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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프리메라리가의 역사 초창기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서 대표팀이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스페인에 불어온 축구 붐이 계기가 되어 1927년 4월 아레나스 클럽 데 겟소 구단주 호세 마리아 아카는 스페인에도 국가 수준의 최고리그를 만들자고 제의했다. 리그의 규모와 참가할 팀에 대한 논의 끝에 스페인 왕립 축구협회는 1928년도 스페인 1부 리그에 10개 팀이 참가하기로 결정하면서 프리메라리가가 시작되었다.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AT빌바오, 레알 소시에다드, 아레나스 겟소, 레알 우니온이 역대 코파델레이 우승자 자격으로, AT 마드리드와 에스파뇰, 유로파는 코파델레이 준우승으로 원년멤버로 선정되었으며 마지막으로 라싱 산탄데르가 예선전을 거쳐 1928~29시즌 프리메라리가 멤버로 선발되었다. 첫 시즌에는 바르셀로나가 초대 챔.. 더보기
분데스리가의 역사 독일 축구의 출발 분데스리가의 태동은 1932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일은 독립왕국 시절의 지역감정이 남아있어서 지역별로 리그를 만들어 소속팀들끼리 리그전을 치르고 챔피언들끼리 경기를 치르는 체제였는데 독일축구협회장 펠릭스 리네만이 독일 최고의 팀들을 모아 ‘왕국 리그(kingdom league)’를 창설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비록 각 지역 축구협회들이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독재자들은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축구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지만 사실 독일에서 축구는 전통적으로 지도층의 구미에 맞는 스포츠는 아니었다. 축구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잉글랜드의 영향력, 무질서함 등은 독일 지도층이 원하는 ‘건강한 국민’ 육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기계체조나 육.. 더보기
세리에A의 역사 제노아의 시대 1893년 9월 7일, 이탈리아 최초의 축구팀 제노아가 만들어진 이후 19세기의 마지막 10년간 토리노(1894), 운디네세(1896), 유벤투스(1897), 밀란(1899) 등 오늘날까지 유명한 여러 팀들이 태어났다. 이탈리아에는 거의 중세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칼치오의 전통이 있었지만 잉글랜드에서 전파된 축구는 이탈리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고 그 중에서도 산업화가 진행된 북서부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1898년 3월 16일, 토리노에서 이탈리아 축구협회가 결성되고 같은해 토너먼트 형식의 전 이탈리아 챔피언쉽이 시작되면서 이탈리아 축구는 20세기를 맞이한다. 이탈리아 챔피언쉽 첫 대회는 하루만에 끝나는 대회로 각지역 대표들이 출전한 최초의 전국급 대회에서 우승한 제노아는 3회.. 더보기
축구리그 평균관중 순위 리그명칭 국가 기준시기 팀수 총관중 평균관중 평관/인구순 평관/밀도순 1 분데스리가1 독일 08~09 18팀 12,825,811 41,914 11 11 2 프리미어리그 잉글랜드 08~09 20팀 13,527,703 35,599 7 15 3 라리가 스페인 07~08 20팀 11,067,120 29,124 8 8 4 멕시코1부리그 멕시코 06~07 18팀 7,766,000 25,379 15 7 5 세리에A 이탈리아 08~09 20팀 9,517,100 25,045 12 13 6 프랑스1부리그 프랑스 08~09 20팀 7,889,827 21,050 14 10 7 아르헨티나1부리그 아르헨티나 2008 20팀 7,936,540 20,886 10 3 8 에레디비지에 네덜란드 08~09 18팀 6,607,288 19,.. 더보기
K리그의 역사 : 4. CU@K 리그 1. CU@K리그 2002년 한국을 강타한 월드컵 열풍과 대표팀의 스타선수들이 줄줄이 해외 빅리그로 진출하면서 (송종국; 부산 > 페예노르트로, 이영표 ; 안양 > PSV 아인트호벤) 증폭된 유럽리그의 영향으로 K리그의 서포팅 문화는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대구와 인천에 시민구단이 등장하는 등 프로축구계에는 폭발적인 활기가 넘쳐 흘렀다. 4강 토너먼트, 챔피언 결정전을 모두 폐지하고 풀리그제를 도입하자마자 디펜딩 챔피언 성남이 독주하는 가운데 후반부터 미칠듯한 기세로 페이스를 끌어올린 울산과 수원의 상승세가 막판까지 우승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2002년 K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불과 승점 2점 차이로 성남이 2연패를 달성하는데 성공한다. 이듬해에는 팀의 레전드 신태용이 K리그 최초로 60-60을.. 더보기
K리그의 역사 : 1. 여명 1. 프로축구, 그 화려한 서막 한국의 1980년대는 3S 정책으로 요약할 수 있고 프로축구도 그 연장선상에서 시작되었다. 81년 5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민의 여가선용 기회 마련을 위해서 야구와 축구의 프로화를 추진하라'는 전두환의 명령이 떨어지면서 프로화 계획이 시작되었지만 그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마련할 길이 문제였다. 당시 야구협회 회장이었던 임광정 씨는 야구 프로화에 36억이 필요하다고 보고했고 축구협회 회장인 최순영 씨는 축구 프로화에 139억원이 소요될 것이라고 보고했는데 당시에 이렇게 막대한 돈을 끌어올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우병규 씨와 고등학교 동기라는 연줄이 있던 MBC의 해설위원출신 이호헌 씨가 기업들에게 야구단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대도록 하자는.. 더보기
K리그의 역사 : 3. 월드컵을 향하여 1. 월드컵 유치경쟁 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94미국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북한, 사우디, 이란, 이라크, 일본과 티켓 2장을 놓고 경쟁했다. 한국은 이란에게 3:0승리를 거두고 이라크와 사우디에 무승부를 기록해 1승 2무로 4차전에서 철천지 원수 일본과 맞붙었다. 그런데 10월 25일, 40$의 시청율을 기록한 이 시합에서 한국은 시종일관 무기력한 경기를 벌인 끝에 0:1로 패했고 이로써 한국은 조3위로 떨어졌다. 10월 28일 운명의 5차전은 승부조작 여지를 없애기 위해 모두 같은 시간에 시작되었는데 한국이 월드컵에 진출하려면 일본이 이라크와 비기고 한국이 북한에게 대승을 거둬 동률이 된 다음 득실차를 노리는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은 북한에게 3:0 대승을 거두었지만 같은.. 더보기
프리미어 리그의 역사 1. 프리미어의 태동 1970년대 이후 10여년간 유럽의 강호로 군림했던 영국축구는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최악의 시기를 맞게 된다. 주요 구장들은 노후화되고 팬의 편의를 위한 시설들은 부실했으며 훌리건이 들끓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잉글랜드 축구팀들은 1985년의 헤이젤 참사로 향후 5년간 유럽의 모든 대회에 출장을 정지당했다. 1888년 이래 1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축구리그는 이탈리아의 세리에A나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와 비교했을때 입장객이나 시설면에서 훨씬 뒤쳐져 있었고 최고수준의 선수들은 해외로 이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0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는 준결승에 올랐고 UEFA가 출전제한을 풀어주자 1991년 맨유는 UEFA컵에서 우승하고 테일러 리포트에 기초해 모든 구장의 개선이 시작되는 등.. 더보기
K리그의 역사 : 2. 일화의 시대 1. 새로운 시작 89년, 축구협회장으로 재취임한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은 2년전에 만들었던 한국프로축구위원회를 해체하고 협회직영제로 다시 바꾸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큰 변화가 아니었지만 K리그와 한국축구계는 90년 월드컵과 함께 새로운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한국은 1차예선에서 6전 전승을 거두었고 최종예선에서도 3승1무의 성적으로 월드컵 2회연속 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이탈리아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서 한국은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를 상대로 3연패를 당했지만 이회택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에는 대학에 갓 입학한 신인 홍명보와 황선홍의 얼굴이 있었다. K리그에서는 6번째 프로팀 일화가 제6구단으로 정식 출범하면서 84년 청소년 축구 4강신화의 주역 박종환 감독을 국내.. 더보기