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미 리지 전투. 리차드 잭 작품, 캐나다 전쟁 기념관
비미 리지 전투는 1차대전에서 영국군이 구상한 대규모 공세인 아라스 전투의 서두를 장식한 전투이며, 캐나다 군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전황의 전개
Background
비미는 북프랑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1차대전 중 서부전선에서 가장 강력한 방어거점으로 구성된 지점들 중 하나로 지방시-엥-고엘로 이어지는 길이 있으며 연합군 입장에서는 이 곳을 거쳐야만 넓은 렝-도애 평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였지만 독일군이 이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철조망과 3중 참호, 대규모 포병과 기관총좌를 터널로 연결한 야전요새 수준의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이곳을 공격한 프랑스와 영국군은 막대한 인명손실을 겪어야 했고, 프랑스군은 1915년 이곳을 공격하다가 15만명의 손실을 입기도 했다.
연합군 사령부는 1917년 또 다른 공격계획을 수립하였으며 공세의 핵심을 맡은 것은 영국 제5보병사단과 새롭게 보충되어 영연방 캐나다 군이 맡게 되었다. 캐나다 군의 지휘관은 그 동안의 프랑스와 영국군이 시도한 실패들에서 교훈을 얻어 후방에 리지 방어선의 모형을 만들고 소대 단위 전술을 훈련시켰으며 이를 통해서 각개 병사들이 장교나 부사관 수준의 지형습득 능력을 갖도록 교육시켰다. 각각의 소대는 단순한 돌격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임무를 부여받았고 독일군 참호 밑에서 대규모 지뢰를 폭파시키는 고전적인 방법들도 연구했다.
전투
1917년 4월 2일, 캐나다 군은 적 진지에 대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포병일제사격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1주간에 걸쳐서 백만발의 포탄을 퍼부어 독일군 진지를 갈아엎다 시피하는 함과 더불어 리지 라인 뒤에 은폐되어 있는 독일군 포병진지를 섬광과 소음으로 관측하여 위치를 파악하고 그곳에 포격을 가하는 방법으로 83%의 독일군 포대를 파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1주간에 걸쳐서 야간돌격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비록, 아터 커리 장군은 이런 야간 돌격은 어리석고 너무 위험한 공격법이라고 주장했지만 독일군은 이 기간을 "고통의 주간"이라고 부를 정도로 괴로워 했다. 이 포격의 규모는 그 소리를 영국 런던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비미 리지 근처 고지에서 사격하는 캐나다 군 기관총 부대
4월9일, 부활절 월요일 새벽녘에 3만명의 캐나다 군은 포격의 뒤에 바로 붙어서 참호를 점령하는 잠행탄막 전술을 시도했으며 영국군이 솜므 전투에서 사용했다가 병사들의 숙련도 부족으로 실패했던 것과 달리 캐나다 군은 이를 완벽하게 수행하여 대규모 병력이 포격선 바로 뒤에서 양측 참호간의 무인지대를 걸어서 전진하는데 성공했다.
역포화 전술같은 몇가지 실험적인 전술도 동원되어 전투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성공을 거두어 독일군 포병대를 대부분 가동불능상태로 만들어 전진중인 보병들을 보호할 수 있었으며 기관총의 간접사격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통해 화력적인 우위로 독일군이 참호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2시간 내로 캐나다군 4개 사단 중 3개 사단이 목표를 달성했으나 4번째 사단은 리지 145고지에서 쏟아지는 기관총 탄막에 전진이 지연되었으며 87대대는 50%의 병력을 손실했다. 보급과 공병임무를 맡고 있던 85 노바 스코티아 하이랜더 부대가 이 지역에 증파되어 그날이 저물 무렵 145고지도 점령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군은 이 승리를 듣자 "C'est impossible!"(It's impossible!)그럴 리 없다고 못 믿다가 작전에 나선 병사들이 캐나다 군이었다는 말을 듣자 그제서야 "Ah! les Canadiens! C'est possible!"(Ah! The Canadians! It's possible!)캐나다 인들이라면 가능하지라고 말했다는 전설이 있다.
결과
4월 12일, 캐나다 군은 리지 전역을 장악했으며 루드비히 폰 팔켄하우젠이 지휘하는 독일 6군은 2만명의 사상자와 4,000명이 포로로 잡힌 반면 캐나다 군은 3,598명이 사망하고 7,104명이 부상당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독일군은 방어하기 어려운 저지대로 후퇴하게 되었으나 이 공세는 대규모 전략의 일부로서 비슷하게 보다 남쪽에서 진행된 영국군이나 오스트레일리아 군의 공세는 성공하지 못했기 떄문에 캐나다 군의 승리로 실제로 얻은 전략적인 성과는 크지 않았다.
다만, 이 작전에서 치루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수천명이 죽어나감으로써 참호를 돌파할 전술적인 기초들이 마련되었고, 연합군은 아라스 주변에서 장기간의 고착상태를 타개하고 일시적이나마 전진하는 데 성공했다. 비미 리지는 연합군이 1년 반만에 처음으로 거둔 승리였고, 독일군이 돌파 불능의 방어거점으로 삼았던 리지를 점령해 냄으로써 가능성을 보여준 전투이기도 했다. 1918년 4월이 되자 독일군 최후의 공세에세도 이 지역의 중요성은 다시금 입증되었으며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연합군이 역공으로 나가는데 큰 이점을 제공했다.
영국군
비미는 캐나다 군이 대부분의 주요 임무를 담당했지만 단독으로 작전한 것이라기 보다는 연합군이 함께 작전에 투입되어 승리를 거둔 것이다.
- 영국 제1군단은 132문의 중포와 102문의 야포를 제공하여 전체 포병전력의 21%를 제공했다.
- 돌격에 투입된 13개 대대중 1개 대대는 전원이 영국인이었다.
- 영국 항공대 16비행대도 24기의 항공기를 제공하여 포병전력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협조했으며 4월 1~4월 13일에 걸쳐서 3기를 손실했다.
- 보급작전의 대부분은 영국군이 수행했다.
Legacy
비미 리지는 캐나다 역사에서 의미있는 이름으로, 캐나다군이 처음으로 군단 규모의 전투에 투입되었으며 다양한 창의적인 전술과 세심한 계획으로 1개월 전의 솜므 전투와는 달리 완벽한 승리를 거두어 캐나다 군을 서부전선 최정예 군으로 부각시키게 되었다. 영국의 쥴리안 H.G. 빙 장군이 지휘하고 캐나다의 아더 커리 경이 참모장을 맡아 캐나다 군은 연합군에게 전환점을 마련하였으며 이 외에도 파쉔데일, 캐나다의 100일간으로 알려진 전공으로 캐나다는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승전국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캐나다 군이 비미 리지에서 거둔 성공에 관하여 다른 국가들의 도움을 부인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피에르 베르통이 지적했듯이 비미를 그토록 신속하게 점령한 것은 거의 전설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비미 기념관
프랑스의 파드 칼레에 있는 지방시 비미 지역 145 고지 근처에는 캐나다 국립 비미 기념관이 있으며 캐나다의 전쟁 기념물 중에는 가장 대규모의 것이다. 1937년에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에 의하여 Salute to Valour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고, 캐나다 군이 거둔 위대한 희생을 기념하여 프랑스 정부는 캐나다에게 리지 지역을 할양했다. 이 지역에 캐나다는 전쟁 기념관을 건축했으며 비미 기념관은 현재 개축 공사 중으로 2007년 4월 9일에 재 개관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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