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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타카미 타츠야, 북해의 미검사 후타카미 타츠야(二上達也, 1932년 1월 2일 ~ ) 1990년에 은퇴. 제 12대 일본장기연맹회장 역임. 기사 번호 57번. 홋카이도 하코다테 출신. 와타나베 도이치 명예 9단 문하. 홋카이도 도립 하코다테 고교(현 하코다테 중부 고교) 졸업 기력 전성기의 오오야마 야스하루를 상대로 고군분투한 기사로 가토 히후미 등 다른 톱클래스 기사들에게 호각이나 그 이상으로 상대했지만 대 오오야마 전적만은 45-116 정도로 안좋다. 1959년 제10기 십단전 에서 오오야마 야스하루를 상대로 첫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4-3으로 패배, 직후인 제9기 왕장전에서도 오오야마에게 도전했지만 역시 패했다. 이후 제10기 왕장전, 제12기 10단전, 제21기 명인전에서 4관왕에 오른 오오야마에게 모두 패했지만 1962년 제1.. 더보기
야마다 미찌요시, 반위에 지다. 야마다 미찌요시(山田道美, 1933년 12월 11일 ~ 1970년 6월 18일) 아이치현 나고야 출신. 카네코 긴고로 문하. 기력 1964년 처음 참가한 A급 순위전에서 우승, 제24기 명인전에서 오오야마 야스하루에게 도전했다. 오오야마 타도에 투지를 불태웠지만 1-4로 패배, 또 다시 오오야마에게 도전한 제15기 왕장전에서도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끝에 아쉽게 패했다. 3번째로 도전한 1967년 제10기 기성전에서 드디어 오오야마를 꺽고 첫번째 타이틀을 획득. 반년후인 제11기 기성전에서도 나카하라 마코토의 도전을 꺽고 방위에 성공했지만 다음 분기에 도전한 나카하라에게 기성위를 내주었다. 이것이 공교롭게도 한시대를 열어간 나카하라의 첫번째 타이틀이고 야마다에게는 생애 마지막 타이틀이 되었다. 1970년 현.. 더보기
1차 중동전쟁, 4. 국제정세와 전환점 외국군대의 개입 팔레스타인의 아랍 자원군 폭력은 군부대가 개입하면서 더욱 심화되는데 위임통치가 끝날때까지 질서를 유지하고 규율을 세워야 할 영국은 상황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고, 주둔군과 관리자들의 철수 준비에만 부심할 뿐이었다. 더욱이, 영국측 책임자들은 분쟁을 통해서 자신들 쪽이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다고 느끼는 중이었으므로 영국은 타국 군이 팔레스타인에 개입하는 것을 막을 여력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UN 특별조사 위원회의 팔레스타인 관련 보고에 따르면, 1월 20~21일 밤에 군복을 입은 700여명의 시리아 인이 무장한 채로 장갑차량의 통제를 받으며 "트렌스요르단을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진입했다. 1월 27일, "팔레스타인 외부에서 진입해온 300여명의 무장집단이 갈릴리의 안전지역에 박격포와.. 더보기
컴퓨터 장기와 인공지능 한동안 인터넷에서 대국을 하다가 웹 기보 프로그램을 연구하느라 K-Shogi와 오래간만에 게임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예전에 가지고 있던 약점이 사라져버렸더군요. 컴퓨터가 패턴을 학습했을리도 없는데 말이죠. 사실 K-shogi에는 패턴 난수화가 짜여있어서 같은 패턴을 반복하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패턴을 스스로 학습할 수 없다는 약점을 커버하기 위한 것인데, 아무튼 한동안 재미있게 두다보니 예전에 우리나라 장기를 컴퓨터랑 두던 기억이 나더군요. 사실 컴퓨터도 장기 초보에게는 꽤 강합니다. 요즘엔 장기도사라는 프로그램 이 나와서 과거의 바다장기보다 훨씬 기력이 높은 프로그램도 등장하고 있죠. 보통 장기류의 게임은 컴퓨터가 생각 이상의 실력을 발휘합니다. 특히 비슷해보이는 바둑과 비교하면 더.. 더보기
1차 중동전쟁, 3. 팔레스타인 내전. 개괄 1947년 11월 30일, 국제연합이 영국의 위임통치를 종결짓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분리독립안을 결의하면서 부터 1948년 5월 15일 영국이 실제로 위임통치를 종료하기 까지의 혼란을 1947~1948, 팔레스타인 내전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아랍인 공동체가 충돌하던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의 초기 단계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 질서를 유지해야할 책임이 있던 영국은 철수준비를 하느라 분쟁의 중재에는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간여하고 있었다. 이 분쟁은 영국이 위임통치를 종료하고 국제연합 결의안에 따라 이스라엘이 분리독립을 선언하면서 주변 아랍국가들과 전쟁이 발발한 1948년 5월 15일부터 1차 중동전으로 더더욱 격화되게 된다. 개괄 UN의 분리독립안이 발표되자 마자 유대인 사회는 기쁨에.. 더보기
예루살렘의 역사 3 (오스만 후기 부터 현대까지) 오스만 통치기(1800 ~ 1917) 1895 예루살렘의 유대인 예루살렘의 다양한 복식들. 1870년대. 예루살렘의 근대는 19세기 중반 오스만 투르크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다. 당시 이 도시는 침체되어 있었고 인구는 8천명을 넘지 못했으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이 극단적으로 복잡하게 혼재되어 있는 독특한 도시로, 크게 유대교, 기독교, 무슬림, 아르메니아인의 4부류로 나뉘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성묘교회는 그리스 정교회, 카톨릭, 아르메니안 교회, 콥트 교도, 에티오피아 교회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고 각 그룹들 간의 갈등관계는 무슬림들의 "중립적" 안전보호의 토대위에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 각각의 공동체들은 주로 자신들의 성역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는데, 무.. 더보기
예루살렘의 역사 2 (칼리프 시대부터 오스만 통치 전기까지) 아랍 칼리프 시대 958~1052 기간 동안의 예루살렘 지도. 아랍 지리학자 알 무스카다시에 의함 마파 문디(세계의 지도).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있다. 쿠란(Qu'ran 코란)에는 "예루살렘"에 관한 언급이 없지만 하디스(hadith, 이슬람교 전승)에서는 무하마드가 Isra and Miraj(무하마드의 야간 여행에 관한 이슬람 전승) 을 통해 예루살렘까지 간 후, 그곳에서 승천했다고 전하고 있다. 덕분에 예루살렘은 아라비아의 칼리프 첫 정복기인 AD 638년 경에 정복되었다. 동시대의 아랍 역사가들에 따르면, 칼리프 우마르 이븐 알 카타브(Umar al-Khattab)는 혼자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그곳을 청소하고 성전에서 기도를 드린 뒤, 수비대와 성곽에 숨어있던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그.. 더보기
예루살렘의 역사 1 (고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다윗왕 시대의 유적 고대 (선사시대 ~ BC 1000) 인간이 예루살렘에 최초로 흔적을 남긴 것은 후기 동석기 시대(Chalcolitic period)에서 초기 청동기 시대(BC 3000)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의 execration 문서(BC 1900~BC 1800)나 아마르나 문서(기원전 14세기)로 볼때, 이 도시는 고대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아마르나 서신 중 하나에서 도시의 감독, 압디-헤바는 이집트에게 하비루(히브리 라는 말의 어원일 수 있다.)와의 싸움에 원조를 요청하고 있다. 창세기 14:18절 에서 이 도시는 제사장 멜기세댁이 다스리는 도시로, 평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소유자가 이러저리 바뀌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미드라쉬에 기록된 유.. 더보기
골다 메이어 골다 메이어 (Golda Meir, Hebrew: ????? ?????, Arabic: ????? ??????) 1898.05.03 ~ 1978.12.08. 이스라엘 4대 수상 노동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으로 근무한 후에 1969.03.17, 이스라엘 수상에 취임했다. 마가렛 대처에 비견될만한 "철의 여인" 으로 불리웠고, 다비드 벤 구리온은 "내각에서 유일한 사나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스라엘 최초의 여자 수상이며, 역사상 3번째 여자 수상이다. (가족 구성원 중에 정부 수반이 없었던 사람으로는 최초) 유년기 러시아 제국(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의 키에프에서 블룸 나디치와 모세 마보비치의 딸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의 이름은 골다 마보비치. 목수인 아버지 슬하에 두명의 자매가 있고, 다섯명의 남매들은 어.. 더보기
용왕전 龍王戰 요미우리 신문사 주최. 일본장기의 총 7개의 타이틀전(용왕, 명인, 기성, 왕위, 왕좌, 기왕, 왕장) 중에서 명인과 함께 최고권위의 기전이다. 결승전인 "용왕전 7번국"에서 먼저 4승을 거두는 기사는 "용왕"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용왕전의 전신인 10단전과 다시 그것의 전신이 되는 9단전에서 부터 계산하면 1950년부터 이어지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개요 요미우리 신문사가 1988년까지 주최한 10단전이 모체로 기전의 명칭은 일본장기말 중에서 "용왕"(비차가 승격한 말. 용이라고도 부른다)에서 유래했다. 용왕전으로 명칭을 변경한 이래 타이틀매치 중 가장 상금이 높은 대회로 승자 3,900만엔, 패자 1,500만엔이 걸려있으며 대국료도 용왕 1,450만엔, 도전자 700만엔으로 높다. 도전자 결정전의 .. 더보기
왕장전 王将戦 스포츠 니혼과 마이니치 신문사가 주최하는 일본장기의 기전. 7대 타이틀의 하나로, "왕장전 7번국"의 승자는 "왕장"이라고 불리운다. 1950년에 창설 구조 1차 예선, 2차 예선, 도전자 결정 리그를 통해 도전자를 결정한다. 도전자는 왕장과 7번 대국해서 먼저 4승을 거둔 기사가 새로운 왕장이 된다. 1차 예선 시드 배정자와 2차 예선에 출전하는 기사를 제외한 순위전 B급 1조 이상의 기사들이 토너먼트 형식으로 겨루어 각조의 토너먼트 승자는 2차 예선에 진출한다. 1차 예선과 2차 예선의 제한시간은 각 3시간. 2차 예선 1차 예선 통과자와 2차예선에 출장하는 기사(전기 도전자 결정 리그 통과자, 타이틀 보관 유지자, 순위전 A급 기사 및 영세 칭호자)를 합한 18명에 의하여 토너먼트 형식으로 치르게 .. 더보기
왕위전 王位戦 지방신문 3사 연합(홋카이도 신문, 주니치 신문, 서일본 신문)과 고베 신문사, 토쿠시마 신문사가 주최하는 일본장기의 기전. 왕위전 7번국의 승자는 왕위라고 불리며 타이틀 보관 유지자가 된다. 1960년에 "3사배 B급 선발 토너먼트"가 발전하여 4번째 타이틀이 되었다. 방식 예선, 도전자 결정 리그 도전자 결정전에 의하여 도전자를 결정한다. 왕위와 도전자는 왕위전 7번국을 겨루게 된다. 예선 시드 4명과 왕위 재위자를 제외한 전 프로기사와 여류기사 2명(여류 왕위 재위자와 여류 왕위 도전자)가 토너먼트 전을 거쳐야 한다. 이들은 토너먼트에서 8개 팀으로 나뉘며 각각을 통과한 8명이 도전자 결정 리그에 진출한다. 예선에서 도전자 결정전까지 제한시간은 모두 각 4시간. 통상적으로 타이틀 보유자나 A급 기사.. 더보기
왕좌전 王座戦 (将棋) 일본 경제 신문사가 주최하는 기전으로 왕좌전 5번국의 승자는 왕좌라고 불리는 타이틀 보관 유지자가 된다. 1953년에 우승기전으로 시작되었지만 1983년(31기)부터는 타이틀전으로 격상되었다. 구조 1차예선, 2차예선, 도전자 결정 토너먼트의 3단계를 거쳐 도전자를 결정한다. 왕좌와 도전자는 왕좌전 5번 대국을 실시한다. 전기 도전자 토너먼트의 4강 이상(전기 왕좌가 패한 경우를 포함) 및 타이틀 보유자는 시드권을 받아 예선이 면제된다. 따라서, 매년 시드권자의 수가 바뀐다. 왕좌전 5번국을 포함한 모든 단계에서 제한시간은 5시간(1일제)이다. 1차 예선 시드 배정자 이외의 순위전 C급 1조 이상의 기사(영세 칭호자는 제외)와 여류 기사 4명이 참가하는 토너먼트를 실시해 이중에서 6명이 2차 예선에 진출.. 더보기
기왕전 棋王戦 쿄도 통신사가 주최하는 기전. 매년 2월부터 3월에 걸쳐서 행해진다. 일본장기 7대 타이틀의 하나로 "기왕전 5번국"의 승자가 "기왕"이 된다. 기보는 쿄도 통신사가 계약하고 있는 각 신문, 잡지에 연재되며 "기왕전 5번국"도 각 신문사가 번갈아 개최하고 있다. 계약사의 상당수는 지방신문사로, 도쿄 안에서 발행하는 신문사는 없다. 도쿄 내에 있어 지방신문에 기왕전이 게재되어 있지 않은 지역에서는 일본저널이 간행하는 "주간 실화"라는 잡지에서 이 기전의 기보를 읽을 수 있다. 원래, 지방 신문(이른바 현지)에 게재하는 기전은 2차대전후가 되어서는 최강자 결정전과 고호 신예전이 있었으며 쿄도 통신사가 주최하고 있었는데, 이 둘을 통합하여 1974년도에 우승기전으로 실시되어 다음 1975년부터 도전 대국제가 .. 더보기
기성전 棋聖戦 (将棋) 산케이 신문사가 주최하는 일본장기 기전으로 ‘조지명식 왕위 결정전’을 계승한 기전이다. "기성전 5번국"의 승자는 "기성"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타이틀 보관 유지자가 된다. 기성이란, 원래 바둑이나 장기 등에서 발군의 재능을 나타내는 사람을 지칭하는 존칭으로, 일본장기의 경우에는 특히 에도 시대말에 나타난 불세출의 천재기사 아마노 소호를 의미할 때가 많다. 구조 1962년 창설 당시에는 해마다 2번 실시되었지만 1995년부터는 다른 타이틀전과 같은 연 1회 개최로 바뀌었다. 81기부터는 도전자 결정 시스템이 변경되어 1차예선, 2차예선, 도전자 결정 토너먼트의 3단계를 거쳐 도전자를 결정하고 기성과 도전자가 5번의 대국을 실시한다. 1차 예선 시드 배정자 이외에 순위전 C급 1조 이상의 기사들과 여류기사.. 더보기
[전법] 마쓰다식 이시다류 ‘마쓰다식 빠른 이시다류’라고도 부른다. 명명자는 아사히 신문의 기자 타무라. 요즘도 초심자용 장기서적에서는 봉은과 함께 상세하게 나오는 인기있는 급전법. 빠른 이시다류의 발전 강렬한 데뷔 마쓰다 고조 실력제 4대명인이 당시에는 도박적인 전법에 불과하던 빠른 이시다류를 개량한 것으로 등장하자마자 일본장기계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도박적인 전법을 1971년 제30기 명인전 7번국 제2국이라는 큰무대에서 사용하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몰이비차인데도 각길을 막지않고 각행교환을 시도하는 등, 종래의 상식을 벗어난 전법으로 이 전법을 이용해서 연승, 불패를 달리던 오오야마 야스하루 명인에게 승리한 것도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포진을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어서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대 유행해 한때는 선수, 후.. 더보기
쇼기 금지의 위기 2차대전때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를 학대한 사건은 꽤 알려져 있습니다. 파고 들어가다보면 일본측이 꼭 포로를 학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차이 때문에 오해가 일어난 것에 불과하다는 등 반론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일본군은 포로가 되는 것을 엄청난 수치로 여겨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사건이 많았죠. 이 정도로 포로가 되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포로로 잡힌 적을 잘대해주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아무튼,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이 진주하여 일본에는 미군정(이하 GHQ)가 통치를 담당하게 됩니다. GHQ는 일본사회가 지극히 군국주의적인 체제이고, 이것을 "수정"해야 한다고 판단을 내리면서 교육을 비롯한 사회 각 분야를 검토하게 되었고 그 대상 중에 일본장기.. 더보기
명인전(일본장기) 名人戦 (将棋) 일본장기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기전으로, 마이니치 신문사와 아사히 신문사가 공동개최(2007년부터)하며 다이와 증권 그룹이 협찬(2005년부터)한다. 순위전과 연동해서 치루어지며 A급 순위전 우승자는 명인과 "명인전 7번국"을 실시해서 승자는 유서깊은 명인위의 타이틀 보관 유지자가 된다. 에도 시대 이래 명인위는 세습제였지만(혈연제는 아님) 일본장기 연맹은 1935년, 300년간 지속되어온 일세 명인제를 폐지한다고 발표한다. 1937년 13세 명인 세키네 긴지로가 세습제에 반대의견 성명서를 발표하며 명인위를 반납했고 이로써 오오하시 소케이 이래 계속된 일세 명인제는 폐지되고 단기 실력제 명인제가 시작되었다. 방식 A급 순위전 토너먼트의 우승자는 명인전 도전권을 얻고 명인과 명인위를 걸고 7번 대국을 .. 더보기
[전법] 빠른 이시다류 ( 제1도 ▲2六보까지) 삼간비차의 이상형인 이시다류를 현대에 되살려낸 것이 "빠른 이시다류"입니다. 곧바로 공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진형에 빈틈이 없고 삼간비차 특유의 "다루기"가 특색이 되는 전법이죠. 우선 초반부터 격전이 펼쳐지는 "빠른 이시다류" 정석을 보고 갑니다. 1도는 보통 초반 4수째에서 기습을 가하는 것으로 작전이 시작됩니다. (제2도 △3二비까지) 제1도에서의 진행 △3五보 ▲2五보 △3二비 (제2도까지) 각길을 막는 대신 후수가 △3五보로 전진하는 것이 이시다류의 특징입니다. ▲2五보로 후수가 응전해와도 △3二비. 몰이비차는 일반적으로 각행교환을 피하지만 이시다류에서는 각길을 막지 않습니다. 여기서 ▲2四보나 ▲6五각을 노리고 싶지만 성공할지? 변화 1번 ( 제3도 △3六보까.. 더보기
[전법] 이시다류 이시다류는 삼간비차 전법의 일종으로 급전 삼간비차라고도 부른다. 이시다류의 탄생 에도시대 중기의 맹인기사 이시다 켄교가 창안했다고 하며 이시다의 실전 기보도 남아있지만 모두 이시다의 패배로 끝나고 있다. 하이쿠 작가인 카카미 시코의 "장기의 부"에는 "그리하여 각행은 기물의 그림자에 숨어 천리 밖의 승리를 엿본다. 언제부터인가, 이시다가 말을 벌여놓으면 향차의 길에 걸린 금은이 물러서고 비차를 위해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후의 용기보다 그 아름다움을 무서워한다."라고 되어 있으며 메이지 시대의 문호, 코다 로항이 저술한 주석(장기 잡담) 에는 이시다의 배치는 이시다 켄교가 생각할 듯한 진법으로, 적이 아직 전의가 있을 때에 급히 돌격하여 아군 장수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적군을 분쇄하는 사람.. 더보기
[전법] 횡보잡기 8五비 횡보잡기의 여러가지 파생형 중에서 후수가 주도권을 잡게 되는 경우가 많은 형태가 횡보잡기 △8五비로, 차앞의 보를 교환한 뒤, 선수의 ▲8七보에 대하여 비차를 8五로 빼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금은 4개는 방어를 담당하고 비차, 각행, 좌우 계마가 공격을 수행하는 것이 특징이며 대부분의 경우 울타리는 나카하라 울타리가 이용된다. 五행에서 비차를 쫓아내야 선수의 전개가 원활해지므로 각행을 교환한 뒤에 ▲9六각으로 나가는 등, 몇개의 대항책이 강구되었지만 8五비 자체를 막아낼 방법은 별로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전법의 역사 프로간의 대국에서는 츄자 마코토가 1997년 8월 26일의 C급 2조 순위전(대 마츠모토 아유무 전)에서 채용한 것이 최초이다. 이 때문에 "츄자 비차"라고도 부르는데, 츄자 본인은 그.. 더보기
[전법] 횡보잡기 일본장기의 대표적인 전법 중 하나로 15수째에 선수가 후수의 3四보(각의 움직임을 살리기 위해 전진시킨 후수측에서 왼쪽 3번째 보)를 비차로 잡으면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변화를 말한다. 여러가지 전법 중에서도 큰말을 모두 교환하는 경우도 있어서 격렬한 급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마추어 간의 대국에서는 변화가 풍부한 재미있는 전법으로 인기가 있지만 일순간의 실수로 패배로 직결되기 때문에 프로 기사가 이 전법을 사용하려면 매우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 때문인지 현재는 대국의 개시부터 종료까지 연구가 끝난 형태도 있다. 전법의 역사 횡보잡기 전법은 에도시대의 기보에서도 확인될 정도로 오래되었다. 오오하시 유세츠가 저술했다는 "평수상현정석오의(平手相懸定跡奥義)"는 횡보잡기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서적으로 간주된.. 더보기
[전법] 게걸음 은 코다마 코이치 7단이 고안하여 2003년 장기 대상의 마쓰다 고조상을 수상한 전법으로 모리 노부오 6단이 은 2개가 올라가는 모습이 게 두마리가 움직이는 것 같다하여 게걸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게걸음 은의 이 기본형을 목표로 한다. 전법의 핵심은 은 2개를 四행에 올려놓으면서 비차는 중앙에 대기하고 각행은 구석으로 옮겨 계마를 움직여 나가는 형태에 있다. 비, 각, 은, 은, 계가 공격을 맡고 선수차례라면 ▲5九옥, ▲4九금, ▲6九금으로 거옥상태에서 방어한다. 이 형태로 만들기는 쉽지 않지만 형태나 움직임이 특징적이라서 기억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전법의 포인트 시작은 망루 울타리 제1도(제1도는▲7七은까지) 최초국면에서 ▲7六보 △8四보 ▲6八은 △3四보 ▲7七은(제1도)으로 진행하는 것이 중요... 더보기
스즈키 다이스케, 호쾌 진비차 스즈키 다이스케(鈴木大介, 1974년 7월 11일 ~ ) 기사 번호 213. 도쿄 마치다 출신. 오오우치 노부유키 문하. 전적 1994년 프로기사(4단)로 데뷔하고 그 해 용왕전에 처음 참가해서 5기 연속 승급을 거듭해 1999년에는 1조에서 용왕 도전권을 획득했다. 제12기 용왕전에서 당시 용왕이었던 후지이 타케시에게 도전(타이틀 첫도전)했는데, 당시 인터뷰에서 7번의 대국에서 모두 몰이비차로 맞서겠다고 선언해 화제를 모았다. 상대인 후지이도 몰이비차의 대가로 유명했기에 서로 몰이비차를 사용하는 대결이 기대되었지만 후지이는 매번 앉은비차로 대응해 결과적으로 스즈키 다이스케는 1승 4패로 패퇴했다. 하지만 같은해의 NHK배 결승에서 고다 마사타카를 꺽고 우승, 전 기사가 참가하는 대회에서 첫 우승을 거머.. 더보기
후카우라 코이치, 불운해도 괜찮아 후카우라 코이치(深浦康市, 1972년 2월 14일 ~ ) 기사 번호 201. 나가사키 사세보 출신. 하나무라 모토지 9단 문하. 기력 1984년에 장려회에 입회, 5급으로 승급하는데 1년이 걸렸지만 이후 순조롭게 승단해서 1991년 10월 1일, 19세의 나이로 프로에 데뷔했다.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1993년 전일본 프로 장기 토너먼트 결승에서 요네나가 쿠니오를 꺽고 우승했다. 1993년, 조지명 신예전에서도 우승해서 같은 해 조지명 장기 선수권 출장자격을 얻었으며 여기서도 우승(결승전 상대는 하부 요시하루)해서 텔레비젼 도쿄의 양 기전을 같은해에 재패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4단인 채로 연간 3회 우승이라는 발군의 성적을 거두어 그 해의 장기 대상 신인상과 감투상을 동시 수상해서 동료 기사들은 아직.. 더보기
모리시타 타쿠, 예의바른 무관의 제왕 모리시타 타쿠(森下 卓, 1966년 7월 10일 ~ ) 기사 번호 161. 후쿠오카 현 키타큐슈 출신. 고 하나무라 모토지 9단 문하. 기력 10살때 아버지에게 배워서 일본장기를 시작해 불과 2년만인 1978년 장려회에 입회했다. 1983년 17세 9개월에 프로데뷔, 이후 하부 세대라고 불리는 동료 기사들과 함께 차일드 브랜드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1990년, 신인왕전 결승 3번국에서 오노 야이치오를 2-0으로 꺽고 우승 이듬해에는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 결승 5번국에서, 키리야마 키요시를 3-1로 꺽고 우승했다. 2007년에는 JT장기 일본시리즈에서 와타나베 아키라 용왕, 사토 야스미츠 기성, 모리우치 토시유키 명인을 연파하고 우승, 23, 24살 무렵에는 강하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노력하고 .. 더보기
나카이 히로에, 여류기사의 자존심 나카이 히로에(中井広恵), 1969년 6월 24일 ~ ) 홋카이도 왓카나이 출신. 사세 휴우지 명예 9단 문하. 일본장기연맹소속시 여류기사번호는 17번. 통산 타이틀 획득수 역대 2위. 인물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여류일본장기계에서 시미즈 이치요와 함께 오랫동안 양강으로 군림했다. 1993년 여류명인전부터 2007년 쿠라시키 토오카전까지 모든 여자일본장기 타이틀 전에는 나카이나 시미즈 둘중 한명은 출장했다. 2002년 시미즈와 함께 여류 6단으로 승단해 2004년에는 시미즈와의 대국기록이 100회에 도달했다. 기록으로는 나카이의 40승 60패로, 여류기사 중에서는 최초의 기록. 여류기사 들 중에서 가장 남자 기사들에 근접한 장기라고 평가받는다. 1993년 12월, 용왕전에서 이케다 슈우이치 .. 더보기
쿠보 토시아키, 다루기의 아티스트 쿠보 토시아키(久保利明, 1975년 8월 27일 ~ ) 기사 번호 207. 효고 카코가와 출신. 아와지 히토시게 9단 문하. 전적 1986년, 초등학생 명인전에서 4강에 진출하여(준결승전에서 스즈키 다이스케를 만나 패배)했다. 같은해 장려회 입회하고 1993년 17세 4개월의 나이로 프로에 데뷔했다. 이후 약 10년간 꾸준히 승단해 2003년 A급 기사가 되었다. 원래는 칸사이 장려회 출신이었으나 프로 입문 후에 관동으로 옮겼다. 타이틀을 획득하면 관서로 돌아오겠다고 공언하고 있었지만 2006년 4월, 타이틀을 획득하지는 않은채로 복귀, ‘이제 관동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하부의 벽 2007년까지 4번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전부 하부 요시하루를 만났다. 또, 하부에게 걸림돌이 될만한 상대가 쿠.. 더보기
막룩, 타이 장기 막룩, 맥룩(หมากรุก)은 타이에서 널리 즐기는 장기의 일종이다 체스판 처럼 칸이 교대로 채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규칙 기본 룰 - 8x8으로 구분된 보드를 이용하고 말은 칸 안에 놓는다. - 경기자들은 교대로 반위에 있는 자신의 말을 1회씩 움직여나간다. - 말은 쌍방이 6종류 16개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움직임은 미리 정해져 있다. - 자신의 말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상대방의 말이 있으면 그곳으로 움직여서 상대방 말을 잡을 수 있고 잡은 말은 제거된다. - 상대방의 쿤(왕)을 몰아넣으면 승리가 된다. - 스테일메이트는 반칙. - 계속 같은 수만 반복하게 되면 무승부가 된다. 다만, 연속으로 장군을 부르게 되는 경우에는 마지막으로 말을 움직이는 쪽이 수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컴퓨터 게.. 더보기
하나무라 모토지, 진검사의 요도 하나무라 모토지(花村 元司, 1917년 11월 18일 ~ 1985년 5월 25일), 기사 번호 39. 시즈오카 현 하마마츠 출신. 키무라 요시오 14세 명인 문하. 인물 내기장기를 생업으로 하는 진검사 출신이라는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 상당한 실전파 기사로 내기장기 수입을 모아 도장을 경영하면서 고급 전통 일본옷을 맵시있게 입고 다녔다. 본인 말로는 ‘프로가 되지 않는 쪽이 더 돈벌이가 좋았다’고 말했을 정도. 도박에 재능이 뛰어나서 화투에도 고수였다고 한다. 마쓰다 고조와 반향떼기로 철야대국을 벌여 이길 정도의 실력이 높게 평가되어 후원자들의 천거로 이례적인 5단 시험을 치러 프로기사가 되었다. 장려회를 거치지 않고 프로가 된 최초의 예로 세가와 슈지가 2005년에 프로 편입시험을 보았을때 거론되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