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카누 옆에 수평으로 긴 목재를 연결시키면 카누는 놀라운 내항성을 갖추게 되고 미크로네시아 지역의 원주민들은 이런 간단한 배를 이용하여 놀랄만큼 먼 거리까지 항해할 수 있었다. 이런 배들은 점차 발전되어 쌍동체 카누나, 아웃트리거를 붙인 형태로 발전되었다.
초기의 갤리
인류가 처음으로 수영에서 한계를 느끼고 통나무에 올라타게 된 이래, 물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통나무에서 뗏목으로, 카누에서 폴리네시아의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쌍동체 카누(Outrigger canoe)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노를 추진력으로, 돛을 보조추진력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각지에서 이런 형식의 배들이 발달하였으며 이렇게 인력에 추진력을 의존하는 형식의 배들을 흔히 갤리 라고 부른다.
갤리선이 지중해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3천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와 페니키아의 갤리선들이 이 시대에도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상선으로, 군함으로 갤리선은 맹활약을 펼쳤다. 당시의 항해자들은 원거리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단이 거의 없었으며 갤리선은 지속적으로 보급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연안에서만 항해가 가능했다. 갤리선들은 인력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강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수심이 얕은 지역에서도 비교적 원활하게 활동할 수 있었고 기원전 5세기 경에는 기병대까지 운송할 수 있었다.
펜테콘테르스
기원전 800년경, 최초의 해전용 병기인 충각(ram)이 개발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저 병력을 운송하는 의미만이 있었던 군함의 해전에 혁신이 일어난 것이다. 충각의 등장은 곧 전함의 발달을 가져왔다. 적을 들이받아 침몰시키기 위해서는 점점 더 무거운 충각이 필요했고 거기에 따라 충각을 장착하는 이물의 구조가 점점 견고해져 갔다.
충각을 효과적인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속도’와 조종성이 필요했다. 적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주기위해서 빠른 속도로 부딪힐 필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적의 배를 원하는 위치에서 부딪히고(주로 옆구리나 고물) 또 적의 충각 돌격을 회피하기 위해서 속도가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바람을 동력원으로 삼는 돛이 정교하게 발달하기 이전이었으므로 이 속도를 얻기 위한 동력은 자연히 인력에 의한 노젓기에서 얻어졌다. 노 젓기로 최대한의 속력을 얻기 위해서는 노잡이의 수를 늘리는 수 밖에 없었으므로 자연히 전함의 길이는 길어졌고 폭은 좁은 화살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문제는 당시의 기술로는 배의 길이가 길어질 수 있는데 내구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과, 너무 길어질 경우에 배의 앞머리가 파도를 헤치면서 발생하는 파도로 인하여 배의 일부분들이 물에서 떨어지게 되는 것 때문에 배의 길이가 길어지는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일정한 한계까지 확대된 갤리선, 펜테콘테르스(Penteconters)가 등장하였다. 펜테콘토로스는 직역하자면 ‘쉰 명이 탄 배(fifty-er)' 가 되며 말 그대로 50명의 노잡이가 타는 배이다. 배의 양쪽에 25명을 앉힌 펜테콘토로스는 배의 폭이 길이의 1/10 정도밖에 안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많은 실패와 시도를 거듭하면서 펜테콘테로스는 38미터 정도의 길이로 고정되었으며 역사가들은 적어도 이들이 9노트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펜테콘테로스들은 서서히 방수성이 강화되고 보다 견고하게 건조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전술은 충각돌격으로 적선을 침몰시키고, 성공하지 못한채 뒤엉켰을 경우 양쪽의 전투부대가 돌격하여 집단전을 벌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고 보이지만, 해전의 승자들이 패배한 갤리선들을 침몰시키는 데 주력했다는 종래의 주장들에는 의문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스 어로, "침몰하다"라는 단어는 동시에 "침수되었다"라는 표현인데, 고고학적으로 침몰선들의 잔해 증거들을 역사가들이 기록한 해전의 규모들에 비교하면 승자들은 대체로 패배한 갤리선들을 나포하는데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오늘날 이 시대의 갤리선들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부분은 안틸리아의 청동제 충각이다. 당대의 갤리선들은 방수처리가 아직 확실하지 않았고 자주 육지로 끌어올려서 선체를 건조시켜 주어야 했다.
현존하는 펜테콘테로스 시대의 유일한 유물. 초기의 충각은 뾰족한 형태였으나 그런 구조로는 일단 박힌 상황에서 쉽게 빠지지 않는것을 알게 되자 점차 충각은 뭉툭한 형태로 변하였다.
유명한 펜테콘테로스
시인, 역사가이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관장이었던 로도스 섬의 아폴로니우스(기원전 295~213)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약 BC 1250년 경에 아르고 호는 신화적인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그리스 북부의 이올코스 항을 떠나서 흑해로 향했다. 아르고 호의 원정대에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 나온 것 처럼, 트로이 전쟁 이전 시기의 모든 영웅들이 망라되어,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 카스톨, 폴룩스를 비롯한 초 호화멤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표적은 흑해 동쪽 콜키스 왕국에서 황금의 양피를 훔치는 것이었다.
로마의 지리학자, 스트라보에 의하면 콜키스에서는 "수심이 얕은 강바닥에 양의 모피를 고정시켜 두면 금을 함유한 모래가 모피에 묻게 된다. 그러면 모피를 가마에 넣고 태우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금을 얻었다."라고 한다. 지금도 코카서스 지방에서 금을 찾는 이들은 이 방법을 이용하고 있으며 아르고 호의 2,800km에 걸친 기나긴 여행(갤리선에게는 불가능할 정도로 먼 거리라고 여겨졌다)을 왕복했다는 전설의 신빙성은 2차대전 이후, 고대 그리스의 선박들이 발굴됨으로써 증명되기 시작했다. 실험항해가인 세버린은 1983년 그리스의 스페체스 섬에서 목수인 바실리스 델리미트로스를 만나서 자신이 건조한 아르고 호 모형을 보여주고 이것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델리미트로스는 혼자서 이 배를 다섯달만에 완성하였고, 이 걸작은 영국의 조선 설계자 콜린 머디가 그리스 선박에 대한 호머의 묘사와 그리스 질그릇에 그려진 문양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호머(=호메로스)의 기록에 의하면 아르고 호는 길이 20미터, 폭 4미터, 홀수 1미터에 배수량 1톤인 배로서, 떡갈나무 목재를 카벨 방식으로 연결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포르투갈 어로 카르발류는 떡갈나무 목재를 의미한다. 이렇게 선판을 이어서 대는 방식은 기원전 15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방식이다.)
아르고 호의 대 모험이 있은지 3,200년 후인 1984년 5월 2일, 아르고 II 호는 각국 출신의 선원들을 태우고 볼로스 항을 떠났다. 키가 두번 부러졌으며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과할때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6월 15일에 흑해에 들어섰을 수 있었고 7월 21에는 목적지인 코카서스의 리오니 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르고II 호의 실험을 통해서 충각이 무기로서의 효용 이외에도 현대의 불버스 바우처럼 파도의 저항을 분산시켜서 노젓기가 수월해지는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었다.
관련링크
http://en.wikipedia.org/wiki/Galley
http://en.wikipedia.org/wiki/Tim_Severin
http://en.wikipedia.org/wiki/Argo
http://blog.naver.com/mdkdk?Redirect=Log&logNo=14001931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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