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스버그는 남부의 동과 서를 연결하는 못이다. - 제퍼슨 데이비스.
에이브러햄 링컨은 전쟁 초부터 미시시피 강변에 위치한 요새 도시 빅스버그야 말로 남북전쟁에 있어 승리의 열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빅스버그는 강이 크게 굽이치는 부분에 있어 수면위로 우뚝 솟은 절벽에 건설된 요새도시로 북쪽과 동쪽으로는 길이 320km너비 80km에 달하는 미시시피 삼각주(야주 삼각주라고도 부른다.)의 늪지대가 펼쳐져 있고 강을 따라 19km 북쪽의 야주 강까지 남군의 포대와 참호가 절벽을 방어하고 있는 천혜의 험지로 ‘미시시피의 지브랄타’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1862년 북부는 해군과의 협력으로 미시시피 강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빅스버그와 그 남쪽에 있는 허드슨 요새만은 북부의 하천 포함대에게 넘을 수 없는 관문이 되었다. 1862년 5월, 북군의 패러거트 제독은 그동안 함대를 이끌고 빅스버그 공략을 시도했지만 막대한 피해만 입고 물러난 뒤 함포만으로는 요새를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해 육군의 도움을 요청했다. 초기에는 빅스버그의 방어병력이 소수였기 때문에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육군을 해군이 상륙시켜 공격할 수도 있었지만 서부지역의 북군 사령관 할렉이 수수 방관하는 중에 빅스버그에 남군 응원부대가 보강되자 해군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할렉이 영전되어 동부로 떠난 뒤, 지휘권을 넘겨받은 율리시스 S. 그랜트는 빅스버그 공략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북군은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북쪽의 멤피스에서 그랜트가 남하하면 그와 보조를 맞추어 나타니엘 P. 뱅크스가 빅스버그 남쪽에 위치한 베턴 루즈에서 북상하며 양면 공격을 가하는 작전을 세워두었지만 뱅크스는 포트 허드슨에 휘하병력을 이끌고 정면공격에 나섰다가 격퇴당한 후 지지부진한 포위에 매달려 있어 빅스버그 공략에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빅스버그 주변 작전도(1862.11 ~ 1863.04)
1차 공략
그랜트는 우선 병력을 둘로 나누어 윌리엄 T. 셔먼이 3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수로로 미시시피 강을 이동하는 동안 그랜트는 4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철도로 병행 전진하면서 빅스버그를 공략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30km 이상 전진하느라 보급선이 길어지자 남군의 기병대가 북군 후방을 계속 교란하는 데다가 얼 반 돈이 지휘하는 남군 기병대에게 홀리 스프링스에 구축한 보급소가 파괴되어 백만 달러 이상의 보급물자를 잃게되자 그랜트는 아무런 소득없이 후퇴해야 했다. 수로로 이동한 셔먼은 빅스버그 북부의 야주 삼각주까지 도착했지만 단독으로 12월말 치커소우에서 남군 포대를 점령하려다 실패하면서 큰 피해를 입게되자 역시 후퇴했다.
이 실패로 그랜트는 다시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한편 일리노이의 정치가 출신인 존 A. 맥클레넌은 빅스버그 공략이 실패한 것은 직업군인들의 무능때문이라고 비난하면서 링컨 행정부에게 남부 일리노이에서 병력을 징집할 수 있는 비밀 허가를 받아내어 자신이 지휘하는 병력으로 빅스버그를 점령하려 했다. 원래 셔먼의 병력을 휘하에 배속하려 했던 맥클레넌은 작전에 실패한 뒤 셔먼이 맴피스로 귀환하자 그의 병력을 휘하에 전환한 다음 빅스버그 대신 엉뚱하게도 아칸사스 강의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 사용했다. 지휘권 문제를 놓고 맥클레넌과 마찰이 빚어지자 그랜트는 서열 문제를 명확히 해줄 것을 북군 지휘부에 요청해 맥클레넌과 그의 병력을 휘하에 편입시켰다. 이후 그랜트는 빅스버그를 직접 공략하는 것보다 우회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겨울 동안 몇가지 야심찬 계획들을 시도했다. 빅스버그 건너편 강 굽이를 뚫는 운하를 놓아 우회하려고 하기도 하고 주변에 있는 호수를 이용해 수로를 바꾸려 하는 등 여러가지로 우회로를 찾아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수압을 잘못 계산해 둑이 무너지고, 애써 가져온 준설기가 남군의 장거리 포격을 맞아 고장이 나는 등등 여러가지 불운도 겹쳐 겨울 동안 허송세월한 것에 대해 그랜트는 훗날 자신이 겨울동안 시도했던 것은 단순히 휘하병력이 목표를 상실해서 헤이해지지 않도록 하고 단결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이 설명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란이 있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적어도 몇개는 성공하기를 바라고 시도한 모험이었다고 평가했다.
2차 공략
1863년 겨울비가 내리는 시기가 끝나고 봄이 오면서 땅이 굳어지자 그랜트는 더이상의 우회로를 찾기보다 빅스버그 공략에 정면으로 부딪히기로 결심한다. 그가 세운 계획의 골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포함에 탑승해 빅스버그의 방어포대를 지나 병력을 남하시켜 그곳에서 일체의 보급을 차단하고 직접 빅스버그를 공략한다는 대담한 것이었다. 사관학교 이래 절친한 친구인 셔먼도 반대했지만 그랜트는 차근차근 준비를 진행시켰다. 빅스버그를 공략하려면 두개의 남군부대를 상대해야 했다. 하나는 존 C. 팸퍼튼 소장이 지휘하는 빅스버그 수비대였고 또 하나는 조셉 E. 존스턴이 지휘하는 남군의 서부전역군이었다. 이들 앞에서 미시시피 강을 남하하다가 만약 빅스버그 요새의 포대에 발사하는 사격에 포함이 전부 노출될 경우 일단 떠내려가기 시작한 속도 때문에 돌이킬 수가 없다는 엄청난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작전이 성공하려면 최대한 남군을 교란시켜야 했다. 이 때문에 그랜트는 맴피스에 머무르던 하천 포함들을 북쪽으로 보내어 공략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등의 기만책을 활용해 빅스버그 요새 주둔군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셔먼이 지휘하는 양동부대는 빅스버그 북방에서 견제 공격을 가하며 주의를 끄는 한편 벤자민 기어슨 대령의 기병대는 중부 미시시피 일대에서 파괴활동을 시도한다는 계획이었다. 특히 기어슨의 기병대는 남부 각지로 분산해 광범위한 지역에서 파괴활동을 펼쳐 남군을 혼란시켰다. 이런 양동작전 때문에 남군의 주의가 분산되자 그랜트는 주력을 미시시피 서쪽 강변으로 이동시킨 다음 4월 16일 강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해 빅스버그 남쪽 브루인스에서 마침내 미시시피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빅스버그 작전도 (1863.04 ~ 1963.07)
이후 일체의 보급을 끊고 작전에 들어간 그랜트는 북쪽의 빅스버그로 바로 진격하는 대신 북서쪽에 위치한 주의 수도 잭슨으로 이동해 남군의 두 주력부대 사이의 연락을 끊었다. 그랜트는 이런 대담한 기동을 위해 식량은 현지 조달하고 탄약만 실어나르도록 했다. 빅스버그 수비대 사령관 팸퍼튼은 5월 12일 그랜트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레이몬드를 공격했지만 미시시피 강을 건넌 시점에서 그랜트는 보급이 없이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하하는 셔먼에게도 보급마차에 식량보다 탄약, 커피, 건빵, 소금 등의 보급품만 가져오도록 명령한 그랜트는 5월 14일 잭슨 시를 점령하고 병력을 합류했다. 각지에 병력이 분산되어 있던 팸퍼튼은 챔피언 힐에서 북군에게 패하자 빅스버그를 버리고 방어병력과 함께 탈출하라는 존스턴의 명령보다 리치몬드의 데이비스 대통령의 사수명령을 따라 빅스버그 주변의 참호선으로 후퇴했다.
빅스버그 포위선. (05.25 ~ 07.04)
그랜트는 전군을 동원해 빅스버그를 두차례 공격했으나 남군의 끈질긴 방어앞에 물러나야 했다. 결국 그랜트는 빅스버그를 포위하고 오래 견디기 경쟁에 들어갔다. 보급이 끊긴 빅스버그에서 남부 병사들과 시민들은 구원군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로버트 E. 리는 빅스버그에 구원병력을 보냈다가 이동하는 도중에 빅스버그가 점령되면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며 서부에 파견하려던 2개 사단 전력을 북 버지니아 군에 편입시키고 섀넌도어 계곡을 통해 북진하다가 결국 게티스버그에서 패하게 된다. 구원군이 도착하지 않게 되자 결국 빅스버그 주둔군은 7월 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그랜트에게 항복한다. 7월 8일, 뱅크스도 허드슨 요새를 점령해 마침내 북군은 미시시피 강 전역을 통제해 남부를 둘로 갈라놓는데 성공한다.
빅스버그 점령으로 그랜트는 요새주둔군 총 29,495명 전체를 포로로 하고 대량의 화포, 소화기, 탄약을 확보했다. 게티스버그의 패배와 함께 남부는 하루걸러 2연타를 얻어맞은 셈이었다. 1주일 후, 링컨 대통령은 ‘아버지 강이 막힘없이 바다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남북전쟁에서 전선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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