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외전 1. 피해의 원인 본문

History/American Civil War

남북전쟁 외전 1. 피해의 원인

아르미셸 2009. 7. 24. 17:53

그리스 인들은 전쟁의 신이 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테네는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전쟁을 주관하고 아레스는 전쟁의 참혹함과 비참함을 주관했고, 두 신중 어떤 신이 주관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성격이 바뀐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느 전쟁이건 다 그렇지만 내전은 특별히 참혹하고 그 중에서도 남북전쟁은 아레스가 전담하기라도 한 듯이 막대한 희생을 내면서 지지부진하게 길어졌습니다. 남부와 북부 모두 1년내로 끝나리라 예상했던 전쟁은 5년간 60만명이 사망하고 40만명이 부상을 당하는 막대한 피해를 내며 계속되었습니다. 전쟁이란 것도 인간의 일이라 사회의 변화나 과학기술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듯 남북전쟁에도 수많은 요소들이 영향을 주었지만 그 중에서도 남북전쟁의 특징적인 ‘많은 피해, 장기화’에 초점을 놓고 보면 그 중에서도 몇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남북전쟁은 전쟁의 산업화가 낳은 결과물입니다. 서구의 전쟁방식은 오라녜 공에서 나폴레옹 전쟁까지 이어진 군사혁명의 산물로, 정형화 되어 있었지만 산업혁명은 보수적인 군대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그 영향이 두드러진 것은 보병의 개인화기 부분입니다. 남북전쟁으로부터 약 반세기 전에 영국군은 거의 16세기 말부터 200년간 계속 사용해온 브라운베스 머스킷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850년의 크림전쟁에서는 미니에 볼이라는 탄환을 사용하는 라이플 총이 사용되어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라이플이란 총열 내부에 강선이라는 나선형 홈이 파여있는 총으로 발사한 총알에 진행방향을 축으로 회전을 주어 정확도와 사거리가 향상되는 효과가 있어 오늘날의 개인화기에는 대부분 채용되어 있습니다. 이런 원리는 15세기 경 유럽 총기 제작의 중심지였던 리에주 지역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당시의 개인화기는 강선이 없는 머스킷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라이플 총의 탄환을 장전하려면 총구에서 총알을 꼬질대와 망치로 살살 두드려 가며 발사위치까지 밀어넣어야 했는데 이 작업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다가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도저히 전투중에는 사용할 수가 없었고 특수훈련을 받은 일부 저격병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화기가 머스킷이었기 때문에 사정거리는 150m내로 제한되었고 명중율도 낮아서 실제로 화기가 위력을 발휘하려면 정연하게 줄을 지어 적진 가까이 접근한 다음에 일제사격을 가한 뒤에 전열이 무너지면 일제 돌격으로 승리를 결정하는 것이 나폴레옹 시대의 전쟁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미니에가 개발한 탄환은 오늘날의 탄환과 비슷한 모양으로 발사할 때의 폭발력에 의해서 강선에 맞물리는 구조로 되어 있어 훨씬 간단히 머스킷과 비슷한 방식으로 장전이 가능했습니다. 머스킷과 미니에 총의 사정거리는 10배 가까운 차이가 있었기에 러시아 육군이 아무리 저항해도 프랑스와 영국군을 막아내기는 어려웠습니다.

남북전쟁 때는 스펜서 건을 비롯해 후장식 연발 강선총들이 사용되어 보다 멀리, 보다 정확하게, 보다 빨리 사격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상대가 진지를 구축한 곳에 돌격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불과했습니다. 총기의 발전은 대포에도 영향을 주어 포병의 사거리도 증대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고위직 장군들은 군대가 눈부신 속도로 변해가는 것에 적응하지 못했기에 피해는 더욱 커졌습니다. 가장 유명한 피켓의 돌격은 거의 1km에 달하는 거리를 1만 5천명이 개인화기와 포격에 노출된 상태로 전진한 끝에 1만명이 학살을 당하다시피했습니다. 야전축성으로 구축한 방어선을 지키는 병사 1명은 공격해오는 병사 3명에 필적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병사들은 돌격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일부 장군들은 전쟁의 방식을 ‘적이 공격해올 수 밖에 없는 지점을 미리 점령해서 그곳에서 상대를 방어’하는 방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만, 양측이 서로 방어만 하고 있으면 정치가들은 막대한 수의 병력을 유지하고 보급품과 무기를 공급하는데 필요한 막대한 조세부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시바삐 승리가 필요했기에 계속 공격을 촉구했습니다. 이 때문에 남북전쟁에서는 ‘정부의 압력을 받아 공세에 나섰다가 막대한 희생을 내고 후퇴했다’는 말이 그토록 여러번 나오게 됩니다. 공격측이 승리를 하더라도 전병력의 25%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면서 후퇴하는 상대를 추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역시 장군들이 비난을 받는 주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무기의 발전 때문이었는가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남북전쟁 중에 프로이센은 덴마크와 전쟁을 치렀고 10년내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격파하지만 오스트리아는 4주만에 프랑스는 6주만에 프로이센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총의 살상력이나 산업화 수준은 미국보다 더했으면 더한 나라들인데 이런 차이를 만든 것은 참모제도와 동원예비군 제도였습니다. 블뤼허-그나이제나우를 모델로 한 프로이센의 참모제도는 작전과 기계에 능숙한 참모진들이 장군을 보좌함으로써 통솔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었고 예비군 제도는 나폴레옹 전쟁의 패배로 국가가 파탄지경에 처했던 프로이센 군에게 탄력적으로 운용가능한 병력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산업화를 거친 국가의 생산능력은 동원된 병력에게 필요한 막대한 량의 총기를 제공할 수 있었고 이 병력을 철도로 집중시켜 단기결전을 통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남북전쟁에는 아직 태동중이던 프로이센의 전쟁방식은 도입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남부에서는 그나마 군사경험이 있는 데이비스 대통령이 보병과 기병 포병의 균형을 고려해가며 웨스트포인트 출신을 지휘관으로 뽑으려 노력했지만(레오니다스 폴크 같은 경우는 성공회 신부 출신이었으며 이 외에도 군인출신이 아닌 남군 지휘자도 상당수 있습니다.) 북부에서는 정치가 장군들도 많았던 데다가 병과간의 균형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지휘가 아마추어 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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