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y Rose 모형. 좌측 상단은 The Great Harry 호
마리 로즈호는 헨리 8세의 명령으로 건조되었으며 최초로 현측에서 일제사격을 할 수 있도록 건조된 선박이다. 마리 로즈호는 78문의 대포를 장비하고 있었고(1536년 91문을 장비할 수 있도록 개장되었다.) 포츠머스에서 건조되었다. 헨리 8세의 누이동생 마리의 이름과 튜어 왕조의 상징 장미를 따서 이름이 지어졌으며 영국해군을 위한 초기의 군용선박으로 특화된 선박이었다. 500톤의 적재능력을 보유하고 (1536년의 개조로 700톤을 적재할 수 있게 되었다.) 길이 38.5m, 넓이 11.7m에 200명의 선원, 185명의 병사, 30명의 포수가 탑승하였다.
1545년,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가 영국침공을 위하여 3만명의 병사와 200척의 선박을 준비하자(43년 후의 스페인 무적함대보다 더 큰 규모의 침공함대), 이에 대응하여 영국은 마리 로즈호를 기함으로 하는 80척의 선박과 12,000명의 병사를 소집하여 조지 카류 제독이 이를 지휘하였다. 프랑스 군이 햄프셔와 아이레의 라이트 사이의 솔렌트 해협에 접근하자 1545년 7월 19일, 솔렌트 해전에서 포츠머스에서 출발한 영국해군이 원거리에서 접전을 벌였다. 양쪽 모두 큰 타격을 입지는 못했지만 프랑스 군이 영국 함대에게 갤리선단을 접근시키자 이에 대응하는 중에 마리 로즈후는 측면의 돌풍때문에 침몰되었다. 경험이 부족한 선원들이 갤리선에 대응하여 포격을 하는 중에 하부 갑판에서 함포사격을 한 후에 제대로 격벽을 닫지 않았던 탓에 배가 기울자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 때문에 침몰된 것으로 보인다.
1836년 6월 16일, 그물에 마리 로즈호의 일부가 걸려올라오자, 존 딘이라는 다이버가 탐사를 시작하여 목재와 대포, 롱보우 등등의 유물을 건져올렸다. 하지만 1840년 딘이 작업을 중단하면서 그 장소가 잊혀져 버렸다.
1965년 알렉산더 멕케이가 다시 탐사를 시작하였고 소나를 이용하여 탐색하기 시작했다. 1971년 몇개의 목재 구조물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1972년 60도로 기울어 있는 배의 우현(스타보드사이드)가 확인되었다.
1979년 마리 로즈 협회가 구성되었다. 침몰된 마리 로즈를 부양도구를 이용하여 인양하는 방법이 연구되었고 도구들이 점차 개선되었다.
1982년 10월 11일, 드디어 마리 로즈호는 물에서 건져올려졌으며
1994년부터 특수한 왁스(glycol)을 이용하여 3단계 보존과정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완료될때까지는 적어도 20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보존작업이 완료되면 배는 서서히 건조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 공법은 1961년에 스웨덴의 바사호를 인양할때에도 적용되었던 공법이다.
인양과정에서 발견된 유물들 중에는 초기 단계의 위치확인도구, 의약도구, 목재도구, 대포, 롱보우, 화살, 조리도구, 조명등, 다이스(주사위 비슷한 노름도구), 백게몬 판(보드게임 도구) 등등의 다양한 물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리 로즈호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영국 포트머스 해군기지의 마리 로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Henri Grace a Dieu(Henry Grace of God)
그레이트 헤리호는 16세기 영국의 카락으로 마리 로즈호와 동시대에 건조되었지만 더 대형이다. 4층의 거대한 선수루와 2층 선미루가 있으며 길이 50미터, 1,000~1,500톤을 적재할 수 있었다. 헨리 8세의 명에 의하여 울위치 조선소에서 1512~1514년간 건조된 그레이트 헤리 호는 최초로 포문(격벽으로 함포발사구를 막았다가 발사할 때만 개방하는 구조)을 장비하여 20문의 새로운 청동제 중포를 운용할 수 있었던 배였으며 43문의 중포와 141문의 경포를 장비하였다. 영국 최초의 2단 갑판을 장비한 배였으며 당대유럽 최대, 최강의 군함이었다.
동시대의 마리 로즈호를 기본으로 화력과 조종성을 개선한 그레이트 해리호는 해군의 상징적인 기함으로 해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잘 보호되었다. 솔렌트 해전을 제외하고 그레이트 헤리호는 전투에 직접 참가하기 보다는 외교적인 면에서 활약하는 함선이었다. 에드워드 6세 시대에 그레이트 헤리호는 이름이 변경되었고 그 이후의 일은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1553년 울위치 조선소의 화재때 파괴되었거나 템즈강에서 해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Great Michael
스코틀랜드 왕립 박물관의 그레이트 미첼호 모형
미첼호는 왕립스코틀랜드 해군의 카락으로, 스코틀랜드 조선소에서 건설하기에는 너무나 대형의 배였기 때문에 뉴헤이븐의 새로운 조선소에서 1504년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의 명에 의하여 건조되었다. 1507년 앤드류 우드 경의 지휘하에 진수된 그레이트 미첼 호는 유럽에서 당대 최대의 군함이었으며 동시대에 건조된 영국의 마리 로즈호보다 두배나 컸다.(1509년 건조)
연대기 저자인 피츠코티의 린드세이는 미첼호의 건조에 관하여 "Fife의 모든 목재"가 이 군함의 건조에 들어갔다고 적었으며 그외에도 프랑스와 발트해에서 목재를 더 수입해야 했다고 적었다. 길이 73m, 폭 11m, 적재량 1,000톤, 마스트가 4개에 24문의 대포(플랜더스에서 구입)를 장비하고 300문의 소형 포를 장비하였으며(후일에는 대포가 36문으로 증가하였다) 300명의 선원과 120명의 포수, 1,000명의 선원이 탑승할 수 있었다.
미첼호는 트리브 성의 포위에 사용되었던 초대형의 22인치 포, "몬스 메그"를 장비했었다고 하며 그렇다면 이 배야말로 역사상 최대구경의 주포를 장비했던 배가 될 것이다.(일본의 야마토 호의 주포는 18인치) 영국왕 헨리 8세는 이에 뒤질세라 보다 큰 그레이트 헤리 호의 건조를 명령하였으며 이 배들이야 말로, 카락에서 전열함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대변하는 배라고 할 수 있다. 미첼호는 미카엘 대천사장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으며 오스만제국에 대항하여 이스라엘 지역을 기독교도들이 점령하려는 십자군 운동에 대한 열의 속에서 건조되었다.
이 대형군함은 스코틀랜드 같은 약소국에게는 유지비를 감당하기만 해도 벅찼던 관계로, 결국 프랑스에 1513년 8월 매각되었고, 1513년 9월 제임스 4세와 그의 스코틀랜드 군대는 플로든 전투에서 대패하였다(제임스 4세도 전사). 미첼호는 프랑스의 루이 12세에게 1514년 4월 2일 4만 리브르라는 헐값에 넘겨졌고 그 후에 "La Grande Nef d'Ecosse"호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545년에 있었던 프랑스의 영국 침공 당시에 이 군함이 영국군함 마리 로즈 호를 솔렌트 전투에서 침몰시키는 공을 세웠다는 주장도 있다.
--------------------------------------
http://blog.naver.com/mdkdk?Redirect=Log&logNo=140019310954
http://en.wikipedia.org/wiki/Michael_(ship)
http://en.wikipedia.org/wiki/Mary_Rose
http://en.wikipedia.org/wiki/Henri_Gr%C3%A2ce_%C3%A0_Dieu
'History > Ship and Sai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갑선, ironclad의 역사 (0) | 2008.03.23 |
---|---|
Clipper (0) | 2008.03.23 |
HMS Dreadnought (0) | 2008.03.23 |
쓰시마 해전 (0) | 2008.03.23 |
갤리 4. 드로몬 (0) | 2008.03.23 |
빅토리아 호와 마젤란 (0) | 2008.03.23 |
산타마리아와 콜롬부스 (0) | 2008.03.23 |
카락 (0) | 2008.03.23 |
갤리 3. 마레 노스트룸 (1) | 2008.03.23 |
갤리 2. 트라이림 (0) | 2008.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