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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Drama

The other side of LOST No4. 시간여행의 역설들

시공간 연속체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가 마치 우리 주변의 물체들 처럼 각자의 위치를 갖고 있다면 물건을 정리하듯이 시간상의 사건들도 움직일 수 있을까? 앞에서 말했듯이 이론적으로 타임머신이 가능하다면, 현실화 시키는데 따르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치워두고 시간여행이 가능해진 상태를 가정해보자. 터미네이터에서 존 코너는 미래에서 자기 부하를 과거로 보내고 미래의 부하가 자기 어머니를 임신시켜 자신이 태어난다.


터미네이터1의 시간구조

이 경우는 비록 복잡해보이긴 하지만 시공간 연속체 개념에서 어긋나지 않는다. 인과관계와 시간적 선후관계가 분리되어 있을 뿐이다. 미래에 타임머신이 만들어지는 것도 예정된 일이고, 존 코너가 아버지를 부하로 삼게되는 것도, 그가 과거로 가는 것도, 사라 코너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임신하는 것도 모두 예정된 일이다. 문제는 이럴 경우에 시공간상의 모든 사건들은 그 지점에 고정되어 있을 뿐 어떤 의지로도 변화시킬 수 없으며 마치 각본대로 연기하는 배우처럼 우리는 시공간상에 이미 결정된 사건들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즉, 모든 것이 결정된 세계에서 자유의지란 허상에 불과하다.


자고나니 찝찝하다

이렇게 말해도 별 감흥이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에게는 문제가 다르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죄는 의미가 없다. 연쇄살인범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그의 책임이 아니다. 모든 것은 시공간에 예정된 것이고 그는 그저 주어진 배역에 따라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실로 불편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인과관계와 시간적 전후를 바꾸는데서 한걸음 더 나가서 인과관계 자체를 바꾸어 보자. 예를 들어보자. 로스트의 스토리를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난 나는 타임머신을 만들어 2011년의 서점에 가서 “로스트 완벽정리”라는 책을 산 다음 현재로 돌아온다. 그 책에는 로스트 시즌 6에서 나올 상상을 초월하는 놀랍고도, 기기묘묘하면서도 논리적이고 흥미를 자극하는 스토리의 전모가 세세하게 나와 있다. 로스트의 모든 것을 알게 되어 흥분한 나는 책속에서 쌍제이가 한국에 왔을때 이벤트로 독자와의 1:1 면담기회를 마련해서 발렌제티 공식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의 정답을 설명한 독자에게 그 기회를 주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 답을 정확히 알고있는 나는 마침내 쌍제이를 만나고 흥분한 나머지 내가 로스트의 모든 스토리를 알고 있다고 말해준다. 그런데 이럴수가. 쌍제이는 이미 너무 많이 풀어놓은 떡밥에 질린 나머지 모든걸 포기한 상태이고 로스트의 결말로는 헐리의 꿈이 준비된 상황이었다.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이대로는 미래가 바뀌어 버릴 판이다. 당황한 나는 그에게 로스트 책을 보여주며 로스트의 스토리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쌍제이는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앞으로 스토리는 이 책을 토대로 만들겠다고 말한다.


아이디어 역설

자. 이 상황에서 로스트의 그 훌륭한 스토리를 짜낸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로스트가 어떻게 될지를 전혀 모른채 책을 사왔을 뿐이다. 쌍제이도 로스트가 어떻게 될지를 몰랐다. TV드라마의 역사에 길이남을 이 놀라운 스토리를 생각해낸 사람은 있지도 않은데 어디선가 스토리가 덜렁 튀어나온 셈이다. 이럴 경우에 미래는 변화된 건가 변화되지 않은 것인가. 만약 미래가 변화될 수 있다면 과거도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내가 과거로 돌아갔는데 실수로 나를 낳기 전의 어머니를 죽이게 되면 어떻게 될까. 어머니를 죽였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고, 내가 존재할 수 없다면 어머니를 죽일 수도 없다. 시간이동은 이제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안보이는 역설에 빠져든다.


이른바 할아버지 역설

만약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하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환상에 불가능하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고 그 결정을 벗어나려 하는 것은 금지될 것이다. 만약 내가 과거로 돌아가 무언가를 바꾸려 한다면 모든 것은 예정에 의하여 내 행동을 방해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내가 어머니에게 총을 쏜다면 총은 고장나거나 빗나갈 것이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건간에 타임머신에서 내리는 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논리적 시공간연속체의 일부로 내 행동은 과거의 어떤 것에도 영향을 줄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면 사정은 달라지게 되고 여기서 양자역학은 평행우주론이라는 흥미로운 이론을 제시한다. 이 이론은 1957년에 휴 에버렛이 제안한 것으로 양자역학에서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은 여러개의 우주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사건들이라고 주장했다. 발생확률이 아무리 적은 사건이더라도 다중우주의 수많은 우주들 중 어느 한 곳에서는 그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평행우주론에서 우리가 느끼고 있는 우주는 선택 또는 관측을 통해서 갈려지는 무한히 많은 우주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평행우주론을 적용한 할아버지 역설

내가 만약 과거로 돌아가 어머니를 죽인다면 나는 이 시점에서 시간을 여행한 것이 아니라 평행하게 진행되고 있는 우주를 건너뛰게 한 것이다. 어머니가 죽는 그 순간에 나는 어머니도 없고 나도 태어나지 않는 우주로 넘어간다. 시공간 연속체는 여전히 변화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시공간연속체로 이동했을 뿐이다. 로스트의 스토리 문제도 간단하다. 그 스토리를 짜낸 사람은 쌍제이가 그 스토리를 적은 평행우주에 거주하고 있는 쌍제이다.

이렇게 평행우주론을 적용하면 시간여행에 관련된 모든 문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명쾌하게 풀리지만 양자역학에서 그랬듯이 이 해석은 수많은 골치아픈 과제를 피해갈 수 있는 대신에 무한히 많은 평행우주라는 더더욱 난해한 개념때문에 물리학자들의 반박에 직면해야 했다. 그나마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이라는 특정한 행동으로 귀결되지만 시간이동의 문제로 간다면 전체 시공간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무한하게 많은 선택들을 직면해야 하는데 모든 가능성이 일제히 진행되는 무한한 우주 속에서 확률의 개념을 정립할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 결과적으로 다중우주의 구체적인 정의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 이 이론은 편리하긴 해도 일반적으로 수용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