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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note

프린터와 무한잉크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큐닉스제 IBM XT에 딸려왔던 도트프린터가 엡슨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루스리프로 되어 있는 두터운 매뉴얼과 박스 1개분량의 전산용지만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어린 나에게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던 프린터는 찌익찌익하면서 익숙한 은행용 ATM기계의 소음을 내며 휠에 걸린 전산용지에 무언가 무늬를 그려내었지만 사실 그것은 잉여물건에 불과했다. 도시 프린터란 것을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는데 기계가 있어서 무엇하랴. 워드프로세스라고는 ‘보석글’ 뿐이고 그나마도 오늘날처럼 프린터가 제대로 지원되는 것이 아니다보니 프린트스크린 키를 누르면 찌익찌익 하는 소음을 내면서 쓸데없이 화면을 찍어낼 뿐 사진을 컴퓨터 화면에 띄울만한 프로그램도 변변히 없던 시절이었다. 악전고투 끝에 잉크리본을 갈아 끼웠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않던 그 도도한 기계는 아직도 다 사용하지 못한 전산문서 한박스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생각해보면 나와 프린터의 악연은 그때 이미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대학에 들어가게 되어 모두가 레포트를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하는 세상이 되자 집에는 두번째 프린터가 생겼다. 이번에는 차원이 달라진 칼러! 잉크 프린터였다. 그 이름도 거룩하신 HP deskjet 610c. 더이상 잔돈을 준비하며 학교 컴퓨터 실에서 프린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기쁜것도 잠시, 불과 얼마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소진되는 잉크는 가난한 대학생의 가슴을 잔인하게도 후벼파내고 있었다. 레포트 작성에나 사용하는 검은 잉크라면 모를까 위대하신 컬러 잉크님은 감히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내게,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알려준 것은 다름아닌 군대였다.

다름아닌 잉크 충전. 가난한 대학생이 더 가난한 군인이 되었지만 이등병 시절에 혼나가며, 프린터 청소하며 어깨너머로 배운 충전 기술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다. 제대하고 나서도 애지중지 잉크를 충전하며 사용하던 어느날, 잉크가 굳어버린 헤드는 아무리 사용해도 더 이상 잉크를 뿜어내질 못했다. 닦아보고 따듯한 물로 좌욕도 시켜보고 했건만 결국 근 7년을 사용해온 녀석을 처리하고 새로 구입한 것이 Epson CX4900. 빠르다! 분당 15장을 뿜어내신다! 게다가 스캔이라는 놀라운 기능이 붙어있다. 이젠 스캐너 쓰러 컴실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구나! 헌데 이럴수가. 그새 기술이 발전하고 돈독이 오른 프린터 회사들이 잉크 충전을 막아버렸다. 오지게도 비싸지만 잉크값이 없을 정도는 아닐 정도로 내 주머니 사정도 나아졌건만, 그동안 충전해가면서 희희낙낙 찍어대던 내게 정품 잉크만 쓰라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잉크 충전을 넘는 또 다른 세상을 보여준 것은 바로, 교회였다.

그렇다고 신이 내려와서 잉크를 던져주었다는 건 아니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프린터를 보니 옆에 이상한 잉크통이 있는게 아닌가. 그것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모은 끝에 그 이름도 거룩하신 무한잉크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운 나는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활로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문제는 이놈의 것을 설치하려면 아무래도 주사기랑 비닐장갑 이상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근 1개월을 고민한 끝에 근처의 무한잉크 전문점까지 낑낑대며 프린터를 들고가 개조대 위에 내 프린터를 맡기기에 이르렀다. 어둑어둑한 가을날 저녁에 다시 프린터를 들고 나오며 나는 새로 태어난 프린터를 보며 희열을 느꼈다. ‘많이 뽑을수록 좋습니다.’라는 아저씨의 말이 귀에서 맴돌고 그때부터 희희낙낙 프린터 혹사를 시작했다. 때는 바야흐로 종이 소비가 정점에 달한 오늘날, 사방에 넘쳐나는 이면지로 뽑고 또 뽑고, 마르고 닳도록 써먹으며 4번째 잉크통을 비워갈 무렵 그 사건은 발생했다.

어째서인지 잉크 유입이 시원치 않다 싶어서 잠시 프린터보다 한참 높은 곳에 외부 잉크통을 올려놓은 채로 하루밤을 자고나니 그 오랜 노예질에도 버텨오던 잉크 헤드는 삽시간에 맛이 갔다. 백약이 무효한 상태에서 무엇이 문제였는지도 잘 모르는 채 헤드청소로 폐 잉크통을 버리기를 수회, 결국 난 프린터를 포기해야 했다. 이미 쌓여있는 잉크 재고가 각2통, 헤드청소액도 1ml로 큼직하게 사놓은 것이 모두 무용지물이 된 상황이 된 것이 중요한 원서쓰기 하루전. 결국 급하게 프린터를 사러가서 작년에 구입한 것이 지금 사용하는 HP B110. 매번 프린터를 바꿀때마다 기술의 진보를 절감하던 내게 이번에 새로 선보인 것은 네트워크 기능. 가뜩이나 어지러운 컴퓨터 뒷면의 선을 하나라도 정리할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어서 구입했는데 이 녀석은 A4지 반권을 사용하기도 전에 잉크경고를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 살때에는 아직 무한잉크가 나오지도 않았음에도 언젠가는 나오려니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 결국 정품 잉크 카트리지가 사망하실 때에야 이루어졌다.

그동안 경험도 몇번 쌓였겠다, 자신만만하게 인터넷으로 무한잉크킷을 주문했는데 이럴수가. 이 망할놈의 것은 칩을 복제하지 못했는지 정품카트리지 본체에서 떼어내라는 게 아닌가. 세상에 쉬운일은 없다지만 커터칼로 카트리지를 긁으면서 프린터와의 악연을 투덜거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어찌어찌 개조는 성공했지만 이 놈의 것을 개조하는데 들어간 수고를 생각해보면 전에 사용하다 남은 잉크 통을 집어넣어서 호환이 가능할지 시험해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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