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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Ship and Sail

갤리 3. 마레 노스트룸

Quinquereme

다단선의 발전(개념도)

 기원전 4세기, 펠레폰네소스 전쟁이 끝나면서 대규모 해군의 트라이림을 조작할만한 숙련된 노잡이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에 맞추어 갤리선의 설계는 점차 노잡이들의 기술보다는 힘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었으며 이를 선도한 것이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우스가 만들기 시작한 4단선(Tetreres=quadriremes)과 5단선 (=penteres =quinquiremes)의 등장이었다.

 4단선에 대한 명확한 묘사나 고고학적인 유물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4단선의 건조에 대해서는 명확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으므로 역사가들은 이들의 형태를 대체로 추정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기원전 413년의 시라쿠사 전투에서 다수의 궁수들과 투석기의 공격으로 트라이림의 가장 윗줄에서 노를 젓는 트라니테스가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 명확해지자 새로운 군선들은 모든 노잡이들을 완전히 갑판으로 보호하게 되었다. 역사가인 폴리비우스에 의하면, 4단선은 300명의 노잡이와 120명의 해전대, 50명의 선원을 탑승시켰다. 역사가 휘크 메이예르는 4단선은 가장 윗열에 29개의 노에 2명씩 노잡이를 배치하고, 중간열에도 29개의 노에 2명씩 노잡이를 배치한 다음 가장 아랫 열에 34명의 노잡이가 각자의 노를 조작하는 구조를 제시하였으며 이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4단선은 3단선보다 훨씬 안정시키는 것이 어려웠고 더 많은 노잡이를 배치했지만 속도의 증가도 크지 않았다. 결국 소규모 해군을 유지하던 국가들은 대체로 주력을 트라이림으로 삼았으며 오직 이집트, 로마, 카르타고 등의 거대한 해군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들만이 다수의 4단선과 5단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대형함들은 소형선박보다 충각돌격을 잘 견뎌낼 수 있었고, 더 많은 수의 전투병력을 탑승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형화된 함선을 장비하고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에서 각자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한 군비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더 이상 이러한 군비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주요해군국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었으며 마케도니아 만이 보유하고 있는 다수의 3단선을 이용하여 다른 세력에 대항할 수 있었다.

 4단선들은 3단선처럼 대량으로 생산되지는 못하였지만 폴리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던 시절에 카르타고는 4단선을 300대나 보유했었다고 한다. 파라가몬 왕국 같은 중간규모의 해군들은 100척 정도의 3단선을 보유하였으며 로마는 포에니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연안방어용으로 3단선 10여척을 보유했을 뿐이었지만 대규모 건함계획을 통해서 2차포에니 전쟁 시기에는 무려 220척의 4단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Polyremes

 디아도키 전쟁 이후로,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은 엄청난 군비경쟁에 돌입하였다. 기술적으로, 이미 알렉산더 대왕이 동지중해의 요충지인 티레 항구를 공략하던 기원전 332년 경에 배에 설치된 투석기들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투석기들은 충각돌격을 무력화 시키는 위력을 보이며 해전에 새로운 조류를 불러일으켰다. 투석기에 맞는다고 배가 바로 침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노잡이들이나 노를 일부라도 상실하게 되면 갤리선들은 충각돌격에 필요한 속도와 조종성을 유지하는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되어 대규모 군선과 접근전에 들어갈 경우 트라이림은 절대적인 열세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340년, 6단선을 설치하였고 기원전 306년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7단선이 등장하였다. 이집트의 프톨레미오스 왕조는 8단, 9단, 10단선을 선보였고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격렬한 군비경쟁의 결과로 12, 16단선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나의 노에 10명 가까이의 노잡이가 배치되자, 한두명이 화살이나 투석기의 피해로 손실되더라도 전투를 지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해전의 주류는 조종성을 중시하던 트라이림 시대에서 대규모 해전대를 탑승시키고 대형화된 투석기를 설치할 수 있는 큰 배의 시대로 바뀌었다.

 풍요로운 이집트를 장악한 프톨레미오스 왕조는 막대한 자금력과 파라오의 권위에 힘입어 거대건물들을 수없이 건축하였고 프톨레미 2세의 함대는 2척의 30단선, 1척의 20단선, 4척의 13단선, 14척의 11단선, 2척의 12단선, 30척의 9단선, 36~37척의 7단선, 6척의 6단선, 17척의 5단선, 222~224척의 4단선과 3단선으로 구성된 초대규모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9단선 이상의 대형함선들은 실전에 투입되기에는 너무나 비싼 무기였고 그 실제적인 가치들도 의문시되었다. 이렇게 건조된 대형함들도 수십년만 지나면 폐기처분 되었기에 지극히 소모적인 군비경쟁으로 이어졌고,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안티고노스 왕조, 시리아와 소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간에 벌어진 군비경쟁의 최종결과물이 프톨레미오스 4세의 40단선이었다.


 

프톨레미오스 4세의 40단선 노잡이 배치 개념도

프톨레미오스의 거함은 카손의 견해에 의하면 쌍동체선(카타마란 선)으로 20단선 두개를 이은 형태였을 것이라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배의 승선원은 3,000명의 군인과 4,000명의 노잡이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인원 7,000명이라는 수치는 군선의 역사상 가장 많은 것이고, 타이타닉호 보다도 3배 이상 많은 기록이다. 이 거함은 길이 130미터, 폭이 50미터로 노한개에 10명의 인원이 배정되어 총 400개의 노에 4천명의 노잡이가 필요했다.

 이 거대한 배를 특별한 금속재 없이 목재로 건조할 수 있었다는 것(특히 이집트 처럼 목재가 부족한 나라에서)은 대단한 기술적 성과였으나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수상건조물에 불과했다. 이 배를 만들기 위하여 레바논 등지에서 수많은 목재를 수입하여야 했으며 단 한번 항해를 시도했을때 자력으로는 조종이 불가능했고 수십척의 갤리선이 끌어서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프톨레미오스 왕조는 거대한 구조물에 대한 욕망으로 유명했으며 그들은 세계 최대의 것을 고집스럽게 추구했다. 알렉산드리아는 당대 최대의 항구였고 세계 최대의 도서관과 세계 역사상 가장 높은(120m) 등대를 보유했고 홍해와 지중해 사이에 운하를 최초로 건설하였다.

 고대의 폭군들은 이러한 대형화된 물건을 소유하기를 좋아했는데(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근친상간과 근친살해로 유명한 인물로, 그는 제위기간 중에 어머니와 남동생을 마취시킨 다음 서서히 끓는 기름에 넣어 튀겨죽였다) 시라쿠사의 폭군 히에론은 적재량 1,000톤의 거함 알렉산드레이아 호를 건조했고 칼리굴라는 로마 근교의 네미 호수에 온수시설을 갖춘 욕실과 종려나무 정원이 있는 두채의 수상궁전을 만들게 했는데 길이가 각각 78미터와 79미터 폭이 22미터와 16미터였다.(1928년에 발굴되었으나 1944년 나찌 친위대가 폭파시켰다)

 
네미 호수 근처에서 발견된 수상궁전 잔해

시라쿠사의 거대 3단선

 40단선이라는 어리석은 실패를 낳고나서 급격히 초대형 군선의 군비경쟁은 수그러졌고 갤리선의 대세는 다시 4단선과 3단선으로 돌아갔다. 아니, 지중해 해군의 중심지가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하였다.

포에니 전쟁과 마레 노스트룸

 로마해군은 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이전에 불과 10척 남짓한 3단선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중해 서부를 장악한 대 해군국 카르타고와 시실리에서 싸우기 위해 대형함대가 절실히 필요했던 로마인들은 기원전 260년에 5단 갤리선 100척을 건조하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이런 대형함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를 처음부터 연구해야 했다. 우연히, 260년 4월, 카르타고의 갤리선 1척이 메시나 근처에서 좌초하자 로마인들은 이 배를 참고하여 그대로 복사한 5단선을 건조했다. 이 배들은 소나무 같은 저급한 목재를 이용했기 때문에 당대 최강의 해군국 카르타고(카르타고의 뒤에는 페니키아 인이 있었다)과 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었다. 로마인들은 근본적으로 해양민족이 아니었기에 숙련된 노잡이도 없었고 배는 어설펐지만 로마인들은 고심끝에 개발한 몇가지 신병기가 있었다. 까마귀 라는 이름의 가교는 배의 앞부분에 설치되며 일단 적선과 충돌하게 되면 나무 다리의 앞부분에 설치된 쇠고리가 적선에 강하게 들러붙었고 숙련된 로마의 중장보병단은 가교를 건너서 적함에 돌격하였다. 해전을 육전으로 바꾼것이었다. 곰이라는 이름의 다른 병기도 있었으며 이 무기는 충각처럼 적선과 충돌하여 파괴하는 무기였지만 이 무기의 표적은 적함의 선체가 아니라 노잡이들이었다.

까마귀의 세부.

로마해군의 5단선

 이런 구조. 폭풍피해가 잦았던 것은 불필요한 물건이 장비되었기 때문에 내항성이 저하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로 까마귀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어설프기 짝이없는 로마함대를 비웃던 카르타고 해군은 철저하게 유린당했고 로마해군은 기세가 등등해졌지만 폭풍에 100척의 5단선을 한꺼번에 상실하면서 의기소침해졌다. 그래도 로마인들은 포기하지 않았으며 1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로마해군은 서지중해의 패자로 제해권을 장악했다. 3차의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해적 토벌단이 에게해를 장악한 뒤로 로마는 지중해 전체의 제해권을 획득하였으며 지중해는 로마의 마레 노스트룸(내해)가 되었다. 고대시대의 마지막 해전이 기원전 31년 악티움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소형선 함대와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의 대형연합함대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이후로 대규모 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325년 이후로, 더이상 5단선은 남지 않게 되었고 로마군은 해적토벌용의 3단선만을 보유하게 되었다.

 
포에니 전쟁에서의 해전

트리야누스의 황제가 5단선에 탑승해 있는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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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mdkdk?Redirect=Log&logNo=140019310954
http://en.wikipedia.org/wiki/Quinquereme
http://www.mlahanas.de/Greeks/GiantShips.htm
클라시커 50, 역사와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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