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view/Drama

미드속의 동양과 우리의 문화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드에 동양계 캐릭터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계만 하더라도 그레이 아나토미의 산드라 오, 배틀스타 갤럭티카의 그레이스 박, 로스트의 김윤진. 대니얼 대 킴 등등. 일본계로는, 그외에도 많이 있겠지만, 히어로즈의 주연급인 히로 나카무라 역의 마시  오카가 있다. 이런 동양계들이 미드에서 일정한 역할을 차지하고 점점 목소리를 키워가는 것에서 같은 동양계로서 세계적인 영향력이 확대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겠다.

동양적인, 이국적인

우리에게는 익숙한 것들도 서양인들의 관점에서는 독특하고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소재가 될 수 있다. 로스트의 달마 이니셔티브 로고는 우리에게 친숙한 팔괘와 달마라는 동양적 문화를 바탕에 두고 있지만 서양인들에게는 충분히 이질적이고 흥미로운 요소로 느껴지기에 드라마에서 소재로 사용된다.

다른 것을 보면 사람들은 흥미를 느낀다. 막장설정으로 욕먹는 우리드라마에서 걸핏하면 백혈병, 기억상실증, 알고보니 남매지간 같은 코드들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흥미를 끌 수 있겠지만 흥미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고 잠시 잠깐의 유행일 수도 있다. 충분한 깊이를 보여줄 수 없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금방 식어버리게 되고 다음에 접할때에는 얄팍한 선입견을 통해서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외국인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히어로즈에서 히로 나카무라는 그냥 희한한 동양인 캐릭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일본도, 무사도, 싹싹하고 상냥한 이미지. 때로는 엉터리 검도에 웃음이 나오고 종잡을 수 없는 일본 무사도 이야기가 황당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본이란 이런것인가 라는 흥미를 심어주고 일본적인 것, 또 활용가능하고 접목가능한 일본적인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지금의 일본문화는 충분히 아이콘화되어 앞으로도 재생산될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

로스트의 한국인, 한국문화

무엇을 하더라도 남의 것으로 최고가 되기는 쉽지 않다. 자기 자신의 철학, 문화, 종교를 찾지 못한다면 정체성은 모호해지고 수많은 개성들 속에 흐리멍텅한 배경에 불과하다. 한국의 문화적 아이콘은 무엇이고 어떻게 전달되는가.

미드가 우리나라를 그저 한때 지나가는 잠도 안자고 일만하는 짠돌이 단역이 아니라 정면으로 처다본 것은 내가 알기로는 로스트가 처음이다. 이 작품속의 우리나라는 어떻게 비춰지는가. 가장 먼저 비춰지는 것은 가부장적 가치관이 아닐까?

시즌 1에서 진이 보여주는 모습은 충격적일 정도로 권위주의적이다. 물론 시즌이 가면서 진의 깊은 속내들이 조명되고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사람들 속의 섬에 불과했던 진과 선이 주류에 접근해 가면서 결국에는 오셔닉6에 선이 포함되고 진은 부활하는 기적을 보이며 점점 비중을 키워가는 것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며 한국에 대해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보다 본질적인 문제로 미드가 한국을 그려나가고자 할때 우리는 한국의 무엇을 보여줄까.

처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한이다.

우리나라는 가족사의 우여곡절이 많은 나라다. 심지어는 미드까지도 출생의 비밀을 가져와야 한다. 모두 알다시피 한국의 근대사는 고난의 역사이고 극복과 변화의 역사이다. 다이나믹 코리아의 역동성은 필연적으로 기존 사회의 해체를 가져왔고 그러다보니 뿌리를 잃어버리고 그걸 다시 찾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근대사 속에서 생겨난 우리의 코드이다. 진은 자신의 부모에 대해 사실을 말할 수 없는 한이 있으며 가부장적 권위에 눌려지내는 선에게도 한이 있다. 깨어진 가정에서 자라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어도 과거에 붙들려 다시금 한을 되물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한. 자식을 만날 수 없는 한. 사랑하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함께 죽지 못한 한, 죽은 남편을 만나고 싶은 한. 한을 빼놓고 우리를 말할 수 없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정이다.

외국인들을 만나서 이야기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람은 정이 많다고 한다. 특히 일본사람에 비교해보면 그런게 더욱 두드러진다. (물론 정이 많은 일본인들도 많다.) 그것도 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쑥스럽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숨기지 못하는 정이 우리의 정이다. 가족을 중심으로 효를 숭상하는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 정만큼 소중한 것은 없었다. 비록 현대사회에 들어와 많은 것이 변했어도 정에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무엇이 있다. 진의 무뚝뚝함 뒤에는 아내의 부정에도 끊을 수 없는 정이 있다. 아내를 유혹한 간통상대를 죽이지 못하는 정, 퉁명스러운 말투속에 숨어있는 따듯한 마음. 욕쟁이 할매들의 사나운 악다구니 속에서도 숨길 수가 없는, 따끈한 김치찌개 같은 정. 우리가 각박한 삶 속에서 잃어가고 있는 정. 우리는 혈맥속에 끊지 못하고 이어지는 정이 있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독이다.

독은 우리의 내면에서 한과 정의 표리를 이룬다. 내편과 남의 편을 갈라버리는 독기. 그 독기가 있었기에 세계의 최빈국에서 반백년만에 세계 20위권에 드는 강국이 되었고, 수많은 내, 외환을 견뎌내었다. 나의 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마음과 가족에 대한 정이 쌓이고 쌓여 독기가 되어 버린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을 위해 남을 모질게 때려눕히고, 남의 가정을 짓밟을 수 있고, 친구였던 사람에게 총을 겨눌 수 있는 독기. 체면 때문에 자살하는 독기, 머리에 들이댄 총 앞을 똑바로 째려보며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말하는 독기, 가슴속에 드러내지 않은 은장도처럼 섬칫한 독기는 진의 쪽째진 두눈에서도, 김윤진의 앙다문 입술에도 남아있다.

투박하고 거친 모습 뒤에 숨어있는 끊지 못하는 정과 슬픔과 분노를 말로 다 표현못하고 고이고이 눌러담는 한, 우리가 아닌 남을 향한 독기 그 모든 것들은 서양인에게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 그저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지도 않아지만)을 하는 사람들, 흑인을 싫어하는 사람들로 비칠까 아니면 미워할 수 없는 속깊은 사람들로 보일까.

사실 한국인을 바라보는 서양인들의 시선은 지금까지 곱기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우리는 중국이나 일본의 아류인 그 무엇이 아니라 세계속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으로 서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