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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rab Israeli conflict

골다 메이어


골다 메이어 (Golda Meir,
Hebrew: ????? ?????, Arabic: ????? ??????) 1898.05.03 ~ 1978.12.08. 이스라엘 4대 수상

노동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으로 근무한 후에 1969.03.17, 이스라엘 수상에 취임했다. 마가렛 대처에 비견될만한 "철의 여인" [각주:1] 으로 불리웠고, 다비드 벤 구리온은 "내각에서 유일한 사나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스라엘 최초의 여자 수상이며, 역사상 3번째 여자 수상이다.[각주:2] (가족 구성원 중에 정부 수반이 없었던 사람으로는 최초)



유년기

러시아 제국(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의 키에프에서 블룸 나디치와 모세 마보비치의 딸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의 이름은 골다 마보비치. 목수인 아버지 [각주:3] 슬하에 두명의 자매가 있고, 다섯명의 남매들은 어릴적에 죽었다. 두 언니 셰냐와 칩케중에 특별히 셰나와 친했다고 한다. 모세 마보비치는 1903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1906년에는 가족 전체가 가난과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각주:4]



미국 이민 생활

골다 메이어의 가족은 위스콘신주의 밀워키에 정착했으며 그곳에서 부친은 목수로 일했고 모친은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그곳에서 골다 메이어는 8살때부터 어머니가 물건을 들여놓으러 외출할때 가게를 돌보았다. 골다 메이어는 "슐츠 브루잉 체육관(Schilitx Brewing Complex)" 근처의 "4번가 학교(Fourth Street School)" [각주:5]를 1906년부터 1912년까지 다녔다. 재학중에 이미 리더쉽이 특출했던 골다는 급우들의 교과서를 구입하기 위한 후원회를 조직했고, 미국 YSS(소녀단)이 조직되기 전에 공공모임을 위하여 장소를 빌리고, 계획하는 일을 도맡았다. 학교 입학시에는 영어도 몰랐지만 졸업할때에는 졸업상 대표(valedictorian)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리더쉽과 노력의 뒷받침 덕분이었다.

 
1914년, 골다 메이어



14살때, 그녀는 북부 고등학교(North Division High School)에 진학하였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골다의 부모는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이에 반발한 그녀는 결혼한 언니 셰나 콘골드가 있는 덴버로 가출했다. 언니 콘골드는 매우 지적인 여성으로 집에서 저녁모임을 주최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골다는 일생동안 헌신하게 될, 시오니즘, 문학, 여성 참정권, 노동조합운동을 접하게 된다. 자서전을 통해서 그녀는 "그 대화로 가득했던 덴버에서의 밤들은 내 미래에 대한 확신을 만들어주었다"라고 회상했다.. 또, 덴버에서 5년후 결혼하게 되는 광고 제작자 모리스 메이슨을 만나게 된다.

1913년 골다는 밀워키의 고등학교로 돌아갔고, 1915년 졸업한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그녀는 청년 시오니즘 노동자당(Young Poalei Zion, 훗날의 Habonim, the Labor Zionist youth movement)에 헌신하게 되며, 집회에서 연설을 맡아 시오니즘 사회주의자들에게 열정을 불어넣었다.

밀워키 주립 보통학교(위스콘신-밀워키 대의 전신)를 졸업한 후 그녀는 1915년, 시오니즘 노동자 당에 정식으로 입단하고, 1917년 모리스와 결혼한 다음,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역이었던 고대 이스라엘 지역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고 1921년, 골다의 언니 셰이나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게 된다.



Aliyah to Palestine


메르하비아 키부츠에서 일하고 있는 골다 메이어

팔레스타인에서 골다 부부는 키부츠 [각주:6]에 가입하려고 제즈릴 계곡(Jezreel Valley)에 위치한 메르하비아 키부츠(Kibbutz Merhavia)에 지원했고, 한번은 거절되었지만 결국 받아들어졌다. 그곳에서 골다의 임무는 아몬드를 수확하고 나무를 심으며 주방을 운영하고 양계장에서 일하는 것이었는데, 그녀의 지도력이 빛을 발하여 키부츠에서 그녀는 히스타드룻(Histadrut, 노동자 총연맹)의 메르하비아 대표로 선출되어 연맹의 여성노동위원회 간사에 이어 집행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24년 골다와 남편은 키브츠를 떠나서 [각주:7] 텔아비브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에 정착하게 된며 그 동안 두사람 사이에는 아들 메나햄(Menachem, 1924~)과 딸 사라(Sarah, 1926~)가 태어났다.
1928년, 골다가 모에츠 하포랏(Moetzet HaPolat, 여성노동당) 비서직에 선출되면서 골다는 1932년부터 2년간 미국 대사관에서 밀사로 일하게 된다. [각주:8] 아이들은 그녀와 함께 갔지만 모리스는 예루살렘에 남았고 부부는 별거하게 되었지만 이혼하지는 않은상태로 1951년 남편 모리스가 사망한다.




노동조합 활동

1934년, 미국에서 메이어가 돌아온 뒤로 그녀는 히스타드룻의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고, 정치국장으로 승진하여, 미래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써 중요한 경력을 쌓게 된다.[각주:9]


이스라엘 국가 수립이전 정치활동

1946년 6월,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시오니즘 운동을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이슈브의 많은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메이어는 모세 샤렛의 부재중에 유대인 조직에서 정치부서의 국장을 맡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영국 식민성 책임자들간의 주요 협상가로 역할을 맡았으며 샤렛이 석방된 뒤, UN 분리안 문제로 미국에 있는 동안 메이어는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기까지 정치국에서 국장으로 일했다. [각주:10] 1948년 5월 10일, 이스라엘이 수립되기 4일전, 메이어는 아랍 여성으로 위장하고 요르단의 수도 암만을 방문하여 트렌스요르단 국왕 압둘라와 비밀회견을 갖는다. 회견장소에서 그녀는 아랍 연합국들이 유대인 국가를 공격하리라는 경고를 받았고, 압둘라는 골다에게 국가 수립 선언을 서두르지 말라고 요구했지만 골다는 재치있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는 2천년을 기다려왔습니다. 너무 서두르고 있나요?" [각주:11]


신생국 내각에서


골다 메이어 대사가 크레믈린에서 신임장을 받고 있다. 1948.09.8

메이어는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에 서명한 24명(그중 2명이 여성) 중 한명으로, 훗날 "서명을 마치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제가 미국 역사를 학교에서 배울 때, 독립선언에 서명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죠. 전 제가 그와 같은 일을 실제로 하게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독립이 선언되는 그 장소에 있었습니다. "

이스라엘은 그 다음날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트렌스요르단, 이라크의 연합군에게 공격을 받고 이스라엘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이스라엘 최초의 여권 [각주:12] 를 받은 골다는 신국가 수립에 필요한 자금마련을 위하여 바로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



모스크바 대사로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메이어는 이스라엘의 첫 소련대사로 임명되었다. 1949년, 그녀의 짦은 체제기간이 끝날때까지 모스크바 시냐고그(유대인 회당)에 참가했고 그녀의 이름을 듣고 몰려온 수천명의 러시아 유대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스탈린의 유대인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사회의 결합은 견고했다. 이스라엘은 1984년 11월, 1만 세겔을 들여서 모스크바에 그녀를 둘러싼 군중을 그린 조각을 세우도록 했다. [각주:13]



1948년 유대인 축일. 골다메이어와 그녀를 만나기 위해 모여든 약 5만여명의 유대계 소련인들.



노동부 장관

1949년 메이어는 마파이 당의 일원으로 의회에 진출하여 1974년까지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49년부터 1956년까지 그녀는 노동부 장관으로 일하며 대규모 주택건설과 도로 건설사업에 중점을 둔 정책을 시행했고 유대인 이민에 대한 제한을 대폭 축소했다.


외무부 장관

1956년, 골다 메이어는 다비드 벤-구리온 내각에서 외무부 장관직을 맡게 된다. 전임자였던 모세 샤렛은 외무성의 모든 직원들에게 히브리식 이름을 사용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는데, 골다 메이어가 외무부 장관이 된 이후, 그녀는 "메이어슨"을 줄여서 히브리어로 "조명(illuminate)"을 의미하는 "메이어"를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외무부 장관으로서 메이어는 새롭게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 수립을 도모하여 국제적인 고립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이스라엘이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국가수립을 추진하는 국가들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그들처럼 우리는 외국의 통치를 받았고, 땅을 되찾고, 작물을 심고 수확할 영토를 주장하는 방법, 결속을 다져나가고,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스스로 배워야 했다"고 적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지금껏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부유하고, 강력한 적들을 맞이하여 해결책을 찾아왔기 때문에"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밝히고 있다. [각주:14]

1960년대 초에, 메이어는 림프종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1966년 1월, 그녀는 외무성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지만, 수상 레비 에쉬콜을 보좌하는 집권 마파이 당의 사무국장역을 맡으며 당내 분규로 진통이 있을때에도 총리를 지지했다.



수상 취임

레비 에쉬콜이 1969년 2월 26일,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집권당은 메이어를 그의 후임으로 선출했다. [각주:15] 메이어는 1969년 3월 17일, 현역으로 복귀하여 1974년까지 수상직을 맡게 되었으며 메이어는 1967년 6일전쟁 이후 구성된 집권 마파이 당의 연립내각(라피 당과 아흐두트 하아보다 당의 연합)정부를 그대로 유지해 나갔다. [각주:16] [각주:17] 1969년에서 1970년 초에 걸쳐서 골다 메이어는 리처드 닉슨(1969), 니콜라이 챠오세스쿠(1972), 교황 바울 6세(1973)등 각국의 정치지도자들과 회견을 갖고 중동에서의 평화전망을 나누고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을 이스라엘로 초대하여 국교정상화에 힘썻다.  또, 1970년, 메이어는 "소모전(the War of Attrition)"의 중단을 위한 평화협정에 조인하고 "확고하고 승인된 경계선"까지 후퇴하기로 약속하며 평화협정의 기초안을 구성했다. 이런 유화 움직임 때문에 가할 당(Gahal party)은 연립 내각을 탈퇴했지만 메이어는 온건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각주:18]




뮌헨 올림픽

1972년, 하계 올림픽을 얼룩지게 한 뮌헨 학살이 일어났을 때, 메이어는 세계를 향하여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범죄에게서 우리 시민들을 도와달라"는 메세지를 전했다. [각주:19] 그러나 세계 언론은 금새 무관심해졌고, 결국 골다 메이어는 모사드에게 "검은 9월단"과 학살을 일으킨 PFLP 에 대하여 "추적하여 암살할 권리"를 승인했다. [각주:20] 이 사건을 소재로 1986년의 TV 영화 "기드온의 칼(Sworld of Gideon)"과 [각주:21] 2005년의 스티븐 스필버그 작 뮌헨이 만들어졌다.




욤 키푸르 전쟁


캘리포니아 리처드 닉슨 박물관에 전시된 골다 메이어 흉상

욤키푸르 전쟁 발발 직전, 이스라엘 정보부는 공격이 임박해있음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가 발발 6시간 전에야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시점에서 골다 메이어는 국방상 모세 다얀과 다비드 엘라자르 장군을 만났으며 그 자리에서 다얀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엘라자르는 시리아 군에게 선재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각주:22] 메이어 수상은 이스라엘이 무기 수급에서 유럽 국가들에 의존할 수 없으리라 예측했고, 따라서 이스라엘을 도울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라고 보았다. 만약 선제공격을 감행할 경우, 미국내 여론이 악화되어 원조가 불가능해질 것을 우려한 메이어는 선제공격에 나서지 않기로 결정했고, 헨리 키신저는 당시 골다 메이어는 만약 선제 공격을 시작한다면 이스라엘은 "손톱만큼도" 원조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임

욤 키푸르 전쟁 이후, 메이어 정부는 전쟁에 대한 준비태만 문제를 추궁받았다. 아그라나트 위원회는 전후 조사를 통하여 그녀의 책임 문제를 지적했고, 이에 따라 1973년 12월 총선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1974년 4월 11일, "국민의 뜻에 따라" [각주:23]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1974년 6월 3일, 그녀의 자리는 이츠하크 라빈이 승계하게 되었다.

이후, 1975년 메이어는 이스라엘의 건국에 대한 공헌을 기리는 특별 훈장을 수상했다.



사망

1978년 12월 8일, 골다 메이어는 예루살렘에서 암으로 80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1978년 12월 12일, 예루살렘 근처의 헤르츨 산에 묻혔다.




어록


키에프의 기념비

"아랍국가들은 싸우고 질 수 있습니다. 돌아가서 다시 싸우면 되니까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오직 한번 질 수 있습니다."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증오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자녀들을 더 사랑할때, 전쟁을 그만둘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같은 경우를 또 찾아볼 수 있을까요. 언제 팔레스타인 인들이 독립국가를 만들었던 적이 있습니까? 1차대전 이전에 팔레스타인은 남 시리아의 일부였고, 요르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팔레스타인 국가를 파괴하고 팔레스타인 인들을 내어 쫓았다고 합니다만, 팔레스타인인이라는 것과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것 자체가 없었습니다."(1969.06.15. 선데이 타임즈)






http://blog.naver.com/mswoominji?Redirect=Log&logNo=60046370472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11&dir_id=110105&eid=20KKBIV2qyARTXM0psWSOfGwrLUT3TbA&qb=sPG02SC43sDMvu4=
http://en.wikipedia.org/wiki/Golda_Meir

  1. BBC News Profile [본문으로]
  2. 실론(스리랑카)의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와 인도의 인디라 간디가 골다 메이어보다 앞서서 여자인채로 국가수반이 되었다. [본문으로]
  3. 골다 메이어가 자서전에서 술회한 바로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 중 가장 뚜렷한 것은 아버지가 포그룸(동유럽, 특히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박해)을 피해서 정신없이 앞문에 못을 박던 모습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Golda Meir's American Roots [본문으로]
  5. 오늘날은 골다 메이어 스쿨(Golda Meir School)이라고 불리며 영재학교가 되었다. [본문으로]
  6. 이스라엘의 집단농장 제도. 농기구를 비롯한 각종 생활용품과 작업도구를 제공해주고 공동작업에 참가하는 형태. 지금도 이스라엘에 다수 남아있지만 생활여건이 아주 좋은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젊은 층에게 외면받고 있는 측면도 있다. [본문으로]
  7. 남편이 키부츠에서의 고된 생활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본문으로]
  8. Golda Meir, Encyclopedia of Zionism and Israel, ed. Raphael Patai, New York, 1971, vol.II, pp. 776-777 [본문으로]
  9. "Golda Meir," Encyclopedia Judaica, Keter, 1972, Jerusalem, vol. 11, pp. 1242-1245 [본문으로]
  10. "Golda Meir," Encyclopedia Judaica, Keter, 1972, Jerusalem, vol. 11, pp. 1242-1245 [본문으로]
  11. "Golda Meir: Peace and Arab Acceptance Were Goals of Her 5 Years as Premier", The New York Times, 1978-12-09. [본문으로]
  12. Golda (Emery/Weiner School) [본문으로]
  13. Golda Meir’s life was devoted to building Zionism by Dan Pine (Jewish SF, July 15, 2005) [본문으로]
  14. Golda Meir, My Life, (NY: Dell Publishing Co., 1975), pp. 308-309 [본문으로]
  15. BBC ON THIS DAY | 7 | 1969: Israel elects first female leader [본문으로]
  16. 이스라엘 노동당 [본문으로]
  17. Golda Meir, Encyclopedia Britannica, Micropedia, 1974, 15th edition, pp.762 [본문으로]
  18. Golda Meir Encyclopedia Judaica, Keter, Jerusalem, 1972, p. 1242-1244  [본문으로]
  19. Hostages killed in gun battle Daily Telegraph, 5 September 1972 [본문으로]
  20. Morris, B. (1999, 2001). Righteous Victims: A History of the Zionist-Arab conflict, 1881?2000. New York: Vintage Books. ISBN 0-679-74475-4. [본문으로]
  21. 원작은 "복수. 이스라엘의 보복테러 실화 조지 요나스 저(Vengeance: The True Story of an Israeli Counter-Terrorist Team by George Jonas) [본문으로]
  22. History News Network [본문으로]
  23. Biography of Golda Meir - Zionism and Israel - Biographies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