전에서는 타니가와에게 명인위를 빼앗겨 ‘전 명인’ 무관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같은해의 제36기 왕좌전에서는 츠카다에게서 왕좌를 탈환하고 제53기 기성전에서는 다나카 토라히코에게 승리해 2관왕으로 복귀, 1990년에는 명인을 타니가와에게서 빼앗아 두번째로 명인위에 복위하면서 다시 3관왕이 되었으나 제56기 기성전에서는 신예인 야시키 노부유키에게 패해 사상 최연소 타이틀 기록을 허용했다. 제38기 왕좌전에서는 타니가와에게 패해 명인위로 후퇴.

1992년의 제50기 명인전에서 다카하시 미치오를 상대로 1승 3패까지 몰렸는데 이때까지 명인전에서 3연승으로 역전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이 징크스를 깨고 방위에 성공. 하지만 주특기였던 서로 망루 전법으로 이루어진 1, 2, 4차전에서 모두 패한 것은 화제거리가 되었다. 이듬해의 제51기 명인전, 요네나가 쿠니오와 명인위를 놓고 6번째로 대결했지만 4-0 패배를 당하며 사상 최고령 명인기록을 허용하고 같은해의 왕장전에서는 타니가와에게 패배, 그것이 나카하라의 마지막 타이틀 도전이었다.

1999년, A급 순위전에서 2승 7패의 성적으로 강급이 정해졌다. 그 후 2기동안 B급 1조를 유지하다가 프리클래스 선언했는데[각주:2] 영세 명인 자격자가 B급 1조가 되는 것도, 프리클래스가 된 것도 사상 최초다.[각주:3] 하지만 2000년 용왕전에서 1조 우승하는 등, 각 기전의 예선 상위에 속하는 경우는 자주 있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나카하라와 그의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하부 요시하루가 동시에 타이틀 보유자이던 시기는 약 4년 정도 있었지만 양자는 타이틀을 걸고 대결해본 적은 한번도 없고, 그 후로도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결과론이지만 나카하라가 단 1기만 더 명인위를 보유했거나 하부 요시하루의 명인위 도전이 1년만 빨랐어도 선명한 세대교체극이 되었을 것으로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다.

은퇴

2008년 8월 12일 왕장전 2차예선 준결승에서 A급 8단 키무라 카즈키를 이긴후 뇌출혈로 입원했으며 다음 기전 복귀를 목표로 재활을 시작했지만 회복이 늦어지면서 2009년 3월 31일 갑작스럽게 은퇴를 발표했다. 왼쪽 손과 발이 불편해 오른손에 지팡이를 집고 모습을 드러낸 기자회견장에서는 담담한 어조로 “43년이라는 긴시간 동안 타이틀 전 등 많은 승부무대에 섰다. 이제 후회는 없다.”라고 말하며 “만약 후회가 있다면 2003년의 용왕전 도전자 결정전 [각주:4] 에서 하부와 겨뤄보고 싶었다”는 말을 남기고 용왕전 1세트 제적중인 상태로 은퇴한다.

기풍

‘자연류’라고 불리는 격조 높은 행마가 특징으로, 전성기에는 망루 울타리 주체의 본격적인 앉은비차파였으나 기사 생활말년에는 몰이비차도 무난하게 소화했다. 대 몰이비차 전법인 옥두 지정이 주특기로 전성기에는 자연스럽게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이를 저지하려는 상대를 정확하게 제압해 이기는 위엄있는 승리가 많았다. 연륜이 쌓이면서 자신이 적극적으로 움직여나가는 기풍으로 변해가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

‘계마의 나카하라’, ‘나카하라의 오른쪽 계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계마의 사용이 교묘하고 나카하라의 명국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계마의 명수법이 등장한다. 본인은 "오오야마 야스하루 명인의 강력한 방어를 무너트리려면 계마로 의표를 찌르는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프로간에 유행하던 횡보잡기 8五비 전법은 원래 나카하라가 이용하는 나카하라 울타리에서의 공중전 방식을 연구한 것이다. 나카하라도 나중에 이를 사용한다. 1996년에는 나카하라류 서로 걸기, 나카하라류 횡보잡기, 나카하라 울타리 등의 공적을 기려 마쓰다 고조상을 수상했다.

다카하시 쿠니오와 명인전에서 대결해 서로 망루 울타리 전법을 사용한 대국에서 1승도 올리지 못하고 패하던 시점부터 기풍이 바뀌어 횡보잡기 나카하라 울타리, 중비차, 후수 차례에서 나오는 나카하라류 망루 급전, 대 몰이비차 6五보 전법 등 독창적인 전법으로 높은 승률을 유지했다. 방어의 견고함보다 반면 전체의 지배를 목표로 하는 대국관이 특징으로 자잘한 공격을 연결해나가는 데 초일류로 이것을 전법의 기초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법을 흉내낼 수 있는 기사가 적다.

형세 낙관주의의 대표주자로 상대나 대기실의 기사들이 ‘호각이거나 나카하라가 불리’라고 생각하는 형국에서도 감상은 ‘그 국면에서는 내가 유리하다고 생각했다’는 경우가 많다.

인물-에피소드

현역 영세명인

1994년 당시의 직함인 ‘전 명인’을 잃었을 때 그때까지의 실적을 고려하면 단순히 "9단"으로만 부를 수는 없을 정도라서 특례로 현역인 상태로 "16세 명인"을 습위할 수 있을지를 논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습위는 은퇴 후가 되었지만, 대신 영세10단을 자칭할 수 있게 되었다. 2007년 9월 2일 환갑을 맞이해 ‘명예 왕좌’를 자칭하고 같은해 11월 17일(일본장기의 날), 영세 명인 자격을 취득한지 30년이 경과했고, 모리우치 토시유키가 18세 명인의 자격을 얻은 것, 은퇴가 수년 남은 점을 고려해서 이사회가 16세 명인 습위를 제안하고 이를 승낙해서 현역인 상태로 영세명인이 되었다. 1993년 무위가 된 이후 14년 만의 일이다. 2008년 4월 1일, 60세가 된 이후에는 "영세 기성", "영세 왕위"를 자칭하게 된다. 영세 왕위를 자칭하게 되는 것은 나카하라가 최초.

회장으로, 지도자로

후타카미 타츠야를 이어 2003년 일본장기연맹회장직을 맡았지만 2005년 회장직을 요네나가 쿠니오에게 양보하고 본인은 부회장이 되었다. 2007년 5월 기사총회에서 이사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이사-부회장직을 퇴임했다. 지도자로서도 뛰어나 오구라 히사시, 사토 슈지, 다카노 히데유키, 쿠마자카 마나부 등을 프로기사로 길러내었다.

스캔들

1998년 여류기사였던 하야시바 나오코("시온의 왕" 스토리 작가)와의 불륜관계가 발각되어 주간 후미하루가 대대적으로 알려서 이것이 물의를 일으키고 와이드 쇼에서 연일 보도되었다. (실제로는 하야시바가 잡지사 측에 이야기를 흘렸다고 한다.) 자동 응답전화에 남겨진 관계가 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나카하라의 육성("지금 돌격하겠습니~다")이 센세이션을 일으켜서 이 불륜 소동은 장기계 외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후일 나카하라의 해명 회견에는 와이드쇼나 여성주간지 뿐 아니라 일본경제 신문사(독자의 대부분인 중노년 남성이 팬) 까지도 취재에 달려들었다. 불륜의 해명을 (아내가 있는) 자기집에서 실시한 것, 매스컴을 배려해서 아침과 저녁으로 나누어 2회 해명한 것 때문에 "굳이 해명까지 자연류로 하지 않아도 좋지 않았나."(산케이 신문)는 말도 있었다.

기타

2003연도의 NHK배 TV 장기 토너먼트 3회전에서, 여류 기사인 나카이 히로에와 대전했다. 나카이는 2회전에서 현역 A급 기사인 아오노 테루시에게 승리하여 사상 최초로 A급 기사에게 승리한 여류기사가 되었지만 만약 영세 명인 자격자가 진다면 이것 또한 사상최초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카하라가 관록의 승리를 거두고 나카이의 베스트 8 진출을 저지했다.

온후한 인격자로서 알려져 있지만 오기가 있어서 아마추어를 상대할 때라도 결코 쉽게 싸워주지 않는다.

다나카 가쿠에이가 자민당 총재가 되었을 때 "5五각"이라고 부채에 휘호해 준 적이 있다.

기록(최상위권)

기성 재위 - 16기

연도 최고 승률 - .855(47승8패)(1968년)

최연소영세 칭호 - 22세(영세 기성)

순위전A급전승 - 1971년(이 해는 휴장자가 있었기 때문에 8전. 그 밖에 전승은 모리우치 토시유키(9전 전승) 뿐)

연도 승률 7할이상 - 10해연속

공식전 최단수순 승리 10수(1974년 제25기 기성전 본선 제1회전)

오오야마 야스하루이래 사상 2번째 1300승 달성(2007년 9월27일)

동일기사와 대국회수 : 요네나가 쿠니오와 대국수 187회. 1위.

http://ja.wikipedia.org/wiki/%E4%B8%AD%E5%8E%9F%E8%AA%A0

  1. 2008년 1월의 NHK교육 방송 프로그램 기호 대국에서 본인의 말에 의하면, 이 표현은 프로기사인 하라다 야스오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순위전 도전을 포기하겠다는 의미 일본장기계에서 최고의 기전으로 불리는 명인위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순위전에서 계속 이겨나가 A급 1조에서 토너먼트를 벌여 우승해야 한다. A, B, C로 나뉘어져 있는 단급 체계에 들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이 선언을 하면 다시 순위에 들 수 없다. [본문으로]
  3. 영세 명인 자격자가 아닌, 단순한 명인 경험자라면 쓰카다 마사오가 B급 1조였고, 가토 히후미는 B급2조로 였다. 요네나가 쿠니오도 프리클래스가 되었다. [본문으로]
  4. 이 3번국의 상대는 모리우치 토시유키였는데 결과적으로 2:1로 패했지만 모리우치 본인도 하부와의 대국 결과는 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