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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야마 야스하루, 사상최강의 명인

오오야마 야스하루(大山康晴) 기사번호 26. 15세 명인. 영세 10단, 영세 기성, 영세 왕위, 영세 왕장. 일본장기기사로 수많은 대기록(공식 타이틀 획득 80기, 기전우승 44회, 통산 1433승 등등)을 수립했다.

일본장기연맹회장으로써 장기의 보급과 연맹의 운영에 많은 실적을 남긴바 있다. 1990년에는 장기계 최초로 문화공로자로 인정받아 정4위 훈2등훈장을 받았다. 제자로 아리요시 미치요, 나카다 이사오, 나메카와 히사시 가 있다.

생애

성장기

1923년 3월 13일, 오카야마 현 아사구치 군 가와우치죠 니시아치에서 태어났다. 5살부터 장기를 배우기 시작해 금방 두각을 나타내 1935년에는 오사카에서 기미 킨지로 9단의 직속제자로 입문했다. 순조롭게 승단을 거듭했으나 흔치 않은 중장기 기사이기도 한 기미 킨지로의 영향을 받아 1938년을 전후해서는 중장기(中将棋)와 바둑에 몰두해 승단이 정체되었다. 하지만 훗날에는 이 시절의 경험이 말의 조화를 중시하는 끈질긴 기풍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 시절의 동문으로 오노 켄이치, 가쿠다 미츠오 그리고 일생의 라이벌 마쓰다 고조가 있다. 제자 시절 처음에는 사형제 지간인 마쓰다 고조가 방어형 장기고 오오야마는 공격형 장기였지만 둘이서 대국하는 과정에 마스다는 공격이 강해지고 오오야마는 수비가 강해졌다고 한다. 1940년에 17세의 나이로 4단의 기사가 되었고 1943년에는 6단으로 승단했으나 태평양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1944년 군에 입대하여 장기를 계속할 상황은 아니었으며 건강면에서 일말의 불안이 있었지만 장기기사였던 것이 다행이라 이등병인 것 치고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아서 남 큐슈에 있는 중에, 기관총 사격을 받았던 이외에는 위험한 상황에 빠진 일도 없고, 주위의 눈이 따가웠던 것을 제외하고는 소집을 받은 다른 기사들보다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명인으로 달려 오르다

전후에 기사로 돌아와서 새롭게 창설된 순위전에 B급 6단으로 출장했다. 1947년에 7단으로 승단하고, 1948년에는 츠카다 마사오 명인에게 도전할 것은 마쓰다 8단일 것이라는 예상을 뛰어넘어 오오야마가 B급 1위가 되면서 당시의 변칙 운용에 의하여 A급 기사를 연파하고, A급 1위였던 마쓰다에게 "고야산의 결전(제 7기 명인도전자 결정전 3번 승부 제 3번국)"에서 힘겨운 승리를 거두어 처음으로 명인 도전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명인위를 얻지 못하고 대신 이 해에 A급 8단으로 승단했다. 이후, 평생(25년 동안) 연속 44기에 걸쳐서 A급 기사로 재적했다.

1950년, 창설된지 얼마 되지 않은 제1기 9단전 [각주:1]에서 서열 2위의 공식타이틀 9단을 획득했다. 1952년에는 제 11기 명인전에서 키무라 요시오 명인에게 도전하여 29세에 실력제 3대 명인의 지위에 올라 기무라를 은퇴로 몰아넣는다. 대국후에 승리한 오오야마가 기무라에게 고개를 깊이 숙인 것으로도 유명한 이 대결에서 명인위를 관서에서 가져온 것은 사카다 산키치 이래 일본장기협회(도쿄에 소재)의 비원이 성취된 것이었고, 이후에도 5년 동안 연속해서 명인위를 방어하여 1956년에 영세 명인(제 15대 명인)의 자격을 얻는다. 이후, 명인-왕장의 2관왕을 3년동안 보관 유지한다.

마쓰다 고조와의 투쟁

고야산의 결전에서 패해 명인 도전을 놓치고, 명인위 획득에서 뒤쳐지고 있던 마쓰다 고조는 "새로운 전법 일생", "명인에게 향차를 떼고 이긴다"를 표방하면서 반격을 노렸다. 1955년, 마쓰다는 드디어 오오야마로부터 왕장을 탈취, 2관왕의 일각을 무너트리고, 이 때 왕장전의 규정으로 마쓰다는 오오야마를 상대로 향차를 빼는 굴욕을 맛보게 하여, "명인에게 향차를 떼고 이긴다"라는 자신의 염원을 달성했다. 오오야마는 나중에 이때의 심경에 대해 ‘장이 끊어질 것 처럼 분했다’라고 술회했다. 1956년 제 16기 명인전에서 제 12, 제 13기에 연이어 마쓰다를 꺾었던 오오야마는 결국 그에게 명인위를 빼앗기고 무관으로 전락한다. 반면 마쓰다는 명인, 9단, 왕장의 전관을 독점하고 일본장기계에서 처음으로 삼관왕을 달성한다.

그때까지 순풍의 연속이었던 오오야마로써는 기사로서 처음으로 맛본 패배감과 좌절감으로 이후 마쓰다에게 연패를 당하고 슬럼프에 빠졌지만 천성의 승부욕과 투혼으로 서서히 극복해갔다. 반면, 마쓰다는 전쟁중에 병을 앓고 나서 컨디션이 무너지기 쉬워진 데다가 대국의 종반에서 큰 악수를 두곤 하는 버릇이 고쳐지지 않음에 따라, 오오야마의 실지회복을 허락하게 된다.

이후, 오오야마는 1957년의 왕장전, 1958년의 9단전, 1959년의 명인전에서 마스다로부터 차례차례 타이틀을 탈환하고 무관으로 몰아넣어 장기계에서 두번째로 타이틀을 전관독점하게 된다. 이 때부터 부채의 휘호로 유명한, "(말이)살아나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살아난다"라는 말이 나왔고, 그 뒤로는 최대의 라이벌인 마쓰다는 단 하나의 타이틀도 획득하지 못한다.

5관왕 시대

3관왕에 오른 이후에도 오오야마는 계속 연승가도를 달려 1960년에 창설된 왕위전과 1962년의 기성전 모두를 휩쓸어 최초의 5관왕이 된다.

1959~1966 동안의 타이틀 기전에서는 거의 무적에 가까운 최전성기를 누렸고 1962~1970동안 4번 넘게 5관왕이 되어 이른바 5관왕 시대를 열었으며 특히 1963~1966년 동안에는 타이틀만 19회 연속 획득으로 타이틀 대회를 모두 우승해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에 걸친 시기는 일본의 고도 성장기 시대에 최강의 기사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후타카미 타츠야, 야마다 미찌요시, 가토 히후미, 나이토 쿠니오 등의 젊은 기사들이 "타도 오오야마"를 목표로 차례차례 도전했지만, "정밀기계"라고까지 불리는 오오야마의 완벽한 수비에 이은 "받아넘기기"로 차례 차례 꺽였다. 또, 키무라 요시오나 마쓰다 고조처럼 오오야마도 자주 반외전술을 구사하고 각별히 강력했다고 한다.

나카하라 마코토등 차세대의 대두, 기록에의 도전

그러나 1960년대 말이 되자 "타도 오오야마"를 내걸은 야마다 미찌요시가 주축이 된 연구그룹 "야마다 교실"에서 솜씨를 연마해온 나카하라 마코토가 대두했다. 비록 야마다 본인은 요절했지만 나카하라는 오오야마에 대한 공략법을 짜내어 계마의 활용이 오오야마의 강력한 방어를 격파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 나카하라에게는 오오야마의 "반외전술"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오오야마는 나카하라 만큼은 궁합이 나빠서 타이틀 전을 도합 20번 치렀지만 그 중에 오오야마의 획득수는 4번, 나카하라의 획득수는 16회에 이른다. 이로써 1968~1972, 나카하라에 의하여 차례차례 타이틀을 잃고, 50세를 목전에 둔 1973년에 오오야마는 무위에 그치고 나카하라가 4관왕이 되었다. 이로써 오오야마 시대는 끝나고 "장기계의 태양" 나카하라 시대가 오게 된 듯 했다.

1973년 무관이 된 오오야마는 특례로 현역인 상태에서 ‘영세 왕장’을 자처하는 것이 인정되었고 3년뒤에는 역시 현역 기사인채로 15세 명인을 계승했다. 원칙상 이런 영세 칭호를 자칭할 수 있는 것은 은퇴 이후였지만 일본장기계에서 그동안 쌓아온 업적을 생각해보면 칭호없이 9단으로만 부를 수는 없다는 배려였다.(나중에 나카하라도 비슷한 이유로 현역인 상태에서 영세 칭호를 자칭할 수 있었다.) 또 첫 실력제 명인인 키무라 요시오는 은퇴시에 14세 명인위를 계승했지만 당시 벌써 오오야마는 전시대 사람이라는 분위기에도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나카하라 시대’라고는 해도 나카하라 전을 제외하면 오오야마는 여전히 A급 강호였고 50대에 이르러도 10단 1기, 기성 7기, 왕장 3기로 합계 11기의 타이틀을 획득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타니가와 코지에 의하면 20대보다 50대의 성적이 통계상 더 좋고 타니가와나 하부 요시하루 같은 젊은 강호들을 상대로도 승리를 거두곤 했다. (56세의 왕장 타이틀 획득은 최연장 기록)

연맹의 운영, 장기의 보급, 현창

1974년, "장기회관 건설 위원장"이 되어 일본장기연맹 본부인 "도쿄 장기회관"의 건설에 기여했고 1977년에는 "간사이 장기회관 건설 부위원장"으로써 "간사이 장기회관"의 건설에 기여했다. 1977~1988 동안에 걸쳐 제1선의 A급 기사이면서 일본 장기연맹의 회장으로 취임하여 프라임 메니저로서 장기계 총본산의 운영에도 정력적으로 종사했으며 간사이 장기회관의 건설 중에는 간사이 대국이 많았다고 한다. 장기의 보급활동에도 열심이어서 불리면 일본의 어디든지 지도하러 갔으며 아오모리 현 모모이시 마치는 제 2의 고향이라고 부를 정도여서 모모이시마치 명예시민의 칭호가 주어져서 마을의 예산으로 오오야마의 공적을 칭송하는 "오오야마 장기 기념관"이 지어졌을 정도다. 출신지인 쿠라시키 시에서도 1970년에 명예시민을 수여하여 “구라시키 시립 오오야마 명인 기념관"이 건설되고 사후인 1993년에는 여류 기사 기전으로 "오오야마 명인 배 쿠라시키 토오카 전"이 창설되었다. 1990년에는 장기계 최초로 문화공로자로 헌정되었다.

만년의 투쟁

만년이 되어도 장기 실력과 기력이 전혀 쇠약하지 않은 오오야마는 암과 투병하면서도 몇번이나 복귀해 A급 순위전을 싸워 계속 타이틀 획득에 도전한 장렬한 노력을 이어나갔다.  환갑을 지난 1986년에는 63세에 명인전에 도전했고 1990년에는 66세의 나이로 기왕전에 도전하는 위업을 달성했으며 당시 19세의 하부 요시하루 용왕을 꺽고 7대 최고령 도전자가 되었다.(결과적으로는 0-3으로 패했다.)

사실 이 연배가 되고 난 후에는 순위전에서 강급의 위기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아져서 "A급에서 떨어지면 은퇴하겠다"라는 오오야마의 결의는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져서 주목을 받았지만 언제나 저력을 발휘해서 A급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

또 1992년의 순위전에서는 암치료 중인 몸으로 당시의 4관왕 다니카와 코지를 꺽고 6승 3패로 명인도전권을 건 플레이오프까지 돌입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하위인 오오야마는 3연승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 서전의 다카하시 전에서 승리 목표에 근접했으나 실수해서 패전했다. 이것이 오오야마 생애 최후의 순위전이었다.

이후에는 요양을 권하는 소리도 많았지만 꿋꿋하게 "평생현역"을 관철하여 1992년 7월에 A급 기사인채로 사망한다.

기풍

자잘한 공격보다는 정면에서 실력으로 누른다는 정공법을 항상 고수했으며 잔기술의 전문가인 진검사 출신 기사 하나무라 모토지를 상대로 압승을 거둔후에 ‘자네는 기껏해야 아마추어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받아내기’의 달인으로서 유명하며, 상대방이 공격하게 한 뒤에 이를 잘라내는 "받아 짖이기기"가 특기이며 우세한 형국이 되어도 승리를 서두르지 않고 안전하게 이기는 것을 목표로 했다. 특히 종반에 들어서면 강인한 끈기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악수를 유도해서 ‘종반이 두번있다.’, ‘이중허리’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였다.

하부 요시하루는 오오야마의 기풍에 대해 ‘수읽기를 하지 않아도 좋은 곳에 손이 간다.’, ‘최선의 수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발언했으며 ‘뭐, 이정도인가’라고 짐작하며 손을 뻗는 곳이 바로 승부처가 되는 것이 바로 명인의 예술이라고 저서 ‘결단력’에서 언급했다.

좋아하는 말은 금장. 금장과 은장의 사용법이 매우 교묘해서 지금도 그 수법이 기사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방송등에서 질문했을 때에는 ‘대국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대답할 수 없다’고 말했었다. 같은 질문을 계속 받자 ‘향차’라고 대답했다.

젊은 시절에는 당시의 주류였던 망루 울타리나 앉은은같은 앉은비차 전법을 사용했지만 급작스럽게 몰이비차로 전향해서 특히 미노 울타리를 중심으로 하는 사간비차봉은 중비차를 즐겨 사용했다. 이 ‘전향’에 대해 카츠마타 같은 경우는 ‘팬들을 즐겁게 하는 장기를 두고 싶었다’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몰이비차 대국의 서반은 대부분 비슷해서 연구, 고려의 시간을 줄이려고 했다는 의견도 있다.

반면에 서로 같은 장기를 두게 되는 것은 극단적으로 싫어해서 상대방이 비차를 움직였다면 반드시 앉은비차로 두고 있는데 스즈키 다이스케는 오오야마가 서로 몰이비차로 싸우는 것을 싫어한 이유로,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금무쌍 전법에서 오른쪽 은(주로 공격을 맡는 은)의 사용법에 고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다. 그 근거로 오오야마가 마지막으로 둔 상진비차 대국에서 오오야마는 2장 금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오른쪽 은은 2八로 올리지 않고 3九에 둔채로 싸워 최종적으로 종반에서 잃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아무튼 이 때문에 오오야마의 공식전에서 선후동형 장기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반상에서 수를 둘 때는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어느쪽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읽었다고

반외전

대국상대에게 무형의 압력을 가하는 이른바 ‘반외전법’의 고수기도 하다.

예컨데 유명한 ‘고야산의 결전’에서 A급 1위인 마쓰다가 당연히 츠카다의 도전자가 되어야 했지만 명인전을 주최하고 있던 마이니치 신문사는 회사에서 밀어주던 오오야마를 참가시키기 위해 억지로 A급 상위 3명과 B급 1명의 플레이오프라는 변칙적인 도전자 결정전을 추가했다. 경쟁사인 아사히가 밀던 마쓰다에게는 대국 날짜나 장소도 알리지 않았는데 마이니치는 오오야마에게 호화로운 관광버스를 대절해주는 편의를 제공했다. 게다가 십이지장의 상태가 안좋았던 마쓰다는 따듯한 곳에서 대국을 요청했지만 마이니치는 황폐한 고야산을 선택하는 등, 대국 이전에 강렬한 반외전술에 말려들고 있었다.

반대로 오오야마도 아사히가 명인전을 주최하게 되자 반외전술의 압력을 받았다. 마쓰다가 이기면 경영진이 총출동해서 축하연을 베풀고 오오야마가 이기면 다들 그냥 돌아가 버린다던지 마쓰다에게 패하면 자꾸만 투료 순간을 재현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지만 오오야마는 명인위를 마쓰다에게 탈취한 이래 13기 연속, 통산 18기 동안 명인위를 유지해 일생의 라이벌에게 타이틀을 내주지 않았다.

에피소드

미나미 요시카즈는 일찌기 "리틀 오오야마"라는 별명이 있었다.

풍모, 재능이라는 면에서 오오야마 야스하루를 연상케 했던 와타나베 아키라는 오오야마의 환생이라는 소문이 돌아 "오오야마 2세"라고 불리기도 했다.

골프를 시작한 후에 "이런 재미있는 것은 장기에 나쁠 수 밖에 없다"라며 단호히 그만두었다.

가와구치 도시히코가 오오야마의 인물상을 그린 "오오야마 야스하루의 만절"은 제 15회 장기 펜클럽 대상을 수상했다. 가와구치 도시히코에 의하면, 오오야마가 금연을 권유했을 때, 가와구치가

"(금연하면 좋다는 건)알고는 있지만..."이라고 대답하자 "알고 있는데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보았다고 한다.

후지이 다케시 9단은 오오야마 야스하루 전집의 전기보를 늘어놓을 정도로 열심히 오오야마 장기를 배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후지이의 행마에는 오오야마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고도 한다.

배틀로열 카자마의 장기 4컷 만화에도 초기에는 자주 등장했다. 장기와 전혀 관계없는 장면에서 오오야마가 "이 몸에게 맡겨라!"라며 호언장담하고 억지로 상황을 정리해버리는 것이 스테디 셀러 개그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오오야마와 카자마의 대담도 실현되어 만화가 되어 장기 매거진에 게재되었다. 카자마는 "오오야마는 장기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철인이었다고 한다." 이 때,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지 않겠냐고 카자마가 물었는데, 오오야마는 "비록 되어봤자 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 왕장이라면 모르겠다."라고 대답

자택 근처인 오키쿠보 역에서 자택으로 돌아가는 도중이나 장기회관 근처의 센다가야 역에서 일본장기회관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지나가는 사람이 추월해서 걸어가면 분해서 반드시 추격해서 앞질렀다고 한다.

사카구치의 소설 "9단"에는 젊은 오오야마 9단의 안하무인 적인 일면이나 사카구치와의 우연한 인연등이 그려져 있다.

월하의 기사에 등장하는 오오하라의 모델이 되었다.

어록

- 살아나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살아나고 있다.

- 평범은 묘수를 이긴다.

- 최고의 수란 평범한 수를 계속 이어가는 것

- 1회째의 찬스는 놓쳐라.

- 종반은 두 번 있다.

- 최선형을 선택해도 나머지는 나빠질 뿐.

- 명인전과 같이 큰 승부에서 변칙 작전을 이용하는 것은 기합이 충실하지 않기 때문

- 한시기 강한것은 일시적이라 누구라도 있을 수 있다 정점을 유지해야 강자다.

- 장점은 곧 결점이다.

- 현역에서 은퇴하면 15세 명인이 될 자격을 얻었을 때 부친은 그 15세라는 것을 5개 따라고 격려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주요기록

통산 1433승 781패 승률 .647

통산 1433승 다승 1위

기전우승 124회 역대 1위

타이틀전 연속 50회 출장 역대 1위

순위전 A급 재적 연속 45년 44기

10단 재위 14기 역대 1위

동일 타이틀 연속 출장 21기 역대 1위

최고령 타이틀 획득 56세 11개월 역대 1위

최고령 타이틀 방어 59세

최고령 타이틀 상실 59세 11개월

최고령 타이틀 도전 59세 11개월

최고령 명인위 방위 48세 3개월

최고령 명인위 도전 63세 2개월

최고령 A급 기사 69세 4개월(A급 제적중에 사망)

  1. 용왕전의 전신인 10단전의 전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