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World War

카미카제, Kamikaze, 特別攻擊隊

야스쿠니의 카미카제 대원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편성한 부대중, 연합군 함정에 대한 ‘직접동체충돌 공격’을 실행할 목적으로 주로 항공기에 의해 생환의 가능성이 없는 작전을 시행하기 위한 부대, 작전의 통칭.

항공기 이외에도 인간폭탄, 인간어뢰 등 다양한 형태의 자살공격이 감행되었으며 공격이 성공했을 경우 승무원이 생환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돌입실패로 바다에 충돌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거나 기체 고장에 의한 불시착등을 이유로 승무원이 생환한 예도 극히 드물게 있지만 확률적으로는 출격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극단적인 행동이 이루어지게 된 이유는,

1. VT신관을 대표로 하는 연합군 대공능력의 비약적인 향상
2. 미드웨이 패전이래 지속적인 조종요원 손실로 숙련된 조종사의 보충이 어려웠던 점
3. 항공기 연료의 품질 악화나 항공기 관련 공업능력이 저하되어 신예기의 설계, 제작이 필요한 수준에 미달되게 된 것
등의 여러가지 원인이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패색이 짙어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가장 전과를 낼 확율이 높은 방법으로 일본 수뇌부가 채택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무사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이며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의 이른바 "반자이 돌격"(만세 돌격)을 비롯해서 유사한 형태가 2차대전 말기의 일본에서는 다양하게 관찰되고 있다. 이러한 '특별공격대'는(독고다이, 특공대라고도 부른다.) 오키나와 교전에 즈음해서 주로 이루어졌고 오키나와 주변의 압도적인 미,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함대에 대해 기쿠스이 작전을 발동하여 큐슈에서 출격한 항공기의 특공으로 대응했다. (이와 연동해 전함 야마토 이하의 함정에 의한 수상 특공도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너무나 뜻밖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이 대응할 수 없어서 약간의 전과를 올린 경우도 있엇지만 말기에 이르면, 연합군의 대응 강화와 강제적인 특공대 편성으로 공격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정신론적인 면 이외에는 유효성이 없게 되었다.

1. 명칭

명칭의 유래

일본의 해군, 육군 모두 항공기나 선박등을 이용하여 다양한 특공부대를 편성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이 해군의 카미카제 특수공격대로, 원나라의 일본침공을 저지했다는 신풍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래는 "신풍"이라고 읽었으나 최초의 출격을 알리는 "일본뉴스" 제232호의 나레이션에서 "카미카제"라고 읽게 되어 "kamikaze"로 정착되었다.(일본어의 읽기 방법. 神風이라는 한자를 신뿌 라고도 읽을 수 있고 카미카제라고도 읽을 수 있다.) 이후에는 이런 특공의 상징처럼 되어 전후에 kamikaze는 자살공격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게 되었다.

일본육군의 특별 공격대

일본 육군의(항공) 특공 부대는 당초는 해군의 「카미카제」와 같은 통일한 대명을 이용하지 않았으며 필리핀 전선에 투입되었던 후가쿠(富嶽)대나 만타(万朶)대처럼 그때그때 명명되었지만 횟수가 증가하면서 이윽고 "제 00 진무대"와 같은 명칭으로 통일되어갔다.

2. 역사

배경

비행기 조종사의 경우에, 자신의 기체가 심각하게 파손되거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최후의 수단으로 자폭공격을 감행하는 것은 연합군과 추축국을 막론하고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속에서 발생하는 특이행동으로 이따금씩 있었다. Axell & Kase에 의하면, 이러한 자살은 "죽을 준비가 정신적으로 끝난 인간의 개인적이며 즉흥적인 결정"으로 이런 행동이 우발적인 행동의 범주를 벗어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예를 들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 중, 후사다 이이다 대위는 자신이 조종하는 기체의 연료가 고갈되자 카나우헤 해군 비행장에 자폭공격을 가했으며 이륙하기 전에 동료들에게 만약 자신의 기체가 심각하게 손상될 경우, "주요한 적 시설물"에 충돌하겠다고 말했었다. 태평양 전쟁에서도 특공이라고 부를만한 공격이 자주,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후기의 일로 마리아나 해전에 앞서 항공모함 다이호에서 코마츠 병조장이 발함한 직후에 미군 잠수함에서 발사된 어뢰가 접근하는 것을 보자 해면으로 뛰어들었다던지 하는 식으로(어뢰를 막지 못해서 결국 다이호는 침몰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동료를 지킨다, 전과를 올리겠다는 등의 예는 있었으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을 수 밖에 없는"방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과거, 러일전쟁 시기에 일본군은 수차례 결사대를 편성한 적이 있었으나 이것은 생환을 기하지 않고 죽으러 간다기 보다는, 결사의 각오로 지극히 곤란하고 위험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임시로 편성된 부대였다. 여순항 폐쇄 작전에서 활약한 것으로 후일 유명해진 히로세 다케오 지휘의 폐쇄 부대의 경우에도 탈출할 방안을 미리 준비하고 가능한한 생환을 목표로 작전을 시도해서 피해가 발생하자 포기했으며 후일의 카미카제와는 다른 형태였다.

그런데 태평양 전쟁 기간 중의 일본에서는 「살아 포로가 되는 치욕을 받지 않을 것」("전진훈" - 복무신조 같은 것)이라고 하여 포로에 대한 특이한 사상이 군인들에게 훈육되었으며 귀환할 수 없는 경우는 자폭하거나 적에게 돌입하라고 가르치는, 타국의 군인에게는 별로 볼 수 없는 방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정규군이 조직적으로, 계획적인 형태로 특공을 행한 예는 근대국가의 군대에서는 일본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일본의 패퇴

1943~44 기간 동안 압도적인 공업력과 풍부한 자원의 지원을 받으며 미군은 일본 본토를 향하여 착실하게 전진했다. 일본의 항공기는 성능과 수적인 면에서 압도적인 미군의 F6F 헬캣과 F4U 콜세어 함재기에게 압도당했으며 솔로몬과 뉴기니에서 패전을 당한 끝에, 필리핀 해전에서 일본군은 무려 400기 이상의 함재기와 조종사를 손실하여 이른바,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불리는 완패를 당하고 더 이상 미군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1944년 6월의 마리아나 해전에서 일본해군의 항공모함기동부대가 괴멸당한 이후, 44.07.15. 일본의 중요한 기지인 사이판이 연합군에게 합락되자 미 공군은 B-29 장거리 폭격기를 이용해서 일본 본토에 폭격을 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에, 일본군 최고사령부는 연합군이 다음으로 일본 본토와 남방 자원지대 사이의 중요한 길목인 필리핀을 점령할 것으로 예측했으며 이에 대응하여 7월 21일, 군령부가 "대해지 제 431호"를 통해 특공작전을 정식으로 채용했고 8월에 일본의 동명 뉴스사는 다케오 다카다라는 교관이 대만에서 자살공격 방법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방송이 나왔고, 카이텐, 사쿠라바다, 진요 등의 호칭이 붙게 되는 자폭용의 이른바, "특공병기"의 제작 계획이 44년 9월에 시작되었다.

즉, 1944년 10월의 항공특공 실시 이전에, 항공기, 인간폭탄기, 인간어뢰 등의 여러 특공대를 준비하는 것이 결정되어 있었다.

또, 최초의 카미카제 공격은 1944.09.13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네그로 섬에 주둔중이던 일본육군 제 31전투기 대의 파일럿들이 그 다음날 자살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다케시 코세이 대위가 실행자로 선택되었으며 2기의 전투기에 2개의 100kg 폭탄을 장비하고 항공모함에 돌진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기지를 이륙했으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그날 공격을 당한 연합군 항공기나 군함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44.10.14, USS Reno가 일본 항공기에 의한 충돌공격을 당했으나 이것이 의도적으로 준비된 형태의 자살 공격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카미카제의 제창자, 오오니시 지로.

제 11 항공함대의 제 26항공대 사령관이었던 아리마 마사후미 대령은 카미카제 전술의 발안자로 종종 거론되는 인물로, 레이테 만 근처에서 1944.10.15, 100여기의 요코스카 D4Y, 스이세이 급강하 폭격기를 이끌고 에섹스 급 항공모함 USS Franklin에 자폭공격을 가했다. 일본군 사령부는 아리마의 경우를 대대적으로 알리고 소장 계급을 추서했으며 최초의 카미카제 공격으로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벌였으나 이것이 처음부터 계획된 자폭공격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일본군의 홍보와 실제의 사건 사이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1944.10.17, 연합함대가 수루안 섬을 공격하면서 레이테 해전이 시작되었고, 마닐라에 위치한 일본해군 제1함대가 연합군을 맞이했다. 이 시기에 1함대는 34기의 제로기와 3기의 나카지마 B6N 뇌격기, 1기의 미쓰비시 G4M, 2기의 요코스카 P1Y 정찰기(육상공격기를 개조)가 있을 뿐으로 연합군에게 전력면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몰렸다.

이에 제 1함대 사령관 오오니시 지로 해군 중장은 마닐라 근교의 클라크 비행장(일본측 명칭 마발라캇 비행장)에서 10월 19일, 휘하 제 201항공대 장교들에게 더이상의 전투가 불가능해진 항공전력을 활용하기 위하여 레이테 해전에서 적 항모부대의 비행갑판을 일시적으로 사용불능시켜 항공전 능력을 일시적이나마 상실시켜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제 필리핀에서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제로기에 250kg 폭탄을 장비해서 미군 항모에 돌격하는 것만이 남았다." )

오오니시 본인도, 생환을 기대할 수 없는 전법을 "통솔의 외도"라고 인정했지만 쿠리타 함대의 레이테 돌입을 지원하기 위해 유효한 수단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명했다고 하며, 그는 본래 1942년 3월 이후 해군 항공본부 총무부장으로서 항공기 생산에 관여할 뿐, 부대지휘의 일선을 떠나 있었으나 44년 10월에 급거 필리핀 제1항공함대의 지휘를 명령받아 현장에 착임한 직후에 특공대의 편성을 명한 것이다.

최초의 카미카제 공격대는 4개 소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소부대에는 모투리 노리나가의 적인 단가(시조 비슷한 일본의 고전문학)에서 이름을 따와 각기 시키시마, 야마토, 아사히, 야마자쿠라라고 명명했다.[각주:1]

한편 카미카제 특공대처럼 병력을 격감시키고 장병의 사기에 충격을 주는 작전을 현지 사령관인 오오니시가 독단으로 채용하는 권한은 없으므로 군령부에서 이미 결정한 특공작전을 현장에서 실행한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또, 카미카제 특공대 의 부대 명칭도 군령부서 편성 전부터 결정해 두었으며 1944년 10월 13일 자의 "기밀 제 261917"에서 특공작전의 때마다 시키시마대, 야마토대 등의 이름도 아울러 발표할 것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군령부의 지시로 전과 발표와 동시에 대대적으로 공표할 방침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시에 있어서도, 미쓰비시 A6M 함상전투기(제로기)에 250kg의 폭탄을 고정 장비했으나 동체에 묶은 상태로 폭발시키기 위하여 신관장치를 개조해서 낙하중의 풍압으로 해제하게 되는 개조를 해야 했으므로 현장에서 병기를 마음대로 개조, 배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전례로 보아 군령부가 처음부터 자살공격 작전을 승낙했던 것으로 보인다.

레이테 만 ; 가미카제의 시작

목격자 증언에 의하면, 가미카제 공격을 당한 최초의 연합군 함정은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중순양함 HMAS Australia로 이 함정을 공격한 것은 오오니시의 특별공격대 소속과는 별개의 것으로 미쓰비시 Ki-51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일본육군항공대의 제6항공대 소속 기체인 것으로 추측되지만 누구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아무튼, 1944.10.21, 레이테 섬 근처에서 HMAS 오스트레일리아와 HMAS 슈럽셔의 포수들은 3기의 일본기를 향하여 사격을 가하고 있었는데 그 중 1기가 배에서 멀어지는 듯 보이다가 선회해서 그대로 오스트레일리아 호의 함교 구조물로 돌진, 충돌했다. 당시 기체는 200kg의 폭탄을 부착하고 있었으나 폭발하지 않아서 배에는 화재만 발생했을 뿐이었으나 이로 인하여 함장인 에밀 드셰너 대령(사망)과 존 콜린스 제독(부상)을 포함하여 30여명의 승무원들이 죽거나 다쳤다.

USS White Plains과 A6M 52

10.25, 오스트레일리아 호는 또 다시 공격을 받고 뉴 헤브리지로 수리를 위해 귀환해야 했으며 같은날 카미카제 특공대가 최초로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작전에서 세키 유키오 대위가 지휘하는 5대의 제로기가 일본의 에이스 니시자와 히로요시를 포함한 호위기의 엄호를 받으며 호위 항모로 돌진하였으며 그 중 1기가 USS Kitkun Bay(CVE-71)의 함교에 충돌하려 했으나 실속으로 선회하면서 바다에 빠졌고 다른 2대는 USS Fanshaw Bay(CVE-70)로 돌진했으나 대공포화로 공중분해되었다. 남은 2기는 USS White Plains(CVE-66)에 충돌하려고 했지만 심한 포연에 의하여 충돌하지 못하고 근처에 USS St. Lo(CVE-63)의 비행갑판과 충돌했다. 이것이 폭탄 저장소에 유폭되어 결국 USS St. lo는 카미카제로 침몰된 최초의 연합군 항공모함이 되었다.(이상 카사블랑카 급 호위항모.)

26일까지 55대의 카미카제 공격기가 잇달아 자폭공격을 시도하여 대형 호위항모 USS Sangamon(CVE-26), USS Suwannee(CVE-27), USS Santee(CVE-29) (이상 3척은 유조선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한 것)와 소형 호위항모 USS White Plains(CVE-66), USS Kalinin Bay(CVE-68), USS Kitkun Bay(CVE-68)(이상 3척 카사블랑카 급 호위항모)가 파손되었다. 이로써 총 7대의 항모 외에 40여척이 손상을 입었다.(5척 침몰, 23척 대파, 12척 파손)

카미카제의 본격화

얼마전에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는 치욕을 당한 일본으로써는 눈이 부실 정도의 대 전과(실제로는 항모 1척 침몰, 6척 파손이지만 전과 보고는 보고한 호위부대의 착오도 있어서 7척 침몰로 과장 되었음)로 카미카제는 일본군에서 대대적으로 실시되었으며 몇개월 사이에 2,000대 이상의 자폭공격이 실시되었다. 필리핀에서 출격한 최후의 카미카제 공격이 1945.01.06 실시된 이후에도 훨씬 장거리 비행이 요구되는 일본 본토의 비행장에서도 이어져 01.08에는 오오니시 소장이 편성한 두번째 자폭공격대가 미쓰비시 A6M 52형과 요코스카 D4Y를 중심으로 다카오 비행장에서 출격했다.

1945.01.29에는 육군도 참가하여 7대의 가와사키 Ki-48기로 구성된 시치시 미타 대가 발렘방에서 출격하여 영국의 태평양 함대를 공격했으며, 02.16에는 제601 항공대의 긴페이 테라오카 소장과 스기야마 리이시 대령도 7조의 특공대를 조직해서 미군 함대를 공격하게 했다.

03.11, USS Randolph(CV-15, Essex Class)가 캐롤라인 제도의 울리티 환초에서 무려 4,000km 밖에서 날라온 카미카제의 공격을 받아 파손되었고(단 2호 작전), 03.20 미국의 잠수함 USS Devilfish도 일본 근해에서 카미카제 공격을 당할 정도로 공격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오우카를 비롯한 자폭전용 병기가 투입되기도 하고, 공중에서도 카미카제 공격을 실시하는 등 전쟁 후기 일본은 카미카제 공격을 대대적이고 광범위하게 전군규모로 실시하게 된다.

연합군의 방어전술

Big blue blanket 개념도

연합군도 카미카제의 공격을 더 이상 일시적인 것으로 판단할 수 없게된 1945년 초, 이미 서치 위브로 유명해진 존 서치 사령관이 카미카제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Big blue blanket"전술을 개발해 내었다. 이 전술은?함대 외곽에 레이다를 탑재한 소형선박을 위치시켜서 접근하는 일본기의 고도와 위치 속도를 알려주면 본함대에의 항공대가 이들을 포위해서 요격하는 것으로?효과가 있었으나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미함대에 호위 항공대가 전방위 방어를 해 줘야 했고 미 해군은 이 시점에서 항공기조종사의 양성을 감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인원을 보충할 수는 없었다.

당시 할지 제독의 참모로 있던 서치 대령은 다시 CAP(combat air patrol)팀을 보다 대규모로 구성할 것을 제안했고 동시에 일본군의 비행장에 대한 집중공세를 퍼부을 것을 제안했고 이런 제안들이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어 카미카제의 효과는 후기로 갈수록 급격하게 감소했다. 일본군도 자살공격에 더 많은 항공기를 투입하고 밀도를 올렸으나 이미 숙련된 조종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진데다가 항공기의 질도 급락한데 반해서 연합군은 미국의 고속항모전단이 단독으로 1,000기의 항공기를 운용할 수 있는데다 자살공격의 방법에 익숙해지자 함선에 충돌하기 전에 요격하는 방법에 숙달되었고 해군에서도 접근하는 자폭기를 막기 위해 수면에 포격을 가해서 큰 물기둥을 일으켜서 자폭기를 격추시키는 전술을 개발했다.

최종단계

카미카제 전술은 1945년 4~6월의 오키나와 전투에서 절정에 도달했으며 1945.04.06, 기쿠스의 작전으로 수백대에 이르는 항공기가 자폭공격을 시도했다. 이 공격으로 30여척의 미군 함정이 침몰되거나 작전에서 이탈했으며 3척의 미군 상선을 포함한 몇척의 연합군 선박에도 피해를 주었다. 최종적으로 총 1,465대의 항공기가 소모되었고 연합군 선박들도 피해를 입었지만 항모나 전함, 순양함과 같은 주요 목표물은 한척도 침몰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공격은 외곽 초계 임무중인 구축함이나 기타 소형 선박에 집중되었다.

미군의 항모들은 이 시기 목재 비행갑판을 채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태평양 함대(British Pacific Fleet, 이하 BPF)의 철제갑판 보다 카미카제 공격에 방어력이 떨어졌다. 05.04 새롭게 태평양 전선에 배치된 BPF에 일본군이 높은 각도에서 HMS Formidable을 향해 대공포화를 뚫고 공격을 성공시켜 비행갑판에 3m길이에 0.6m 넓이, 0.6m 깊이로 찌그러트리는 데 성공했으며 이 충격으로 철재 빔이 기관실과 격납고에 떨어져서 화재가 발생하여 8명이 사망하고 47명이 부상을 당했고 1기의 콜세어 함재기와 10기의 어벤저 공격기가 파손되었지만 5시간 뒤에는 모두 수리되었다.

공식적인 지시에 따른 최후의 카미카제 공격 명령은 우가키 마토메 소장에 의하여 1945.08.15일에 제 701항공대가 요코스카 D4Y 스이세이 폭격기로 오키나와의 연합군 함대에게 가한 것으로 이 후에도 독단적인 자폭공격은 간간히 이루어졌다.

한편, 소련군에 대한 카미카제 공격도 이루어져서 일본 관동군의 비행기 6대가 만주의 46 탱크 여단과 6호위 기갑군에게 자폭공격을 감행하여 1대의 트럭이 완파되고 셔먼전차 1대가 손상됐다. 또 08.18 또는 그 다음날에 소련해군의 소형선박 KT-152가 쿠릴 열도 근해에서 카미카제 공격으로 침몰되었다는 설도 있다.

전과

불타오르는 HMS Victorious

특공기에 의해서 침몰된 연합군 함선중 최대의 목표물이라면 카사블랑카 급 호위항모 2척으로 St. Lo(CVE-63)는 필리핀 상륙작전에서, Bismarck Sea(CV-95)는 이오지마 상륙작전에서 격침되었다. 함재기의 공격이 일본 수비부대에게 최대의 위협이었기 때문에 항공모함군은 언제나 자살공격에서 최대 중요 목표물로 선정되었으며 호위항모들은 공략 목표 근처에서 CAP(전장 공중초계)망을 형성해서 공략부대를 이끌었기 때문에 특공기에게는 중요한 목표였다.
그러나, 연합군의 방공능력과 특공전술에 대한 대처능력이 향상되면서 호위항모의 격침도 어려워 졌다.

미 해군은 오키나와 전에서 구축한 12척을 포함하여 격침 26척 손상 164척이라는 상당한 손해를 보았으며 인적 손실도 1945년 4월 부터 6월 까지 사망 4,907명, 부상 4,824명에 달하고 있다. 특공의 주력함에 대한 전과는 2월 21일, 해군 제 2공격대가 이오지마의 정규항모 사라토가에 자폭공격을 감행하여 이를 대파시켜 종전시까지 작전 불능 상태로 만들었으며 벙커힐은 5월 11일에 특공기 2기의 공격을 받고 손실을 입어 진주만을 거쳐 브렘튼으로 귀환해야 했고, 엔터프라이즈도 5월 14일, 특공기에 의한 손실로 퓨젯 사운드의 해군 기지에 귀환해서 종전시까지 수리를 계속해야 했다.

USS Bunker hill

이렇게 피해를 입은 정규 항모는 적지는 않지만, 침몰된 함이 1척도 없는 것은 미해군 정규항모의 비행갑판의 장갑 방어나 함내 구조물 배치 등에 데미지 컨트롤의 노하우가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있었던 것이 크지만, 어찌되었건 특공기의 공격으로 데미지 컨트롤이 불가능하거나 예항(다른 배가 끌고 가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단념할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을 일시적이라도 내려질 정도의 손해를 입혔던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특공기에 의한 공격 시에는 돌입기가 특공대 1개 부대에 있어서 2~6기, 많아야 10기 정도 수준이라서 1일의 출격기를 다 합친다고 해도 미 해군 기준으로는 항공모함 1척 분의 공격대에도 못 미치는 소규모의 것이며 지속적으로 인원이 소모되고 있기 때문에 경험누적에 의한 새로운 전과 확대를 바랄 수는 없었으므로 공격력은 계속 하락되어 나중에는 주요 함정의 격침을 위한 공격을 실시할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1945년 4월 6일의 기쿠스의 1호 작전 시에는 그 다음날까지 육, 해군 합쳐서 300기 가까운 특공기가 투입되었지만 편대 편성 능력등의 부족으로 일시에 기습을 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산발적인 공격을 하다가 축차 소모되어서 돌입에 성공한 기체는 비교적 많았지만 격침한 것은 불과 소해정 1척 뿐이었다.

2차대전 종전까지 일본해군 항공대는 2,525명의 카미카제 조종사를 희생시켰고 육군항공대는 1,387명을 희생시켰다. 공식적인 일본 발표에 의하면 자폭공격으로 81척의 함선을 침몰시켰고 195척의 함선에 손상을 가했다고 하며 일본의 조사로는 태평양 전쟁 최종단계에서 연합군 함정의 손해 80%가 카미카제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반면, 미 공군의 보고에 의하면

"약 2,800대의 카미카제 공격기가 34척의 해군선박을 침몰시키고 368척의 소형선박에 손실을 입혔으며 4,900명의 해군병사를 사망시키고 4,800명을 부상시켰다. 레이더 탐지기술과 항공기 및 대공포화에 의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전체 공격기의 14%가 살아남아 카미카제 공격을 시도했고 공격단한 선박 중 8.5%가 침몰되었다"고 한다.

3. 카미카제의 사람들

카미카제 공격 지원자

세키 유키오 대위

군용기를 이용한 특공은 통상, 특공기와 엄호기의 부대로 편성되었으며 엄호기는 전장까지 특공기를 호위하고 전장에 도달한 다음은 특공기에 의한 돌입을 지켜본 후, 귀환해 전과의 보고를 실시하는 것으로 되었으며 특별 공격대의 참가자는 본인의 지원후에 사령부가 선별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이다.
지원에 거절하는 경우 상관으로 부터 지원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반 강제적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강제는 육군의 경우에 더 많았다고도 하지만, 해군의 이른바 "제1호" 특공을 감행한 것으로 유명해진 세키 유키오의 경우에도, 실제로는 지원이 아니고 상관의 지명에 의한 사실상의 강제였다.

자신이 가르친 23명의 제자들을 공격대로 선발한 아사이키 타마이 사령관은 세키 유키오 대위에게 특공대를 지휘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10초쯤 생각한 뒤, 자신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런 특공작전의 참가는 결코 명령에 의해서 강제해서는 안된다 라고 하는 상층부의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하룻밤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했으며 고민끝에 결국은 거절할 수 없었다는 것이 진상인 것으로 훗날 그의 지휘관이 쓴 기술에 의하여 밝혀졌고, 본인이 남긴 기록으로는 "훌륭한 파일롯에게 죽음을 강요해서는 일본의 미래는 더이상 없다. 나는 이 작전에 일본을, 또는 일왕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수행한다."라고 적었다.

또, 대원은 비록 지원한 경우라도 형제가 없거나 신혼인 경우에는 가능한 한 제외한다는 것도 지켜지는 경우는 매우 적었다. 또, 대전 말기에는 비행대 그 자체가 "특공대"로 편성을 바꾸게 되어 거기에서 지원자를 모집한다고도 했다.
덧붙여 특공대로서 전군에 포고된 항공대(특히, 큐슈 항공전 이후의 해군의 부대)의 전사자중에는, 편성?출격시에는 통상 공격을 실시하는 부대 였지만 공격 실시 후에 특공대(특공전사)로 취급되어 전군에 포고된 사례도 적지 않다.

특공대원

대부분의 특공대원은 하사관이나 학도 동원된 사관으로, 해군을 예로 들면 하사관, 병 예과련 출신이며, 부대 편성상 이들이 특공의 주축이 되었다. 그리고, 학도동원의 사관은 비행 예비학생 출신으로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사관은 온존시켜 조직의 보신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전체 특공작전에 있어서, 사관급(소위 후보생 이상)의 전사는 769명으로, 그 중에 비행 예비교 학생이 653명으로 전체의 약 85%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으며 말하자면, "모집, 소집영장의 종이조각으로 (자살공격의)예비는 국민에서 충분히 소집할 수 있다"라는 군상층부의 교만이 들어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군인의 특공 전사자 수는 육, 해군을 합쳐서 6천명을 넘는 것오 보고 있으며 특공에 의해 전사한 탑승원은 특진의 영예를 받는 것이 원칙이다.

특공대원의 훈련

"생과 사에 대한 모든 잡념을 지우면 이승에서의 삶에 대하여 완전히 초연해 질 수 있다. 이를 통해 집중력을 높이고 두려움없이 결단을 내려 전투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다." - 카미카제 승무원 훈련서에서.

카스가 다케오의 설명에 의하면 특공대 병사의 훈련이란 "대단히 격렬한 훈련과 폭력적인 처벌의 일상화"로, 해군의 츠치우라 비행장에서 훈련을 받은 이로카와 다이키치에 의하면 "따귀를 하도 맞아서 더 이상 감촉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한번은 너무 맞아서 앞을 볼수 없게 되어 넘어진 적이 있을 정도인데, 일어났더니 다시 몽둥이로 맞아서 기억이 나질 않았다."고 한다.

이런 가혹한 "훈련"은 병사에게 근성을 심어준다는 발상으로 정당화되었지만 이런 일상적인 구타와 폭력으로 조종사들의 애국심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훈련 조종사들은 사고하는 방법과 준비, 공격에 대한 절차들을 지도 받았으며 "고도의 정신적 훈련상태를 유지"하고 "건강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방법"등을 지도받았으며 이를 통해 조종사들은 정신적으로 죽기 위한 준비를 갖췄다.

특공대의 훈련교범에는 조종사가 만약 목표물을 발견할 수 없을때는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 가를 설명하고 있고, "조종사는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고 적고 있지만, 기지로 계속 귀환한 병사들에게는 유형 무형의 제제가 기다리고 있었고 9번 귀환한 경우에는 총살당했다.

교범은 매우 상세하게 어떻게 조종사가 공격을 하는지를 설명하며, 표적으로 "함교와 연돌 사이"를 노릴 것을 지시하고 있으며 특별히 연돌을 향하여 돌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조종사는 함교나 포탑을 표적으로 삼지 말 것을 지시하고 그 대신 비행갑판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시설을 찾도록 하고 있으며 수평 공격시에는 조종사는 "선박의 중간 부분, 수면 약간 위쪽"을 공격하거나 그럴 수 없을 경우에는 "격납고 입구 또는 함선 바닥쪽을 노리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목표에 명중될 확률이 낮아질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조종사가 눈을 감지 말라고 지시하고 있으며 돌입할 시에는 "실패없이 침몰시킬 수 있도록", "필살!"이라 외치라고 지시하고 있다.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는 어떻게든 살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왜 20대 초에 죽어야 하는지 이해라고 하기 위해서 읽고 또 읽었지요. 죽음을 향해서 시계가 째깍거리는 걸 듣다보면 수명이 단축되는 기분이었죠" - 이로카와 다이키치 ; 카미카제 다이어리, 학도병의 회상

특공대원의 문화적 배경과 심리

일본인들에게는 신토의 신앙관이 강하고 신토란, 일본신과 정령, 그 외에 기원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한 숭배와 관련되어 있다. 메이지 유신으로 신토가 일본의 국교로 지정된 이래 일왕에 대한 숭배가 일본국민에게 강요되었으며 1890년대 이래 일본의 "천황제"에대한 숭배가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채용되었고 학생들은 일상적인 선서문 낭독을 통해 "조국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것"과 "몸을 바쳐 황족을 보호할 것"을 맹세했다. 메이지 유신이래 일본 근대화를 통해 정립된 일왕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 통치구조에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가장 큰 명예로 취급되었다. 엑셀과 카제가 지적한 바로, "수많은 일본의 병사들에게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다는 것은 대단한 명예였다. 일왕은 1년에 2번씩 신사를 참배하는데, 일본 전체를 통틀어 야스쿠니 신사만이 인간신 일왕이 직접 참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가적인 문화적 배경을 통해 초기에는 지휘관들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카미카제에 지원자가 몰렸고, 국가 전체에서 카미카제를 찬양하는 열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미국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에 자신의 비행기를 충돌시켜서 일본함선을 구한 키유 이시카와의 경우, 죽은 후에 상사에서 중위로 일왕이 직접 특진시켰고 야스쿠니 신사에 안장되었으며 이를 통해서 죽음을 통해 명예를 얻는다는 것이 많은 일본 젊은이들에게 특공대를 지원할 용기와 죽을 열망을 주었다.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죽기 위해 최종 출격을 하기 전에는 기념행사가 열렸으며 일장기나 욱일승천기와 함께 남부 권총 또는 일본도, 일왕의 하사주 등이 지급되었다. 출격시에는 무운장구를 비는 세니바리(천번 바느질한 허리띄를 두르면 살아서 돌아온다는 속설에 의한)나 머리띄를 두르고 사무라이들이 할복전에 하던 전통적인 예식에 따라 죽기 전에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카미카제 출격에 나서는 젊은 조종사들은 922m의 카이몬 산, 일명 "사쓰마 후지"(후지산을 닮았지만 사쓰마 지역-오늘날의 가고시마에 있음)를 어깨 너머로 바라보며 조국에 작별을 고하고, 아마미 오시마 동쪽의 키카이지마 를 지날때, 조종사들은 출격할때 가져온 꽃을 뿌리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전설의 반영인 듯, 키카이지마 비행장의 언덕에는 5월마다 시차국(꽃의 이름, cornflower)가 핀다.

특공에 반대하는 이들

특공 명령을 거절하고 묵인받은 제343 해군 항공대의 경우도 있기는 하나 전쟁 말기에 이와 같은 사례는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숙련자에 의한 야간 통상 공격의 유효성을 주장하여 특공을 지시하는 상층부를 논파해 종전까지 오키나와에 야간습격을 계속한 부용 부대의 대장 비소베 소령도 부하에게 특공을 시키지 않았던 인간으로 후세의 평가는 높으나, 정작 본인은 "대안이 없다면 특공이 불가피하다"라고 하여 특공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일왕의 패전방송 이후에도 철저항전을 주장하여 반란 상태가 된 아츠키 항공대 제302 항공대의 사령관도 특공에는 반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 후에 일본의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 같은 경우는 특공을 비난하며,

"카미카제는 일본 고대부터의 기습작전에 따른 것인데 기습은 한번은 성공하더라도 10개월동안 몇번씩 시도하면 어떤 바보가 당하겠는가. 일왕이 그걸 깨닫고 멈추도록 지시했어야 한다."

"아직까지도 눈을 감으면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눈에 선한데, 수많은 제자들이 카미카제 특공대로 끌려갔다. 어째서 일본 사령부는 그런 어리석은 작전을 10개월이나 지속했는가. 모든 이들이 카미카제에 지원했다지만, 죽으라고 보낸 겐다 미노루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아있다. 모두 거짓말쟁이들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2006 요미우리 신문 편집장 와타나베 츠네오는 카미카제에 대한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태도를 비난하며,

"그들이 기쁨과 용기로 충만해서 "텐노헤이카이반자이"를 외치며 죽어갔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억지로 글려갔고 모두들 고개를 떨구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걸을 수도 없어서 군인들이 실어가서 조종석에 처넣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특공대’생환자

특공대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생환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시기를 놓쳤거나 기계 고장, 컨디션 불량, 기후 불량 등으로 출격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돌입 직전에 격추되어 포로가 되었다던지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이렇게 생환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한결같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전후의 부흥과 경제발전에 기여했고 전사자의 위령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일부의 경우에는 사회나 가치관의 변모를 뒤따르지 못하고 자포자기가 되어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거나 특공과 관계없는 사람이 자신은 원래 특공대원이었다고 속여서 실시하는 범죄도 있었다. 또, 세상의 시선도 패잔병으로 그들에게 싸늘했고 특공에서 돌아왔다고 업신여기는 풍조도 있었다.

특공대원으로 생환한 이들 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니시무라 아키라(탤런트), 내각 관방장관 겸 외무대신과 후생성 장관을 역임한 소노다 , 중의원 의원인 다나카 로쿠스케, 쿠로오 시게아키(야구선수), 항공자위대 교관 및 전일공(일본의 항공사 ANA) 기장으로 반전단체 대표인 시다 등이 있으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한 사람중에는 "천하제일회"의 우치무라 켄이치, 특공대원으로 자신을 포장한 범죄자로는 "3억엔 보험금 살인사건"의 아라키 호미, 츠루타 코지 등이 있다.

4. 카미카제 전법과 기술, 무기

전법

목표 함정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군의 곧 호위 전투기 대의 방공망을 돌파해야 하고, 그 뒤에는 목표함과 호위함의 대공포화 탄막을 돌파해야만 했다.
방공망을 돌파하는 것은 최신예 기체에 훈련을 쌓은 조종사가 탑승하고 있는 엄호용 전투기 대도 쉽지 않은 것이며 폭격을 성공시키는 데에도 상당한 기량이 필요했다. 게다가 호위 전투기 부대를 돌파하더라도 VT신관과 레이더 관제에 의한 요격을 돌파해야 하므로 전쟁 후반에는 시도 자체가 상당히 어려웠으며, 결국 일본군의 공격대상은 정규 항공모함이나 전함보다는 주력함의 외곽에 있는 초계용의 구축함등을 노리는데 그쳤고, 실제로 오키나와 전에서 특공기에 의해 미군이 받은 피해는 수송선이나 구축함등에 한정되어 있다.

전투기에 의한 특공

초기에는 미군의 의표를 찌르는 일로 나름대로의 전과를 거둘 수 있었으나 곧 미군도 특공에 대한 대비법을 익히게 되어 특공을 위한 공격 각도를 잡기 전에 격추해버리거나 돌격하더라도 명중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일반적으로 급강하 폭격같은 높은 각도의 공격을 위한 다이브 브레이크가 장비되어 있지 않는 기체는 한계속도를 넘어서 기체가 돌입하는 도중에 떠올라 버리거나 조종불능이 되던지, 플러터 현상으로 공중분해 되기 때문에 이를 억제하기 위한 기량이나 자제심도 필요하게 되었다.(사카이 사부로도 이에 관해서 언급한바 있다.)
또, 무사히 돌입하더라도 기체강도와 운동에너지가 함정의 장갑강도를 웃돌지 못해서 장갑에 튕겨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특공 전용기

사쿠라바나

이에 더하여, 용법상 특공 전용기로 밖에 볼 수없는 대용기체까지 계획되어 기수에 대형의 철갑폭탄을 고정해 폭격기에서 투하하고 활공 후에 조종사까지 돌격하게 되어 있는 유인유도폭탄 사쿠라바나, 귀환 및 착륙용 바퀴가 없는 츠루기 등이 만들어졌다.

단, 츠루기의 경우 폭탄 투하후의 귀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츠루기를 심사한 시험비행을 하는 파일럿은 중량과대, 이착륙 성능열악에 대한 개량 요구를 계속 해서 내었으며 이 기체를 설계한 육군 미타카 연구소에서도 "지금의 상황에 맞게 전과를 낼 수 있는 비행기"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세세한 기교는 모두 생략하고 해안에 모여 있는 상륙용 소형정의 한복판에 대형폭탄을 던질 수 있는, 조준도 명중할 필요도 없이 적에게 혼란을 강요한 다음 동체착륙을 시도하는 것으로 엔진은 회수하고 재사용한다"는 취지로 설계한 것이다.

이런 컨셉의 기체는 이-400 잠수함에서 발진하는 세이란도 채용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런 병기들은 실용화가 늦거나 본토 결전을 위해서 남겨두었기 때문에 사쿠라바나를 제외하고는 실전 투입되기 전에 종전을 맞이했다.

사쿠라바나에 탑재된 폭약은 제로전투기 4기분에 상당하는 것으로 속도도 모기에서 발사되면 최대 850km/h 까지 낼 수 있다고 기대되었으나 항속거리는 불과 37km뿐으로 모기로 그 정도 거리까지 접근해야 했으며 육상공격기를 모기로 한 사쿠라바나 특공대는 10번에 걸쳐서 특공작전을 감행했으나 속도가 느린 관계로 레이더에 포착되어 미군의 함재기에 요격되어 그 대부분이 격추되었다.
결국, 사쿠라바나 탑승원 55명과 모기 탑승원 369명의 전사자를 낸데 반하여 전과는 불과 구축함 1척 격침과 수척에 손상을 줄 뿐으로 미군은 사쿠라바나를 "바보폭탄(bakabomb)"이라는 코드네임을 붙인 바 있다.

연습기에 의한 특공

말기에는 본토 결전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쓸 수 있는 기체를 온존하기 위하여 남아있는 복엽 연습기(이른바 빨간잠자리)를 특공작전에 투입하였으며 석유 부족 상황에서 가솔린이 아닌 알콜 연료로도 가동시킬 수 있다는 점에도 이 기체를 쓰기 좋았던 것 같다.
덧붙여서 이 연습기에 의한 특공으로 구축함 1척을 격침하고 있는데 이런 구식 복엽기의 경우에는 VT신관이 작동하지 않거나 기관포탄이 명중해도 관통할 뿐이고, 워낙 속도가 느려서 돌입하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기 때문에 의외로 전과를 내기는 쉬웠지만 반면 워낙 저속기인데 더해서 중량이 있는 폭탄을 억지로 탑재했기 때문에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특공을 시도할때는 편도분량의 연료만을 넣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레이더를 피하기 위한 저공비행과 폭탄탑재 때문에 연료를 만재한 상태라도 부족한 경우가 있었을 정도로 가능한 한 많은 연료를 실어야 했다. 미쓰비시 A6M, 통칭 제로전투기의 설계주임이었던 호리코시 기사는 전후에 자신의 저서에서 "영전을 폭격용(52형 이후)으로 운용할때는 동체 하부에 폭탄을 장비하고 양쪽 날개 아래에 증가연료탱크를 부착했지만 연료탱크 투하 장치의 불편 때문에 특공작전을 중지하고 귀환하거나 미귀하는 예가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미군에서도 연료가 남아있으면 충돌시에 화재를 더욱 크게 번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 평가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현장에서 정비원들이 편도 연료만 주라는 명령에 반발해서 가능한한 연료를 충분히 넣었다는 말도 들리고 있으나, 실제로는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 주변 해역까지의 거리는 약 650km에 달하며 CAP(전장 공중초계)를 피하기 위해서 우회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선행해서 정찰하거나 목표의 위치 통보를 실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기체도 자주 요격, 격추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목표물을 탐색해서 공격을 실시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연료는 일단 "적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게 되었다. 게다가 승조원의 기량 저하가 극심해서 항법을 잘못하면 일순간에 대량의 연료를 소비해버리게 된다던지 하는 점이라던지 여러가지 면에서 과연 실제로도 연료는 편도분만 제공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특공대원들이 적어도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죽지는 않을 수 있도록 출격기에는 가능한한 정비를 우선시 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당시 일본의 공업생산력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항공기의 품질관리는 매우 부족했고 대체 부품 부족으로 인한 정비 문제 등으로 비행중에 이상이 생겨서 특공기가 작전을 중지하고 귀환하는 것은 드문일은 아니었다고도 한다.

5. 유사한 개념

특공과 유사한 공격

지금까지 언급한 항공기를 사용한 수상 함정에 대한 공격 외에도 적에 대하여 생환을 기하는 일 없이 공격을 실시하는 전법을 통틀어서 "특공"이라고 부르는데, 항공기 뿐 아니라 소형 함선(진양), 유인 조종 어뢰(카이텐), 유인 유도 폭탄(사쿠라바나), 소형 잠항정 등이 개발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진주만 공격때 사용되어 유명해진 특수 잠항정 "갑표적"의 개조함인 교룡도 건조되었다. 또, 실전에는 투입되지 않았지만 본토결전에 대비하여 잠수한 다음 막대기의 끝부분에 붙인 폭약으로 상륙하려는 소형선박을 공격하기 위한 잠수도구(후쿠류)도 있었다.

카이텐. 유인 어뢰

이 외에도 점령된 비행장에 강행 착륙한 다음 탑승한 병사들이 활주로의 적기를 공격해 파괴하려는 "이열 낙하산대"라던지, 필리핀 전투 말기에 행해진 대만 원주민들로 편성한 "훈낙하산대"를 사용한 "의호작전", 타카치호 강하 부대를 사용한 "테호작전" 등, 낙하산 특공도 있었다.

수상함에 의한 특공

제 2함대의 야마토 이하 수척의 함정에 의한 오키나와 수상특공에서, 출격부대는 편도 연료만을 탑재한채로 출격했으며 구체적으로 군령부에서 2,000톤의 중유를 할당했고 연합함대 사령부도 이를 승낙하였다.
군령부 제1부장인 토미오카 소장은 연함함대 참모부장 다카다 소장에게 이것을 엄수하도록 명하고 있으며 45년 4월에 일본 해군의 중요재고는 5만톤에 못미치는 실정으로, 이미 남방 항로가 두절되어 각종 자원과 식료품을 일본에 공급하는 최후의 목숨줄인 조선, 만주등과의 항로를 호위하려고 한다면 한달에 최저 7,000톤의 중유가 필요한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연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2,000톤이라도 그 분량만으로 편도라는 것이 아니라 전투 행동에 실시하면서도 어떻게든 운이 좋다면 1회 왕복은 가능한 분량으로 연합함대 측에서는 보급부서와 연료창을 갈궈서 "죽으러 가는데 어떻게든 먹여서 보내라"고 닥달을 하여 나중에 책임추궁을 당한다면 "명령 전달이 확실하지 않고 과적 분량은 후일 회수할 예정이었지만 완수할 수 없었다"는 식으로 입을 맞춰두면서 까지 연료를 보급했다.

아무튼, 이로써 특공에 동원된 부대는 가능한한 연료를 적재하여 야마토의 경우는 4천톤을 적재하여 약 63%, 야하기의 경우는 약 93%, 구축함 이하는 가득히 연료를 탑재하여 당초 예정보다는 5배 정도로 연료를 탑재했다. 이리하여 기준속력 16노트로 이동할 경우 4~5회를 왕복할 수 있으며 연료 소비가 5배에 달하는 전속 항해를 계속하더라도 왕복은 가능한 분량의 연료를 탑재했지만 이로써 일본의 항로 호위용 연료도, 조직적인 수상함 공격력도 파탄나 버렸다.

항공전

태평양 전쟁 말기에 B-29에 의한 일본 본토 폭격이 개시되면서 이를 요격하기 위해 일본은 사력을 다했으며 일본 본토 방공전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전투기로는 해군의 라이덴, 겟코, 시덴 카이, 육군의 쇼키, 토류, 히엔, 하야테, 5식 전투기 등이 있지만 터보차저를 비롯한 고공 기동 기술이 일본에는 실용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기로는 B-29가 비행하는 고고도에는 도달하는 것조차 어렵고 설령 그 고도에 오른다 하여도 충분한 기체 성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B-29의 높은 방탄성과 두터운 방어탄막, 고속 때문에 요격은 대단히 난황을 거듭했으며 기초 공업력 부족으로 인한 기술력 부족때문에 결국 종전까지 B-29에 완전히 대응할 수 있는 요격기는 완성되지 못했다. 이에, 차선책으로 육, 해군은 100식 정찰기나 사이운 같은 비교적 성능좋은 정찰기나 긴카, 스이세이와 같은 폭격기에 경사 기관총을 부착한 야간전투기로 요격을 하거나 4식 중폭격기 히류의 개조기체에 고사포를 쌓아 날리는 등의 갖은 방법을 동원해보았지만 대부분 ㅣ효과는 없었다.

본토 방공전에서 특공이라고 할 수 있는 공격은 가미카제 특공대 조직 2개월 전에 B-29의 기타 큐슈 폭격에서 통상 요격에 나온 육군 제 19비행 사단 비행4전대 소속으로 토큐에 탑승한 시게오 병조가 "돌격하여 전력투구하겠다!"라고 무선으로 결별선언을 한다음 B-29에 돌격해서 2기를 격추한 것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육군은 본토 방어에 필요한 능력이 충분한 요격기가 당시 일본에 없었기 때문에 육탄돌격을 해서라도 무장, 방탄장비, 통신 안테나까지 철거한 "무저항기"라고 칭한 기체를 만들어 이것으로 B-29에 자살돌격을 하겠다는 작전을 세웠으며 최초로 이런 부대가 조직된 것은 11월 7일에 수도 방공부대인 육군 제10비행 사단 예하 부대에 대하여 사단장 요시다 키하치로 소장의 명령으로 1 부대당 각 4기씩 자폭기의 편성 명령이 발령되었으며 이후, 대도시권의 방공 임무 부대를 중심으로 공대공 특공부대가 조직되었다.

이 들이 최초 출격한 것은 같은해 11월 24일, 사이판 섬에서 도쿄를 최초로 공습한 B-29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며 제 47전대 소속의 미타 요시오 하사가 토류로 자폭공격을 감행하여 B-29 1기를 격추하고 전사했으며 같은 53전대의 이리야마 하사는 충돌 직전에 탑승기체가 공중분해되었다.

한편 비행기 자폭공격에서는 탑승원이 낙하산 강하나 손상된 기체로 어떻게든 생환할 가능성이 적게나마 있었기 때문에 2번이나 자폭공격을 하고도 2번 다 살아남아서 마침내 오키나와에서 함선 특공으로 전사한 비행 제 244전대의 시노미야 도오루 중위나 같은 B-29에 2회 자폭공격을 감행하고 생환한 나카노 마츠미 하사와같은 진기한 예도 있었으며 대 함선특공처럼 거의 100% 사망을 각오해야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결국은 살아올 가능성이 별로 없는 특공이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엇다. 또, 이런 형태의 특공은 일본 본토에서 사람들이 목격하는 중에 행해진 것 때문인지 다음날이면 사진이 첨부되어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것이 적지 않았다.

해군의 경우에는 공대공 특공대를 조직으로 결성하지는 않았지만 특공이은 상당히 있었으며 육군의 자폭공격 부대의 최초 출격에서 선도한 것도 해군이었으며 사카모토 중위는 제로 전투기로 요격 전투중, 기타 큐슈 상공에서 B-29에 자폭공격을 해서 격추한뒤 전사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1기로 2기를 격추했다던지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방어력이 강한 B-29가 일본기 2대의 동체충돌공격을 받고도 생환한 것처럼 실제의 전과는 좋지 않았다. B-29의 일본 폭격에서 1회 공격시에 입은 최대의 손실율은 15.9%로 평균적으로는 1.38% 수준으로 33,000기 출격에서 전투에 의한 상실기체는 450기 정도다. 이 수치는 특공만이 아니라 주, 야간 전투기 고사포의 전과도 포함한 수치로 특공의 전과는 더욱 낮아지며 B-29에 의하여 일본에 투하된 폭탄은 14만 7천톤에 달하는 양이다.

결국 이러한 고육지책도 이오지마가 점령되어 B-29가 무스탕을 비롯한 우수한 호위기의 방어를 받게 되자 통하지 않게 되었으며 항공모함 함재기 부대가 본토공습에 참가하기 시작하여 일본군 항공기지를 습격하게 되자 무저항기나 야간 전투기 등은 절호의 표적이 되어 차례대로 격추, 지상격파 되었다. 결과적으로 특공이 성공하는 최종 비율은 20~30% 정도라는 것이 미국측의 계산이다.

독일 공군의 경우

연합군의 중폭격기에 직접충돌공격을 가한다는 유사한 개념의 공격은 독일에서도 시행되었으며 엘베 특공대라고 불렸다. Bf 109나 FW 190등을 사용해서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적기를 일직선으로 돌격하는 전법으로 1945년 4월 7일에 약 189기에 출격했으나 이때는 반드시 직접 동체 충돌공격을 하라는 것은 아니고, "적 중폭격기를 정면으로 사격해서 각자 1기는 격추하도록 하고, 필요하다면 충돌하라"라고 명령하였으며 조종사들은 무선으로 흘러가는 독일 국가를 들으면서 돌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합군의 호위전투기군에게 공격을 당하여 출격기의 대부분과 파일럿의 절반 가량을 잃은데 반해 전과는 겨우 8기의 폭격기를 격추하는 것에 머물러서 전과가 적었기 때문에 곧바로 중지되었다.

이 외에 '미스텔'(영어의 미슬토, 겨우살이에 해당)라고 불리는 기체가 있었으며 모기와 자기로 구성되어 자기는 융커스 Ju88기를 개조하여 폭약과 무선조종장치를 달아 기체의 상부에 연결된 자기 Bf 109와 세트로 비행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목표의 상공에서 분리하여 자기가 모기를 유도해서 직접충돌공격을 시키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때 충돌공격을 시행하는 기체는 무인조종상태로, 말하자면 현대의 미사일을 대형화 시킨 개념에 가깝다.

미스텔은 약간이지만 전과를 들어 이를 좀 더 개량해서 자기에 FW190을 사용하는 형태로 생산되었으나 속도가 늦은 미스텔은 통상의 폭격기 이상으로 적 전투기의 좋은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결국 적 목표물에 대한 공격은 중지되고 교량이나 도로를 폭파하는데 사용되었다.

육상전

중일전쟁 이후, 일본 육군에서는 97식 전차에 대전차 지뢰를 부착하여 적전차에 직접충돌공격을 하거나 폭탄을 사람이 안아들고 적전차에 육탄 돌격하는 전법을 다수 수앻했다. 이런 행동을 하게된 배경은, 당시 일본육군에는 정상적인 대전차 병기가 존재하지 않는(개발하지도 않았다) 것이 이유였으며 특히 대전 후기에는 무기가 부족해서 민간인을 징용한 "철혈근황대" 등에 이 전법을 강요해서 오키나와전에도 대량으로 시도했다.

만주의 관동군에서는 소련의 침공에 대비하여 특공반을 편성했고 국경 근처에 구덩이를 파서(일명 낙지단지) 그 안에 숨은 2인 1조의 명사가 야포의 15cm 유탄을 안아들고 신관을 소련군 전차에 부딪혀서 폭파하려는 전법이었으며 전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북한의 특공계획과 관련

북한 공군에서는 한국전쟁에서 사용하던 MiG-15를 아직까지도 다수 보유하고 있는데 제트기이기는 해도 현대전에 사용되기에는 전투능력이나 항속거리도 부족한 기체를 아직도 다수 유지하고 있는 이유로서 연습기, 표적기, 무인기 등으로 시험이나 훈련용도에 사용되고 있다는 이 외에도, 유사시 2차대전 시절의 일본이 했던 것과 같은 특공용으로 MiG-15를 사용하려는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 북한은 14만명의 자살공격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북한 공군의 총 병력을 크게 상회할 뿐만 아니라 MiG-15기 총 생산대수가 라이센스 포함해서 15,000기라는 점을 고려해도 불가능한 일이고 60년 전의 구형 기체라서 이미 부품의 조달도 곤란해서 기동이 가능할지 자체가 의문스럽다는 점에서 복좌식 연습기인 MiG-15UTI를 제외한 대부분은 부품을 유용하거나 전쟁시 적을 속이기 위한 위장용으로 사용하려는 것이라는 게 옳다.

6. 평가

전쟁에서 정신적인 측면보다 합리적인 물질과 물량을 중시하는 미국에서는 특공대의 공격법을 광기로 평가하고 있었으나 스프루언스 제독은 나름대로 합리적이라고 평가했다고도 한다. 이러한 자폭공격의 발상은 독이르이 프릿츠 X를 참고했다고 할 수 있지만 기술적으로 유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이 탑승해서 유도를 하게 된 것이다.

한편, 미국에서는 이러한 자폭공격의 보도가 미군 병사의 전의 상실을 불러 후방의 가족에게 불안을 준다고 해서 규제되었고 나중에 일괄적으로 보도되었으나 FDR의 죽음과 겹쳐서 발표되었기 때문에 미국내에서의 충격이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동양 문화를 잘 모르는 미국이나 영국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공격에 대한 공포 내지 노이로제가 생겨났다고 하며, 어느 미 해군 항모 승무원은 "우리는 카미카제를 두려워 했고 10사람 중 7명은 눈물로 그 상황을 맞이하고 3명은 증오심으로 적을 격추했다."라고 증언한다.

프랑스 기자인 베르나르 미로의 경우, 저서 "카미카제"에서 '산화한 젊은이들의 생명은 무익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순수성의 위대함에 대한 교휸을 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서양 문명에서는 미리 심사숙고한 계획적인 자살공격이라는 것은 그다지 생각해본적이 없는 것으로 우리의 생활 신조, 도덕,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며 서구인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라고도 말하고 있다.
결국 이런 이해불능성, 공포나 불안으로 인하여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게된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라고도 한다.

전후, 일본의 특별 공격부대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미친 작전" "전법이라고 할 수 없는 전법"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로, 무엇보다 장기간에 걸쳐서 육성한 귀중한 인명을 무익하게 소모시키는 데다가, 한정되고 귀중한 자원과 병기를 무리하게 소모시키는 데다가 작전을 지도층들이 앞의 전망등은 생각하지도 않고 무책임하게 명령을 내리고 책임조차 지지 않았다는 것이 평가의 근저에 있다.

게다가 후일로 가면 망상에 가까운 실현 불가능한 목적을 내걸어 승산도 없고 딱히 궁리를 하지도 않은채 임기응변만으로 수많은 인간의 목숨을 헛되이 희생시키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특공작전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이 강했으나 극우단체, 폭력단, 폭주족을 중심으로 야마토 정신의 진수, 일본인의 귀감이라는 등의 높은 평가를 내리기도 하여 특공대를 본뜬 단체 명칭을 좋아하거나 복장을 특공복으로 정하기도 했으나 일반적으로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강하다.

  1. 시키시마(일본의 시적인 표현)의 야마토(일본의 옛 명칭, 형이상학적인 일본) 정신이 뭐냐고 묻는다면, 아침햇살(아사히)같은 산 벛꽃(야마자쿠라바나). [본문으로]

'History > World War'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블 크로스 위원회  (0) 2008.03.24
대서양 전쟁과 U-boat  (0) 2008.03.24
1차대전 후반기  (0) 2008.03.24
1차대전 전반기  (0) 2008.03.24
1차 세계대전의 원인  (2) 2008.03.24
Germania, 게르마니아  (0) 2008.03.24
E-100  (0) 2008.03.24
Battle of Khalkhin gol(노몬한 사건)  (1) 2008.03.21
츠지 마사노부, 작전의 신  (0) 2008.03.21
히로히토, 평화의 상징 또는 특A급 전범  (4) 2008.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