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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merican Civil War

남북전쟁 17. 서부전역 - g. 바다로의 행군

1864년 겨울, 북군의 윌리엄 테쿰세 셔먼 소장은 11월 15일, 애틀랜타를 점령한 뒤 남부의 심장인 조지아 주로 부대를 행군시키며 12월 21일 서배너 항을 점령하기 까지 각종 산업시설과 기반시설을 파괴했다. 훗날 총력전 개념으로 알려지게 된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은 남부의 전쟁수행능력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함께 남부의 민간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서 전쟁수행의지를 꺽어버렸다.

행군의 준비

1864년, 셔먼은 5월부터 9월까지 계속된 애틀랜타 전역에서 승리를 거두고 남부의 심장부로 진격할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북군 총사령관이던 그랜트와 서부군 사령관 셔먼은 남북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남부의 전략적, 산업적, 심리적 전쟁수행능력 자체를 철저하게 파괴해야한다고 믿었다. 게다가 버지니아에서 그랜트가 남군의 리와 피터스버그에서 대치 상태에 있었기에 북군은 배후지역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그랜트가 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거나 적어도 리의 북버지니아군이 더 이상 증원을 받을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 셔먼은 조지아 주로 진격해 곡물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면서 보급품을 획득하게 하는 한편 진로상에 있는 전선, 철도를 비롯한 모든 기반시설을 파괴하는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려 했지만 이 작전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우선 정치적으로 초토화 작전에 따른 민간인들의 피해는 정치적인 압력이 될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후드가 지휘하는 남군이 잔존해 있는 상태에서 진격할 경우 보급과 통신선이 차단될 가능성이 있었다. 또, 그때까지 남북전쟁에서는 육상보급선인 철도를 중심으로 작전이 이뤄졌는데 이 번에는 보급범위를 벗어나야 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서부에서 북군의 주력부대가 보급이 차단된 상태로 적지에서 고립될 수도 있었다.

애틀랜타의 점령으로 링컨이 재선되면서 민간인 피해로 인해 발생할 정치적인 부담감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군사적으로 볼 때, 보급면에서는 빅스버그 공략시에 그랜트가 시도했던 작전을 참고할 수 있었고, 후드의 남군에 대해서는 ‘치커모거의 바위’ 토머스가 방어를 맡아주고 보급선과 통신선을 차단한채 전진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셔먼의 판단이었다.

아틀랜타에서 집결한 4개 군단규모의 북군은 부상자나 환자 등 장기간의 행군에 부적합한 병력은 남겨두고, 포대별로 대포도 1문으로 제한하면서 장거리 행군을 준비했다. 그와 함께 20일치 식량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북군은 공병대의 포우 대령 지휘하에 약탈대를 조직해서 파괴한 농장에서 식량을 확보했다.

그와 함께 철도와 농업 및 생산 기반시설 들을 철저하게 파괴해 나갔고, 약탈대는 철로를 파괴한 다음 선로는 열을 가해서 비틀고 침목을 꼬아서 ‘셔먼의 넥타이’라는 표식을 남기고 다녔기 때문에 버머스(bummers)라고 악명이 높았다. 11월 15일, 북군이 애틀랜타를 출발할 준비를 마치는 시점에서 애틀랜타에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나중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유명해진 이 대화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의 예고편이 되었고 포우 대령은 ‘군사적으로 애틀랜타는 소멸되었다’라는 말로 간단히 보고했다.

일단 애틀랜타를 출발하고 나면 통신선이 차단될 것이므로 셔먼은 실행단계에서 휘하부대와 접촉을 두절해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보급에 대한 지침을 확실하게 전달했다.

4. 아군은 행진하는 도중에 자유롭게 식량을 징발한다. 이를 위해서 각 여단 지휘관은 사려 깊은 지휘관들의 통제하에 징발부대를 효율적으로 조직해서 행군로 근처에 있는 옥수수나 건초, 모든 종류의 고기와 야채를 비롯해서 10일간의 부대보급에 필요한 물자는 무엇이라도 징발하도록 한다. 병사는 절대로 민간인 주거지나 진입로를 침범해서는 안되지만 정지해있거나 숙영하는 중에는 감자나 기타 야채 등을 반입할 수 있다. 징발대는 행군로에서의 거리를 불문하고 필요한 물자를 징발해오도록 지도를 받도록 한다.

5. 각 군단 지휘관은 풍차, 가옥, 목화밭 등등의 생산시설 및 그와 관련된 건물을 파괴하는 데 주력한다. 주거지역과 기타 생활필수 시설에 대한 가해행위는 금지한다. 단, 게릴라나 행진을 방해하는 집단 또는 교량을 파괴하거나 도로 시설을 훼손한다던지 기타등등의 적대행위를 취하는 자에게는 이러한 제한사항에 해당이 없고 이러한 파괴행위에는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6. 말, 당나귀, 마차을 비롯한 거주 관련 용품과 기병과 포병은 제한 없이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적대적인 부유층과 일반적으로 중립적이거나 우호적인 빈민층과 노동자에게는 구분해서 대우해야 한다. 당나귀나 말은 징발부대는 짐차를 끄느라 지쳐있는 짐승과 교체하거나 여단 내지 대대 급에서 운용하는 짐운반용 노새로 활용토록 한다. 징발부대 일체는 위협적이거나 모욕적인 언어 사용을 지양하고 장교들은 심사숙고해서 사실 확인서를 작성해주되 영수증은 작성해주지 않는다. 또, 각 가족에게 필수불가결한 분량을 이성적으로 고려해서 징발하거나 또는 제공하도록 한다.

7. 건강하거나 복무할 수 있는 흑인은 각 제대에 소속되어 복무할 수 있으나 지휘관들은 보급문제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William T. Sherman , Military Division of the Mississippi Special Field Order 120, November 9, 1864.

‘바다로의 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작전의 전개 : 그리스월드

북군의 작전

조지 토머스 소장에게 후드 중장의 남군을 맡겨놓은 셔먼은 서배너 작전을 위해 62,000명의 병력을 확보하고는 북군의 진행방향을 숨기고, 남군을 혼란시킬 목적으로 휘하의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하워드 소장의 테네시 군(Army of Tennessee)이 우익을 맡고 슬로컴 소장의 조지아 군(Army of Georgia)은 좌익을 맡았으며 킬패트릭의 기병사단이 양군의 지원임무를 수행했다. 슬로컴의 좌익은 메디슨과 오거스타 방향으로 전진하고 하워드의 우익부대는 메이컨을 향했으며 셔먼은 제1 앨라배마 기병연대를 대동하고 슬로컴과 함께 오거스타 방향으로 향했다.

북군 우익이 러브조이 역에 접근하자 이곳을 방어하던 남군의 잔존병력은 메이콘으로 후퇴했고 북군 기병대가 이곳에서 남군의 대포 2문을 노획했다. 북군 기병대가 베어크리크에서 다시 포로 50명과 대포 2문을 확보하자 하워드는 메이콘 근처까지 수월하게 진출했고 이곳에서 밀지빌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셔먼과 슬로컴도 메디슨을 지나 오거스타가 위치한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오크니 강에 이르러 교각을 파괴하고 밀지빌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합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남군의 대응

셔먼의 대군앞에 무방비 상태에 놓인 조지아 주의회는 ‘노예로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자’면서 지지를 호소했지만 북군이 접근하자 주의 수도인 밀지빌을 탈출해 버렸다. 이 지역을 방어해야 하는 남군의 하디 중장은 서배너에 도착해 지휘부를 구성한 다음에야 북군이 메이콘이나 오거스타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서배너까지 공격해오리라고 판단했다. 하디는 휠러의 남군 기병대를 북군의 배후로 이동시켜 측면을 위협하는 한편 스미스의 민병사단을 서배너 항구로 급파해 방어하게 하고, 러브조이 역에서 메이콘을 거쳐 후퇴중인 남군의 잔존병력은 그리스월드에 대기토록 했다.

11월 22일, 하워드가 지휘하는 북군 우익은 그리스월드에서 바다로의 행진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남군의 조직적인 저항에 부딪혔다. 기병대 간의 전투에서는 휠러의 남군 기병대가 킬 패트릭의 북군 기병대를 공격해 3명을 사살하고 18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으나 찰스 C 월콧 준장의 보병 여단이 지원병으로 그리스월드에 도착해서 야전진지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실책이었다. 조지아 출신의 민병대로 규모가 보강된 남군은 스펜서 연발총으로 무장된채 야전진지에서 대기중인 북군에게 정면으로 돌격했다가 1,100명의 사상자를 내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북군의 피해는 100여명에 불과한 참패였다.

11월 23일, 셔먼과 그의 참모진은 밀지빌에 입성했고, 주의회 건물에서 희희낙낙 카드놀이를 하며 조지아 주가 연방에 복귀한다고 선언했다.

작전의 전개 : 서배너

기병대간의 전투

밀지빌을 지나면서 북군의 4개 군단은 서로간의 거리를 좁혔고 남군의 대응수단은 점점 더 제한되었다. 남군의 휠러 기병대는 보병부대와 협조해 11월 24일과 25일 벌(Ball)에서 기습으로 북군을 교란시켰다. 하워드와 제1 알라배마 기병대가 이를 맞아 싸우면서 지체했지만 밤동안 북군의 공병대는 3km 떨어진 지점에 오코니 강을 도하할 다리를 건설했고 200명의 병사가 강을 건너 남부를 측면에서 공격했다.

계속해서 휠러의 기병대는 11월 25일과 26일 샌더스빌에서 슬로컴의 전위를 기습해 북군 기병대에게도 타격을 입혔다. 킬 패트릭이 지휘하는 북군 기병대는 오거스타를 공격할 듯 가장하다가 우회해 브리에의 철교를 파괴하고 밀렌의 로튼 전쟁 포로 수용소를 해방하려는 작전을 세웠지만 11월 26일 휠러의 공격을 받아 실비안 그로브에서 제8 인디애나 기병대와 제2 켄터키 기병대가 합류한 전력으로도 간신히 휠러의 방어선을 뚫고 탈출해야 했다. 피해를 입은 북군 기병대는 철도작전은 포기했으며 포로들이 밀렌에서 이동했다는 정보를 얻어 결국 루지에빌의 북군 본대에 합류했다. 11월 28일의 벅헤드 전투에서도 킬 패트릭은 남군에게 포로로 잡힐 위기에 처했지만 제5 오하이오 기병대가 레이놀드 농장에서 휠러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북군은 보병과 기병의 혼성부대로 휠러 기병대를 추적한 끝에 12월 4일의 웨인스보로 전투에서 휠러 기병대를 격파했다.

서배너

남군의 잔여병력이 서배너에 집결한 것을 확인한 셔먼은 존 G. 포스터 소장을 파견해 찰스턴-서배너 철도를 차단하고 남군 주력을 고립시키기 위해 존 P. 해치 준장이 지휘하는 병력 5,500과 대포 10문을 그레이험빌 역쪽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역 5km 남쪽의 허니힐 전투에서 G.W. 스미스의 조지아 민병대 1,400명에게 측면에서 기습을 당해 650명의 병력피해를 입고 북군이 후퇴하면서 서배너 포위는 실패로 돌아갔다.

게다가 북군은 서배너에 근접해 있었지만 주변지역은 인기척이 드문 숲지대여서 보급이 부족해졌고 12월 10일 셔먼이 서배너에 도착했을 때 남군은 잘 준비된 방어진지에 1만여명의 남군병력을 배치해두었고 식량 보급 상태도 풍족했다. 북군이 서배너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지역은 하나뿐이었기에 정면 공격은 엄청난 피해를 부를 것이 뻔했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셔먼은 우선 해군의 도움을 받아 보급을 확보하려는 계획으로 오지치 강변에 구축된 남군의 매칼리스터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기병 정찰을 시도했고 이곳이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구축되어 있어서 육지에서의 접근에 취약하다는 점을 파악했다. 12월 13일, 하워드의 윌리엄 B. 하젠 사단은 매칼리스터 요새 배후의 습지대를 재빨리 통과했고 저격병으로 요새 포병을 빠르게 처리해버림으로써 불과 15분만에 요새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셔먼은 존 A. 달그렌 제독 히하의 북부 해군함대를 통해 보급망을 확보하고 이곳에서 서배너 점령에 필요한 공성포를 보급받아 공격준비를 완료했다.

전세가 역전되자 셔먼은 12월 17일, 서배너의 하디에게 서신을 보냈다

나는 귀하가 방어하는 도시의 심장부에 결정적이고 강력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중포를 확보했습니다. 서배너 방어군과 시민들이 통제하고 있는 모든 지역을 점령하는데 필요한 시간적 여유도 충분하므로, 이에 서배너와 그 방어 요새의 항복을 권고하는 바이며 귀하가 이성적인 답변을 제공하기 까지는 공격을 시작하지 않겠습니다. 귀하께서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시민과 방어군에게 관대한 조건으로 항복을 허용할 것입니다만, 어쩔 수 없이 맹공격을 해야 하거나 보다 느리지만 고통스러운 형태의 포위전을 실시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 군의 수고도 덜기 위해 가혹한 처사지만 서배너와 다른 대 도시들을 불태움으로써 이 내전을 보다 빨리 끝내도록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William T. Sherman , Message to William J. Hardee, December 17, 1864, recorded in his memoirs

하디는 항복을 거부하고 12월 20일, 서배너 강의 부교를 통해 휘하 병력과 함께 후퇴했다. 이튿날 아침, 서배너 시장 R. D. 아놀드는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기어리 장군이 보증한다면 공식적으로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리고 기어리의 20군단이 앞세워 미시시피 군은 이날 서배너를 점령했고 셔먼은 링컨에게 ‘대통령 각하께 서배너와 150문의 대포 및 수많은 탄약과 목화 2만5천 상자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드립니다.’라는 전문을 발송했다.

결과

12월 26일, 대통령 링컨은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내왔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서배너를 점령해 주신데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애틀랜타를 떠나 대서양 연안으로 향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두려움 까지는 아니더라도 근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는 말대로 저는 간섭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제 성공과 그에 따르는 명예는 장군의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것을 의심치 않으리라 믿습니다. 이로써 군사적인 이득을 얻었을 뿐 아니라 세계에 장군의 병력이 둘로 나뉘더라도 각기 적군 전체를 상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남군의 후드는 어둠속에서 밝은 빛을 두려워하는 처지입니다. 다음 목표는 어디인가요? 그랜트 장군과 셔먼 장군이 결정하도록 한다면 더더욱 좋은 결과를 거두리라고 기대합니다. 장군 휘하의 병력과 장교들에게 저의 감사를 전해주십시오.

봄이 오자 셔먼은 서배너를 떠나 캐롤라이나를 가로질러 그랜트와 연합해서 로버트 E. 리의 남군을 협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2달 동안의 성공적인 작전 끝에 남부의 조셉 E. 존스턴은 1865년 4월 북 캐롤라이나에서 셔먼에게 항복한다.

우리는 적군하고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적대적인 국민들과 싸우며 노소와 빈부를 불문하고 전쟁의 참혹함을 실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조지아에서 제 행동은 이런 측면에서 강렬한 효과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거짓된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림으로써 다시는 이런 경험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Letter, Sherman to Henry W. Halleck, December 24, 1864.

셔먼의 초토화 작전은 이후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고 초토화 작전의 쓰라린 기억은 많은 남부인들의 기억에 남았다. 수많은 노예들이 셔먼을 해방자로 환영했고 약 1만명 이상의 흑인 노예가 셔먼의 군에 합류했지만 그 중 수백명이 행진 도중에 질병과 기아로 사망했다.

이 작전으로 남부와 조지아주는 전쟁수행능력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셔먼 자신은 이 작전으로 남부가 1억 달러의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했으며 ‘황무지와 파괴만이 남았다’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북군은 선로 480km를 파괴하고 수많은 교량과 전신소를 파괴했으며 말 5,000마리, 노새 4,000마리, 13,000여두의 가축을 징발하고 9백50만 파운드의 옥수수와 1천5십만 파운드의 밀가루를 파괴하했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목화밭이 파괴되었고 이로써 남부의 보급능력과 수송능력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