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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예루살렘의 역사 2 (칼리프 시대부터 오스만 통치 전기까지)

아랍 칼리프 시대



958~1052 기간 동안의 예루살렘 지도. 아랍 지리학자 알 무스카다시에 의함



마파 문디(세계의 지도).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있다.


쿠란(Qu'ran 코란)에는 "예루살렘"에 관한 언급이 없지만 하디스(hadith, 이슬람교 전승)에서는 무하마드가 Isra and Miraj(무하마드의 야간 여행에 관한 이슬람 전승) 을 통해 예루살렘까지 간 후, 그곳에서 승천했다고 전하고 있다. 덕분에 예루살렘은 아라비아의 칼리프 첫 정복기인 AD 638년 경에 정복되었다. 동시대의 아랍 역사가들에 따르면, 칼리프 우마르 이븐 알 카타브(Umar al-Khattab)는 혼자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그곳을 청소하고 성전에서 기도를 드린 뒤, 수비대와 성곽에 숨어있던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그렇게 "정화"된지 60년 후, 그 장소는 무하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기록되고 반석교회(Dome of the Rock)가 설립되었다.(현존하는 황금돔은 알아크사 모스크가 아니라 3세기 후에 건축된 것이다.) 또, 우마 이븐 알 카타브는 400년만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살고 예배드릴 자유를 인정했다.

옴미야드 왕조(Umayyad 650~750)와 압바스 왕조(Abbasid 750~969) 초기에 예루살렘은 크게 번성했고 지리학자 이븐 후칼과 알 이스타크리(10세기)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기름진 곳(the most fertile province of Palestine)"이라고 불리웠다고 하지만, 알 이스타크리의 아들이자 지리학자인 알 무카다시(946년 출생)은 유명한 저서 "등산에 필요한 지식"에서 무슬림 치하의 예루살렘에 관하여 많은 찬사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이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다마스커스, 바그다드, 카이로의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고 적고 있다. 흥미롭게도 알 무카다시의 이름은 아랍어로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Bayt al-Muqaddas에서 나온 것이고 직역하면 유대 사원(Beit Ha-Mikdash)이라는 뜻이다.

비록 심각한 차별대우와 종교행사, 이주, 재산소유, 재건축등에 제약은 있었지만 아랍통치기에 대체로 종교적인 관용이 베풀어진 시기였다. 도시내의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들 대부분은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특히 기독교도들은 외부에서의 종교행사를 금지당했으며 여행의 자유가 제약되었고 모스크나 이맘 [각주:1] 앞에서 절을 해야 했고, 특정한 옷을 입어야 하며, 무슬림 들에게 길을 양보해야 하는 등 2등 시민 대접을 받았다.

한편 성지순례를 할 수 있는 인구도 제한되어 있었기에 샤를마뉴 대제(Emperor Charlamagne)는 프랑크 왕국의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칼리프들과 몇가지 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러한 보호가 카롤링거(Carolonian) 왕조가 몰락한 10세기 이후 사라지자 무슬림의 차별대우는 재개되었으나 이번에는 세력을 회복한 비잔틴 제국이 새롭게 순례객들의 보호자로 나서게 되었고 비잔틴 십자군의 영향으로 예루사렘에는 순례자들의 왕래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이 11세기초에 레반트(동지중해) 지역으로 확장되어감에 따라 무슬림 지배자들의 기독교도에 대한 관용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집트 파티마 왕조(Fatimid)의 칼리프 알 하킴 비-아므르 알라(Al-Hakim bi-Amr Allah)는 예루살렘의 모든 회당(Synagogue)와 교회들을 파괴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의 후계자가 이 명령을 중지시키기는 했어도 그리스도가 승천하고 묻혔다고 전해지는 성묘교회가 파괴되었다고 전해지고, 기독교인들이 살해되었다는 소식과 비잔틴 제국이 새롭게 대두한 셀주크 투르크(Seljuq)에게 패했다는 사실이 유럽에 전달된 것은, 1차 십자군 원정의 한 원인이 되었다.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 1099. (중세 기도서에서)

유럽에서 도착한 1차 십자군은 1099년 7월 15일, 1개월 간의 포위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며 포위기간 중 유대인들이 격렬하게 저항한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십자군은 유대인들이 숨어있는 시냐고그들을 불태우고 파괴했다. [각주:2] 이후 400년에 걸쳐서 반복될 전란의 시작이었다.



십자군 시대

예루살렘은 한동안 봉건적인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의 수도가 되었고, 부이용의 고드프리(Godfrey of Bouillon)가 1099년 7월 22일, 예루살렘 공으로 선출되었지만 1년후에 죽음으로써 대관식을 거행하지는 못했다. [각주:3] 귀족드른 에뎃사의 백작인 고드프리의 동생 볼드윈에게 왕위를 계승하도록 요청했고, 1100년 크리스마스의 베들레헴 바실리카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각주:4]

이후에 서방에서 기독교 정착민들이 이주하여 그리스도의 행적을 따라 주요 성소들을 재건하였으며 성묘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야심차게 제건되고, 성산교회(반석의 돔과 알 아크사 모스크)는 기독교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또, 이슬람 해적들과 베두인에 의한 습격의 좋은 표적이 되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몇개의 군사기사단과 순례 기사단 등이 설립되어 예루살렘의 안정을 도모했고 [각주:5] 이들은 12세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루살렘 왕국 시대에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재건활동이 활발하여 카에사레아 항구(habour of Ceasaria)재건 티베리아스(city of Tiberias) 요새화, 아쉬켈란(Ashkelan) 확장, 야파(Jaffa) 증축과 성벽건설, 베들레헴(Betheleham) 재건 등이 이루어지고 수십개의 정착촌이 건설되며 대규모 농장과 교회, 성당, 성벽등이 건설되었다.

하지만 이런 번영은 1187년 살라딘의 지하드 군이 예루살렘이 함락하기까지의 잠깐에 불과했고, 그는 이 지역에서 모든 종교행사를 금지시켰다. 예루살렘 왕국은 1291년까지 지속되었지만 살라딘 이후로는 유명무실한 명목상의 존재로 남았을 뿐이다.


중세에 건축된 "다윗의 탑"

랍비 첼름의 엘리야(Elijah of Chelm)에 의하면, 독일계 유대인들은 11세기부터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하며 그에 관련하여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 돌베르거라는 젊은 독일인을 구했고 그 때문에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돌베르거의 가족중 하나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을 구출하여 포위망 밖으로 빼돌려 주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각주:6] 또, 11세기 중반에 독일에서 예루살렘에 전달된 "할라킥 문답(Halakic question)"을 통하여 예루살렘의 독일계 사회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각주:7]


1173년, 투델라의 벤자민(Benjamin of Tudela)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기행문에서 그는 자코비트(시리아의 동방정교회 신자),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그루지아인 들이 거주하는 도시로 묘사하고 있으며 약 200명의 유대인들이 다비드의 탑 밑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1219년, 도시의 방벽이 다마스커스의 아유비드 왕조 술탄 알 무아잠(al-Mu'azzam)의 명령으로 완전히 파괴되면서 예루살렘은 무방비 도시가 되었고 이 사건은 도시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

1229년, 이집트의 지배자 알 카밀(al-Kamil)과의 조약에 따라 예루살렘은 신성로마제국황제 프레데릭 2세(Frederick II)에게 넘겨졌다. 1239년, 10년간에 걸친 협정이 종결되자 프레데릭은 도시에 새로 성벽을 건축했지만 케락의 에미르(the emir of Kerak) 알 나세르 다우드(al Nasir Da'ud)에 의하여 다시 파괴되었다.

1243년,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의 관리에 들어왔고 성벽이 복구되었으나 곧이어 북쪽에서 몰려든 터키계 무슬림에 의하여 예루살렘의 주인은 바뀌게 된다.


호라즘 시대

몽골제국의 진출에 의하여 호라즘이 서쪽으로 밀려나면서 그들은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고 아유브 왕조가 통치하는 이집트의 술탄 알마리크 알 살리(al-Malik al-Salih)는 호라즘 인들로 기병대를 편성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걸친 호라즘 제국을 영향력 안에 두어 몽골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1244년 7월 11일, 예루살렘에 호라즘 타타르 족(Khwarezmian Tatars)이 침입해 왔고, 끝까지 다윗의 탑(Tower of David)에서 저항하던 잔존세력도 8월 23일 항복했다. [각주:8]

호라즘은 잔혹하게 주민을 학살하고 2천여명의 기독교인과 이슬람 교도를 남겨둔 채 도시를 떠났고[각주:9] 이 시간은 7차 십자군 원정의 계기가 되었다. 목표하던 이집트 원정은 실패했지만 이때 새롭게 참전한 루이 왕의 부대는 팔레스타인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아유브 왕조

호라즘을 다루는데 애를 먹은 후, 이집트의 술탄 알 살리는 무장 습격대를 조직하여 기독교 사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대는 리아즈(riazzas)라고 불리며 코사서스, 흑해 연안, 비잔틴 지역까지 진출하여 각지의 기독교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다. 붙잡힌 사람들은 분류되어 각기 다른 처우를 받게 되었는데 여자들은 하녀나 성 노예로 팔렸고, 남자들은 노예가 되거나 살해 당했으며 아이들은 이맘들에게 보내져 무슬림으로 재 교육을 받아 예니체리나 술탄의 노예 병사로 이용되었다. 이들은 맘루크라고 불리우며 이슬람의 영향으로 세뇌되다 시피한, 정예 군사집단으로 재탄생되어 술탄의 군대로 활용되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호라즘을 쫓아내고 1247년 이 지역을 이집트 아유브 왕조의 통치하에 넣게 한다.

알 살리가 죽자 그의 미망인으로 노예 출신인 샤자르 알 뒤르(Shajar al-Durr)가 여 술탄으로서 권력을 잡게 되었으며 그의 뒤를 이어 맘루크 지도자인 아유브(Aybeg)가 1250년 술탄이 되었다. [각주:10]




맘루크 지배와 몽골 침략



"자크 모레이(Jacques Molay) 예루살렘을 점령하다 1299", 1800년대에 클로다 자퀀이 그린 상상도. 바르세이유의 "십자군의 방(Hall of Crusades)"에 진열되어 있다. 이러한 전투가 일어났던 적은 없으나 드 모레이는 확실히 예루살렘에서 비교적 근접한 키프로스에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안티오키아와 킬리키아(Cilician) 아르메니아 인들은 몽골의 영역에 접해 있었으며 이들은 이라크와 시리아로 향하는 몽골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1260년, 할라구 칸(Hulagu Khan)이 이끄는 몽골 군의 일부가 이집트를 향하여 진군해왔고 맘루크와 갈릴리에서 교전을 벌여 아인 자루트(Battle of Ain Jalut)에서 격렬한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맘루크가 승리하여 몽골군대는 이 지역을 떠났지만 1300년대 초, 몽골군대는 수차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진출해 와서 한때는 북부 시리아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수주간의 점령 후에 이들은 이란으로 철수해갔고, 수개월 후에 맘루크 집단은 미미한 저항을 누르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재 점령한다.

비록 1260~1300 동안 몽골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십자군에게 그 지역을 반환했다는 소문은 자주 퍼지긴 했지만 이런 소문들은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각주:11]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정착할만한 전략적 중요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습격"했을 가능성은 있어도 "점령"했을 가능성은 없다는 데 동의한다. [각주:12] 예루살렘에 들어왔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주변 마을로 도주했다는 기록은 남아있다.




맘루크의 재건

이러한 혼란의 시대가 지나고 다시 순례자들이 소수지만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교황 니콜라이 4세(Pope Nicholas IV)는 맘루크 술탄과 조약을 맺어 카톨릭 성직자들이 성묘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허가를 얻고, 탁발승들을 보내어 예루살렘에서 카톨릭 식 전례를 거행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교황 자신도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였다.)
그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일부 기독교 인들의 방문이 허가 되었지만 도시에서 거주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으나 1300년 시실리의 로베르트(King Robert of Sicily)가 술탄에게 큰 선물을 보내어 시온 교회(Sion Church)와 성묘 교회 옆에 마리아 성당(Mary Chapel)등을 건설하고 기독교인들이 머물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각주:13]

또, 맘루크 술탄도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새로운 건축물을 건설하고 모스크의 확장과 무슬림 이주를 장려했으며 배바르(Baibar) 술탄은 유대인들과 이 지역에서의 협조관계를 다지기 위하여 두개의 성소를 건축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해, 또 하나는 살리에게 헌상하고 무슬림과 유대인 순례객들이 부활절 기간에 기독교도들 만큼 예루살렘을 방문하도록 장려했다. [각주:14]


예루살렘 건축 계획 뉘렘베르그 1493년.


1267년에 나흐마니데스(흔히 람반이라고 불리는) 주의자 [각주:15] 들이 알리야 [각주:16] 를 만들어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시냐고그인 람반 시냐고그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도시가 아니었고 맘루크 왕조는 이곳을 종교적이며 비공식적인 장소로 간주하여 낮은 계급의 에미르(이슬람 국가에서의 수장, 지배자)가 다스리도록 했다. [각주:17]




오스만 통치(1300~1800)


1517년, 예루살렘과 주변지역은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하에 편입되며 20세기 까지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각주:18]

유럽인들도 성지에서 살아갈 권리를 얻었으며 성지의 언덕을 둘러싼 분쟁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터키 술탄의 후원을 얻어 그리스 인들은 정교회 성당과 병원, 지역사회를 건설 할 수 있었고 터키에서 박해를 피해서 도망쳐온 아르메니아인이나 그루지아 인들도 자신들의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인구 증가로 구시가지 너머에 새로운 시가지를 확장하게 된 시기였으며
1517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가 되어 슐레이만 대제 치하에서 성벽을 재건하는 등 번영과 평화를 누렸다.(이 성벽 일부는 원래의 고대 성벽 기초위에 건설된 것이고, 이 성벽 안쪽의 지역은 오늘날 "구시가지(Old City)"라고 불리운다.)

슐레이만과 그의 뒤를 이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기는 "종교적 평화"시대라고 불리우며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모두가 종교적 자유를 누리게 되어 시냐고그, 교회, 모스크가 같은 지역내에서 공존하기 까지 했다. 도시는 슐레이만 통치기 이후의 운영미숙으로 불경기를 겪기는 했지만 오스만 제국 통치기간 내내 모든 종교에 개방되었다.

1482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도미니끄 회 수도사(Dominican priest) 펠릭스 파브리(Felix Fabri)는 도시를 "수많은 국가들이 공존하는, 지금도, 과거에도 그랬듯이 모든 종류의 혐오스러운 이방인(abominations)들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이런 이방인들로, 사라센, 그리스인, 시리아인, 시리아계 유대인, 아비시니아인, 네스토리우스 교 신자, 아르메니아인, 그루지안, 마로니트[각주:19], 투르크만, 베두인, 아사신, 드루즈인, 맘루크(Saracens, Greeks, Syrians, Jacobites, Abyssinians, Nestorians, Armenians, Gregorians, Maronites, Turcomans, Bedouins, Assassins, a possibly Druze sect, Mamluks) 등을 들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저주받을 것"으로 유대인을 들고있다. 아마도, 서방 기독교인들만이 "기독교 군주가 이 도시를 다스려 로마 교회가 전역을 통치하기를 전심으로 갈망하고 있었다"
(A. Stewart, Palestine Pilgrims Text Society, Vol 9-10, p. 384-391)

1700년대에 들어서, 유다 히 하시드(Judah he-Hasid)는 대규모 유대인 이민자 집단을 조직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주했고 이곳에 16세기부터 1948년 까지 가장 중요한 유대인 회당이 될 허바 시나고그(Hurba Synagogue)를 설립했다.(1948년 1차 중동전 때 아랍 군대에게 파괴됨)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Jerusalem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Jerusalem_%28Middle_Ages%29

  1. 이슬람교에서 유대교의 랍비처럼 존경받는 학자들을 일컫는 칭호 [본문으로]
  2. Hull, Michael D. (June 1999). "First Crusade: Siege of Jerusalem". Military History. Retrieved on 2007-05-18.  [본문으로]
  3. Brehier, Louis Latin Kingdom of Jerusalem (1099-1291) Catholic Encyclopedia 1910, accessed Mar. 11, 2008 [본문으로]
  4. Brehier, Louis Latin Kingdom of Jerusalem (1099-1291) Catholic Encyclopedia 1910, accessed Mar. 11, 2008 [본문으로]
  5. 템플기사단이나 성요한 기사단 등 [본문으로]
  6. "Seder ha-Dorot", p. 252, 1878 ed. [본문으로]
  7. Epstein, in "Monatsschrift," xlvii. 344; Jerusalem: Under the Arabs [본문으로]
  8. Riley-Smith, The Crusades, p. 191 [본문으로]
  9. Armstrong, p.304   [본문으로]
  10.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the Middle Ages, 1250-1520, p. 264  [본문으로]
  11. Sylvia Schein, "Gesta Dei per Mongolos" [본문으로]
  12. Reuven Amitai, "Mongol raids into Palestine (1260 and 1300)  [본문으로]
  13. Armstrong, pp. 307-308 [본문으로]
  14. Anderson, pp. 304-305 [본문으로]
  15. 람반 모세 벤 나흐만(rabbi Moes ben Nahman, 1194~1270)을 따르는 유대인들 [본문으로]
  16. 유대교 예배에서 신성한 토라(모세 5경)을 낭독하기 전에 찬미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단상에 올라가는 것. 여기서는 예배 의식, 제단을 의미. [본문으로]
  17. Armstrong, p. 310 [본문으로]
  18. Main Events in the History of Jerusalem. Jerusalem: The Endless Crusade. The CenturyOne Foundation (2003). Retrieved on 2007-02-02. [본문으로]
  19. 레바논에 분포하는 카톨릭 분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