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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American Civil War

남북전쟁 12. 서부전역 - b. 스톤 리버 전투

할렉이 코린스를 점령하자 남부는 6월 27일 테네시군 사령관을 보우리가드에서 브랙스턴 브래그로 교체했다. 


켄터키-테네시-미시시피 전역 작전도. 코린스에서 페리빌 전투까지.

코린스 남쪽 미시시피의 투펠로에 주둔중인 테네시군 56,000명을 지휘하게 된 브래그는 테네시에서 남부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대치중인 북군과 바로 전투를 벌이는 것보다 우회기동해서 북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스털링 프라이스 소장과 얼 반 돈 소장에게 일부 병력을 남겨 그랜트와 대치하도록 한 뒤 철도를 이용해 35,000명의 병력을 빠르게 채터누가로 재배치했다. 한편 할렉이 북군 총사령관으로 영전되면서 이 지역의 지휘체계는 그랜트와 뷰엘이 각기 대등한 관계에서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랜트는 코린스에서 남군과 대치중이었고 뷰엘은 서서히 남서쪽으로 전진해 그랜트와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으로 브래그는 채터누가로 이동시킨 자신의 병력과 에드문드 커비 스미스 소장의 병력이 연합작전을 펼쳐 북군의 보급선을 차단한 다음 뷰엘을 먼저 격파하고 다시 그랜트에게 병력을 집중시킬 계획이었다.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에 위치한 이 지역은 주민이 적고 계곡이 많은 지역이라 남군과 북군 모두 철도수송에 보급을 의존하고 있었다. 뷰엘과 스미스는 북군의 보급선이 되는 철도를 노리고 북상해 스미스는 8월 14일 녹스빌을 떠나 캠벌랜드 협곡에서 소수 북군 부대를 격파한 다음 8월 30일에는 렉싱턴을 점령했다. 그에 발맞추어 브래그도 채터누가를 출발해 북군의 루이스빌을 목표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뷰엘은 브래그가 내쉬빌을 노리고 있다고 오판해서 그쪽에서 귀중한 시간을 지체하느라 9월 14일 브래그가 북군 보급선을 차단해 버리는 상황을 막지 못했다. 남군의 작전은 여기까지 예정대로 진행되었지만 문제는 브래그의 병력이 스미스의 도움 없이 뷰엘을 상대하기에는 병력면에서 열세라는 점이었다. 스미스와 병력을 합친다면 수적으로 대등한 상태에 놓일 수도 있었지만 스미스는 명령체계상 독립되어 있었던 데다가 브래그를 지원하지 않더라도 그가 루이스빌을 점령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한편 공세에 나서라는 강한 압력을 받고 있었지만 뷰엘은 부상도 있고해서 거의 직무를 유기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북군이 서서히 켄터키 주의 페리빌쪽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남군의 브래그는 자신이 지휘하고 있는 군을 떠나 남부파 켄터키 주지사의 취임식에 참가하느라 프랭크포트에 가 있었다. 10월 8일, 남군과 북군이 페리빌에 있는 수원지를 둘러싸고 사소한 교전이 벌어지면서 점차 양군이 이곳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브래그의 미시시피 군은 이곳에서 북군의 오하이오군을 집중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나 뷰엘은 1km 이상 떨어진 곳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있어서 대처가 늦었다. 남군은 페리빌에서 북군을 1km이상 밀어내며 전술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듯 했지만 이날 저녁 뷰엘의 병력 전체를 상대하고 있다는 걸 알게된 브래그는 휘하병력에게 헤로즈버그로 후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브래그와 스미스의 군이 10월 10일 합류하게 되었고 브래그가 선임자로서 이 지역의 남군 전체를 통솔하게 되었지만 브래그는 더이상 공세를 시도하지 않고 캠벌랜드 협곡을 지나 채터누가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멀프리스보로로 귀환했다.

뷰엘이 켄터키에서 브래그와 대치하고 있는 동안 미시시피 북부에 위치한 남군 잔류병력은 빅스버그 공략을 준비중인 그랜트가 뷰엘에게 증원군을 보내지 못하도록 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할렉이 떠나면서 서 테네시 군관구에서 더이상 간섭을 받지 않게된 그랜트를 상대로 남군의 스털링 프라이스 자신이ㅡ 부대를 코린스 동쪽 32km에 위치한 이우카로 이동시켜 얼 반 돈과 합류하려했다. 그랜트는 로스크랜과 에드워드 오드를 파견해 이우카에서 9월 19일 남군을 격파했지만 각 지휘관의 협조문제로 남군을 완전히 포위하는데에는 실패했다.

프라이스와 반 돈은 일단 합류한 부대를 추스리고 코린스의 북군을 공격한 다음에 테네시 서부나 중부로 전진하려 했으나 10월 3일 벌어진 2차 코린스 전투에서 요새화된 북군 진지를 정면 공격했다가 막대한 피해만 입고 북서쪽으로 후퇴했다. 로스크랜의 추격대는 간신히 따돌렸지만 중부 테네시의 그랜트를 붙잡아두려는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스톤리버

1862년 겨울 북부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동부에서는 번사이드가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무모한 공세에 나섰다가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고 미시시피 전역에서 그랜트는 빅스버그 1차 공략에 실패한 상태였다. 북부의 3개 야전군 중 패배를 당하지 않은 것은 이곳의 캠벌랜드 군 뿐이었다. 북부는 한시라도 빨리 공세에 나서주기를 바랬지만 뷰엘은 수동적인 대처를 계속했다. 결국 최근에 코린스와 이우카에서 승리를 거둔 로스크랜이 새로 캠벌랜드 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내쉬빌에서 충분히 병력을 훈련시고 보급을 확보한 로스크랜은 크리스마스를 지낸 12월 26일, 멀프리스보로의 브래그를 향해 전진을 시작했다. 남군 기병대의 지연작전에 말려들어 로스크랜의 전진은 더뎠고 이곳 저곳을 방어하느라 내쉬빌을 출발할 때 81,000명에 달했던 총병력은 멀프리스보로 근처에 도착했을때는 겨우 반정도에 불과했다. 12월 29일부터 멀프리스보로 주변에서 포진한 남군과 북군은 서로의 진형을 보면서 상대의 우익을 노려 병력을 집중시키는 작전을 준비했다. 양측 모두 12월 31일을 결전일로 예정했으나 남군은 아침을 먹기전인 오전 6시에 공격을 개시해 선수를 쳤다.

북군 우익의 존슨사단은 식사중에 당한 기습으로 50%나 병력을 상실하고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남군의 제파공격 앞에 북군 우익 전체가 붕괴되는 상황을 막은 것은 셰리단 사단의 결사적인 저항과 다급하게 투입된 예비대 덕분이었다. 남군의 맹공으로 친구이던 참모장 가렛셰 대령이 즉사해 그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상황에서도 로스크랜은 리더쉽을 발휘해 패주하는 북군병력을을 재집결시켜 방어선을 구축했다. 부대의 1/3이 사망한 가운데서도 4시간이나 남군을 막아낸 셰리단도 결국 탄약이 떨어지면서 후퇴했지만 그동안 북군은 좁고 탄탄한 방어선을 형성해 남군의 공세를 막아내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지만 남군이 이 지점에서 공격력을 잃고 격퇴된 것은 작전에 기본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로즈크랜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시작한 공세가 북군을 그곳으로 몰아가면서 마치 눈뭉치가 단단해지듯 북군은 방어선이 두터워지는데 반해 남군은 이동하는 동안 타력을 잃어버린 결과였다. 그날밤 북군의 작전회의 분위기는 침울했지만 로스크랜은 후퇴하느니 이곳에서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전선을 강화했다. 남군은 이미 승리한 분위기로 리치몬드에 ‘우리군은 모든 전장을 점령하고 적을 추격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복한 새해를 허락하셨다’라고 전보를 보낼 정도였다. 

새해를 맞이하고 1월 2일 브래그는 그동안 공세를 맡아온 좌익이 지친 상황에서 전력을 온존하고 있는 우익에 공세를 지시했으나 결사의 돌격도 강건너편에 완벽한 포대를 구축한 북군 포병대에게 1시간만에 1,800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피해를 입으면서 공세를 중단했다. 전술적으로는 무승부 또는 남군이 유리한 듯한 상황이었지만 1월 3일 로스크랜에게 소규모 원군이 도착하자 브래그는 남군을 후퇴시켜 버림으로써 북군이 전략적으로는 스톤리버 전투에서 승리하는 결과를 낳았다. 남군과 북군은 이 전투에서 23,515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비율로 따지면 남북전쟁의 주요전투중 최대의 피해가 발생했다. 샤일로나 앤티텀에서보다도 더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지만 북부로서는 여기서 지지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로스크랜에게 “귀하는 우리가 갈망하던 승리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여기서 패했다면 이 나라는 계속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라고 전보를 보낼 정도였다. 이후 로스크랜은 5개월 반동안 이곳에 물자를 비축하며 병력을 휴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