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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World War

1차대전 후반기

남부전선

오스만 제국

1914년 10월 8월에 맺어진 독일과의 동맹 밀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이 동맹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코카서스 영토를 위협하는 동시에 수에즈 운하를 차단하여 영국-인도간의 육상 연락로를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응하여 1915년 갈리폴리와 메소포타미아에 새로운 전선을 확장한다. 갈리폴리에서 투르크 군은 영국-프랑스-안잭(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군의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쿠트 포위(1915~1916)에 실패하여 영국군에게 1917년 3월, 바그다드를 뺏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보다 서쪽의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영국군은 초기의 실패를 극복하고 1917.12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에드문트 알렌비 장군의 지휘아래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군을 1918년 9월 메기도 전투에서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중앙 아시아의 지배자가 되려는 야망에 불타던 터키군 최고사령관 엔버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 군을 맞아 러시아 군은 코카서스 지역에서 훌륭한 작전을 펼쳤다. 엔버 파샤는 야망에 비해서 군사적인 재능이 부족했으며 1914년 12월 코카서스에서 10만명의 병력으로 공세를 시작했으나 한겨울에 산악지역에 방어선을 펼친 러시아 군에게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다 86%의 병력을 살리카미스 전투에서 상실하는 대패를 당했다.  1915~1916동안 유데니히 장군이 지휘한 러시아 군은 오스만 투르크 군에게 연전연승을 거두어 코카서스 남부에서 몰아내었으며 1917년 니콜라이 대공이 코카서스 전역의 상급 지휘관으로 임명되자 러시아의 게오르기아 방면에서 정복지까지 철도를 부설하여 보다 공세적인 작전으로 전환할 준비를 했지만 1917년 3월(러시아 달력으로는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전복되자 러시아 군도 천천히 붕괴되었다.

이탈리아의 참전

이탈리아는 1882년 이래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관계에 있었으나 그런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의 트렌티노,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지역 영토에 욕심이 있었고 1902년 프랑스와의 밀약을 맺어두었기에 동맹관계에서 크게 구애되지는 않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요구에 대하여 '방위 동맹'이지 공수 동맹이 아니었음을 이유로 참전을 거절했고 튀니지의 프랑스 영토를 제공하겠다는 조건으로 이탈리아를 회유하려던 오스트리아 와의 협상이 실패하자 이탈리아는 1915년 4월 런던 조약을 승인하고 1915년 5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했다.(15개월 후에 독일에게도 선전포고)

일반적으로, 이탈리아는 수적인 면에서 유리한 상황에 있었지만 1917년 영국과 프랑스가 포병 전력을 지원해줄 때까지는 루이제 카도르나 장군에 의한 이론조 전선의 공세에서 그 이점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 군 사령관 카도르나는 적 전선을 돌파하여 슬로베니아 고원으로 진격하여 루블리아나를 점령하고 비엔나를 위협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방어되는 참호전의 실상을 도외시 하는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카도르나 장군은 아군 병력의 희생을 도외시 하고 연합군의 다른 전역에서의 압박을 덜어주고 목표로 하는 지역을 점려하고자 맹렬한 공세를 펼쳤으나 트렌티노 전선에서 산악지형의 이점을 살린 오스트리아 군의 순차적인 후퇴전략에 휘말려 피해만 누적되고 전선의 고착상태를 타개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의 KaiserschutzenStandschutzen과 이탈리아의 Alpini 부대는 여름 내내 육박전을 벌이고, 겨울에는 고원지대에서 생존을 위해 격전을 벌였고 1916년 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아시아고 고원에서 베로나와 파두아를 향하여 반격을 시도했지만 역시 큰 소득은 없었다.

1915년 초부터 이탈리아는 트리에스테 북부의 이손조 강 유역에서 이손조 전투라고 불리게 된 11차례의 대규모 공세를 벌였으며 결국 고지를 점령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격퇴당했다. 1916년 여름, 이탈리아는 고리지아를 점령하는 작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탈리아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전선의 고착상태는 풀리지 않았다. 1917년 동부 전선의 상황이 개선됨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독일 돌격사단을 포함한 대규모 증원병력을 남부 전선에 배치할 수 있었으며 10월 26일 부터 동맹군은 독일군을 선봉으로 하여 돌파작전을 시도했으며 카포레토에서 승리를 거두어 이탈리아 군은 100km를 후퇴한 끝에 후방의 피에브 강에 이르러 부대를 재조직하고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1918년, 오스트리아 군은 아시아고 고원의 전투를 비롯한 일련의 전투에서 이탈리아 군의 전선을 돌파하지 못했고 결국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여 11월 항복했다.

발칸 전역

러시아 군을 상대하기 위하여 병력을 돌려야 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자국군의 1/3이상을 동원할 수 없었다.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일시적으로 세르비아의 수도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반격으로 1914년 말까지 대부분의 점령지역에서 축출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1915년 10월까지 오스트리아는 대 이탈리아 전선에도 많은 병력을 할애했던 관계로 수세에 몰렸지만 불가리아를 동맹군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고 오스트리아 령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가 적극적인 지원을 유지한 관계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전선은 지리한 대치국면에 돌입했지만 1917년 러시아 전선이 정리되자 10월 7일,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증원된 병력으로 북부에서 공세를 시작하였으며 4일 뒤 불가리아가 동쪽에서 양면전을 펼쳐나가자 결국 세르비아 군은 코소보의 질란 근처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다.

1915년 말, 프랑스-영국의 연합군이 그리스의 살로니카에 상륙하고 그리스 정부에 연합군측에서 참전할 것을 요청했지만 독일계인 그리스 국왕 콘스탄틴 1세는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연합국에 기울어진 그리스의 에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를 해임해 버렸다. 살로니카 전선은 완전히 고착되었으며 동맹국들은 농담삼아 살로니카는 독일의 최대규모 포로수용소라고 놀리곤 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동맹군 병력 대부분이 후퇴할 때까지 연합군은 발칸반도를 돌파하지 못했으며 불가리아는 도브로 폴 전투와 그에 이은 도이란 전투에서 패배할때까지 연합군을 잘 막아내었으나 동맹군에게 전반적인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1918.09.29 종전협정에 동의했다.

동부전선

서부전선이 고착상태에 놓였으나 동부의 전쟁은 계속 진행중이었다. 러시아 군은 오스트리아의 갈라시아와 독일의 동프러시아 지방으로 진격했으며 갈리시아 방면의 전진은 성공적이었던 반면에 동프러시아에서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가 이끄는 독일군에게 1914년, 8월과 9월에 탄넨베르크와 마수리안 호수 지역에서 크게 패했다.

산업화가 진행되지 않아 생산력이 부족한 러시아는 장비와 지휘관의 역량 면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1915년 봄에는 갈리시아 지방에서도 축출되었고 동맹군은 폴란드 남부 지역의 러시아 방어선을 돌파하여 8월 5일 바르샤바를 점령했으며 러시아군은 폴란드 전역에서 물러났다.

러시아 혁명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러시아 군은 동부 갈리시아에서 1916년 6월의 브루실로프 공세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러시아 정부의 전쟁수행은 전체적으로 실망스러웠고, 러시아군의 성공은 승전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지역의 지휘관들에 의하여 평가 절하되고 있었다. 연합군과 러시아 군은 08.27, 루마니아 군이 전쟁에 가담하면서 동부전선에서 재기의 기회를 잡았지만 12월 6일, 트란실바니아와 부크레슈티를 동맹군이 점령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짜르 체제에 대한 불만이 점점 강해졌으며 알렉산드라 여제가 러시아 정치에 간섭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1916년 말, 보수적인 러시아 귀족층에 의하여 여제의 정치적 조언자인 라스푸틴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Vladimir Ulianov (Lenin)

1917년 3월, 상트페테르스 부르크에서 짜르 니콜라이 2세에 항거하는 데모가 발생하고 이것이 2월 혁명으로 발전하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구성된다. 이로 인해 발생한 정치적 혼란은 전선과 후방의 국민들에게 심각한 혼란을 가져왔고 군대의 통솔이 크게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제정러시아 정부는 점차 국민들에게 지지를 잃어갔으며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세비키는 1차대전에서 러시아가 발을 뺄 것을 약속하면서 많은 지지를 얻었다. 볼세비키가 11월(러시아력 10월)혁명에서 승리를 거두자 독일과의 단독 휴전협정을 시작했으나 독일은 휴전협상을 거부하고 우크라이나로 진격해 들어갔고, 결국 소련의 신정부는 1918.03.03,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하여 핀란드, 발틱해 지역,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일부를 동맹군에게 할양하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에 조인했다.

볼셰비키 신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이 조약이 짜르가 맺은 것이라고 선전했으며, 새로운 형태의 정부가 러시아에 수립되었다는 사실은 러시아와 독일이 종전협정을 체결했다는 것보다 더 큰 전세계적 파장을 불러왔다. 러시아가 전열에서 이탈하자 삼국연합 자체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되었으며 연합군은 아르항겔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소규모 침공을 시도하여 독일이 러시아로부터 자원을 획득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적백내전에서 백군을 지원했다.

1917년의 사건들은 당장은 효과가 보이지 않았지만 1918년이 되면서 전쟁이 끝나가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영국해군의 봉쇄로 사기 저하와 후방의 생산력 저하에 시달리게 되자 독일최고참모본부(OHL)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독일 수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위그를 설득하여 여 1917년 2월, 무제한 잠수함 작전 실시를 결정한다. 그해 2월에서 7월까지 독일의 잠수함이 침몰시킨 총 톤수 합계는 1개월에 50만톤이라는 수치에 육박했으며 4월에는 86만톤을 침몰시켜 정점에 도달했다. 7월 이후부터 상선대 체제를 정비하고 호위체계를 갖추면서 U-boat의 위험은 서서히 감소했고 영국은 아사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동맹군이 카포레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자 연합군은 라발로 회의에서 지금까지처럼, 각국이 개별적인 명령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연합군 사령부를 베르사이유에 설치하여 작전을 구상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12월에, 러시아와 종전협정을 조인한 동맹군은 동부전선에 배치되었던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돌릴 여유를 갖게 되었다. 만약 동맹군이 점령한 지역이 그토록 광대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병력을 서부에 돌릴 수 있었겠지만, 이 증원전력을 활용하여 독일은 미국이 새롭게 참전하여 연합군이 병력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기 전에 단기전을 통해 결정적인 승기를 잡으려 했다.

계속 이어지는 전쟁으로 연합군과 동맹군 모두가 1899년 이반 블로크가 예상했고 러시아에서 실현된 것처럼, 산업화된 사회에서 장기간의 전쟁을 치를 경우 사회적인 혼란이 발생하여 혁명으로 체제가 전복될 지도 모르는 위험을 걱정하게 되었으며 양측 모두, 서부전선의 대치국면을 타개하고 결정적인 승기를 잡아서 전쟁을 끝내고 사회 혼란을 방지하려 했다. 이제 결전의 분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미국의 참전

당시 미국은 아직도 고립주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유럽의 분쟁과 별개로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다. 한편, 독일이 1915년 영국의 연락선 루시타니아 호를 침몰시킨 사건으로 128명의 미국인들이 사망하자,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신은 "미국은 명예롭게 전쟁을 거부한다."고 선언하면서 독일에게 연락선과 민간인을 탑승시킨 선박에 공격을 하지 말것을 촉구했고 독일도 그에 긍정적인 답신을 보냈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윌슨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실시할 경우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수차례 경고했지만 이런 미온적인 반응에 전임 대통령 테디 루즈벨트는 독일의 해적행위에 대한 윌슨의 나약한 대응을 비난하고 나섰다.

1917년 2월, 베를린은 멕시코에 독일의 동맹군으로 참전할 것을 권유하는 "침머만 전보"를 보냈으며 이로 인하여 미국의 여론이 들끓게 된데 더해서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선언하고 수척의 미국 민간상선이 침몰하게 되자 윌슨은 독일계 미국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위스콘신 같은 지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17.04.06 예고했던 대로 독일에 선전포고 한다.(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한 것은 1917.12)

미군은 공식적으로는 연합군이 아니며 "협조국가" 지위로 참전했으며 1918년 여름 부터 하루에 1만명 정도의 신예 병력이 유럽전선에 파병되기 시작했다. 독일은 처음에 미군 병력이 이렇게 빠르게 배치되리라 예상하지 못했고 배치된다 하더라도 U-Boat들이 수송선에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실제로는 단 1명의 미군 병사도 독일군의 U-Boat에 의해 사망한 경우가 없다.

미 해군도 전함을 스캐퍼 플로에 파견하여 영국의 대함대와 합류했으며 다수의 구축함들은 아일랜드의 퀸즈랜드에 파견되었고 아조레스나 밴트리 만에는 잠수함대가 파견되어 수송선 보호임무에 투입되었다.

미 해병대는 프랑스 전선에 직접 투입되었지만 사실, 미군이 서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두드러지는 규모로 파견되어 활약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군이 전선에 막바로 보병전력을 증원해 주고 자신들이 장비일체를 제공하는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에 초창기에 미군 병사들은 영국과 프랑스 야포와 항공기, 탱크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AEF(American Expeditionary Force 미 파병군) 사령관 John J. Pershing 장군은 미군을 영국이나 프랑스 군의 증원병력 정도로 취급해 버리는 걸 거부했다.(반면에 흑인 병사들은 프랑스 군에게 제공했다.) 퍼싱 장군은 이 시기에는 막대한 병력피해로 영국과 프랑스 군이 포기한 전선 돌격을 여전히 선호하고 있었다.

독일, 1918년 봄 공세

Image:Trencheswwi2.jpg

독일의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1918년 동부전선에서 증파된 병력을 활용하여 미군이 대규모로 증원되기 전인 1918년 봄에 서부전선을 돌파하려는 구상하에 미하일 작전을 계획했다. 독일군의 1918년 봄 대공세는 영국과 프랑스 군을 일련의 기만작전과 진격작전을 활용하여 돌파하려는 세밀한 계획이었으며 준비는 철저했지만 루덴도르프는 독일군의 정예부대인 제8군을 동부전선에 방어전력으로 남겨둔채 일부의 병력만을 서부전선으로 돌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1918.03.21, 미하일 작전은 아미엥의 철도 교차지점 근처의 영국군에 맹렬한 공격을 가하면서 시작되었고, 루덴도르프는 이 지점에서 영국과 프랑스 군을 분단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독일군의 돌파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 60km나 전진하는 데 성공했으며 1914년 이래 처음으로 전장에서 주도권을 잡는데 성공했다.

독일군의 대 공세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후티어 전술로 대표되는 새로운 돌파 전술의 활용에 있었으며 후티어 전술이란, 독일의 오스카 폰 후티어 장군이 고안한 것으로 당시에 일반적으로 활용되던, 장기간의 집중적인 포병화력 활용과 보병의 집단 돌격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전술이 참호화된 방어 진지를 돌파하는데 어려움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안된 것이다.

후티어 전술은 기본적으로 단기간에 넓은 지역에 걸쳐서 화학탄을 비롯한 다양한 포탄으로 공격을 가해 일시적으로 적의 반격의지를 마비시킨 다음 잘 훈련된 소규모 보병전력을 투입하여 적의 약점만을 공격해서 돌파하고 바로 후방의 지휘부와 보급체계를 마비시켜 마침내는 적의 방어거점들을 고립시키고, 그런 후에 중화기로 무장된 병력들이 고립된 거점들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 방식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연합군은 연패를 거듭하면서 파리에서 120km떨어진 지점까지 후퇴했고, 독일군은 최대 진출선까지 3문의 초대형 크루프 열차포를 전진시켜 파리에 183발의 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런 성공에 기뻐한 나머지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는 3월 24일을 국경일로 선포했으며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격전의 끝에 독일군의 공세는 중지되었다. 돌파전술 자체는 대단히 효과적인 위력을 발휘했지만 독일군에게 탱크와 자주포 같은 기동성있는 화력이 부족하다는 약점이 크게 작용하여 전진한 지역을 고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영국과 프랑스 군은 불과 몇마일만 물러나게 될 경우 독일군은 조직력이 와해되어 연합군의 반격에 무력해 진다는 것을 이해하였고, 증원되기 시작한 미군 병력은 3월 28일부터 영국과 프랑스 군에 일시 소속되어 영국의 더글러스 헤이그 원수의 지휘아래 방어를 돕기 시작했다.

독일은 미하일 작전에 이어 죠르제 작전을 개시, 북부전선에서 도버 해협 지역의 항구들에 일련의 공세를 가했지만 연합군은 미하일 작전에서 보다 더 적은 피해로 독일군의 전진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파리 방면을 향해서 전진한 교두보를 확대하기 위한 남부전선에서의 블뤼헤르 작전과 요크 작전에서도 그랬다. 7월 15일에 있은 렝스를 포위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2차 마른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곳에서 드디어 연합군은 성공적으로 독일군의 공세를 반격하는 데 성공했다. 7월 20일이 되자 독일군은 대공세를 펼치기 전의 카이젤샤흐트 라인으로 아무런 소득없이 돌아와야 했으며 3월에서 4월에 걸친 공세로 27만명의 독일 최정예 병력들이 사망했다. 후티어 전술을 수행하기 위한 스톰트루퍼들이 대대적인 피해를 입은데 반해 연합군에는 싱싱한 새 전력이 계속 증원되기 시작하였고, 이 피해로 독일 내에서는 반전여론이 강화도기 시작했다. 반전 시휘가 빈번해졌고, 일선 병사들의 사기가 급속도로 저하되면서 독일의 공업력은 1913년의 53% 수준까지 저하되었고, 독일은 승리를 목전에 두고 패전을 향해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연합군의 승리 : 1918년 여름에서 가을로

100일간의 공세로 알려지게 될 연합군의 반격작전은 1918년 8월 8일에 시작되었으며,영국 4군이 좌익, 프랑스 1군이 우익에 서고 오스트리아와 캐나다 군이 중앙과 선봉을 맡았으며 12만명의 보병과 414대의 탱크를 동원한 아미엥 전투에서 연합군은 독일 점령지역으로 7시간 만에 12km를 전진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이 날을 "독일군의 암흑의 날"로 지칭했다.

반격 자체는 성공적이었지만, 보급 문제로 서서히 전진 속도가 둔화되고 관성을 잃어버렸다. 영국군의 탱크와 트럭들은 연료 부족으로 모두 정지해버렸고 8월 15일, 헤이그 원수는 부대에 정지를 명하고, 새로운 공세를 위하여 전선을 재 배치했다. 8월 21일, 제2차 솜므 전투에서는 증파된 13만의 미군 병력과 영국 제3, 4군이 합류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독일 2군은 55km를 후퇴해야 했고, 독일군은 서서히 후퇴를 거듭하여 9월 2일에는 1914년 공세를 시작한 힌덴부르크 라인까지 밀려났다.

연합군은 9월 26일부터 힌덴부르크 라인에 뮤즈-아르곤 공세를 펼쳤으며 이 전투에서는 26만 명의 미군 병사들이 크게 활약했고, 몽포콘에서 강력한 저항으로 하루가 더 소요된 미 제 79보병사단을 제외한 모든 사단이 예정대로 작전목표를 달성했다. 미군은 이 시점에서 지휘부의 경험 부족과 험준한 지형사정으로 보급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동시에 프랑스 군은 샹파뉴 지방을 돌파하여 벨기에 지역으로 전진했고, 영연방군이 주축이 되어 벨기에 지역으로 진격했다. 독일군은 전선이 축소되어 감에 따라

동시에 프랑스 군이 샹파뉴를 돌파하여 벨기에 전선에 접근했고, 영연방군은 벨기에의 겐트를 해방하면서 주목할만한 전진이 이루어졌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전진과 역량의 약화로 인해, 전선을 축소시키고 네덜란드쪽 전선을 축으로 배후에서 방어작전을 수행하여 독일군의 전면붕괴를 막으려고 했지만, 사기저하를 막을 수는 없었다. 10월초가 되자 새로운 증원병력은 실제적인 전력으로 활용하기에는 너무 어리거나 너무 나이가 많았고, 독일은 더 이상 성공적인 방어작전이나 효율적인 반격이 불가능해졌음이 확실해졌다. 수적인 열세가 심해지는데, 병사와 말에게 주어지는 식량보급은 생산력이 고갈되면서 한계수준에 도달했다. 10월 1일, 루덴돌프는 전멸전과 휴전의 갈림길에서 후자를 선택하는 게 낫다고 결정했고 10월 이후, 연합군은 승기를 굳힌채 더 이상의 압박을 가하지 않고 대기했다.

그러는 동안, 독일의 군사적인 패배가 확실해졌음이 독일군 전체로 퍼져나가며 불온한 분위기가 강해졌다. 이에 해군제독 라인하르트 셰어와 루덴도르프는 독일해군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한 최후의 절망적인 시도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나 정부의 막스 폰 바덴은 이런 행동을 거부하리라 보고, 그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만연한 불온한 공기가 키엘 군항의 수병들 사이에서 폭발하여 그렇게 가능성이 없는 자살적인 행동에 대한 거부감을 명확히 했다. 루덴도르프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독일 황제는 10.26, 그를 해임했다. 발칸 전역에서 독일 동맹군 전열이 붕괴되면서 독일은 최후의 석유와 식량 보급처를 잃었고, 독일내의 예비 자원도 고갈되는 상황에서 미군은 하루에 10,000명 꼴로 증원되고 있었다.

베를린의 새로운 담당자들은 결정권을 쥐게된 시점에서 독일군의 사상자는 6백만에 달했고 더 이상의 항전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려졌다. 막스 폰 바덴 대공의 독일 신정부가 평화 회담을 요청했고, 프랑스나 영국보다 더 나은 조건의 휴전을 위해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대상자로 선택되었다. 윌슨은 자신의 14개조를 제안하는 동시에 황제의 퇴위를 요구했고 독일군은 기세가 꺽였다. 독일인들은 루덴도르프가 전쟁의 막바지에서 허황된 희망을 심어주고, 군사적 승리에 대한 잘못된 보고를 전했음을 알고 충격을 받았고, 11월 9일, 독일 사민당의 필립 쉬더만이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을 때 큰 저항은 없었다. 바덴 대공은 황제가 퇴위했음을 알렸고 독일 제2제국의 조종을 울렸다. 새로운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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