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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예루살렘의 역사 1 (고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다윗왕 시대의 유적

고대 (선사시대 ~ BC 1000)

인간이 예루살렘에 최초로 흔적을 남긴 것은 후기 동석기 시대(Chalcolitic period)에서 초기 청동기 시대(BC 3000)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의 execration 문서(BC 1900~BC 1800)나 아마르나 문서(기원전 14세기)로 볼때, 이 도시는 고대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아마르나 서신 중 하나에서 도시의 감독, 압디-헤바는 이집트에게 하비루(히브리 라는 말의 어원일 수 있다.)와의 싸움에 원조를 요청하고 있다.

창세기 14:18절 [각주:1] 에서 이 도시는 제사장 멜기세댁이 다스리는 도시로, 평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소유자가 이러저리 바뀌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미드라쉬에 기록된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 도시는 아브라함의 선조, 셈과 에베르가 만들었다고 하며, 미드라쉬 중에는 멜키세덱과 셈을 동일 인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사무엘 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 도시는 여부스 족(Jebusites)이 지배하고 있었다고 하며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들이 힛타이트 족의 한 분파라고 본다. 아마도, -제덱(zedek)이라는 이름을 아도니제덱(Adonizedek)등과 비교해 보았을때 멜기세덱 본인도 여부스 족이었 가능성이 높으며 예레미아 31:23절 [각주:2] 의 네웨 제덱(neweh zedek, 의로운 처소 home of righteous)이라는 이름에서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보기도 한다. [각주:3]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 BC 1000 ~ BC 580 )


사무엘 서에 따르면, 여부스 족은 이스라엘의 공략에 맞서 맹렬히 저항했고, 다윗 왕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 군의 공격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한편, 사무엘 서에 관한 마조라 문서(유대인의 외경서, 주석서) 다윗은 이 도시를 수로를 통해서 병력을 잠입시켜서 내부에서 은밀하게 공략하려고 시도했다고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오늘날 내부로 통하는 유일한 수로인 기혼샘(Gihon spring)을 통해서 고도로 방어된 도시에 잠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그 루트를 통해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은 물론 더욱 어렵다.) 그러나 70인역에서는 다윗이 수로를 통해서 침입한 것이 아니라 단검을 이용해서 여부스 족을 무찔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성서의 문맥을 통해서 파악해 볼때, 다윗이 예루살렘을 다스리던 시기 또는 그 전에 다른 여부스 족의 예루살렘 왕 "아라우나(Araunah)" [각주:4]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각주:5]

당시,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오펠(Ophel)"이라고 불리던 이 도시는 점차 남쪽으로 확장되어갔으며 다윗은 이 도시를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수도로 선포했다. 이후, 사무엘서의 기록에 의하면, 다윗은 아라우나에게서 구입한 지역에 제단을 건축했으며 (성서학자들 중 일부는 이것을 신생 이스라엘 왕국의 기반에 기존의 신성성을 추가하기 위해서 집어넣은 서술이라고 보기도 한다. [각주:6]) 이 제단에 더더욱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역대기(The book of Chronicles)에 다윗을 이은 솔로몬 왕(King Solomon)이 이 제단이 있던 장소에 확장된 성전(the Temple of Solomon)을 건축했다고 명시된 점이다.

이 성전은 예루살렘을 유대교의 핵심으로 만들었으며 훗날 히스키야(Hezekiah)에서 요수아(Josiah)에 이르는 종교부흥기까지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에서 실로나 베델처럼 강력한 종교적 권위와 경배의 대상으로 기능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왕궁과 밀로(무엇을 위한 건축물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를 비롯한 다양한 건축사업을 벌였다고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에 관하여 다른 건축에 전용된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석조 건축 흔적을 제외하고는 충분한 증거물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훗날 오므리(Omrides) 왕 시대에 벌어진 대규모 건축사업을 신화적으로 각색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각주:7]

왕국이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리된 이후(성서에서는 이것이 솔로몬 치세에 바로 뒤이어 일어난 현상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다비드 핑켈슈타인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이것이 히즈기야 [각주:8] 시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본다.) 예루살렘은 남 유다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북부의 이스라엘 왕국은 사마리아에 수도를 두었다. 이 제1성전기가 끝나는 시점에 이르러 예루살렘은 확고한 종교적 성지로 자리매김하여 경배와 순례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것은 고고학적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아세라(Asherah) 신상이 이 시기 말부터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각주:9]

예루살렘은 400년간 남유다 왕국의 수도로 남았으며 BC 701년 경 아시리아의 침공때,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가 20년 전에 이미 점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성경의 기록상으로는 산헤립(Sennacherib)의 18만5천 군대가 천사들에 의하여 죽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되어 있으며 산헤립의 기록에 따르면(타일러 석비 Taylor prism) 유다왕 히즈기야가 금 30달란트와 은 800달란트를 바치고 포위망을 풀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BC 597년 바빌론에게 굴복하여 어린 왕 여호아킴(Jehoiachin)은 귀족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가며 바빌론 황제 느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에 의하여 마지막 왕 시드기야(Zedekiah)가 즉위한다. 그가 느부카드네자를 배반하려고 시도함에 따라 (BC 587~586) 바빌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재 점령하고 시드기야의 자녀들을 그의 면전에서 죽이는 모습을 보인 다음 시드기야의 두눈을 뽑아버린다. 바빌론은 시드기야를 압송하고 유다 왕국의 핵심계층들을 포로로 붙잡았으며 사원을 불지르고 도시 성벽을 철저히 파괴한 다음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Gedaliah the son of Achikam)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하지만 [각주:10] 그는 통치한지 52일만에 암몬 왕 바알리스(Baalis king of Ammon)의 사주를 받은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Yishmael son of Netahiah)에게 살해되었으며 느부카드네자르의 보복을 두려워한 유대인들은 이집트로 도주하게 된다.[각주:11]



귀환과 페르시아 통치기 ( ~ BC 312)

바빌론에서 오랜 포로생활을 한뒤,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하자 페르시아의 고레스 2세(Cyrus II)는 유대인에게 유다 지방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가를 했다. 이 건축은 다리우스 대왕(Darius the Great) 6년(BC 516)에야 끝나는데 그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es I)는 에즈라(Ezra)와 느헤미야(Nehemiah)를 보내어 도시의 성벽을 재건하도록 하고, 유다 지방을 페르시아의 속주로서 통치했다. 성전 재건축을 통하여 예루살렘은 유다의 수도이자 유대교의 신앙적 중심지로 부흥하게 된다.



그리스 통치하 (BC 312 ~ BC 164)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함에 따라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은 그리스의 통치를 받으며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게 된다. 알렉산더의 죽음으로 인한 디아도키아 전쟁(the Wars of Diadochi)으로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은 이집트의 프롤레미 1세(Ptolemy I) 통치하에 들어가지만 BC 198년의 파니움 전투(the Battle of Panium) 이후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대왕(Seleucids under Antiochus the Great)의 지배를 받게 된다.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은 강요와 자발적인 참여을 통하여 헬라화 되었고, 이런 헬라화에 맞서 대제사장 마티샤우와 그의 다섯 아들 시몬, 요하난, 엘라자르, 요나단, 유다 마카비(Matisyahu the High Priest and his five sons; Simon, Yochanan, Eleazar, Jonathan and Judah the Maccabee)는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헤르몬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헤르몬 왕국시대 (BC 164 ~ BC 35)

헤르몬 왕국은 103년간 지속되었으며 마티샤후의 아들 시몬에게서 요하난, 예후다 아리스토볼루스(Yehuda Aristobolus)로 이어지고, 그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Salome Alexandra), 오빠 알렉산더 야나이(Alexander Yannai)로 이어진 다음 히르카누스(Hyrcanus)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로 계승되어갔다. 그리고 히르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가 로마에 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유다는 로마제국의 독립속주로 존재하게 되었고, 하쉬모니안의 마지막 왕은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마티샤후 안티고누스(Matisyahu Antigonus)였다.


헤로데 왕국 시대 (BC 35 ~ AD 96)


로마는 헤로데(Herod)를 로마 지배하의 왕으로 내세웠고, BC 19년 경부터 유대 왕 헤롯은 성전을 증축하고 주변 시설을 확충했다. 이 건물은 제2성전이라고 불리우며 예루살렘 재건의 핵심이 되었다. 그러나 헤롯 사후에 유대 지역과 예루살렘은 로마의 직할 통치에 들어서게 되고 유대 반란으로 인한 성전 파괴 이후에도 AD 96년까지 아그리파 I세(Agrippa I)와 아그리파 2세는 거의 30년간에 걸쳐서 유대 왕국의 통치자로 남았다.



로마와 비잔틴 통치 (AD 6 ~ AD 638)


 

68년의 반란때 발행된 주화. 앞면 "세켈 이스라엘, 3년" 뒷면 "성도 예루살렘(Jerusalem the Holy)"


티투스의 예루살렘 함락을 묘사한 부조. 로마.

기원후 1세기 경 부터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성지로 각인되게 된다. 신약에 따르면 나사렛 예수가 이곳에서 수난을 당하고 승천 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예루살렘에는 새로운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리고, 로마의 통치가 시작된지 얼마 안있어 예루살렘은 유대 폭동(the Great Jewish Revolt)에 따른 내전으로 AD 70년 경 티투스(Titus)에게 철저하게 파괴되어 제2성전은 불태워 지고 서쪽 벽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파괴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이 시대의 서쪽 성벽이 남아있으며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이 첫번째 폭도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남았으며 신앙을 지켜 나갔다. 오늘날 "구시가지(Old City)"라고 불리는 지역은 로마의 하드리아누스(Hadrian) 시대인 2세기 경에 만들어 진 것이고, 그는 예루살렘을 이교적인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AD 135년 재건축하며 유대인들에게 몇가지 제약을 가했다가 시몬 바르 코흐바(Simon Bar Kokhba)에 의한 폭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에 대하여 강경한 응징책으로 맞섰고 이 반란의 과정에서 약 50만명의 유대인이 사망되었고 도시는 로마식 도시,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탈바꿈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이 도시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고 1년에 Tisha B'Av(히브리 달력으로 아뷥월 9일)에만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이 날이 되면 유대인들은 파괴된 서쪽 성벽에서 눈물짓는 관습이 생기게 되었다. [각주:12]

바 코흐바 폭동 이후로 예루살렘은 로마와 비잔틴의 통치하에 남았다. 4세기가 되자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I)는 예루살렘에 성묘 교회(335년)를 비롯한 다양한 기독교 건축물을 건술하여 도시를 기독교의 성지로 만들었다. 예루살렘은 2제곱킬로미터에 20만명의 인구가 상주하여 제2 성전 시대 말기의 규모와 인구를 회복했다.[각주:13] [각주:14]

콘스탄티누스 시절부터 아랍인들이 638년 이 도시를 정복하기 까지 비잔틴 제국의 수많은 유대인들이 열정적으로 로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 도시에 들어갈 수 없었다. 618년, 비잔틴 연대기(Byzantine chronicles)에는 무슬림들의 중동 정복에 유대인들이 협력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각주:15] 예루살렘이 점령되었을 때, 기독교인들과 성곽에서 방어하던 수비대는 심한 보복을 당했음에도 유대인들은 무슬림 지도자들의 허락을 얻어 도시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각주:16] 7세기 말에, 옴미야드 왕조의 칼리프 아브 알 말릭(Umayyad caliph Abd al-Malik)은 예루살렘의 명소로 유명한 반석의 돔을 건축했고 [각주:17] 이후 400년 간에 걸쳐서 예루살렘은 아랍 권력자들의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Jerusalem_%28Middle_Ages%29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Jerusalem

  1.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본문으로]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에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 것이며 [본문으로]
  3. ibid, also Jewish Encyclopedia [본문으로]
  4. Biblical Archaeology Review, Reading David in Genesis, Gary A. Rendsburg [본문으로]
  5. 사무엘 하 24:23 "(다윗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Araunah the King gave to the King [David] ...) [본문으로]
  6. 이 장소, 예루살렘 성전의 신성성에 관한 기록들은 이후에도 계속 추가되고 확장되어 탈무드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다수 존재한다. Peake's commentary on the Bible [본문으로]
  7. Israel Finkelstein, The Bible Unearthed [본문으로]
  8. 전게서 [본문으로]
  9. 전게서 [본문으로]
  10. 예레미야 40:5 [본문으로]
  11. 예레미아 40:14~41:2 [본문으로]
  12.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출입하는 것은 금지되었지만 이들이 이스라엘 전역에서 축출된 것은 아니다. 이후 유대인들은 문화의 중심을 헤로데 시절부터 융성한 갈릴리 지역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유대 문화는 새로운 발전을 접하게 된다. [본문으로]
  13. Har-el, Menashe. This Is Jerusalem. Canaan Publishing House [본문으로]
  14. Lehmann, Clayton Miles (2007-02-22). Palestine: History. The On-line Encyclopedia of the Roman Provinces. The University of South Dakota. Retrieved on 2007-04-18. [본문으로]
  15. Zank, Michael. Byzantian Jerusalem. Boston University. Retrieved on 2007-02-01. [본문으로]
  16. Gil, Moshe (February 1997). A History of Palestine, 634-1099. Cambridge University Press, 70-71. ISBN 0521599849. [본문으로]
  17. Hoppe, Leslie J. (August 2000). The Holy City: Jerusalem in the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Michael Glazier Books, 15. ISBN 081465081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