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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World War

1차대전 전반기

I. 7월 위기와 전쟁선언

- 6월 28일, 암살이 발생한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향후의 상황전개에 앞서 3주간에 걸친 장고에 들어갔으며 독일에게 "백지수표"를 얻어내고서야 세르비아와의 전면대결이라는 최종결정을 내린다.

- 7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게 "7월 최후통첩"을 보내어 암살사건에 대한 책임을 강력하게 추궁한다. 세르비아 정부는 최후통첩의 조건들 중에서 주권침해로 받아들인 내정간섭에 관한 내용을 제외한 모든 조건을 수락하는 답신을 보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에 외교적인 관계를 단절한다.

-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 7월 29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포격을 개시했다.

- 7월 30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전군에 동원령을 선포하였으며 러시아도 이에 대응하여 세르비아에 대한 안전보장을 이유로 동원령을 선포한다.

- 7월 31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지원을 약속한 독일은 러시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어 12시간 내로 동원령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 8월  1일, 최후통첩이 묵살되자 독일은 러시아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한다.

- 8월  2일, 독일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벨기에 침공의 예비단계로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벨기에를 상대로 독일군에게 프랑스로 진격할 것을 허락하도록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벨기에는 이를 거절한다. 슐리펜 플랜 발동의 최종단계에서 빌헬름 2세는 참모총장 몰트케에게 벨기에를 침공할 경우 영국과의 전쟁이 예상되므로 프랑스 침공을 중지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 질문하였으며 몰트케는 "일단 시작되면 번복될 수 없습니다."라는 말로 연쇄적인 스케쥴 진행을 변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반대의견을 표시했다.

- 8월  3일,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

- 8월  4일, 독일, 프랑스, 영국이 비준한 벨기에의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독일군이 무력으로 침공. 영국은 독일-프랑스의 전쟁이 이루어질 경우 중립을 유지할 예정이었으나 벨기에를 침공할 경우 전통적으로 도버해협에서의 해상권 유지를 위해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원했던 영국이 전쟁의 명분을 획득하게 됨.

독일 수상 비트만 홀비그는 독일 의회에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침공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했으나 "국가가 원하고, 필요는 법을 모른다"는 답변을 얻었을 뿐. 같은 날 늦게 영국의 독일대사 에드워드 거쉬인 경은 홀비그 수상에게 독일이 1839년의 벨기에 중립보장 조약을 무시할 경우 영국이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으며 이미 "종이짝"이 되었다는 답변을 얻었고 이 발언은 영국과 미국에서 여론을 들끓게 한다. 마침내 영국 정부는 벨기에 침공을 이유로 독일에 선전포고하지만 이 시기 까지만 해도 영국은 해군력만을 활용하는 제한적인 규모의 전쟁을 예상하고 있었다.

II. 1차대전 초기단계

1. 동맹군 간의 혼란

유럽 전선에서 동맹군(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투르크) 진형은 의사소통의 문제와 상호간의 군사적 의도에 대한 몰이해와 첩보 부족등으로 난항을 겪었다. 원칙적으로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을 지원하기로 되어있었지만 양자간의 정책적 의도 차이로 의사가 원활하게 소통되지 못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를 대응하는 동안 서부전선에서 프랑스를 뚫어내려고 했고, 이로 인하여 발생한 혼란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전략적인 목표와 병력 집중을 할 수 없게 만들어서 절반 이상이 러시아를 상대하고 남은 여력으로 세르비아를 상대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2. 아프리카 전선

1차대전의 초기에 전투가 시작된 곳은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식민지가 있는 아프리카였다. 8월 7일, 프랑스와 영국은 서아프리카의 독일보호령 토고를 침공했고 8월 10일 독일의 서남아프리카 군은 영국령 남아프리카를 공격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는 동 아프리카 지역에서 원주민 부대를 고용한 독일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3. 세르비아 전선

세르비아 군은 8월 12일부터 드리나 남부와 사바 강 유역에서 방어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오스트리아 군에 대응하여 방어전을 펼쳤다. 그후 2주에 걸친 오스트리아 군의 공세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것이 연합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세르비아에 대하여 오스트리아 군이 손쉬운 승리를 거두리라는 예상은 빗나갔고 결과적으로 세르비아 전선이 고착되자 대 러시아 전선에 투입될 병력도 약화되는 결과가 발생했다.

4. 벨기에와 프랑스의 독일군

French postcard depicting the arrival of 15th Sikh Regiment in France during World War I. The post card reads, "Gentlemen of India marching to chasten German hooligans".

프랑스 군의 제 15시크 대대.

초기에 독일군은 08.14~24일 동안의 프롱티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빠르게 병력을 동원한 러시아가 동 프러시아 지역을 공격하자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배치된 병력의 일부를 동부로 돌려야 했다. 독일은 08.17~09.02 동안 2차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로 인하여 진격의 속도가 예정보다 느려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원래 슐리펜 계획은 독일군이 프랑스 군의 우측면을 돌파해서 파리 서쪽으로 진격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말과 철도 수송에 의존하는 독일의 보급력이 요구되는 수준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고 결국 프랑스와 영국군이 파리 동쪽 마른의 1차 전투(09.05~12)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동맹군은 계획대로의 조기 승리를 거두는 대신 양면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독일군은 대체로 프랑스 내부에서 안정적인 방어선을 유지하였으며 8~9월 동안 병력손실면에서 프랑스와 영국군에게 23만명의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전선과 사령부 간의 의사소통 문제와 의문의 여지가 있는 지휘(몰트케가 세당을 방어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동하도록 지시한 것)도 있었으나 독일군은 대체로 전략적인 면에서 거의 승기를 잡는 듯 했다.

5. 아시아와 태평양 전선

영연방의 뉴질랜드는 독일령 사모아(서 사모아)를 08.30에 점령했고 09.11에는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독일령 뉴기니의 일부인 뉴 폼메른(Neu Pommern = New Britain)에 상륙했다. 일본도 독일령 미크로네시아를 포위하고 칭다오 전투 이후에 중국 산동반도의 독일의 보급기지를 점령하였다. 이런 일련의 작전으로 연합군은 태평양 지역에 산재해 있는 독일의 모든 식민지를 점령했다.

참호전 시작되다

1차대전 초기의 군사 전술은 군사 기술의 개발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군사적인 방어시설 분야에서의 기술적인 진보는 당대의 모든 공세전술을 무력화 시켜서 돌파를 허용하지 않았다. 철조망은 보병이 은폐된 상태로 전진할 수 없도록 했고 1870년대에 비교하자면 기관총이라는 신병기와 포병의 조합으로 구성된 화력은 공격측에 끔찍한 손실을 요구했다.

양측의 기술자들은 어마어마한 희생없이는 진지화된 방어진지의 참호들을 돌파할 만한 새로운 공격무기를 개발하지 못했지만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탱크의 개발도 전쟁 중 참호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도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탱크를 사용했고 독일은 독자적인 탱크를 개발하기 까지 노획한 연합군 탱크를 활용했다.

1차 마른전투 이후, 연합군과 독일군은 측면을 돌파하여 상대방을 후퇴시키기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바다를 향한 경주"가 이루어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스위스 접경지역의 로레앙에서 부터 벨기에의 플레미시 해안까지에 걸친 넓은 지역에서 독일군과 대치한 상황에서 독일군 점령지를 회복하기 위한 공세를 하던 중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체로 독일군의 참호시설은 상대측의 것보다 잘 구성되어 있었으며 방어자가 아니라 점령지를 되찾기 위하여 공세를 취한 영국과 프랑스 군은 적군의 전선을 돌파하기 까지의 일시적인 시설로 간주했던 관계로 비교적 미비한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In the trenches: Infantry with gas masks, Ypres, 1917

1917년 이프르의 참호에서, 가스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독일군

독일은 1915년 4월 Chlorine gas를 1차 이프르 전투에 투입하였으며 그 결과 프랑스군 방어지역에 6km에 걸친 광범위한 돌파구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으며 2차 이프르 전투에도 투입하여 5,000여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2차, 3차 이프르 전투에서도 독가스에 주로 영연방 캐나다 병사들이 희생되었다. 양측 모두 경쟁적으로 독가스를 사용했으나 화학무기를 이용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다만, 독가스의 효과는 참호전을 보다 끔찍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일단 노출된 병사들은 고통속에서 느리게 죽거나 살아도 오랫동안 전쟁의 공포에 떨게 되었다. 4월 독일군이

1916년 7월 1일, 솜므 전투의 첫날에 역국군은 단 하루만에 57,47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그 중 19,240명이 사망했다는 영국군 역사상 가장 참혹한 하루를 맞이했다.

베르덩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막고 2년간에 걸쳐서 양군은 모두 상대방에게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부심하였으며 베르덩에서 대패배를 당한 연합군은 일시적으로 프랑스군 담당 방어선이 붕괴되는 상황에 까지 몰렸다. 고도의 방어시설이 갖추어진 참호에 보병을 그대로 돌격시키는 것은 너무 심각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고 특히 1917년 봄의 니벨 공세 중에는 항명사건이 다수 발생했다.

Canadian troops advancing behind a Canadian Mark II tank at the Battle of Vimy Ridge

비미 리지 전투에서 캐나다 군이 자국군의 Mark II탱크를 따라 전진하고 있다.

1915~17 기간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보다 훨씬 심각한 사상자 수에 시달려야 했고 독일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던 베르덩에서도 독일군의 돌파시도는 무위로 돌아갔지만 역습에 나선 연합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서부전선에 영국군은 약 80만명의 병력을 전개하고 오른 강에서 북해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1,000개 대대를 배치해서 1개월에 4교대 체제로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연장된 전선의 길이는 총 9,600km에 달했다. 모든 대대들은 예비대로 후위에 돌려지기까지 1주일씩 전선에 머물렀으며 포페링이나 아미엥에서는 전선투입 1주전 부터 예비대로 돌려지기도 했다.

아서 커래 경과 쥴리어스 빙이 지휘하는 캐나다 군이 주축이 된 1917년 아라스 전투에서 비미 리지를 점령하는 영국군의 유일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영연방의 가세는 군사적으로 큰 이익을 제공했으며 이 사건은 오랫동안 기억되어 캐나다 군의 전설적인 용명으로 역사가들에게 기록되기도 했다.

III. 1차대전의 해전

1. 영국의 통상봉쇄

1차대전의 개전과 함께 독일제국은 전세계의 독일 순양함대에게 연합군에 대한 통상파괴 작전을 시작하도록 지시했고 영국의 왕립해군은 이에 대응하여 독일 순양함 사냥을 시작했다. 1914년의 포클랜드 해전도 그 좋은 예로, 이 전투에서 독일은 2척의 장갑순양함과 2척의 경순양함, 2척의 보급선을 상실했다. 독일의 순양작전이 압도적인 영국해군의 전력에 의하여 단발성 게릴라 전으로 끝나가면서 영국은 독일을 해군력으로 봉쇄하여 통상을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영국해군의 봉쇄는 전략적으로 독일의 경제를 붕괴시키고 기아를 일으켰으며 보급력을 감소시켜 피해를 누적시켜 복싱의 바디블로우 같은 막강한 효과를 발휘했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하여 함대의 존재만으로도 포 한번 사용하지 않고 적대국의 무역을 차단하고 통상을 봉쇄하며 선박의 항행을 점검하였으며, 당사국의 선박들을 선별적으로 차단하여 봉쇄로 인한 중립국의 피해를 최소화 했다.

2. 유틀란트 해전

독일의 대해함대는 이 봉쇄를 타개하기 위해 열세인 전력으로 영국의 대함대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1916년 역사상 최대규모의 해전인 유틀란트 해전이 벌어졌다. 유틀란트 해전은 1916.05.31~06.01에 걸쳐서 북해의 유틀란트에서 이루어졌는데, 라인하르트 쉐어 제독이 이끄는 독일의 대해함대(High Seas Fleet)와 영국의 존 제리코 제독이 이끄는 대함대(Grand Fleet)의 대격돌은 결국 독일측이 전면 퇴각함으로써 종료되었다. 양측은 모두 자국의 선전을 자랑했고, 독일측이 침몰한 함선의 수가 적었으므로 전술적인 승리처럼 보였지만 함선의 피해가 워낙 컸던 데다가 결국 영국의 봉쇄망을 돌파하고 제해권을 되찾아내지 못했으므로 전략적으로는 패배가 되었다. 독일 대해함대는 유틀란트 해전 이후 항구에서 수리로 남은 시간을 보내었으며 1918년 10월까지 남은 전력을 온존하는데만 집중했다.

3. U-Boat

한편 독일은 북미와 영국의 통상을 위협하기 위하여 U-Boat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잠수함의 특성상, 목표물에게 은밀하게 접근하는 것이 요구되었고 공격은 경고없이 이루어졌으므로 표적이 된 함선에서는 벗어날 기회가 없었다. (북대서양의 낮은 수온 때문에 침몰당한 배의 선원들은 생존하기도 어려웠다.) 독일의 통상파괴 작전 중, 민간 연락선은 침몰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루시타니아(RMS Lusitania)호가 1915년 침몰하게 되자 그때까지 중립을 표방하고 있던 미국은 독일에 강력한 항의를 표시했다. 마침내 1917년 독일이 영국의 전략적 우위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통상파괴가 필수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결정하자 미국은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독일은 이제 미국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고 유럽으로 병력을 수송하기 전에 도박적인 승부에 나서야하는 상황에 처했다.

1차대전 초기의 영국해군에게는 잠수함에 대응할 수 있는 무기체계도, 막대한 규모의 민간 상선을 호위하는 임무에 돌릴 충분한 구축함이나 콜벳이 없었지만 1917년, 영국 해군성은 민간함선을 집단으로 구성하여 상선대를 조직하고 호위함을 붙이는 정책을 채택하고 소나와 폭뢰를 장비함으로써 U-boat 위기를 해소했다. 잠수함 공격의 손실은 점차 감소했지만 상선대는 선단에서 가장 느린 함선의 속도에 맞추어야 했기 때문에 연합군의 통상 흐름 체계는 많이 늦춰지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대적인 프리깃 함 건조 계획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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